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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왕세자 방한 (2) (104/529)

 105화. 왕세자 방한 (2)

 사우디 왕세자 일행은 파이브시즌스 호텔의 25층부터 최상층인 29층까지 통째로 사용했다.

 참고로 전 세계 60여 개국에 호텔을 운영 중인 럭셔리 호텔 브랜드 파이브시즌스는 사우디 왕가가 대주주로 있다.

 난 유재호 회장에게 연락을 받자마자 택시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중년의 택시기사는 넉살 좋게 물었다.

 “이 시간에 무슨 일로 호텔에 가십니까?”

 “왕자님과 약속이 있어서요.”

 “예? 왕자님이요?”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택시기사는 웃음을 터트렸다.

 애초에 21세기에 왕자니 공주니 하는 것부터가 신기한 일이다. 내가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신기한 일이고.

 난 머릿속으로 만나서 할 얘기를 정리했다.

 만나자마자 다짜고짜 그림을 사라고 들이밀면 미친놈 취급받을 게 뻔하다. 그림의 가치를 결정하는 게 화가라면, 그 화가가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화상이다.

 때문에 유명한 화가 뒤에는 언제나 유명한 화상이 있다.

 하지만 난 화상이 아니니 그림을 팔기 위해서는 먼저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우디 왕자님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

 한 가지 다행인 건 내가 그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어떤 사람이고, 그가 앞으로 뭘 할지도.

 난 택시에서 내려 호텔로 들어갔다. 로비의 화장실에 들러서 마지막으로 복장을 점검한 다음 짐을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아셰르 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미리 언질을 받았는지 직원은 어딘가로 연락했다.

 “따라오시겠습니까?”

 VIP룸이 있는 최상층부는 일반 고객들과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엘리베이터도 따로 있었다.

 직원은 카드키를 찍고 26층을 눌러주었다.

 26층에 도착하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이미 앞에서부터 경호원들이 대기 중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검문을 받아야 했다.

 난 가지고 온 짐과 핸드폰을 맡기고, 몸수색을 받은 뒤 안내되었다.

 복도 끝에 있는 문 앞에는 토브를 입은 사우디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신이 한미루 씨인가요?”

 “그렇습니다.”

 나이는 약 20대 중반.

 수염을 기르지 않았기 때문인지 어려 보였다. 키는 좀 작은 편이지만 얼굴은 잘생겼고, 온몸에서 귀티가 흘렀다.

 오일머니로 곱게 자란 귀공자 같은 느낌이다.

 실제로 그는 사우디 귀족 가문 출신이다. 그러니 라시드 왕자를 수행하고 있는 거겠지.

 그는 경계하는 표정과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딱 봐도 별로 마음에 안 들어 하는 눈치다.

 아마 나를 귀하신 왕자님께 선을 대보려는 날파리쯤으로 여기고 있지 않을까?

 “왕자님을 만나 뵙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춰주십시오.”

 “알겠습니다.”

 * * *

 난 그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갔다.

 웬만한 운동장 크기의 거실이 보였고, 전면 유리창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펼쳐졌다.

 거실 한쪽에는 호화로운 양탄자가 깔려있고, 그 위에는 토브를 입은 30대 남자가 서쪽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절을 하며 기도문을 읊었다.

 “라 일라 하 일라 알라, 무함마둔 라술룰라.”

 표정과 동작에서 신을 경배하는 마음과 경건함이 묻어났다.

 지금 기도 시간인가?

 무슬림들은 하루에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할 의무가 있다. 그래서 무슬림들이 자주 방문하는 특급호텔의 경우 기도실을 따로 둔다.

 하지만 신앙심 깊은 무슬림들은 정해진 시간 외에도 수시로 기도를 올리고, 그럴 때를 대비해 항상 양탄자를 가지고 다닌다.

 잠시 후, 기도를 끝마친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난 다음 손수 양탄자를 말았다.

 남자는 소파에 앉았고, 안내해준 청년은 한 발자국 떨어진 옆에 섰다.

 난 인사를 하며 상대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나이는 32세.

 잘생기고 온화한 얼굴이다. 어린 시절부터 뉴욕에서 살며 미국식 교육을 받았고, 아랍어는 따로 선생을 두고 공부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라시드 빈 아부 바크르 알사우드.

 현 국왕 아부 바르크 국왕의 아들로 정확히는 12명의 남매 중 세 번째 부인에게서 태어난 다섯째 아들이다.

 왕의 아들이지만 그는 왕세자가 아닌 그냥 왕자고, 현재 왕세자는 그의 사촌형이다.

 그 이유는 사우디가 형제 상속제이기 때문.

 일반적으로 왕위는 대를 이어 내려온다. 그러나 사우디는 특이하게 형제끼리 왕위를 계승한다.

 물론 형제라고 모두가 왕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현 국왕은 아부 바크르 아자르 알사우드.

 그는 사우디의 7대 국왕으로, 초대 국왕의 25번째 아들이다. 현재 80대 고령으로 그가 죽고 나면 왕위는 이복형 술라이만의 아들인 할리드 왕세자에게 넘어가게 될 것이다.

 현재 라시드 왕자의 왕위 계승 순위는 27위.

 이 순서로 볼 때 그에게까지 순번이 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만약 온다고 해도 50년은 지난 뒤겠지.

 아부 바크르 국왕 역시 80세에 간신히 즉위했다. 만약 그의 이복형이 몇 년만 더 살았다면 그 역시 왕위에 오르기 전에 죽었을 것이다.

 난 허리를 숙이며 영어로 인사했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시드 왕자님. 전 한미루라고 합니다.”

 그 역시 영어로 대답했다.

 “반갑습니다. 저에 대해서는 알고 계실 테고, 이쪽은 제 비서 아셰르 알 자심입니다.”

 “두 분을 만나 뵙게 돼서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인사가 끝나자 그는 맞은편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난 소파에 앉으며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바닥에 무릎 꿇고 있으라고 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태국 왕실의 경우 왕족 앞에서는 누구든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한다는 거지 같은 예법이 있다.

 그래서 장소가 어디든 왕족이 나타나기만 하면 태국인들 모두가 열심히 바닥을 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1세기에 이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리인가 싶지만 진짜다.

 수행원은 내 앞에 물과 차를 내주었다.

 “컨티뉴 캐피탈의 창업자라고 들었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재밌는 일을 몇 가지 벌였던데.”

 몇 가지라는 것은 토머스 모터스 사태와 스노우 크래시 인수를 말하는 거겠지?

 이렇게 말하는 걸 보니 나한테 제법 흥미가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무슨 일 때문에 보자고 하신 겁니까?”

 실내에는 그 말고도 수행원과 경호원들이 함께였다.

 “왕자님과만 조용히 얘기를 나누고 싶은데, 주위를 물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이 자리에서 해보라는 느낌이다.

 정말로 해도 되려나?

 난 테이블 위에 있는 메모지에 뭔가를 적은 다음 접어서 그에게 내밀었다.

 “보시고 괜찮다고 하시면 그냥 말하겠습니다.”

 그것을 펼쳐본 순간 라시드 왕자의 표정이 변했다. 잠시 메모를 보며 생각에 잠긴 그는 가볍게 손짓을 했다.

 그러자 아셰르는 일어나서 수행원들을 전부 방 밖으로 내보냈다. 다들 나가고 나자 그는 문을 닫고 당연하다는 듯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측근이라는 건가?

 라시드 왕자는 쪽지를 펼쳐서 나에게 내밀었다.

 메모장에는 딱 두 문장이 적혀 있었다.

 [전 왕자님께서 사우디의 왕이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매우 중요한 몇 가지 조언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을 본 아셰르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이런 불경한!”

 라시드 왕자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매우 불쾌하군요. 지금 본인이 무슨 짓을 한 건지 알고 있습니까?”

 사우디에서 왕족에 대한 얘기는 금기사항이다.

 만약 여기가 사우디였다면 이 자리에서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다행히 이곳은 한국. 이런 일로 처벌받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혹시라도 외교적으로는 큰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뭐,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난 먼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기분 나쁘셨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그다음 고개를 들며 한마디 덧붙였다.

 “하지만 진심입니다. 왕자님이야말로 왕좌에 가장 어울리는 분이니까요.”

 * * *

 지구상에 왕국은 많다.

 영국, 스페인, 노르웨이, 스웨덴, 일본, 태국 등등.

 하지만 이들 나라는 입헌군주제로 왕이 있다뿐이지, 사실상 민주공화제와 큰 차이가 없는 정치형태를 지니고 있다.

 반면 사우디아라비아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전제군주국이다.

 국왕의 권력은 그야말로 무소불위.

 삼권 분립은 개뿔.

 국왕이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를 총괄하며, 군 통수권까지 쥐고 있다. 또한 장관을 비롯한 고위직에는 왕족만이 임명된다.

 21세기에 뭐 이런 나라가 다 있나 싶지만, 애초에 사우디아라비아라는 국명부터가 사우드 가문의 아랍왕국이라는 뜻이다.

 라시드 왕자.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그는 사우디의 실세 중의 실세다.

 공식적인 직함으로는 왕실 경제개발위원회 위원장만 맡고 있지만, 실제로는 에너지부와 국방부까지 그가 장악하고 있다.

 다시 말해 사우디의 돈줄과 군대가 그의 손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외부에 자신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국왕과 왕세자에게 충성을 바치는 중이다.

 그러나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라시드 왕자는 2년 후 쿠데타를 일으켜 할리드 왕자를 몰아내고 자신이 왕세자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노쇠한 국왕을 대신해 사실상 사우디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국가를 통치한다.

 그에게 붙은 별명은 미스터 에브리씽(Mr. Everything).

 모든 것이 가능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 * *

 라시드 왕자는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대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이제부터 말을 잘해야 한다.

 비록 왕세자는 아니지만 지금도 그는 왕과 왕세자의 신임을 얻어 각종 대소사를 처리한다. 사실상 사우디의 비선실세인 셈이다.

 돈과 권력은 자석처럼 사람을 끌어당긴다.

 아마 아첨꾼과 모사꾼들을 수도 없이 만나봤을 것이다.

 까딱 말을 잘못했다가는 나도 그런 놈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당할 수 있다.

 그럼 거기서 끝이다.

 난 침착하게 말했다.

 “이대로라면 사우디아라비아 왕실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아셰르는 또다시 분노했다.

 “감히 그런 불경스러운 발언을!”

 다시 말하지만 사우디에서 이런 말을 했다가는 목이 잘린다.

 라시드 왕자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한국인이 어째서 그런 걸 걱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얘기나 한번 들어보죠.”

 찢어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는 아셰르와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나타나지 않았다.

 난 기다렸다는 듯 준비해온 말들을 내뱉었다.

 “원인은 이미 아시다시피 유가 하락입니다. 지금도 저유가 시대라고 하지만, 향후 유가 하락 속도는 더욱 가팔라질 겁니다.”

 유가 하락의 이유는 여러 가지다.

 셰일 혁명, 채굴기술의 발달, 새로운 유전 발견, 재생 에너지 확대 등등.

 “하루라도 빨리 경제구조를 개혁하지 않으면 사우디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될 테고, 국민들의 불만은 왕실로 향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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