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왕세자 방한 (1)
왕세자의 방한에 동행하는 왕족만 12명이다.
사우디에 널려있는 게 왕자 공주다 보니 이름과 얼굴을 일일이 다 기억하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라시드 왕자 정도는 알고 있겠지.
유재호 회장은 살짝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쉬운 부탁은 아니로군요.”
일전에 허민웅을 만나게 해달라는 것과는 좀 다르다.
그의 입장에서 허민웅은 아는 사람이지만 라시드 왕자는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누군가를 소개해준다는 건 그 사람이 신원과 행동을 보증한다는 말과 똑같다. 만약 내가 실수를 한다면 유재호 회장까지도 피해를 입게 된다.
나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것저것 하다 보면 돈도 좀 들어갈 테고. 아마 오늘 내가 준 그림값 이상은 써야 할 것이다.
유재호 회장은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얘기는 전할 수 있지만, 그쪽에서 수락할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내 말에 그는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그럼 이번에는 대가에 대해 얘기해볼까요?”
“방금 드리지 않았습니까?”
“무슨······.”
말을 하려던 유재호 회장은 멈칫했다. 그러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려다.
“하하! 그렇군요.”
역시 바로 눈치챘구나.
성윤아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우리는 식사를 끝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서를 보니 내 한 달치 식비보다 많은 금액이 나왔다.
뭐가 이렇게 비싼가 해서 봤더니······ 아! 와인이 비쌌구나.
가끔은 이런 것도 좀 먹어줘야겠지. 난 법인카드로 시원하게 긁었다.
“오늘 밥 잘 먹었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사죠.”
난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오늘보다 비싼 거 먹어야겠네요.”
“하하! 얼마든지요.”
유재호 회장은 차에 올라탔다.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차가 완전히 떠나고 나자 성윤아가 나에게 물었다.
“라시드 왕자를 왜 만나게 해달라고 한 거예요?”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에요.”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라면 뭔지 말해줄 수도 있겠네요.”
표정을 보니 듣고 싶은 모양이다.
난 솔직하게 이유를 말해주었다.
“그림 때문이에요.”
“랭크시 그림이요?”
“그것 말고 미국에서 따로 사온 그림이 하나 있는데, 이게 꽤 가치가 있을 수도 있거든요.”
“그럼 경매에 내놓으면 되잖아요.”
“그러기에는 아직 복원과 진품 감정이 안 된 상태예요. 라시드 왕자가 미술품 애호가라는 소문이 있어서, 혹시 관심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아하! 수집가에게 팔 생각이군요.”
“그런 셈이죠. 이제 궁금한 건 풀렸어요?”
“하나 더요. 부탁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는 게 대체 무슨 말이에요? 설마 처음에 준 그림이 대가였다는 거예요?”
“음, 별거 아닌데.”
“별거 아니면 말해줘도 되겠네요.”
역시나 듣고 싶다는 표정이다.
“제가 라시드 왕자를 만나고 싶다고 부탁했잖아요.”
“그렇죠.”
“덕분에 유재호 회장님은 제가 라시드 왕자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죠. 그렇다면 라시드 왕자에 대해 조사해보지 않겠어요?”
성윤아는 알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어, 설마······ 라시드 왕자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그는 사우디 왕가의 실세나 다름없어요.”
* *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유재호는 생각에 잠겼다.
‘어째서 한미루는 라시드 왕자를 만나고 싶어 하는 거지?’
일단 라시드 왕자에 대해 검색해보았다.
그는 현 국왕의 아들. 일부다처제를 하는 사우디의 특성상 그의 위로는 수많은 형제들이 있다.
왕위계승서열로는 27위다.
여기까지 보면 별로 중요할 건 없어 보인다.
그나마 주목할 만한 점 하나는, 라시드 왕자가 할리드 왕세자의 측근으로 현재 왕실 경제개발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는 것.
그런데 한미루는 왜 그를 만나려고 하는 걸까?
이유는 잘 모르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라시드 왕자에게 뭔가 있다는 건가?’
사우디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전제군주국.
권력자와 친해지면 얻을 수 있는 이권은 막대하다. 때문에 모든 재벌그룹들이 할리드 왕세자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접대와 로비를 준비 중이었다.
그런데 사우디 왕세자에게 부족한 게 뭐가 있겠는가?
따라서 접대와 로비는 왕세자의 가족과 측근들에게 집중할 예정이었다. 동행하는 다른 왕자와 공주에 대해서는 다들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다.
유재호는 김지석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회장님.]
“한국으로 입국할 사우디 왕세자 일행 명단 다 확인했죠?”
[그렇습니다.]
“라시드 왕자의 가족들은 몇 명이나 됩니까?”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잠시 후, 김지석 비서실장이 말했다.
[두 번째 부인과 세 번째 부인. 그리도 세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과 동행하고 있습니다.]
유재호는 바로 지시를 내렸다.
“그들에게도 왕세자 가족들과 똑같은 선물을 준비하세요. 단, 다른 사람들 모르게 조용히 진행해야 합니다.”
접대는 그 사람의 위치를 나타낸다. 왕세자 쪽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불쾌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라시드 왕자와 관련해 전부 조사한 다음 정리해서 저한테 보고하세요.”
김지석 비서실장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유재호는 전화를 끊은 다음 생각에 잠겼다.
정말로 라시드 왕자가 사우디에서 중요한 인물일지 아닐지 아직은 모른다.
하지만 정말로 뭔가 있다고 한다면······.
‘미리 잘 보여 둬서 나쁠 건 없겠지.’
* * *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 방한. 할라드 왕세자는 누구인가?]
[사우디 왕세자 방한해서 경제협력 논의]
[박현락 국무총리, 서울공항에서 왕세자 영접]
[할리드 왕세자, 오 대통령과 10대 그룹 총수와 오찬!]
사우디 왕세자의 방한 소식에 나라가 들썩거렸다.
박현락 국무총리가 직접 공항까지 나가 영접을 했고, 청와대는 의장대를 사열시켰다.
오영환 대통령을 비롯해 재벌그룹 총수들은 왕세자 일행들을 맞이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에이오일은 본사에 할리드 왕세자 방한을 환영한다는 현수막을 내걸었고, 재계는 오일머니 투자 기대감을 내비쳤다.
일정은 2박 3일.
청와대에서 대통령과 기업인들과 만남을 갖고, 충남의 에이오일 원유정제 공장 기공식에 참석할 예정이다.
국빈에게 문제가 생기면 그건 해당 국가의 책임이다. 때문에 정부는 사우디 왕세자 일행을 철통같이 호위했다.
언론은 할리드 왕세자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며 각종 기사를 쏟아냈다.
[한-사우디 경제협력 MOU 체결]
[할리드 왕세자, 한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에 감탄]
[사우디, 10조 원 규모 투자 보따리 푼다]
[제2의 중동 특수 기대감]
[한-사우디, 에너지와 신산업 분야에 대한 협력 강화]
[중동 건설수주 기지개 켜나?]
* * *
주목의 대상이자 집중 경호 대상인 할리드 왕세자에 비해 라시드 왕자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그는 청와대가 주최하는 저녁 만찬에 참석하는 대신 서울 시내를 관광했다. 외교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의 비서인 아셰르는 라시드 왕자에게 보고했다.
“유재호 회장이 또 선물을 보냈다고 합니다.”
“흠, 그래?”
유성그룹 측에서는 라시드 왕자 일행에게 엄청난 선물을 뿌려댔다. 이러니 가족과 측근들 사이에서 좋은 얘기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거지?’
라시드 왕자는 할리드 왕세자와 함께 총수들과의 간담회에 참석했다.
다른 재벌그룹 총수들이 전부 할리드 왕세자만 신경 쓰는 것에 비해 유독 유재호 회장만은 자신에게 말과 눈빛을 건넸다.
게다가 다른 왕자들은 제쳐두고 자신에게만 왕세자에 준하는 접대를 하고 있다. 당연히 여기에는 뭔가 의도가 있을 것이다.
“일단 감사의 인사는 해야겠군.”
라시드 왕자는 유재호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화는 영어로 이뤄졌다.
“환대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회장님.”
[아닙니다, 왕자님.]
“보여주신 마음은 잊지 않고 간직하겠습니다.”
[약소한 성의였는데 좋게 봐주셨다니 감사합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만나자는 말씀이신가요?”
그는 대한민국 재계 1위 그룹의 회장. 따로 만난다면 괜한 구설수에 오를 수도 있다.
[제가 아니라 한 사람을 소개해 드리고 싶어서요.]
“누구인지 궁금하군요.”
[혹시 컨티뉴 캐피탈이라고 알고 계십니까?]
라시드 왕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들어봤습니다. 데이비드 록허트가 대표로 있는 곳이죠.”
[그 회사의 창업자인 한미루입니다. 왕자님을 꼭 만나 뵙고 싶다고 하더군요.]
“무슨 일 때문입니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회사에 투자를 해달라는 요청인가?’
그는 왕실 경제개발위원회 위원장.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만큼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금융인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들 대부분은 사우디 왕가의 투자를 희망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거절했겠지만 약간의 흥미가 생겼다.
‘유재호 회장이 이 정도로 신경을 쓰는 사람이라니.’
왠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 * *
아무리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해도 자본과 인맥이 부족한 한계가 있다.
어차피 내가 알고 있는 미래라는 건 시간이 지나면 모두가 겪는 현실이 된다. 그러니 그 전에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야 한다.
투자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내 편 역시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처음에는 그림만 팔 생각이었는데 계획이 좀 바뀌었다.
“라시드 왕자라······.”
그는 본인 재산만 수십억 달러.
여기에 왕실 경제개발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어서 왕실의 자산을 투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단지 그림 파는 걸 넘어서 친분을 쌓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 기회를 잡느냐 못 잡느냐에 따라 향후 계획이 완전히 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일단 만나야 뭘 하든지 말든지 할 거 아니야?”
하루가 지났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이제 내일 오전이면 그는 한국을 떠나 사우디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만나려면 오늘 밤밖에는 시간이 없다.
시곗바늘이 밤 9시를 넘어가자 마음이 점점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내가 그를 만날 방법은 사실상 없다.
아무리 가치 있는 그림이라도 팔 수 있는 루트가 없으면 소용없다. 이래서 수수료를 많이 떼어가도 경매장에 위탁판매하는 모양이다.
난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며 계속 기다렸다.
무작정 호텔로 찾아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 때쯤 유재호 회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떻게 됐나요?”
[시간을 내주겠다고 합니다.]
그 말에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11시까지 광화문 파이브시즌스 호텔로 가실 수 있죠?]
“그럼요.”
이미 준비를 끝마치고 대기 중이다.
[무슨 일인지는 묻지 않겠지만 주의해주시기 부탁드립니다.]
“절대 회장님께 누가 되는 일 없도록 잘하겠습니다.”
유재호 회장은 농담처럼 물었다.
[믿어도 되겠습니까?]
“예. 뿐만 아니라 오늘 일을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시게 될 겁니다.”
[하하, 정말 그랬으면 좋겠군요.]
난 통화가 끝나자마자 두 주먹을 쥐며 환호했다.
“좋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