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이사 (3)
한미루의 얘기는 계속 이어졌다.
“어! 쿨라우드를 인수했다고?”
“지금은 스노우 크래시지. 뭐 하는 회사인지 알아?”
“클라우드 회사잖아. 유명 개발자로 알려졌던 롤프 부치는 알고 보니 죽은 친구의 프로그램을 자기가 개발했다고 뻥친 거였고. 나 그 기사 보고 깜짝 놀랐는데.”
일반인들에게는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는 회사지만, 아무래도 IT업계에서 일하고 있는 만큼 클라우드 업체를 모를 리 없었다.
‘클라우드 업계 4위 회사를 인수했다고?’
“그럼 지금 내 돈은 얼마가 된 거야?”
“정확히는 몰라도 그때보다 최소 백 배는 늘었다고 봐야지.”
“잠깐만. 당시 대략 300억이었으니······.”
계산을 하던 강선우는 입이 쩍 벌어졌다. 열 배만 해도 3천억이고 백 배면 3조 원이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
어째서인지 성윤아가 반색했다.
“그렇죠?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죠?”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잠깐. 그럼 혹시 나 부자가 된 건가? 성과급 수백만 원 받으려고 아등바등하는 동안 내 재산이 그렇게 불어나고 있었다니!’
그렇게 생각하는데 한미루가 말했다.
“일단 나가자.”
“어디로?”
“차 사러. 너 맨날 포르쉐 사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잖아.”
“내가 언제? 나 그런 적 없는데.”
“아! 치킨집 할 때 그랬나?”
“응? 치킨집?”
“아무것도 아니야. 어쨌거나 필요 없다니 내 차만 사야겠네. 하나 사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지.”
그 말에 강선우는 재빨리 친구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 내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고 해서 포르쉐가 갖고 싶지 않다는 건 아니야. 사주면 잘 타고 다닐 자신 있어!”
* * *
이사도 하고 차도 사고 나니 마음이 좀 편하다.
후줄근한 옷들도 다 내다버리고 쇼핑도 한번 해야 하지만, 그건 천천히 하기로 했다. 그 전에 일단 해야 할 일이 좀 있다.
난 앞으로의 일에 대해 고민을 좀 해보았다.
얼마 후 벌어질 일들을 생각한다면 당장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갤러리에서 산 이 그림이 바로 돈을 벌 수단이다.
난 내가 사온 그림을 다시 살펴보았다.
그림은 크기에서 나오는 위압감도 무시하지 못한다.
실제로 잭슨 폴록의 넘버 시리즈나 마크 로스코의 색면화 같은 경우 크기에서부터 압도당하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이 그림의 고작 가로 45.4센티, 세로 65.6센티. 그림에서 딱히 뭔가 엄청난 아우라 같은 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미래를 알고 있던 덕분에 그림을 쉽게 손에 넣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건 이제부터다.
유명화가의 숨겨진 그림을 싸게 산 다음 비싸게 판다.
계획만 놓고 보면 더할 나위 없이 심플하다. 그런데 막상 실행에 옮기려니 걸리는 점이 한두 개가 아니다.
투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엑시트.
4억 달러의 가치를 지닌 그림이라도 팔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미술관 차려서 전시할 것도 아니고.
원래 이 그림을 산 두 명은 뉴욕 미술계의 유명인이었다.
그들은 복원을 진행하며 여러 차례 감정을 받았고, 미술계의 최고 권위자들을 총동원해서 진품이라는 인정을 받아냈다.
그 과정에서 얼마만큼의 돈과 노력이 들었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도 돈이지만 그만한 인맥과 권위가 있어야 한다. 현실적으로 내가 직접 작업하기는 힘들다.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복원이라는 게 그냥 물감 걷어내고 다시 칠한다고 되는 게 되는 게 아니다. 복원 기간은 짧게 잡아도 1년.
하지만 난 당장 투자에 쓸 돈이 필요하다. 언제 한가하게 그림 붙들고 복원이나 하고 있겠는가?
차라리 값을 덜 받더라도 최대한 빨리 현금화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그림을 과연 누구에게 팔아야 할까?
가장 좋은 건 원래 그림을 사간 사람에게 파는 것이다. 거액을 내고 샀다는 건 그만큼 이 그림을 가지고 싶었다는 뜻일 테니까.
경매에서 그림을 낙찰받은 사람의 신원은 공개되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지는 다들 알고 있다.
세상에 부자는 많지만 한 번에 1억 달러 이상의 현금을 동원할 수 있는 부자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4억 달러라면 100명도 채 안 되겠지.
그림을 사간 사람은 다름 아닌 사우디아라비아의 왕세자.
“오일머니가 또 미술품 좋아하기로 유명하지.”
당시 이 그림을 손에 넣기 위해 화상, 투자자, 미술관, 기업, 재단 등이 일제히 입찰에 참여했었다.
수많은 경쟁자들을 제치고 낙찰받았다는 것은 그만큼 이 그림을 갖고 싶었다는 뜻이겠지?
그러니까 사우디 왕세자랑 직접 접촉해서 팔면 되는 것이다!
“으음.”
무작정 그림을 들고 리야드로 찾아간다고 해서 왕세자가 나를 만나줄 리 없다. 아니, 그 전에 현재 사우디는 무슬림이 아니면 입국조차 안 된다.
그림 한 장 팔자고 이슬람교로 개종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난 사우디 왕세자에 대해 검색해보았다.
“오! 마침 다음 주에 국빈 방한하네. 운이 좋군.”
요즘 들어 이상하게 타이밍이 잘 맞는 느낌이다.
사우디 왕세자의 방한은 오영환 대통령의 초청으로 인해 이뤄졌다.
한국은 사우디의 주요 교역국.
한국의 원유 수입 중 약 30퍼센트를 사우디가 차지한다. 또한 사우디 국영기업 아람코는 한국 4대 메이저 석유회사 에이오일의 대주주기도 하다.
이번 방한 목적은 양국의 투자와 교역 증진을 위함.
한국에 머무는 기간은 2박 3일. 그 뒤에는 사우디로 돌아간다.
왕세자 방한은 거의 20년 만이라 일정은 빡빡하게 짜여있다. 그사이 과연 만날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난 사우디 왕세자의 사진을 열어보았다.
요즘은 왕들이 하도 장수하다 보니 왕세자는 배 나온 60대 아저씨였다. 공식적인 부인은 4명, 비공식까지 포함하면 12명. 자식은 44명.
아아! 아랍 왕족의 삶이란······.
사진을 보던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잠깐. 뭔가 좀 이상한데.”
왕세자는 젊고 잘생겼던 것 같은데.
혹시 내 기억이 잘못됐나? 아니면,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건가?
난 사진을 몇 장 더 뒤져보다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왕세자와 함께 있는 사람들 중에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턱수염을 기르고 선이 굵은 남자가 있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이제 기억나네.”
* * *
어떻게 구매자를 만날 수 있을지 고민하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난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한국에 돌아왔다는 얘기 들었습니다.]
“예. 며칠 전 돌아왔습니다.”
[하하! 그럼 식사 한번 해야죠.]
“그럼요. 약속한 대로 제가 사겠습니다.”
[모레 8시는 어떤가요? 그날은 일이 좀 일찍 끝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날 맞춰서 미리 식당을 예약해야겠구나.
재벌그룹 회장님은 평소에 과연 뭘 드시려나?
난 슬쩍 물어보았다.
“혹시 자주 가시는 곳이나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신가요?”
제발 아무거나 잘 먹는다는 말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전 아무거나 다 잘 먹습니다. 얻어먹는 입장이니 사주는 사람의 선택에 맡기겠습니다.]
“······네.”
통화가 끝났다.
날짜와 시간은 정했는데 어느 음식점에서 봐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김밥천국이나 맥도날드로 데려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느 음식점을 예약할지 고민하던 나는 결국 전문가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예, 미루 씨.]
난 성윤아에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유재호 회장님께 밥을 사기로 했는데 뭘 좋아하실지 잘 몰라서요. 혹시 추천할 만한 곳이 있나요?”
[글쎄요. 미루 씨는 어디를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난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저희 동네에 떡볶이 맛있는데 있는데.”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 네. 그럼 거기로 하면 되겠네요. 이만 끊을게요.]
“······아니에요. 좀 도와줘요.”
[그런데 설마 둘이서만 볼 생각이에요?]
“그렇죠.”
목소리를 들어보니 왠지 불러줬으면 하는 것 같은 느낌인데.
난 재빨리 말했다.
“아! 윤아 씨도 오실 거죠?”
[제가 가도 돼요? 괜히 눈치 없이 끼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이에요. 안 그래도 윤아 씨에게도 밥 살 생각이었는데. 그리고 둘만 보면 어색할 것 같아서요. 유재호 회장님도 좋아할 거예요.”
[지난번에 유재호 회장님이 같이 보자고 하긴 했어요.]
“그래요? 그럼 더 잘됐네요.”
성윤아는 기분이 좋아진 것 같은 목소리였다.
[흐응, 알았어요. 미루 씨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그럼 음식점은 제가 예약할게요.]
* * *
압구정에 있는 스페인 레스토랑.
음식점이라기보다는 마치 가정집 같은 분위기였고, 방으로 나뉘어 있었다. 난 성윤아와 함께 먼저 자리를 잡았다.
잠시 후, 퇴근한 유재호 회장이 도착했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오랜만이로군요. 미국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예. 회장님께서도 며칠 전 일본에 다녀오셨다고 들었습니다.”
“하하! 제 스케줄은 누구한테 들었나요?”
“뉴스 아나운서가 말해주던데요. 아! 이건 미국에서 사온 선물입니다.”
난 유재호 회장에게 그림이 들어있는 화구통을 건네주었다.
“여행 다녀온 선물입니다.”
“뭔가요? 꺼내 봐도 됩니까?”
“그럼요.”
그는 통 안에서 그림을 꺼내 펼쳐보았다.
“잘은 몰라도 좋은 그림 같아 보이네요.”
“예. 좋은 겁니다.”
그러자 뒤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칫! 나한테만 주는 건 줄 알았는데.”
“······.”
그런 말한 적 없는데.
그동안 신세 진 사람들에게 다 한 장씩 나눠주는 중이다.
유재호 회장이 잠시 통화를 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 성윤아는 나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렇게 비싼 그림을 선물로 줘도 되는 거예요?”
“그러는 윤아 씨도 저렇게 비싼 그림을 선물로 받았잖아요.”
“뭐, 그렇긴 한데······.”
덕분에 번 돈 생각하면 아까울 것도 없다. 게다가 오늘 또 부탁할 일이 하나 있기도 하고.
유재호 회장이 자리로 돌아오자 성윤아는 와인을 주문했다.
음식은 맛있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평소 뉴스에서나 보던 재벌그룹 회장과 마주 보며 식사를 하고 있으니 약간 신기한 기분이 든다. 재계 사람 중에서도 유재호 회장과 이렇게 따로 식사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유재호 회장은 시종일관 유쾌했다.
격식을 차린다거나 까다롭지 않은 모습이다.
적당히 돈이 많으면 부자인 티를 내지만, 너무 돈이 많은 부자는 오히려 소탈해지나?
식사가 끝나갈 때쯤 난 슬쩍 말을 꺼냈다.
“회장님께 부탁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유재호 회장은 농담처럼 말했다.
“얻어먹는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네요. 설마 맨입으로 들어달라는 건 아니겠죠?”
“설마요. 제가 그렇게 염치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대가는 충분히 지불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일단 한번 들어보죠.”
“다음 주에 사우디 왕세자 일행이 방한하는데, 알고 계시죠?”
“그럼요.”
이미 그룹 총수들과의 간담회 자리가 예정되어 있고, 유재호 회장은 당연히 그 자리에 참석한다.
“그중 누구를 좀 만나고 싶어서요.”
“할리드 왕세자를 말입니까? 그건 어렵지 않을까요? 저도 따로 독대하는 시간은 없습니다.”
이미 풀스케줄인 데다가 만나자고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아무리 유성그룹 회장이라고 해도 사우디 왕세자의 스케줄까지 조정하기는 힘들겠지.
“왕세자가 아닙니다.”
“그럼 누군가요?”
“라시드 왕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