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미술품 투자 (3)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돈으로 환산된다.
미술품 역시 예외가 아니다.
예술에 어떻게 가치를 매길 수 있느냐라는 건 헛소리다. 오히려 미술품만큼 열심히 가치를 매기는 것도 드물다.
미술품은 경매와 매매를 통해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으며, 미술품 투자의 수익률은 주식과 부동산 못지않게 높다.
헐값에 산 그림이나 도자기가 진품이라고 판정되면 수천, 수억 배의 수익을 남길 수도 있다.
이 그림이 경매에 나오는 건 앞으로 4년 후.
한 러시아 부호가 크리스티 경매에 내놓았고 미술품 경매 역사상 최고가에 낙찰되었다.
그는 미술품 관계자 두 명에서 1억 달러를 주고 그림을 산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 두 명이 구매하기 전까지 그림은 한 갤러리의 창고 속에 잠들어 있었다.
즉, 지금 시점에서는 말이다.
그게 과연 어디일까?
내가 무슨 미술품 관계자도 아니고 그냥 지나가며 기사로 봤을 뿐이다. 그림과 화가는 기억나도 그게 어느 갤러리에서 팔렸는지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행히 선우에게 시카고의 한 갤러리에서 팔렸다는 얘기를 들었던 게 떠올랐다.
그런데 시카고에 있는 갤러리가 어디 한둘인가?
유명 갤러리만 해도 수십 곳이고, 중소 갤러리까지 치면 수백 곳이 넘는다. 거기서 파는 그림들을 다 합치면 최소 수만 점이다.
다행히 몇 가지 단서가 있었다.
16세기 초 유럽에서 제작, 종교화, 작자미상, 훼손 상태가 심각, 그리고 시카고에 있는 갤러리에서 11000달러에 팔렸다는 것.
잘못하면 시카고 전역의 갤러리를 이 잡듯이 뒤지고 다녀야 할 판이다.
다행히 요즘은 인터넷 시대.
갤러리들은 그림 판매를 위해 홈페이지에 인터넷으로 도록을 공개했다. 모두가 볼 수 있는 건 아니고, 대부분 유료회원으로 가입해야 했지만.
난 수십 군데 사이트에 결제하고 도록을 뒤져보았다. 그렇게 한참 웹서핑을 한 끝에 에펜프리트 갤러리라는 곳에서 조건에 부합하는 그림을 찾아낼 수 있었다.
원래 그림을 샀던 2인조가 언제 샀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어쨌거나 그들보다 먼저 움직여야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공항에 내리자마자 갤러리로 달려갔고, 무사히 그림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 * *
택시를 타고 호텔에 도착한 나는 먼저 씻고 침대에 털썩 누웠다.
그렇게 한숨 돌린 다음 포장을 뜯고 그림을 펼쳐보았다.
그림은 반쯤 뭉개진 것 같은 모습이다. 복원을 하지 않고서는 원래 형태를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림값보다 복원비가 더 나오지 않을까?
그러니 갤러리도 복원을 안 한 거겠지만.
“이런 그림이 12200달러라니.”
내가 기억하기로는 11000달러에 팔렸는데, 안 팔려서 가격을 낮춘 건가? 아니면, 그 사람들한테만 싸게 판 건가?
이 그림에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12200달러는커녕 1달러에 판다고 해도 안 사지 않을까?
하지만 화가가 누군지 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그림 가격에 가장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요소는 뭘까?
캔버스의 크기? 들어간 물감의 양? 작업 인원과 시간?
다 필요 없고 ‘누가 그렸나’가 가장 중요하다. 메모장에 대충 그린 스케치도 피카소가 그린 거라면 1만 달러는 기본이다.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모두가 아는 유명인.
그러나 그는 고작 17점의 회화를 남겼을 뿐이고, 그중에는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건 그의 18번째 회화인 셈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게 4년 뒤 경매에서 4억 6030만 달러에 팔린단 말이지?”
* * *
눈앞에서 사려던 그림을 한국인 청년에게 빼앗긴 로버트는 망연자실했다. 그의 얘기를 들은 패트릭은 화를 내며 말했다.
“대체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한 거야?”
로버트가 괜한 친절을 베풀지만 않았어도 그들은 그림을 무사히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 그림을 사러 온 줄 몰랐으니까.”
“그 한국인 이름은 뭐야? 연락처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너 때문에 대체 이게 뭐야!”
“뭐? 나 때문이라고?”
“그럼 아니야?”
“애초에 그림을 찾은 건 나고, 넌 그냥 따라만 온 거잖아!”
둘은 대판 싸우면서도 그림을 사간 한국인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원래 갤러리는 고객의 개인정보를 알려주지 않지만, 두 사람은 관장을 어르고 달래 간신히 이름을 알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그림을 되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느 호텔에 묵고 있는지라도 물어볼걸!’
로버트는 혹시 그 한국인이 다시 찾아오거나 연락해오면, 자신에게 연락 달라고 신신당부하고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 그림은 분명히 진품이 아닐 거야. 진짜 그림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집에 돌아온 그는 분통을 터트렸다.
“이런 젠장!”
그는 로비에서 만난 청년의 모습을 떠올렸다.
‘니가 사간 그림! 그 그림이 내 그림이었어야 해!’
랭크시의 그림도, 그 그림도 눈앞에서 놓쳤다. 하필 둘 다 한국인이 낚아채갔다.
‘한미루라고 했지? 그러고 보니······.’
랭크시는 자신의 그림을 전부 사간 한국인이 ‘미스터 한’이라고 말했다.
문득 센트럴파크에서 고개를 돌렸을 때 봤던 동양인 청년의 모습과 갤러리에서 만난 동양인 청년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진실을 깨달은 로버트는 경악했다.
“자, 잠깐! 설마 그놈이 그놈이었어?”
* * *
난 공항으로 향하며 데이비드 록허트와 통화했다.
[갑자기 시카고에는 무슨 일로 가신 겁니까?]
“살 게 좀 있어서요.”
[대체 뭘 산 겁니까? 갤러리에서 12200달러를 결제했던데.]
나한테 1만 달러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법인카드로 시원하게 긁었다.
“그건 다음에 말씀드릴게요. 한국지사는 설립해놨죠?”
[예. 서류 작업 다 끝내놨습니다.]
이제부터 할 일을 생각하면 한국에 지사가 있어야 한다.
“그럼 한국 가서 다시 연락드릴게요.”
[알겠습니다.]
난 그림을 들고 드디어 한국으로 향했다.
열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그제야 긴 여정이 끝났다는 실감이 났다.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좁은 투룸이지만 역시 집이 최고다.
난 먼저 센트럴파크 노점에서 산 그림을 꺼내보았다.
“역시 예상이 맞았어.”
이 그림들은 랭크시의 작품이었다. 랭크시 본인이 직접 투위터에 글을 올렸고, 뉴스로도 나왔다.
화상들은 열심히 구매자를 추적 중이라고 한다.
내가 산 그림은 12장.
장당 50만 달러라고 치면 600만 달러.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돈이지만, 내가 진 빚(?)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로는 턱도 없다. 중요한 건 랭크시의 그림 12장이 아니라 갤러리에서 산 그림 한 장이다.
저것만 잘 팔면 돈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것이다.
누워서 쉬고 있는데 선우가 퇴근하고 돌아왔다.
“왔어?”
선우는 깜짝 놀랐다.
“헉! 뭐야? 언제 돌아왔어?”
“방금.”
“오면 온다고 얘기를 하지.”
“아, 얘기 안 했나?”
“응. 안 했어.”
난 선우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넌 상태가 왜 이래? 노숙하다 왔어?”
녀석은 소파에 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새끼가 사고 치는 바람에 지금 수습하느라 죽을 지경이야. 클릭 몇 번에 유저 수가 반토막 났어.”
“운영자가 아이템 복사해서 팔아먹은 거?”
내 말에 선우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어떻게 알았어?”
그야 1회차 때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으니까.
난 적당히 둘러댔다.
“인터넷에서 봤어.”
“지금 그것 때문에 게임 개판 나고 아주 난리도 아니야. 이대로 망하면 안 되는데.”
안타깝게도 이대로 망한다.
당시 술 마시며 울분을 쏟아내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미국은 잘 다녀왔어?”
“응.”
“대체 뭘 했기에 몇 달이나 있었어?”
“말했잖아. 회사 만들고 여기저기 투자했다고.”
“내 돈은 무사히 잘 있는 거지?”
“그럼. 열심히 불어나는 중이야.”
이렇게 묻는 걸 보니 뉴스를 잘 안 챙겨보는 모양이다. 하기야 외국계 사모펀드 이름까지 누가 기억이나 하겠는가?
“뭘 투자한 건데?”
“거기에는 엄청 긴 얘기가 있지. 지금은 피곤하니 다음에 말해줄게.”
선우는 바닥에 널려있는 그림을 보며 물었다.
“그런데 이 그림들은 다 뭐야?”
“아! 미국에서 사온 거야. 한 장 줄게.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봐.”
“아니, 웬 그림을 이렇게 많이 사왔어?”
“공원 노점에서 팔기에 샀어.”
선우는 여러 장의 그림을 대충 살펴보았다.
“노점에서 산 그림 치고는 꽤 괜찮아 보이는데.”
“그래?”
“응. 선도 제대로 그은 것 같고.”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얘가 그림 볼 줄 아는 모양이다.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선도 제대로 못 그었다고 욕하고 갔다던데. 지금쯤이면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난 집을 둘러보았다.
“나 없다고 집이 쓰레기장 다 됐네.”
벗어놓은 옷들과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먼지가 뭉쳐서 떠다녔다. 내가 미국 간 뒤로 청소 한 번 안 했음이 분명하다.
“누가 들으면 평소에 니가 청소한 줄 알겠는데.”
“그래도 내가 있을 땐 이 정도는 아니었어.”
이제까지 살면서 딱히 불편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호텔에서 지내다 와서 그런지 집이 엄청 좁아 보였다.
돈도 벌었는데 계속 허름한 투룸에서 살 수는 없는 노릇.
“여기 월세 얼마였지?”
“3천에 100. 왜?”
그중 내가 매달 40을 보탰다. 대신 쪽방이나 다름없는 작은 방을 썼다.
“이 집 빼는 게 어떨까?”
선우는 깜짝 놀랐다.
“그게 뭔 소리야?”
“좀 좋은 데로······.”
“설마 전 재산에 마통까지 뜯어간 것도 모자라 내 보증금 3천까지 빼가려고? 안 된다, 이놈아!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안 돼!”
“······.”
* * *
난 선우와 몇 마디 나누고 나서 바로 잠이 들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피로가 쌓여 있었는지 12시간 동안 깨지도 않고 푹 잤다. 눈을 떴을 때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시간은 아침 8시. 선우는 먼저 나갔는지 집에 없었다. 핸드폰을 확인해보니 성윤아에게 전화가 와있었다.
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지금 어디예요? 한국에 왔어요?]
“예. 어제저녁에 들어왔어요.”
[왜 이렇게 늦었어요? 뉴욕에서 바로 돌아온다더니.]
“중간에 잠깐 들렀다 올 데가 있어서요.”
[칫! 오늘은 뭐할 거예요?]
“이사 갈 집을 좀 알아보려구요.”
[그래요? 그럼 얼굴도 볼 겸, 같이 집구경 갈까요?]
“회사는요?”
[마침 오늘 연차 쓰려고 했거든요.]
“······.”
연차라는 게 쓰고 싶으면 쓸 수 있는 거였나?
어쨌거나 잘 됐다.
“그럼 12시에 강남역에서 볼래요? 같이 점심 먹어요.”
[알았어요.]
약속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그때까지 뭐할까 생각하다가 알람을 맞춰놓은 다음 다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