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미술품 투자 (2)
둘은 이 바닥에서 꽤나 이름이 알려져 있다.
만약 그가 문의를 할 경우, 갤러리 측에서 따로 조사를 해볼 수도 있다. 만약 그림의 진짜 가치를 알게 된다면, 그때는 열 배를 준다고 해도 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100퍼센트 확실한 건 아니야. 그림을 직접 보고 판단해야 돼.”
로버트는 감정사보다도 날카로운 눈썰미를 지녔고, 덕분에 큰돈을 만질 수 있었다.
도록에 나온 그림을 보는 순간 이전에는 느끼지 못한 강한 확신이 들었지만, 정확한 판단은 직접 눈으로 살펴보고 내려도 늦지 않다.
둘 다 바쁜 몸이었지만, 머뭇거릴 생각은 없었다.
로버트는 팁을 포함한 돈을 테이블 위에 놓고 일어났다.
“지금 바로 시카고로 가자.”
* * *
뉴욕에서 시카고까지는 고작 두 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았다.
오헤어 국제공항에 내린 그들은 택시를 타고 바로 에펜프리트 갤러리로 향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갤러리답게 로비는 다양한 그림과 조각품들로 꾸며져 있었다.
패트릭이 직원과 얘기하러 간 사이 로버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파에 앉아 뭔가를 쓰고 있는 동양인 청년이 눈에 들어왔다.
‘중국인인가?’
동양인들은 갤러리의 중요한 고객이다.
과거 버블경제 시절 일본인들은 미친 듯이 그림을 사들였다. 한 일본의 보험사가 영국 크리스티 경매에서 고흐의 해바라기를 미술품 경매 역사상 최고가인 53억 엔에 사들인 것은 유명한 일화다.
당시만 해도 모두가 말도 안 되는 고가라고 생각했지만, 현재 그림의 가치는 세 배 넘게 올랐다.
일본 버블이 무너진 뒤 이번에는 중국이 미술계의 큰손으로 등장했다. 중국 부호들은 유명 화가의 그림들을 닥치는 대로 사들이며 그림값을 크게 올려놓았다.
어쩌면 이번에 자신들이 산 그림도 나중에 중국인의 손에 넘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사든 난 돈만 벌면 그만이지만.’
그런데 왠지 청년의 모습이 좀 낯이 익은 듯했다.
로버트는 청년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어디서 왔나?”
동양인 청년은 웃으며 영어로 말했다.
“한국에서 왔습니다.”
로버트는 손을 내밀었다.
“한국인이었군. 만나서 반갑네. 난 로버트 팬델이네. 뉴욕에서 왔네.”
“아! 저도 방금 전에 뉴욕에서 오는 길입니다.”
소파 옆에 캐리어가 있는 걸로 봐서는 공항에서 바로 이곳으로 온 모양이다.
“오! 그럼 센트럴파크도 가봤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소인데.”
그 말에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가봤습니다. 잠깐 머물렀지만 아주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로버트는 잠시 안 좋은 기억이 떠올랐지만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이곳에는 무슨 일인가?”
로버트의 물음에 청년은 자신의 이름과 함께 왜 이곳에 왔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얘기를 다 들은 그는 흥미를 나타냈다.
“오호! 그림을 사러 뉴욕에서 여기로 왔다는 건가?”
“예. 인터넷으로는 구매가 안 되더라구요.”
“그 그림이 마음에 들었나 보군.”
청년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사실은 투자가 목적입니다.”
로버트는 턱수염을 매만졌다.
“흐음, 쉽지 않을 텐데.”
그림은 사두면 가격이 오른다.
하지만 모든 그림의 가격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그 역시 관련 일을 하며 큰 손실을 본 적도 몇 번 있다.
“그림 투자는 쉬운 일이 아니네. 가격이 오르는 그림은 정해져 있기 마련이지. 그리고 그런 그림들은 일반인이 사기 힘들 정도의 가격이네.”
고가 미술품 경매시장은 일반 개인이 접근하기 힘든 ‘그들만의 리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가끔은 진흙 속에서 진주를 발견해 대박이 터지는 일도 있긴 하지.”
그러기 위해서는 시장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야 하고, 진품과 가품을 가려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한다. 이는 하루 이틀 안에 기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그 기회를 잡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네.”
‘나조차도 랭크시 그림을 눈앞에서 보고 놓쳤으니까.’
청년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확실히 미술품 시장은 어렵네요.”
“어중이떠중이들이 접근할 만한 곳이 아니지. 그런데 뭘 쓰고 있는 건가?”
“회원가입서를 작성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가입 절차가 좀 까다롭네요. 제출해야 할 서류도 여러 개고, 시간도 며칠 걸린다고 하고.”
돈만 내면 살 수 있는 그림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그림들도 있다.
고가의 그림은 거래 이력 자체가 감정서 역할을 한다. 때문에 일부 갤러리에서는 구매자의 신원을 철저하게 관리한다.
그는 작은 친절을 베풀어주기로 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내가 도와주겠네.”
로버트 팬델은 미국 갤러리협회의 이사. 그의 추천이 있으면 별다른 서류와 절차 없이도 회원 가입이 가능했다.
로버트는 직원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추천인란에 이름을 적어주었다. 그의 도움 덕분에 청년은 여권만으로도 에펜프리트 갤러리의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었다.
청년은 기뻐하며 허리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로버트는 청년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니네. 서로 돕고 살아야지.”
한창 즐겁게 대화를 나누는데, 패트릭과 함께 콧수염을 기르고 이마가 살짝 벗겨진 중년 백인 남자가 다가왔다.
그는 정중하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로버트 팬델 님. 에펜프리트 갤러리를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전 게리 루니 관장입니다.”
“반갑습니다, 관장님.”
두 사람은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바로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로버트는 청년에게 말했다.
“대화 즐거웠네.”
동양인 청년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로버트와 패트릭은 3층에 있는 VIP 응접실로 안내되었다.
루니 관장은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분께서 이렇게 직접 찾아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둘은 미술계의 유명인이었다. 패트릭 윌시는 뉴욕의 유명한 화상으로 월가의 부호들과 두루 친분을 맺고 있고, 로버트 팬델은 미술계에서 발이 넓기로 유명했다. 화가는 물론, 관련학과 교수, 학예사, 역사가 등등.
“저희 에펜프리트 갤러리는 이번 기회에 두 분과 좋은 인연을 만들었으면 합니다.”
로버트는 시원하게 웃었다.
“하하! 저희 역시 그렇습니다.”
그들은 커피를 마시며 최근 미술계의 경향과 유망한 화가들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어느 정도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지자, 패트릭은 본격적으로 얘기를 꺼냈다.
“이곳에 오기 전, 인터넷으로 도록을 살펴보았습니다. 그중 저희가 관심을 갖고 있는 작품이 몇 개 있습니다.”
그 말에 루니 관장은 반색했다.
“어떤 그림입니까? 두 분이 직접 여기까지 오셨으니, 원하시는 그림을 최대한 좋은 가격에 드리겠습니다.”
“오, 감사합니다.”
그는 십여 점의 그림 목록을 얘기하며, 그중에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섞어 놓았다.
“이 그림들을 한번 볼 수 있을까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관장이 나가고 나자 로버트는 바로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패트릭은 그에게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땀 좀 닦아.”
“아, 알았어.”
괜히 긴장한 모습을 보일 경우 저쪽에서 눈치챌 위험이 있다. 그냥 다른 그림들을 보며 자연스럽게 살펴보면 된다.
그리고 그 그림이 맞다 싶으면 바로 구매하는 것이다.
로버트와 패트릭은 긴장을 숨긴 채 기다렸다.
잠시 후, 직원들이 로버트가 말한 그림들을 들고 와 눈앞에 직접 펼쳐보였다.
둘은 주의 깊게 그림을 살펴보는 척했다. 그런데 정작 그들이 사려 했던 그림은 보이지 않았다.
패트릭은 당황하며 말했다.
“하나가 빠진 것 같은데요.”
“어떤 것 말입니까?”
“16세기 종교화 말입니다.”
루니 관장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아! 그 작품은 방금 전에 어떤 분이 구매하셨습니다.”
그 말에 둘은 깜짝 놀랐다.
“뭐, 뭐라구요?”
거들떠도 안 볼 그림을 대체 누가 사갔단 말인가?
눈앞에서 그림을 놓쳤다고 생각하니. 속이 거꾸로 뒤집힐 것만 같았다.
로버트는 참지 못하고 버럭 소리쳤다.
“그걸 팔면 어떡해! 그게 누가 그린 그림인데!”
갑작스레 변한 그의 태도에 루니 관장은 당황하며 물었다.
“누가 그린 그림입니까?”
“바로······.”
패트릭은 소리치려는 로버트의 입을 틀어막았다. 화가 이름을 알면 절대 그림을 팔 리 없을 테니.
“누가 샀습니까?”
갤러리와 경매자에서는 거래 이력을 남기기 위해 고객의 신원을 확인한다. 하지만 그걸 타인에게 알려주지는 않는다.
“고객의 개인정보에 대해서는 말씀드릴 수가······.”
로버트는 그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누가 샀냐고!”
놀란 게리 관장은 얼떨결에 대답했다.
“한국인이······.”
로버트는 이곳에 올라오기 전 로비에서 대화를 나눴던 청년을 떠올렸다.
“오! 신이시여!”
패트릭은 창밖을 보며 소리쳤다.
“저기야!”
한 손에는 캐리어를, 다른 손에는 그림을 든 동양인 청년이 건물 밖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포장된 그림이 들려있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설마 그 그림을 사기 위해 한국에서 시카고로 날아왔다고? 그렇다는 건 그 그림을 누가 그렸는지 알고 있다는 건가?’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인터넷에 도록이 공개된 지는 1년도 넘었다. 하지만 그 사이 누구도 그 그림에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자신들을 제외하면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런 것도 모르고 회원 가입을 도와줬다니!’
로버트는 더 이상 생각할 것 없이 재빨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신발이 벗겨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달렸다.
‘이 자리에서 산 가격의 두 배를 쳐준다고 하면 팔지 않을까?’
아니, 팔기만 한다면 열 배, 백 배라도 줄 용의가 있다. 만약 안 판다고 하면 빼앗기라도 해야 한다.
로버트가 회전문을 열고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을 때, 청년은 이미 택시에 올라타는 중이었다.
“멈춰! 거기 서!”
하지만 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택시는 출발했다.
로버트는 택시를 뒤따라 달리며 소리쳤다.
“자, 잠깐만! 안 돼에에에에!”
* * *
택시에 올라타자 젊은 택시기사가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어디로 모실까요?”
“그레이튼 호텔로 가주세요.”
그는 차를 출발시키며 물었다.
“어디서 오셨나요?”
“한국에서 왔습니다.”
“영어 잘하시네요. 시카고에는 관광으로 오신 건가요?”
“아니요. 사실은 그림을 사기 위해 왔어요.”
“품에 안고 있는 걸 보니 방금 산 모양이네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반드시 사야 하는 그림이었는데, 구매절차가 까다로워서 하마터면 못 살 뻔했어요. 다행히 친절한 미국분이 도와준 덕분에 살 수 있었습니다.”
“정말인가요? 요즘 같은 세상에 그런 사람 만나기 쉽지 않은데요.”
“이래서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건지도 모르겠어요.”
한창 대화를 하는데, 젊은 택시기사가 놀란 표정으로 사이드미러를 살폈다.
“왜 그러세요?”
“아, 아니요. 누가 소리 지르며 쫓아오는 것 같아서요.”
마침 택시가 모퉁이를 지났고, 난 고개를 뒤로 돌려보았다.
“아무도 없는데요.”
택시기사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기분 탓이었나 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