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7화. 센트럴파크 노점 (96/529)

 97화. 센트럴파크 노점

 투자해야 할 곳은 있는데 돈이 없다는 게 문제다.

 별다른 자본 없이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큰돈을 벌 방법이 뭐가 있을까?

 난 한참을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

 “음, 내가 말하고도 양심 터진 소리 같구나.”

 그런 게 있다면 세상 사람들 다 부자 됐겠지.

 회귀를 해도 세상이 만만치는 않다.

 “꿈을 너무 크게 잡았나?”

 적당히(?) 10조 원 정도 벌어서 놀고먹을 생각이었으면 이렇게까지 빡세게 할 필요는 없다. 그런데 목표가 크다 보니 좀 무리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머리를 식힐 겸 잠시 걷기로 했다.

 공원 곳곳에는 허가받은 노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먹을 걸 파는 곳도 있고, 장신구나 간단한 기념품을 파는 곳도 있다.

 노점들을 둘러보며 구경하는데, 저 멀리 있는 노점에서 작은 실랑이가 벌어진 것이 보였다. 거리가 멀고 위치상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체구가 좋은 백인 남성이다. 그리고 노점 앞에는 수염이 하얗게 센 노인이 앉아 있었다.

 남자는 멀리 떨어진 나에게도 들릴 만큼 크게 웃으며 말했다.

 “푸하하! 이런 그림이 60달러라는 게 말이 됩니까?”

 수염이 하얗게 센 노인이 말했다.

 “말이 안 될 건 뭐요?”

 남자는 설교하듯 말했다.

 “그림의 첫 단계는 선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선도 제대로 못 긋는 허접한 화가가 어디서 주워듣고 프로의 흉내만 낸 겁니다. 자기 딴에는 여유 있다는 듯 허세 부리면서 그리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유명 화가의 그림을 따라 그린 낙서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요?”

 “현대미술을 우습게 생각하는 화가들이 있는데, 이건 예술이 아니라 애들 장난입니다. 다른 도시라면 모를까 뉴욕에서는 이런 삼류 그림을 보고 속아서 살 사람은 없을 겁니다. 이런 그림에는 10달러도 아깝습니다.”

 노인은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기 싫으면 사지 마시오. 누가 사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잖소?”

 “그림을 파는 건 자유입니다. 하지만 이딴 걸 예술작품이라고 하는 건 진정한 예술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만 알아두십시오.”

 “알았으니까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갈 길 가시오.”

 백인 남성은 그림을 사지 않고 그냥 갔고, 노인은 툴툴거리며 매대에 있는 그림들을 정리했다.

 난 왠지 흥미가 생겨서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노점으로 다가갔다.

 노점에는 여러 그림들이 진열되어 있었고, ‘예술작품을 저렴하게 판매합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라는 말도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내 물음에 노인은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모르겠소. 괜히 와서 진정한 예술이 어쩌니, 선도 제대로 못 긋니 하며 한바탕 설교를 하더군. 자기가 유명 갤러리에서 일한다나 뭐라나. 안 살 거면 말 것이지. 쯧쯧!”

 난 그를 달래주었다.

 “기분 나쁘셨겠네요. 자기 작품을 그렇게 말하면 누구든 화가 날 만하죠.”

 노인은 좀 누그러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뭐, 딱히 그렇진 않소. 내가 그린 건 아니라서.”

 “화가가 아니신가요?”

 “하하! 난 이게 무슨 그림인지도 잘 모르오. 그냥 일당 받고 판매만 할 뿐이지.”

 “그렇군요.”

 노인은 나를 보며 물었다.

 “뉴요커는 아닌 것 같은데 어디서 왔소?”

 “한국에서 왔습니다.”

 “오! 코리아! 사촌 형님이 한국전쟁에 참가했었지. 지금도 만나면 그때의 일을 자랑스럽게 얘기하곤 하네. 이름은 어떻게 되나?”

 “한미루라고 합니다.”

 “난 재키 베일리스네. 그냥 잭이라고 부르면 되네.”

 “예.”

 난 노인과 잠시 잡담을 나누었다.

 “그럼 이 그림들은 누가 그린 건가요?”

 노인은 피식 웃었다.

 “나도 잘 모르네. 아마 이름을 말해줘도 모를 테지.”

 “그렇긴 하겠네요.”

 뉴욕에 온 김에 기념품으로 한 장 사갈까?

 난 진열된 그림들을 한번 둘러보았다. 대충 훑어봐도 아까 그 남자가 왜 그런 말을 하고 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림은 물감으로 그린 유화나 수채화가 아닌, 판화나 그라피티 같은 그림도 있고, 크로키나 드로잉도 있다.

 언뜻 보면 적당히 대충 그린 것 같기도 하고, 크기도 제각각이다.

 문외한인 사람이 봐도 잘 그렸는지 못 그렸는지 대충 알 수 있는 고전미술과는 달리, 현대미술은 웬만큼 안목이 있지 않고서는 알아보기 쉽지 않다.

 난 소녀가 하트 모양의 빨간색 풍선을 향해 손을 뻗고 있는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 그림은 얼마인가요?”

 내 물음에 노인이 말했다.

 “크기에 상관없이 장당 60달러요.”

 “음······.”

 만만치 않은 가격이다. 노점에서 파는 무명화가의 그림을 이 가격에 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늘 몇 장이나 파셨나요?”

 “네 시간 동안 세 장 팔았소.”

 세 장이면 180달러. 원가 생각하면 꽤 남는 장사 아닌가?

 난 그냥 가려다가 멈칫했다.

 왠지 그림체가 좀 낯이 익은 듯하다. 비슷한 그림을 몇 번 본 것 같은데. 내가 이걸 어디서 봤더라······.

 그 순간, 문득 떠오르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센트럴파크 노점.

 예술작품을 저렴하게 판다는 홍보문구.

 그리고 바로 이 그림!

 이거 설마······?

 “남은 그림이 총 몇 장인가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노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한 열 몇 장 남았는데.”

 “제가 다 사겠습니다.”

 노인은 깜짝 놀랐다.

 “이걸 다 사겠다고?”

 “예.

 난 바로 지갑을 꺼내 남은 달러가 얼마인지 확인했다. 그리고 노인에게 물었다.

 “혹시 카드도 받나요?”

 * * *

 랭크시(Ranksy).

 그는 스스로를 예술 테러리스트라고 칭했다. 그가 하는 예술활동은 기행이라고 해도 좋았다.

 대영박물관과 루브르 박물관 등에 잠입해 쇼핑카트를 모는 원시인이 그려진 돌 등을 진열하고 도망갔고, 밤새 벽에 몰래 그라피티를 그리고 도망치기도 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가 기존 미술계에 반감을 드러낼수록 그의 명성은 높아졌고, 높아지는 명성만큼이나 그림값도 치솟았다.

 21세기 가장 뛰어난 예술가, 거리의 아티스트, 창조적 파괴자, 현대미술의 새로운 지평을 연 천재 등등.

 언론과 미술계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그의 예술성을 칭찬했다.

 그가 무명이던 시절 그라피티를 지우고 신고하던 사람들은 그가 유명해진 뒤에는 보존을 하느라 애썼고, 심지어는 벽면을 통째로 뜯어내 팔기도 했다.

 그가 그라피티를 그린 이동주택은 무려 500배의 가격에 팔렸고, 예전에 그렸던 그림들은 경매에 나와 장당 50만 달러 이상에 팔렸다.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랭크시는 소더비 경매에 자신이 직접 그림을 내놓았고, 낙찰자가 결정되자마자 그림을 분쇄시켰다.

 그런데도 낙찰자는 기꺼이 그림을 구매했다. 분쇄 자체가 하나의 행위예술로 여겨지며, 값이 더욱 치솟았기 때문이다.

 미술계에서는 명성이 곧 돈이다.

 그림을 그림 그 자체로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중이든 전문가든 그저 화가의 유명세에 따라 돈을 지불할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산 그림을 감상하는 것이 아닌, 창고에 보관해 놓고 가격이 뛰기만을 바란다.

 랭크시는 이러한 미술계의 허상을 비판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의 그림을 뉴욕 센트럴파크 노점에서 판매하는 퍼포먼스를 기획했다.

 설마 노점에서 파는 60달러짜리 그림이 랭크시가 그린 진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는 구직사이트에서 찾은 한 노인에게 그림을 대신 팔도록 시켰다.

 뉴욕은 세계의 금융중심지임과 동시에 문화중심지다. 이에 대한 뉴요커들의 자부심도 대단했다.

 ‘하지만 그들 중 과연 몇 명이나 내 그림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웃기는 일이다.

 크리스티나 소더비 경매장에서 50만 달러가 넘게 팔리는 그림을, 노점에서 60달러에 팔고 있으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니.

 ‘결국 대중의 안목이라는 것은 허상일 뿐이지. 진정한 예술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얼마 없어.’

 해가 질 무렵 랭크시는 느긋하게 공원으로 향했다.

 ‘한 두세 장이나 팔렸으려나?’

 노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매대는 텅 비어 있었다. 그가 준비해놓은 그림은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노인은 그를 보며 말했다.

 “이제 왔군. 한참 기다렸소.”

 그는 당황하며 물었다.

 “그림들은 어디 갔습니까?”

 “다 팔렸소.”

 그 말에 랭크시는 깜짝 놀랐다.

 “전부 다 팔렸다구요?”

 놀라는 그에게 노인은 말했다.

 “세 장은 각기 다른 사람이 사갔고, 한 동양인 청년이 보더니 남은 그림을 한 번에 다 사갔소.”

 그가 준비한 그림은 총 15장.

 어떤 그림은 10분 만에 그렸고, 어떤 그림은 한 달 내내 공들여 그렸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그의 예술혼을 담지 않은 그림이 없었다.

 그런데 세 장을 빼고 남은 12장을 한 사람이 다 사갔다고?

 개당 60달러씩이니 12장을 샀다면 무려 720달러다. 무명화가의 그림에 지불하기에는 엄청난 거액이다.

 “대체 누굽니까?”

 “여행 온 한국인이라고 하더군. 자네 그림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네.”

 랭크시는 쉽게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길거리 노점에서 파는 내 그림의 가치를 알아봤다고? 화가의 유명세나 화상의 신뢰도 없이도 그림의 예술성을 파악했단 말인가?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었다니!’

 노인은 멍하니 서 있는 랭크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하하! 그림이 다 팔린 사실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군. 가끔은 이런 행운도 있으니, 앞으로도 꿈을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노력하게. 지금은 비록 노점에서 60달러에 파는 그림이지만, 언젠가는 유명 화가가 되어서 소더비 경매장 같은 곳에서 수십만 달러에 팔릴 수도 있지 않겠나?”

 “······.”

 * * *

 그림을 안고 숙소로 돌아온 나는 바로 노트북을 열어 랭크시의 그림들을 검색해보았다.

 게임회사에서 일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선우는 디자인과 미술 쪽에도 관심이 많았다.

 때문에 전시회가 열릴 때면 혼자 가기 싫다며 나를 여기저기 끌고 다녔고, 덕분에 유명하다는 그림은 한 번쯤 접해볼 수 있었다.

 선우에게 들은 일화가 생각나서 일단 다 사긴 했는데······.

 “이거 진짜 랭크시 그림인가?”

 랭크시는 본명도 얼굴도 알려지지 않은 현대예술가다.

 그러나 미술계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고, 그의 기행이 언론에 자주 나오며 일반인들에게도 유명해졌다.

 그 기행 중 하나가 센트럴파크 노점에서 자신의 그림을 장당 60달러에 판매한 것이다.

 랭크시는 현재 미술계의 슈퍼스타나 다름없다.

 10년 후에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그는 탈권위적인 성향에다 예술계의 상업성을 비판하는 작업을 하는 만큼, 그가 직접 경매장에 그림을 출품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수요는 넘쳐나는데 공급이 제한되니, 그의 그림은 경매에 나오기만 하면 엄청난 가격에 팔려나갔다.

 얼마 전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그림은 무려 150만 달러에 판매됐다.

 “그럼 이게 다 얼마야?”

 내가 산 그림은 12장.

 장당 50만 달러를 받는다고 하면 무려 600만 달러. 고작 1320달러로 600만 달러를 번 셈이다!

 “대체 몇 배 수익이지?”

 물론 어디까지나 랭크시 그림일 때 얘기다. 그냥 랭크시를 흉내를 내서 그린 그림이면 내가 산 가격도 받기 힘들겠지.

 잠시 행복회로를 돌리던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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