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딸 바보
우리는 골목길 안쪽에 있는 펍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실내는 텅 비어있었다. 설마 그새 망했나?
“저기요!”
그러자 주방에서 거구의 중년 남성이 걸어 나왔다. 외모만 봐서는 가게를 털러 온 산적처럼 보이지만 그의 정체는 이 가게의 사장.
그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아직 영업 전이니 세 시간 뒤에 오게.”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어쩐지 사람이 없다 했다.
“이따 다시 오죠.”
데이비드와 함께 나가려는데, 솥뚜껑 같은 손이 뒤에서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어이, 잠깐.”
“왜 그러시나요?”
내가 뭘 잘못했나?
그는 두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혹시 지난번에 내 딸과 함께 가게에 오지 않았던가?”
“맞습니다만?”
“오! 역시 그때 그 청년이 맞군!”
오코너 사장은 두 손으로 내 손을 꼭 붙잡으며 말했다.
“아들 사업에 10만 달러를 투자해줬다고 들었네. 그것만으로도 고마운데 딸에게 특종까지 주다니. 자네는 오코너 가문의 은인이네!”
“뭘요.”
둘 다 내 사리사욕을 위해서 그런 거니 너무 고마워해도 곤란하다.
그는 슬쩍 물어보았다.
“딸이 자네가 엄청 대단한 투자자라고 칭찬하더군. 아들에게 투자한 걸 보면 그 녀석이 정말 잘할 것 같아서 그런 건가?”
“그럼요. 너무 걱정 마세요.”
앱 개발 좀 못하는 게 뭐가 중요하겠나? 햄버거만 잘 만들면 되지. 애초에 그는 햄버거를 만들 운명이었다.
“하하! 다행이군. 그런데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건가?”
“햄버거를 사러 왔습니다.”
“오! 그렇군. 잠시만 기다리게. 금방 만들어줄 테니.”
그는 재빨리 주방으로 들어갔다.
데이비드와 앉아서 기다리는데, 붉은색 머리카락에 노트북 가방을 메고 카메라를 든 여성이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아빠! 저 왔어요!”
“어!”
“앗!”
우리는 서로 깜짝 놀랐다.
트리시는 나와 데이비드를 보고는 반가워했다.
“뉴욕에는 언제 온 거예요?”
“방금요.”
“잠깐만요. 사진 한 장만 찍을게요.”
뭐라 말할 틈도 없이 그녀는 재빨리 카메라를 들어 우리의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찰칵!
“갑자기요?”
“지금 앉아있는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요. 보내줄 테니 나중에 자서전 쓸 때 꼭 넣어요.”
“제가 자서전 쓸 일이 있을까요?”
“컨티뉴 캐피탈이 세계 최대 회사가 될 거라면서요? 자서전 안 쓰면 전기라도 나오지 않겠어요?”
“듣고 보니 그러네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필요하면 달라고 할 테니, 대신 가지고 있어요.”
“알았어요.”
트리시는 기뻐하며 말했다.
“덕분에 특종을 두 개나 낼 수 있었어요. 저희 구독자도 늘고 광고도 엄청 붙은 거 알아요? 바넷사 코도 납작하게 해줬어요!”
“바넷사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축하드려요.”
실제로 WST와 그녀의 이름은 월스트리트에서 꽤나 유명해졌다.
트리시와 데이비드가 직접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두 사람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컨티뉴 캐피탈의 데이비드 록허트입니다.”
“월스트리트타임즈 트리시 오코너 기자예요. 예전부터 꼭 한번 만나고 싶었어요.”
“이번에 기사 쓰신 거 잘 봤습니다.”
“전부 대표님께서 쓰신 리포트 덕분이에요. 인터뷰해주신 것도 너무 감사드려요.”
인사가 끝난 뒤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뉴욕으로 돌아온 걸 보면 실리콘밸리에서 투자는 다 잘 끝난 거예요?”
“예. 잘 끝났어요.”
“그런데 우리 가게에는 어쩐 일로 온 거예요?”
“햄버거 사러 왔어요.”
한창 대화를 나누는데 오코너 사장이 햄버거를 내왔다.
“이건 서비스네. 포장은 준비해놓을 테니 하나씩 먹고 가게.”
비주얼을 본 데이비드는 별로 기대하지 않는 같은 표정이었다. 이런 펍에서 파는 햄버거가 맛있어봐야 얼마나 맛있겠냐고 생각하겠지.
그 생각이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데이비드는 햄버거를 베어 물었다. 그러자 이내 표정이 변했다.
“제 말이 맞죠?”
그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인생 절반을 손해 본 기분입니다. 맨해튼에 살면서도 이곳을 몰랐다니.”
“그래도 앞으로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요.”
하지만 난 한국에 체인점이 들어올 때까지 당분간은 못 먹겠지.
우리는 앉은 자리에서 햄버거 하나를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트리시에게 말했다.
“그럼 다음에 또 봐요.”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또 다른 특종 있으면 꼭 제보 부탁할게요.”
“예.”
우리는 햄버거를 포장해 병원으로 향했다.
* * *
새하얀 피부에 곱슬거리는 금발, 푸른색 눈동자.
환자복을 입은 인형 같이 예쁜 아이는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 아저씨는 누구예요?”
그 말에 난 깜짝 놀랐다.
아저씨라니! 내가 아저씨라니!
회귀하기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아저씨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니다. 뭐, 어린애가 보기에는 크면 다 아저씨일 수도 있겠지.
데이비드는 설명해주었다.
“아빠의 보스야. 이번에 같이 일하게 됐어.”
난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 난 한미루라고 해. 한국에서 왔어.”
아이는 밝은 표정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전 메기 록허트예요.”
“······.”
아, 귀엽다.
너무 귀엽다.
왜 데이비드가 딸 바보가 됐는지 알 것 같다. 이런 딸 있으면 나도 딸 바보가 됐을 것 같다.
난 손에 든 햄버거를 들어보였다.
“메기가 햄버거 좋아한다고 해서 아저씨가 사왔어.”
“와! 감사합니다.”
메기는 작은 입으로 햄버거를 한입 가득 베어 물었다. 오물오물 씹는데 푸른색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맛있니?”
내 물음에 메기는 소리치듯 말했다.
“맛있냐구요? 이건 맛있는 정도가 아니라 세계 최고의 햄버거에요!”
데이비드는 웃음을 터트렸다.
* * *
메기가 잠시 치료를 받으러 간 사이, 데이비드는 나에게 말했다.
“메기는 제 전부입니다. 저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도,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명성도······ 딸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포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게 부모의 마음이라는 건가?
아직 자식을 낳아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다. 언젠가 나도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으려나?
지난번에는 친구와 함께 독거노인의 삶을 살았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이번 생에는 꼭 결혼해야지.
난 그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병이 나아서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뛰어놀게 될 테니까요.”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말씀만이 아닌데요.”
그는 의문을 나타냈다.
“무슨 뜻입니까?”
다시 말하지만 데이비드 록허트는 21세기 초 가장 유명한 투자자로 이름을 알린다. 때문에 난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어떤 투자를 했는지는 물론이고, 그의 딸이 루나백스에서 나온 신약 덕분에 완치된다는 것까지.
“말 그대로예요. 메기는 치료될 겁니다.”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진심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그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지금 하신 말씀이 거짓이라면 보스를 원망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세요. 메기는 반드시 완치될 테니까요.”
데이비드는 잠시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대체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난 의사가 아닌 그저 투자자에 불과하다.
내가 투자에 뛰어난 실력을 지녔다고 해서 딸의 병세까지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내 말은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공매도 해놓고 가만히 기다린다고 주가가 떨어지지는 않습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직접 부실을 폭로하는 거죠. 우리 역시 그렇게 해서 큰돈을 벌었잖아요.”
“그래서요?
“마찬가지라는 거죠. 가만히 기다린다고 해서 메기의 병이 치료되지는 않겠죠. 가장 확실한 방법은 직접 치료제를 만드는 겁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난 담담하게 말했다.
“유성바이오에서 루나백스가 개발 중인 소아 림프종 치료제에 개발비를 투자할 예정입니다. 세부사항을 조율 중이라고 하니 조만간 발표가 날 거예요.”
이게 바로 GTiger PE와 정산이 끝난 뒤 유재호 회장에게 한 부탁이었다.
돈은 많은 걸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유성바이오가 투자한다면 1회차 때보다 훨씬 빠르게 치료제가 개발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잠시 멍하니 있던 데이비드는 주저앉으며 울음을 터트렸다.
“오! 감사합니다, 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
* * *
데이비드는 메기가 잠들 때까지 옆에서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메기는 금방 낮잠에 빠져들었다.
난 가족끼리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 이만 가볼게요.”
데이비드는 깊숙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짧은 말이었지만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 느껴졌다.
돈 주며 일 시키는 것은 쉬워도 마음까지 얻기는 힘든 법이다. 이걸로 그의 마음을 얻었으으니, 충분히 남는 장사다.
난 손을 내저었다.
“감사 인사는 나중에 듣도록 하죠.”
“한국으로 돌아가시는 겁니까?”
“예. 본사를 잘 부탁드려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우리는 병원에서 이별의 악수를 나눴다.
* * *
돌아가는 비행기는 저녁 9시 출발이다.
그때까지 여유가 있는 관계로 난 뉴욕을 둘러보았다. 관광하러 온 건 아니지만 기왕 온 김에 센트럴파크에 들렀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조깅을 하거나, 대형견 여러 마리를 데리고 산책하고 있었다.
난 공원에 앉아 생각했다.
미국행의 성과는 엄청났다.
데이비드 록허트를 고용했고, 오코너 버거, 프리즈너, 크래프트 밸리의 지분을 손에 넣었다. 그중에서도 무엇보다 큰 성과는 쿨라우드의 인수계약을 했다는 것.
서둘러 미국에 오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돈 벌기는 힘든데, 쓰는 건 순식간이구나.”
필요한 투자를 하고 나니 빈털터리다.
미래를 위한 투자한 건 좋은데, 지갑이 텅텅 빈 것도 모자라 빚더미에 앉았다. 빚은 160억 달러.
“······.”
160억 달러라니!
생각해보면 이거 미친 짓 아닌가?
당장 6개월 안에 80억 원도 아닌, 80억 달러를 모아야 한다.
다행히 금융시장에는 공매도나 선물옵션 같은 훌륭한(?) 상품들이 존재하고, 나는 미래를 알고 있다.
잘만 하면 단기간에 수십 배를 버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문제는 초기 투자금인가?”
투자란 눈밭에서 눈덩이를 굴리는 것과 비슷하다. 눈덩이 크기가 작을 때는 달라붙는 눈도 적지만, 눈덩이가 크면 달라붙는 눈도 많아진다.
초기 투자금이 클수록 더 빠르게 돈을 불릴 수 있다. 1만 달러로 10배 벌어봐야 10만 달러지만, 1억 달러로 10배 벌면 100억 달러다.
그런데 그 종잣돈마저 다 쏟아부었다.
10억 달러만 남겼어도 별걱정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계약금을 내느라 다 써서 남은 돈은 채 1억 달러도 안 된다.
이걸로는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
다행히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유재호 회장한테 빌려야 하나?”
내 덕분에 4억 달러를 넘게 벌었다. 잘 얘기하면 그중 1, 2억 정도는 빌려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지난번에 그랬듯 수익을 나눠야겠지.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어디에 투자할지 보고하고 허락을 맡아야 한다.
“사업은 웬만하면 내 돈으로 하는 게 좋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