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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이게 말이 되나? (1) (88/529)

 89화. 이게 말이 되나? (1)

 프리머스 사태의 주범 박태일은 인천공항에서 출국 직전 붙들린 뒤 줄곧 구속수사를 받았다.

 대중들이 이목이 집중된 사건인 만큼 재판은 이례적으로 빠르게 진행됐다.

 그는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피해복구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어디서 돈이 났는지 검사와 판사 출신으로 구성된 초호화 변호인단을 꾸려 재판에 임했다.

 그리고 드디어 1심 판결이 내려졌다.

 [프리머스 자산운용사 박태일 대표, 징역 10년에 벌금 5억 원, 추징금 651억 원 선고]

 [추징금 회수 가능성 거의 없어]

 [검찰 해외로 빼돌린 자산 추적]

 [검사 측과 변호인 측 모두 항소 의사 밝혀]

 -이야! 1조 원을 해먹어도 고작 10년이구나.

 -그것도 세다고 항소하네.

 -항소하면 5년형 나오겠지. 출소해서 그동안 번 돈으로 행복하게 살면 해피엔딩~

 -하긴 나머지 돈은 이미 다 빼돌렸다며?

 -가족들은 이미 해외로 출국. 달달허다~

 -사기 친 놈은 떵떵거리며 살고, 사기당한 사람은 거지처럼 사는 게 대한민국 국룰.

 -미국은 엔론 사태 주범자나 메이도프나 사실상 종신형 받았는데 한국은 고작 10년이네.

 -이번에 토머스 모터스 CEO도 20년 형 나올 수도 있다고 하던데.

 -이러니 대한민국이 사기공화국 소리를 듣지 ㅎㅎ

 -이 사건 폭로한 사람이 알면 어이없이 하겠네.

 -그러고 보니 신입사원이 폭로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거 폭로하고 바로 회사 그만둔 걸로 알고 있는데.

 -회사 나가면 뭐 먹고 살아?

 -어디 물류센터에서 상하차 알바라도 하고 있는 거 아니야?

 -치킨집 차렸다에 500원 건다.

 -퇴직 후 치킨집은 국룰이지~

 -지금쯤 뭐 하고 살고 있으려나?

 성윤아는 올라오는 댓글들을 보며 생각했다.

 ‘그러게. 그 사람 지금 뭐 하고 있을까?’

 미국 간다고 하더니 그 뒤로 소식이 없다. 돌아오면 연락 줄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다.

 ‘일 있어서 미국 간다고 하더니 아직 안 돌아온 건가? 설마 돌아왔는데 연락을 안 하는 건 아니겠지?’

 어느 쪽인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연락을 해보는 수밖에 없다.

 그녀는 한미루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핸드폰이 꺼져있다. 다음 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혹시 몰라 타톡을 보내봤지만 확인도 하지 않았다.

 ‘아니, 왜 핸드폰이 꺼져있는 거지? 설마 미국에서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어제도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나?’

 괜히 걱정이 되기 시작한 성윤아는 점심시간에 리서치부서를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그녀의 등장에 다들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DA금융그룹 회장의 손녀.

 아니, 이제는 차기 회장의 외동딸이라고 해야 하나?

 지방 지점으로 좌천당한 윤영철 부장을 대신해 새로 부장 자리에 오른 김수원 부장은 당황하며 말했다.

 “여,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 아니, 무슨 일로 왔나?”

 “잠깐 이동호 대리님께 용무가 있어서요.”

 마치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고 있는 타조처럼 잔뜩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이동호는 화들짝 놀랐다.

 “저, 저요?”

 “점심시간인 줄 알았는데, 업무 중이면 나중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 말에 김수원 부장은 재빨리 말했다.

 “아! 어느새 점심시간이군. 자자, 다들 알아서 점심 먹고 오세요.”

 성윤아는 이동호에게 말했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아, 예.”

 밖으로 나온 이동호는 차렷 자세를 한 채 그녀를 마주했다. 가끔 마주쳐서 인사한 적은 있어도 따로 얘기를 나눈 적은 없었다.

 ‘대체 무슨 일로 날 찾아온 거지?’

 혹시 뭐 잘못한 일이 없는지 머릿속으로 열심히 생각하는데, 성윤아가 물었다.

 “혹시 제가 불편하세요?”

 “그럴 리가요. 전 지금 매우 릴렉스합니다.”

 “······.”

 그런데 왜 전혀 릴렉스해보이지 않는 걸까?

 “차렷 자세 안 하고 편하게 있어도 돼요.”

 “알겠습니다.”

 그 말에 이동호는 편하게 자세를 바꾸었다.

 성윤아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열중쉬어 하라는 얘기는 아니었어요.”

 “······네.”

 이동호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요?”

 그는 한미루의 학교 선배이자 직장 선배. 평소에도 친하게 지내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성윤아는 슬쩍 물어보았다.

 “요즘 미루 씨랑 자주 연락하시죠?”

 “예?”

 이동호는 당황했다.

 ‘이거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지?’

 그도 그럴 것이 한미루는 사내 문제를 폭로하고 퇴사했다.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이지만 이를 안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설마 나의 애사심을 테스트하는 질문인가?’

 혹시 다른 오해를 하지 않도록 성윤아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그냥요. 얼마 전 미국 갔는데 지금쯤이면 돌아왔나 해서요.”

 이동호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걔 미국 갔어요? 아니, 거기는 무슨 일로 갔대요?”

 ‘뭐야? 미국 갔는지도 모르고 있었어?’

 물어보러 왔다가 가르쳐주게 생겼다.

 “그, 글쎄요. 일 때문이라고 하던데······.”

 “아니, 걔가 미국에서 무슨 일을 한다고? 김밥집이라도 차린대요?”

 “······.”

 안 그래도 그게 궁금해서 물어보려던 거였다. 대체 거기서 무슨 일을 하려는 걸까?

 “그런데 그냥 연락해보면 되지 않아요? 번호 몰라요?”

 “아니요. 계속 해봤는데 핸드폰이 꺼져 있어서요. 혹시 무슨 일 있나 걱정되네요.”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던 이동호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미루를 걱정할 이유가 있나요?”

 “그, 그건······.”

 ‘이거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 거지?’

 성윤아는 변명하듯 말했다.

 “입사 동기잖아요.”

 “걔 퇴사했잖아요. 회사 나가면 남인데.”

 “그, 그래도 한번 입사 동기는 영원한 입사 동기죠. 안 그래요?”

 “······.”

 그런 것치고는 정작 회사에 남아있는 입사 동기들은 별로 안 챙기는 것 같은데.

 왠지 입맛이 없어서 점심은 거르고 커피만 마시기로 했다.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단 게 땡기네.’

 성윤아는 평소라면 마시지 않았을 초코칩 프라푸치노를 마시며 생각했다.

 ‘아니, 왜 핸드폰이 꺼져있는 거야? 사람 걱정되게.’

 괜스레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데 갑자기 진동이 울렸다. 혹시 한미루인가 싶어 재빨리 핸드폰을 봤지만, 그녀의 표정은 이내 실망으로 물들었다.

 “여보세요.”

 [어, 윤아야. 요즘 어떻게 지내?]

 그의 이름은 주현진.

 한정그룹 사람으로 어머니 때문에 어린 시절 알게 되었다. 어쩌다 가끔 연락 정도나 하는 사이였는데 최근 부쩍 연락이 늘었다.

 “무슨 일이에요?”

 [주말에는 뭐해? 재윤이 알지? SL그룹 이재윤. 걔가 이번에 파티한다는데 같이 가는 게 어때?]

 “전 일이 있으니 혼자 다녀오세요.”

 [에이, 그러지 말고. 가끔 바람도 좀 쐬고 그래야 일도 더 잘되는 거 아니겠어? 재계 사람들 많이 온다고 하니까 오빠가 한 명씩 소개시켜줄게. 알아두면 나중에 다 도움이 될 거야.]

 “괜찮아요.”

 몇 차례나 제안을 거절했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계속해서 권했다.

 ‘이쯤 되면 좀 알아들어야 할 거 아니야? 눈치가 없나?’

 “저 지금 일하는 중이니 나중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그래? 그럼 이따 일 끝나고······.]

 그녀는 상대가 뭐라고 하기 전에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바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성윤아는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 지금 일하는 중이라니까요.”

 [그렇군요. 점심시간인 줄 알았는데 이거 실례했네요.]

 방금 전과는 목소리가 좀 다르다.

 놀란 그녀는 핸드폰에 뜬 이름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앗! 안녕하세요, 회장님.”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언제 통화 괜찮으신가요?]

 “아, 아니에요. 지금도 얼마든지 괜찮습니다.”

 [일하는 중이라고 말하지 않았나요?]

 “그게······ 아! 방금 대출상담 전화 같은 게 와서 그렇게 말한 거예요.”

 그는 웃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군요. 저한테도 가끔 옵니다. 담보도 없이 5천만 원까지 대출해준다고 하던데.]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유재호 회장.

 하마터면 유성그룹 회장의 전화를 그냥 끊을 뻔했다. 다행히 기분 나빠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성윤아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잘 지내고 있죠?]

 “예. 회장님도 잘 지내시죠?”

 [저야 항상 똑같습니다. 갑자기 연락드린 이유는 괜찮은 제안이 하나 있어서요.]

 “어떤 건가요?”

 [이번에 유성증권이 스위스 쪽 금융회사와 손잡고 독일 LNG 인프라 사업 인수를 추진 중입니다. 현재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돼 협상을 진행 중인데, 알고 있나요?]

 “예. 알고 있습니다.”

 모를 리가 있나?

 원래 현지 회사가 가지고 있던 지분 72퍼센트를 한국과 스위스가 각각 39퍼센트, 33퍼센트씩 나눠서 인수하는 일이다.

 유성증권이 주축이 된 컨소시엄이 총 투자하는 금액은 약 5억 1천 유로. 한화로는 대략 7천억 원이다.

 예상 수익률은 연 8퍼센트.

 안정성이 뛰어난 데다가 수익성도 좋은 사업인 만큼 다들 군침을 흘렸다.

 BK증권이나 미래투자증권 같은 대형 증권사들도 컨소시엄에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기에 DA증권도 참여하는 게 어떤가 해서요.]

 그 말에 저절로 눈이 크게 떠졌다.

 “정말인가요?”

 해외 인프라 사업을 놓고 벌이는 대형 M&A의 경우, 경험이 없는 중소 증권사가 뛰어들기는 쉽지 않다.

 각종 실사부터 협상, 해당 국가의 승인과 법률 문제 등등.

 하지만 이 경우는 유성증권이 전면에 나서는 것인 만큼 그냥 묻어가면 된다. 또한 실무자들이 이번 일을 통해 경험을 쌓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끝까지 떠먹여주는 셈이다.

 [금액은 DA증권이 원하는 만큼 참여하면 됩니다. 홍보 효과가 꽤 클 겁니다. 기사도 많이 나갈 테구요.]

 수익도 수익이지만 이런 초대형 M&A 컨소시엄에 이름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홍보 효과가 있다.

 이 기회에 프리머스 사태로 인한 안 좋은 이미지를 전환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며칠 안에 DA증권으로 제안서가 갈 겁니다. 어차피 경영진이 검토한 뒤 결정할 일이지만 그전에 미리 알려드리는 겁니다.]

 아무리 회장 손녀라고 해도 지금은 일개 직장인. 그녀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럼에도 먼저 이 얘기를 해준다는 것은 사실상 그녀를 봐서 제안을 준다는 뜻이었다.

 유재호 회장은 농담처럼 말했다.

 [거절당해도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않겠습니다.]

 “아, 아닙니다, 회장님. 거절이라니요.”

 중소 증권사로서는 쉽게 잡을 수 없는 기회다. 이걸 거절하는 것은 바보짓이겠지.

 “좋은 기회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 사양하겠습니다. 지난번 신세 진 걸 갚는다고 생각해주세요.]

 “예? 신세요?”

 [미루 씨를 소개시켜주지 않았습니까? 정말 큰 신세를 졌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내저었다.

 “시, 신세라니. 당치도 않아요. 전 그냥 소개만 시켜드린 건데요.”

 [동우정밀뿐 아니라 다른 것들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

 ‘동우정밀 말고 다른 게 또 있다고?’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뭔가 떠올랐다.

 “설마 유성전자가 최근 인수하는 기업들이······?”

 [맞습니다. 미루 씨가 추천해준 기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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