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게임 이론 (4)
난 잠시 생각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어차피 인수하는 입장에서 굳이 그런 사실을 알려서 회사의 가치를 낮출 이유는 없으니까요. 무명의 개발자가 개발한 프로그램이라는 것보다 실리콘밸리의 천재 롤프 부치가 개발한 프로그램으로 남겨두는 게 더 보기가 좋을 테고.”
“제이슨 킴의 아내가 문제를 제기하면?”
“걱정할 것 없어요.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없으니까요. 충분한 돈만 쥐어주면 그쪽도 만족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난 불안해하는 그를 안심시켜주었다.
“그의 아내는 클라우드가 뭔지도 모릅니다. 설사 의혹은 제기할 수 있어도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죠. 모든 증거는 이미 제 손에 있으니까요. 그리고 줄리아 킴에게는 이렇게 말할 겁니다. 미네르바는 미미르에게서 아이디어만 얻었을 뿐 전혀 다른 프로그램이라고. 그러면 의혹조차 제기하지 못하겠죠. 다시 말해 저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내 말에 데이비드는 잠깐 흠칫했지만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롤프 씨가 지분을 매각할 경우입니다. 계약서는 준비됐죠?”
데이비드는 말없이 이미 작성해 놓은 계약서를 꺼내 롤프의 앞에 내밀었다.
그는 한참 동안 계약서를 들여다보았다.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떠오르는 듯한 표정이다.
이제 여기에 사인만 하면 끝이다.
그런데 막상 계약서를 보니 다른 생각이 드는지 그는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이, 일단 돌아가서 변호사와 상의해보고 결정할게.”
무려 10억 달러라는 거액이 오가는 계약이다. 변호사의 검토를 맡는 것은 상식적이고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면 알렉스가 알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매각을 못 하게 막을 테고 상황이 꼬여버린다.
“쿨라우드의 자문을 맡고 있는 로펌은 프레스턴그룹과 거래하는 곳이죠? 상의하는 과정에서 알렉스 프레스턴 씨에게 알려질 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게 어때서?”
변호사에게는 의뢰인의 비밀을 보호할 의무가 있지만, 그렇다고 얘기가 새나가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지는 않다.
그러니 무조건 이 자리에서 결정을 내리게 만들어야 한다.
“재밌는 사실 하나 얘기해줄까요?”
“무슨 얘기?”
“지금쯤이면 프레스턴 씨는 당신을 회사에서 쫓아낼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내 말에 그는 당황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어차피 모든 잘못은 당신이 했잖아요. 냉정하게 따져보면 이건 쿨라우드의 문제가 아니라 당신의 문제입니다. 알렉스 프레스턴 역시 당신에게 속은 피해자일 뿐이죠. 회사가 잘못되는 걸 막기 위해서는 당신을 쫓아내는 게 최선 아니겠어요?”
“그, 그럴 리가.”
“한번 잘 생각해봐요. 혹시 뭐 비슷한 얘기 들은 거 없어요?”
“설마······.”
표정을 보니 비슷한 뉘앙스의 말을 들은 모양이다.
사실 알렉스가 정확히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에게 어떤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궁지에 몰려있는 사람이 의심을 가지고 보면 다 그렇게 보이기 마련이지.
“당신이 지분을 매각하려는 사실을 알게 되면 프레스턴 씨가 과연 가만히 있을까요?그보다 앞서서 자신의 지분을 먼저 팔려고 할 겁니다. 그때가 되면 롤프 씨의 지분 가치는 더 내려갈 텐데요.”
당연히 헐값에 팔진 않을 테고, 우리는 살 만한 돈이 없긴 하지만······ 굳이 그 얘기는 하지 않았다.
롤프는 계속해서 갈등하는 표정이었다.
“정말로 비밀을 지켜줄 수 있어?”
“그럼요. 계약서에도 적었잖아요.”
“고소와 소송을 안 한다고만 적혀 있잖아.”
“설마 제 말을 못 믿어요?”
“그래도 계약서에······.”
난 테이블 아래로 슬쩍 데이비드의 발을 쳤다. 그러자 그는 호통을 치듯 말했다.
“어리광 좀 작작 부려!”
“뭐, 뭐라고?”
갑작스러운 호통에 나는 물론이고 롤프도 크게 당황한 기색이었다.
데이비드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같은 놈과 말 섞을 시간에 알렉스 프레스턴과 협상을 하는 게 낫겠군.”
롤프는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뭐? 너 말 다했어? 이딴 식으로 하면 내가 계약을 할 것 같아?”
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목소리가 심하게 떨렸다. 상대의 위세에 짓눌리지 않기 위한 발악과도 같은 외침이었다.
데이비드는 인간미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자신의 위치를 잘 모르는 모양인데, 어차피 알렉스 프레스턴의 지분만 인수하면 과반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어. 그렇게 되면 우리는 네놈을 바로 회사에서 내쫓은 다음 고소와 소송을 진행할 거다. 그 과정에서 네가 어떤 쓰레기 같은 짓을 했는지 전 세계가 알게 될 테고, 실리콘밸리 천재의 명성은 바닥까지 추락하겠지. 언론이고 대중이고 모두가 너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욕하고 침을 뱉을 거다. 그때가 되면 네놈의 지분 따위는 소송을 통해 배상금과 합의금으로 뜯어내면 그만이야. 돈 한 푼 던져줄 필요도 없이 말이야.”
“마, 말도 안 돼.”
실제로 말도 안 된다.
그 정도로 배상금이 나올 리가 있나?
그러나 롤프의 표정은 공포로 질렸다. 하기야 실리콘밸리의 천재라는 그가 언제 이런 경우를 당해봤겠는가? 그래서인지 제대로 된 판단을 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데이비드는 계속해서 롤프를 몰아붙였다.
“계약하기 싫으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썩 꺼져!”
“······.”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닌데도 괜히 오금이 저린다. 그러니 듣는 당사자는 오죽하겠는가?
제대로 통했는지 롤프는 울먹거렸다.
“나, 나는······.”
천재라는 화려한 가면이 벗겨지니 남은 건 꼴사나운 사기꾼인가? 어째서 시드가 그를 얼간이 취급했는지 알 것 같다.
난 데이비드를 말리는 척했다.
“자자, 너무 그러지 말아요. 롤프 씨도 나쁜 의도는 없었을 거예요. 그렇죠?”
내 말에 롤프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난 다정하게 그의 손에 펜을 쥐어주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어서 사인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협상을 포기하고 WST에 리포트를 공개한 후 고소장을 제출하는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 상황이 생기는 건 롤프 씨도 원하지 않잖아요.”
협상은 아쉬운 놈이 지기 마련.
자기 발로 나를 찾아온 시점에서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롤프는 떨리는 손으로 지분을 매각하는 서류에 사인했다. 사인을 끝마친 그는 모든 기운을 소진했는지 탈진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난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이걸로 쿨라우드 지분 31.16퍼센트를 손에 넣었다.
일단 절반은 해결한 셈인가?
* * *
난 근처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시드를 만났다.
시드는 먼저 와서 햄버거를 먹고 있었다. 난 맞은편에 앉았다.
“햄버거 좋아해?”
그는 햄버거를 입에 문 채 말했다.
“싫어하는 사람도 있어요?”
“내가 진짜 맛있는 곳을 아는데.”
“햄버거가 다 거기서 거기 아니에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 햄버거를 먹어보고 생각이 바뀌었어. 장담컨대 뉴욕 최고의 햄버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 정도예요?”
“어쩌면 미국 최고일 수도 있어.”
시드는 먹다 말고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맛인지 상상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 말 들으니 지금 당장 뉴욕에 가보고 싶어지는데요.”
“걱정할 것 없어. 조만간 실리콘밸리에도 생길 테니까.”
“어떻게 알아요?”
“내가 그 햄버거 가게에 투자를 좀 했거든.”
“정말요?”
“응.”
정확히는 다른 이유로 투자한 거지만.
내 말에 시드는 어린애처럼 웃었다.
“얼른 생겼으면 좋겠네요.”
“얼마 안 걸릴 거야.”
“그나저나 어떻게 됐어요?”
“롤프의 지분을 인수하는데 성공했어.”
내 말에 시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한 거예요?”
“적당히 어르고 달랬지.”
어차피 금액의 문제였을 뿐이다.
약점을 틀어쥐고 있는 한 그는 자신의 지분을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난 계약 당시의 상황과 협상 내용을 말해주었다.
시드는 놀란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미미르에 대해 밝히지 말아 달라고 했다구요? 정말로 그렇게 할 생각이에요?”
난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그의 말에 따르면, 말로 한 약속이면 안 지켜도 되는 거라는데.”
내 말에 시드는 웃음을 터트렸다.
“프흡, 하긴 그러네요. 진실은 알려야죠.”
무사히 회사를 인수한다 치면 괜한 논란을 만들어서 좋을 건 없다. 그러면 기업 가치만 떨어지게 되니까.
하지만 난 반드시 이를 알릴 생각이다.
첫째는 줄리아 킴과 약속을 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시드가 그렇게 하는 걸 원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시드는 누구보다 앞서서 롤프 부치의 흔적 지우기에 나섰다.
“CEO가 되면 뭘 할지 생각은 해봤어?”
“일단 필요 없는 사람은 자르고, 필요한 사람은 데려와야죠.”
“자를 사람은 누구야?”
“정리해 왔어요.”
그는 소스가 묻은 손가락을 바지에 대충 닦은 다음 주머니에서 메모장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글씨가 엉망이긴 해도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다.
쿨라우드의 직원은 CEO 둘을 제외하면 총 93명. 이중 개발팀에 있는 이들은 52명. 그중 시드가 뽑은 사람은 겨우 네 명이었다.
“몇 명 안 되네.”
“실력 없는 인간들이 버티고 있을 만큼 쿨라우드가 만만치는 않으니까요. 그리고 롤프가 직원 하나는 제대로 뽑았어요.”
롤프는 타인의 능력을 알아보는 데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다.
그러니 경력도 없고 나이도 어린 시드를 직원으로 뽑고, 제이슨 킴이 만든 프로그램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봤겠지.
그냥 사업가로만 남았다면 승승장구했을 텐데, 그놈의 천재라는 명성이 대체 뭔지.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돈이 많이 필요해요.”
인수는 어디까지나 시작에 불과하다.
엄청난 기업 가치와는 별개로 쿨라우드는 현재 적자기업이다. 적자 폭이 줄고 있다지만 현재도 분기별 2억 달러 가량의 적자가 발생한다.
사내유보금이라고 해봐야 고작 5억 7천만 달러. 간신히 3분기 동안 버틸 수준이다.
게다가 부채는 무려 160억 달러. 이는 그동안의 적자를 투자가 아닌 대출로 메웠기 때문이다.
다행히 수익모델은 이미 안착되었고, 적자는 어디까지나 계속해서 신규투자를 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다.
허리띠를 졸라매면 적자폭을 줄일 수 있겠지만, 그러면 반대로 성장은 늦어질 수밖에 없다.
“걱정할 것 없어. 필요한 만큼 내가 벌어올게.”
시드는 머리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형이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부담 가질 거 전혀 없어.”
어차피 다 내 사리사욕을 위해서니까.
상장이나 투자를 받을 생각이 없는 만큼, 앞으로 들어갈 투자금은 내가 다 벌어 와야 한다.
일단 인수부터 끝내고 나서 그다음 일은 천천히 생각해봐야겠지.
햄버거를 다 먹은 시드는 소스가 묻은 손을 대충 닦았다.
“롤프야 얼간이지만 알렉스는 만만치 않을 거예요.”
“그렇겠지.”
롤프와는 다르게 개인적인 약점도 없을 테고.
하지만······.
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래도 지금쯤이면 지분을 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