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지혜의 합당한 대가 (1)
토머스 모터스 사태는 스타트업계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그동안 스타트업들은 너도나도 미래가치를 내세우며 투자금을 끌어들였다. 이렇다 보니 시장에는 부실기업들이 넘쳐났다.
그런데 이번에 제대로 터진 것이다.
투자사들은 계획했던 투자를 중단하고, 그동안 투자했던 회사들이 멀쩡한지 점검에 들어갔다.
수익은 내지 못하며 투자금만으로 연명하던 회사들은 투자가 끊기자 줄줄이 무너졌다.
스타트업계는 올 것이 왔다는 반응이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옥석 가리기가 시작될 것이다.
롤프가 말했다.
“설마 우리 회사 가치까지 떨어지는 건 아니지?”
“오히려 반대일걸.”
쿨라우드는 토머스 모터스와는 경우가 전혀 다르다.
별다른 수익 모델이 없이 기대감만으로 주가가 오른 토머스 모터스와는 달리, 쿨라우드는 실제로 엄청난 수익을 내고 있으니까.
시장의 유동성이 갑자기 어딘가로 사라지지는 않는다.
옥석 가리기가 끝나고 나면 옥으로 평가받는 기업들의 가치는 더 크게 오르게 될 것이다.
투자 유치와 상장 시기를 저울질 중이었던 만큼 알렉스는 시장 동향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번 사태에 더욱 흥미가 생기는 이유는, 터트린 사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그사이 이런 일을 벌였을 줄이야.”
“이놈들 돈 좀 벌었겠네.”
알렉스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번 투자로 과연 어느 정도 수익을 냈을까?’
알려진 바에 따르면 풋옵션을 매수하고 CFD 거래를 통해 열 배의 레버리지를 일으켰다고 한다.
이는 주가 폭락을 확신하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나오지 않는군.”
“이게 대단하다고? 그냥 부실을 알아내서 폭로만 하면 되는 거잖아.”
알렉스는 피식 웃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이게 정말로 쉬운 일이라면 시장에는 공매도로 돈을 번 투자자가 넘쳐나야 한다. 그런데 주식을 사서 돈 번 사람은 많아도 팔아서 돈 번 사람은 별로 없다.
“콜럼버스의 달걀과도 같은 거지.”
뭐든 결과만 놓고 보면 쉬워 보인다. 해보라고 하면 못할 뿐이지.
설명을 들은 롤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이번에 너희 형도 손실 봤다며?”
“맞아.”
샤크 매니지먼트가 이번 사태로 입은 손실액은 현재를 기준으로 약 13억 달러.
엄청난 액수지만 전체 운용자산 규모에서 보면 극히 일부의 손실일 뿐이다. 하지만 마이클 프레스턴이 운용한 펀드 중 마이너스가 난 것은 이번이 최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손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고 손실을 뒤집어썼다.
얼마나 충격적인지 LP들이 다른 수소차 회사에 투자하려는 것마저 중단을 요구했을 정도다.
모르긴 몰라도 마이클 프레스턴은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입었을 것이다.
롤프는 웃으며 물었다.
“너한테는 잘된 거 아니야?”
“그렇긴 하지.”
그는 금융재벌로 유명한 프레스턴가의 3남.
가문 내의 모두가 경쟁자나 다름없다. 그중 마이클 프레스턴은 가장 앞서 나가고 있었다. 따라서 형이 실패할수록 그가 가문을 물려받을 확률은 높아질 것이다.
“니 말대로 데이비드 록허트가 대단하긴 하네. 처음 얘기 듣고 퇴물인 줄 알았는데 말이야.”
모두가 데이비드 록허트에 대해 떠들어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알렉스는 자꾸만 그와 같이 있던 한국인이 마음에 걸렸다.
‘한미루라고 했지?’
롤프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 새끼들 때문에 시드에게 지분 15퍼센트 내준 거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나네. 괜히 말 잘 듣는 애한테 헛바람 불어넣는 바람에 대체 얼마를 날린 거야?”
그들은 바로 쿨라우드의 핵심 인물이 시드 루카스라는 것을 알아챘다. 그리고 토머스 모터스의 부실을 눈치챘다.
빠른 시간 안에 상대의 약점을 파악한 다음,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찌른다. 헤지펀드들이 즐겨 쓰는 방식이다.
어느 기업이든 아킬레스건이 존재한다. 하지만 외부인이 그걸 파악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한 번이야 그렇다 쳐도 두 번이면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실력이 된다는 거겠지.
‘그런데 그게 과연 둘 중 누구의 실력일까?’
알렉스는 일전에 회사를 찾아왔던 두 사람을 떠올렸다. 그들은 쿨라우드 인수를 제안했다. 거절당하자 시드 루카스를 빼가려다가 실패했다.
그런데 뜬금없이 토머스 모터스 사태에 주연으로 등장해 월스트리트를 뒤흔들어 놓았다.
그들이 이번 일로 얻은 것은 돈뿐만이 아니다.
바로 명성이다. 그도 그럴 것이 리포트 하나로 시장의 주목을 받는 기업의 주가를 90퍼센트 폭락시켰고, 다른 투자자들이 전부 틀렸다는 것을 입증해냈다.
금융계에서 명성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앞으로 데이비드 록허트가 어떤 리포트를 쓰는지, 어디에 투자하는지 모두가 주목하게 될 것이다.
그 순간, 알렉스는 뭔가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그의 표정을 본 롤프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래?”
잠시 후, 알렉스가 입을 열었다.
“정말로 시드를 빼가려는 게 목적이었을까?”
“그게 무슨 말이야?”
알렉스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듯 말했다.
“그들은 시드가 쿨라우드의 핵심 인재라는 것을 알았어. 그래서 회사를 차려주겠다는 제안까지 하며 빼가려 했던 거고.”
“그런데 실패했잖아.”
두 사람은 온갖 조항으로 시드를 쿨라우드에 묶어놓았다. 이제 와서 빼내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컨티뉴 캐피탈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치밀한 놈들이 실패했다고?’
혹시 다른 목적이 있었던 건 아닐까?
롤프가 말했다.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어? 어차피 그놈들 다시는 볼 일 없을 거 아니야?”
잠시 생각하던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불길한 기분을 애써 떨쳐내려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롤프가 말했다.
“갑자기? 누군데?”
[컨티뉴 캐피탈에서 왔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 * *
시드에게 알렉스와 롤프가 회사에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우리는 쿨라우드로 출발했다.
난 로비에서 직원에게 말했다.
“알렉스 프레스턴과 롤프 부치 씨를 만나러 왔습니다.”
“약속하셨습니까?”
“아니요. 약속은 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얘기가 있어서 그러니 말씀 좀 전해주시겠어요?”
우리는 잠시 앉아서 기다렸다.
데이비드가 물었다.
“안 만나겠다고 하면 어쩔 겁니까?”
“그럼 온 김에 시드라도 만나고 가죠.”
그러면 시드를 못 만나게 하기 위해서라도 만나겠다고 하지 않을까?
굳이 그럴 필요 없이 우리는 안으로 안내되었다. 이전에 만났던 회의실과는 다르게 직원들과는 완전히 분리된 층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쿨라우드의 공동창업자 알렉스와 롤프가 들어왔다.
난 그들에게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받아준 알렉스와는 다르게 롤프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스는 데이비드에게 말했다.
“토머스 모터스 투자로 큰 성공을 거뒀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데이비드는 웃음을 지었다.
“소문이 벌써 거기까지 났습니까?”
“월스트리트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몸은 실리콘밸리에 있어도 자신은 월스트리트 사람이라는 건가?
한때 잘나가던 사모펀드를 파산시킨 실패자로 낙인찍혔던 데이비드 록허트는 단 한 번의 투자로 평판을 역전시켰다. 이런 걸 보면 역시 인생은 한 방이란 말이지.
롤프는 이죽거리듯 말했다.
“이야! 돈 좀 벌었겠는데.”
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뭐, 적당히 벌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무슨 일로 왔는데? 설마 또 우리 직원 몰래 빼가려고?”
시드 일로 어지간히 화가 난 모양이다.
“그럴 리가요. 그리고 몰래 빼가려 한 적 없습니다. 떳떳하고 정당하게 스카우트하려고 한 거죠.”
롤프는 손가락으로 총 모양을 만들어 나에게 겨눴다.
“웃기고 있네. 경고하는데, 한 번만 더 시드에게 찝쩍거리면 그땐 가만히 안 둬.”
“가만히 안 두면 총이라도 쏘나요?”
“못할 것도 없지.”
난 피식 웃었다.
“총 맞기 싫어서라도 찝쩍거리지 말아야겠네요.”
이미 내 사람이 됐는데 찝쩍거리고 말고 할 게 뭐가 있겠는가?
알렉스는 슬쩍 롤프를 말리며 물었다.
“오늘은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그냥 드릴 말씀이 좀 있어서요.”
“뭔데?”
“쿨라우드를 인수하고 싶습니다.”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번 투자로 얼마를 벌었는지 모르겠지만, 쿨라우드를 인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텐데요.”
롤프는 빈정거리듯 말했다.
“한 2000억 달러 정도 현금으로 가져오면 생각 정도는 해볼 수 있겠네.”
두 사람 다 회사를 팔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는 듯했다. 그렇다면 그런 마음이 들게 해주는 수밖에.
“시장에서는 쿨라우드의 기업가치를 700억 달러 정도로 평가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 말에 롤프는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누가 그래?”
알렉스가 말했다.
“그건 예전의 일이죠. 얼마 전 새로운 투자 제안을 받았습니다. 15퍼센트를 150억에 사고 싶다는 제안이었죠.”
이 제안대로라면 쿨라우드 기업가치는 1000억 달러까지 올라간다.
“그리고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분 매각이라면 모를까 회사를 팔 생각은 없습니다.”
둘 다 황금알을 넣는 거위의 배를 가를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실제로 상장 이후에도 그들은 각각 20퍼센트 대 지분율을 유지했다. 제이슨 킴 사건이 터진 이후 경영에서 물러나며 반강제적으로 지분율을 15퍼센트까지 낮췄지만 여전히 주요주주였다.
덕분에 둘 다 세계 5위 부자 안에 나란히 이름을 올릴 수 있었고.
롤프가 말했다.
“그런데 대체 얼마에 사겠다는 건데? 팔 생각은 없지만 들어나 보자.”
데이비드가 말했다.
“700억이든 1000억이든 그건 어디까지나 시장이 평가하는 가격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 가격에는 거품이 껴있습니다. 쿨라우드의 실제 가치는 그보다 훨씬 낮게 책정돼야 합니다.”
알렉스는 데이비드를 보며 물었다.
“이유가 뭡니까?”
데이비드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쿨라우드의 사업 모델이 지속 가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든 외부적 요인에 의해 사업이 중단될 위험이 있습니다.”
알렉스는 인상을 찌푸렸고 롤프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난 롤프를 보며 물었다.
“혹시 생각나는 거 없어요?”
“뭔 헛소리야? 쿨라우드가 토머스 모터스처럼 사기 친 거라도 있을 것 같아?”
“······.”
정말이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는 듯한 태도다. 상상을 초월하는 그의 뻔뻔함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때의 일을 전부 잊었나? 아니면 절대 걸릴 리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자신 있으면 어디 토머스 모터스한테 그랬던 것처럼 쿨라우드에 대한 리포트도 써보지 그래?”
난 그를 보며 물었다.
“어! 정말 그래도 되나요?”
롤프는 대놓고 비웃음을 지었다.
“하하! 쓰고 싶으면 써봐.”
“그 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물론이지. 어디 한번 마음껏 써봐. 무슨 내용인지 구경이나 하게.”
“제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하시나 봐요?”
“해볼 수 있으면 해보라니까. 소송당할 각오는 하고.”
난 웃고 있는 그에게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이걸 보고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하네요.”
“이게 뭔데?”
“보면 알 겁니다.”
롤프는 봉투 안의 서류를 꺼내들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