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위기는 기회다 (3)
이는 수소에너지 사업을 매각하지 않고 허민웅에게 맡기겠다는 선언이었다. 허민홍은 뭐라 말을 하려다가 아버지의 표정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회장이 심사숙고 끝에 결정을 내리자 더 이상의 반론은 나오지 않았다.
허성훈 회장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허민웅 팀장은 이따 회장실로 오도록.”
“알겠습니다.”
임원들도 각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본 허민홍은 착잡한 심정이었다.
처음 브레드 버튼 CEO를 만나 파트너십을 맺고 수소인프라 사업을 추진한 건 허민홍이다.
잘되면 자신의 공으로 치켜세우고 잘못되면 동생 탓을 할 생각이었다.
이제 잘못됐으니 동생 탓을 해야 하는데······.
동생은 사전에 인지하고 위험을 피한 반면 그는 못 피했다. 결국 책임을 그가 떠안은 꼴이 됐다.
직전까지만 해도 화안그룹의 후계자 구도는 비교적 명확한 편이었다.
장남인 허민홍이 그룹을 물려받는다. 그리고 허민웅은 적당히 자신의 몫을 챙겨서 그룹에서 떨어져나간다.
설마 동생이 형을 제치고 그룹을 물려받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이번 일로 허민웅은 자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임원들은 이제부터 두 사람을 저울 위에 올려놓고 어느 쪽에 서는 게 유리할지 끝없이 비교할 것이다.
모두가 나가고 나자 넓은 회의장에는 형제 둘만 남았다.
허민홍은 동생을 쳐다보며 말했다.
“데이비드 록허트를 직접 만난 모양이군.”
그는 공개된 리포트를 보고 의심을 가졌다고 말했지만, 정말로 그것만으로 눈치챘을 리는 없다.
이렇게 빠른 판단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사전에 누군가를 만나 다른 정보를 전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전에 컨티뉴 캐피탈과 손을 잡은 게 분명해.’
동생 성격상 웬만한 상대와는 말을 섞지 않았을 것이다. 때문에 허민홍은 데이비드 록허트와 직접 만났을 거라 생각했다.
허민웅은 피식 웃었다.
컨티뉴 캐피탈의 핵심은 데이비드 록허트가 아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인물이 뒤에 존재했다.
‘하지만 이걸 말해줄 필요는 없겠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형 마음대로 생각해.”
* * *
일이 끝난 만큼 직원 세 사람은 먼저 뉴욕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난 모리스 피어슨에게 말했다.
“맨해튼에 적당한 사무실 하나 구하고 세팅해 놓으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에드워드 밴슨을 따로 불렀다.
“이번에 정말 고생했어요.”
“아닙니다. 저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그가 단상으로 뛰어들어 보닛을 강제로 뜯어 들어 올리는 장면은 전 세계에 뉴스로 나갔다.
그 장면은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서 유명해졌고, 그는 ‘보닛맨’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지금도 검색만 하면 영상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주위 사람들 반응은 어때요?”
에드워드는 민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다들 재밌어합니다. 집에서는 제가 또 사고 친 줄 알고 연락 오긴 했습니다만.”
토머스 모터스에서는 이에 대해 업무방해로 고소하겠다 어쩐다 난리를 쳤지만 비웃음만 살 뿐이었다.
정작 본인들이 고소당하게 생긴 판에 누구를 고소한단 말인가?
“그런데 보닛을 힘으로 뜯어내는 게 가능하네요. 전 승용차 보닛 들어올리는 것도 힘들던데.”
“요령만 알면 어렵진 않습니다. 물론 힘은 필요하지만요.”
난 그의 팔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팔뚝이 내 허벅지만 하다.
“그 요령은 어디서 알려주나요?”
그는 씨익 웃었다.
“사실은 행사장 가기 전에 폐차장에서 연습을 좀 했습니다. 트럭 대여섯 대를 뜯어보니 대충 어떻게 하는지 알 것 같더군요.”
“하하하!”
난 그의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영상으로 보기에는 그냥 힘으로 쉽게 뜯어낸 줄 알았는데 미리 연습까지 했다니. 역시나 철두철미하다.
규모가 큰 사모펀드의 경우 팀 단위로 일을 한다.
만약 내가 고용하지 않았다면 데이비드 록허트는 샤크 매니지먼트에서 자신의 팀을 꾸려 딜소싱부터 엑시트까지 처리했을 것이다.
그 팀에서 에드워드 밴슨은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가 힘만 잘 쓰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누구보다 똑똑하고 계획적인 사람으로, 데이비드 록허트의 오른팔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재무회계 쪽에 능력이 뛰어나 팀의 재무관리를 맡았고, 투자 대상 기업의 자금 흐름과 회계 부정을 정확하게 밝혀내기로 유명했다.
아마 큰 기업의 CFO를 해도 잘했을 것이다.
데이비드 록허트를 얻었더니 이런 인재가 따라 들어온 셈이다.
“뉴욕으로 가기 전에 미시건에 잠깐 들르세요.”
“왜 그러십니까?”
“거기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어요.”
“무슨 일입니까?”
내 설명을 들은 그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난 이유를 말해주었다.
“특정 기업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산업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죠. 오히려 이럴 때가 좋은 기업을 싸게 살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니겠어요?”
내 말에 에드워드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왜 그래요?”
“좀 놀랐습니다. 남들이 투자를 철회할 때 오히려 투자를 하겠다니. 말로는 쉬워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안 될 겁니다.”
다 미래를 알고 있는 덕분이지.
“부탁해도 되겠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 * *
톰슨 데일리.
그는 한 글로벌 자동차회사의 수소차 개발 연구원으로 일했다. 연구 초기만 하더라도 전기차와 수소차가 경쟁을 하는 분위기였으나, 어느 순간 전기차가 대세로 굳어졌다.
수소차와 전기차 모두 전기로 모터를 움직인다는 작동 원리는 같다. 하지만 전기차는 배터리만 넣으면 되는 반면, 수소차는 연료전지스택과 고압수소탱크를 넣어야 한다.
더 많은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물론, 비용도 더 비싸고,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
때문에 승용차 분야에서는 확실히 전기차가 유리했다.
수소차 개발 부서는 해체되었고 톰슨은 전기차 개발 부서로 자리를 옮겼다.
내연기관차의 경우 부품 수가 많고 높은 기술력이 필요하다. 때문에 과거에는 대규모 투자와 고용이 가능한 대기업만이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전기차는 다르다.
내연기관차가 기계라면 전기차는 전자기기에 가깝다. 부품 수가 내연기관차에 비해 10분의 1도 안 되는 데다가, 배터리와 모터 등의 부품들을 표준화하기도 쉽다.
진입장벽이 낮다 보니 전기차 스타트업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심지어는 3D프린터를 활용해 전기차를 만드는 회사도 있었다.
‘전기차 스타트업은 넘쳐나는 반면, 수소차 스타트업은 거의 없잖아.’
그 이유는 당연히 전기차가 승기를 잡았기 때문. 그러나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몇 가지 있었다.
전기차는 내연기관차보다 부품 수가 적고 가장 무거운 부품인 엔진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전기차는 내연기관차보다 가벼울까?
그렇지 않다.
정확히는 반대다. 차체 크기가 동일하다고 하면 보통 전기차가 내연기관차에 비해 15퍼센트 가량 더 무겁다.
그 이유는 바로 배터리의 무게 때문.
사실 배터리는 에너지 저장 밀도가 별로 높지 않다. 게다가 저장된 에너지를 다 쓴다고 해도 무게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전기차는 주행거리를 늘리려면 배터리를 더 넣어야 하잖아. 그러면 가격과 무게가 올라가고 적재량은 줄어들지. 여기에 충전시간도 길어지고.’
반면 수소차는 수소탱크를 크게 만들기만 하면 된다.
다시 말해 주행거리가 길어질수록 수소차의 경제성이 전기차보다 올라가게 된다는 뜻이다.
‘연료전지스택과 고압수소탱크 등의 부품을 표준화해 가격을 낮추면 수소차도 대중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여기서 기회를 본 톰슨은 자동차회사를 나와 동료 연구원들과 함께 넥스트로젠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수소차의 핵심기술이라 할 수 있는 연료전지스택과 촉매를 개발하는 회사였다. 직접 차를 생산하기보다는 수소차 플랫폼을 만들어서 여러 자동차 회사에서 판매할 계획이었다.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대연자동차가 수소트럭을 출시하고, 토머스 모터스가 뜨며 수소차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투자를 하겠다는 투자사들이 줄지어서 문의해왔다. 그중 가장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인 곳은 바로 샤크 매니지먼트.
다름 아닌 마이클 프레스턴이 이끄는 사모펀드였다.
그는 먼저 지분 51퍼센트를 매입하고, 콜옵션을 확보해 이후 완전히 인수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아직은 시제품 개발 단계인 만큼 수익을 내기까지는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거대 사모펀드의 지원을 받으면 자금 걱정 없이 개발에만 매진할 수 있다. 그래서 톰슨은 기꺼이 투자를 받기로 했다.
그런데 투자 체결 직전에 토머스 모터스 사태가 터졌다.
토머스 모터스는 수소차 업계의 선두주자.
이 회사가 사기 기업으로 판명나자 수소차는 상품성이 없다는 인식이 퍼졌다.
자칭 전문가라는 놈들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금방이라도 수소차 시대가 열릴 것처럼 떠들어댔다. 그런데 사태가 터지고 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한동안 수소차는 힘들 거라고 말을 바꿨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상황에서 누가 수소차에 투자를 하겠는가?
샤크 매니지먼트는 투자 직전에 취소를 통보했고, 다른 투자자들의 문의도 전부 끊겼다.
문제는 당연히 투자를 받을 거라 생각하고 설비투자와 고용을 늘렸다는 것이다. 당장 투자금이 들어오지 않으면 회사 문을 닫아야 할 판이다.
톰슨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이제 모든 게 끝장이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누군가 그를 찾아왔다.
건장한 30대 흑인 남성이었다.
“안녕하세요. 컨티뉴 캐피탈의 에드워드 밴슨이라고 합니다.”
“컨티뉴 캐피탈이면 설마······.”
톰슨은 상대를 자세히 보고는 깜짝 놀랐다.
‘보닛맨이잖아!’
그는 다름 아닌 토머스 모터스의 행사장에서 보닛을 뜯어 올린 장본인이다. 그 직후 토머스 모터스 주가는 풍비박산 났고, 넥스트로젠 역시 투자가 끊겼다.
“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보닛맨(?)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귀사를 인수하고 싶습니다.”
“저, 저희를요?”
“예. 1차로 1억 달러를 투자할 생각입니다.”
“······.”
* * *
다들 떠나고 나자 다시 둘만 남게 됐다.
난 데이비드를 보며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표정이 좋아 보이네요.”
“처음 만났을 때 제 표정이 어땠습니까?”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안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었죠.”
데이비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는 정말 그랬으니까요.”
다니던 회사는 망하고 패배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새로운 일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빚은 점점 늘어만 갔다.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는 현재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투자자였다. 그도 그럴 것이 리포트 하나로 증시에서 가장 핫한 기업인 토머스 모터스를 골로 보냈으니까.
모든 언론사들은 인터뷰를 하자고 달려들었고, 돈 많은 투자자들은 그에게 투자하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다.
“인기 있어졌다고 다른 데 갈 건 아니죠?”
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른 데 간다고 하면 보내주실 겁니까?”
“그건 안 되죠.”
데이비드는 나를 보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하려던 일 해야죠.”
토머스 모터스는 어디까지나 수단이었을 뿐. 진짜 목적은 따로 있다.
데이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쿨라우드 인수 말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