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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토머스 모터스 (4) (65/529)

 65화. 토머스 모터스 (4)

 유재호 회장은 자리에 앉은 임원들을 둘러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이 자리에 있는 상당수가 이번 인수합병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한미루의 말만 듣고 인수를 결정한 것은 아니다. 그 전에 해당 기업들에 대해 면밀하게 조사했다.

 사업을 하다 보면 될지 안 될지 느낌이 오는 순간이 있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 기업들을 반드시 인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잘만 하면 그동안 뒤처져 있던 시스템 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유성전자가 단숨에 치고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한미루라는 존재가 더욱 아쉽게 느껴졌다.

 ‘그는 대체 이 기업들이 괜찮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이게 절대 우연일 리 없다.

 ‘직감적으로 본질을 파악하는 재능 같은 게 있는 걸지도.’

 벌써 세 시간 넘게 회의가 이어졌다.

 처음에는 바른 자세로 앉아있던 임원들도 조금씩 몸을 꼼지락거렸다.

 ‘아! 쉬고 싶다.’

 ‘졸려 죽겠네.’

 ‘대체 오늘 회의는 언제 끝나는 거지?’

 ‘좀 쉬었다 하면 안 되나?’

 ‘담배 한 대 피우고 오면 좋겠는데.’

 나이 많은 임원들은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나마 다행이다. 생리현상이 급한 사람들은 말 그대로 똥줄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회장이 주재하는 회의에는 기저귀를 차고 들어가야 한다는 농담이 있다.

 ‘화장실 가고 싶은데.’

 ‘진짜 기저귀라도 차고 올 걸 그랬나?’

 ‘나 진짜 급한데.’

 ‘죽을 것 같아!’

 몇 명은 참느라 얼굴이 새빨갛게 변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회장이 열정적으로 회의를 진행하는데 감히 화장실 다녀오겠다고 손들고 말할 만큼 간 큰 사람은 없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먼저 말해주면 안 되나?’

 ‘제발! 누가 좀 쉬자고 말해!’

 ‘조금만 참자! 나보다 급한 놈이 분명 한 명은 있을 거야.’

 ‘더 급한 놈이 지는 거다!’

 다들 누군가 먼저 말해주길 기다리며 눈치를 살피는데, 비서실장이 들어와 회장에게 뭔가 말을 전했다.

 그 얘기를 들은 유재호 회장은 모두가 듣고 싶은 말을 해주었다.

 “잠깐 쉬었다 하겠습니다.”

 회장이 회의장을 나가자 바른 자세로 앉아있던 임원들은 일제히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김지석 비서실장이 말했다.

 “회장님께서는 전화 받으러 가셨으니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돌아오시기 전에 미리 말씀드릴 테니 그동안 편하게 쉬고 계세요.”

 그 말에 급한 사람들은 바로 화장실로 달려갔고, 다른 사람들은 몸을 풀거나 담배를 피우러 가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누군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런데 누구 전화지?”

 그 말에 다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대체 유재호 회장이 회의를 중단하면서까지 전화를 받아야 할 사람이 누굴까?

 * * *

 집무실로 돌아온 유재호는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오랜만이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수천억의 컨설팅으로도 못 받을 도움을 공짜로 받았다.

 언제 연락을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렇게 먼저 연락이 오자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와 연락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가 연락을 기다리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예. 회장님도 잘 지내고 계시죠?]

 “늘 똑같습니다.”

 [회의 중이라고 들었는데, 통화 괜찮으세요?]

 “잠깐 중단했습니다.”

 [저 때문에요?]

 “어차피 쉴 때가 되긴 했으니까요. 세 시간 동안 쉬지 않고 했으니 지금쯤 살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겁니다.”

 [그렇게 길게 하면 힘들어하지 않나요? 다들 나이도 있을 텐데.]

 그 말에 유재호는 웃으며 말했다.

 “말 안 듣는 노인네들 말 잘 듣게 하려면 가끔은 이렇게 해줘야 합니다. 그럼 회의하기 싫어서라도 다음부터는 알아서 잘하거든요.”

 [오! 길게 하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그런데 지금 어디서 전화를 건 겁니까?”

 [아! 제가 지금 사업차 미국에 와있습니다.]

 “호오! 어느새 미국까지 갔군요. 그래서 무슨 일로 연락을 주신 겁니까?”

 [부탁드릴 게 좀 있어서요.]

 그 말에 유재호는 농담처럼 말했다.

 “부탁을 그렇게 쉽게 해도 되는 겁니까?”

 [쉬운 부탁이니까요.]

 “쉬운지 어려운지는 들어보고 판단하죠.”

 대체 자신에게 무슨 부탁을 하려고 전화한 건지 궁금했다.

 [화안그룹 둘째 아들 허민웅이라고 아시나요?]

 “알고 있습니다. 화안에너지에서 일하고 있죠.”

 [지금 미국에 와있습니다.]

 “그래서요? 혹시 그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회장님께서 소개를 좀 시켜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정말이지 너무 쉬운 부탁이다.

 이유가 궁금했지만 유재호는 이것저것 묻는 대신 흔쾌히 말했다.

 “시간과 장소는요?”

 [빠를수록 좋습니다. 장소는 제가 그쪽으로 간다고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한번 연락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유재호는 전화를 끊고 생각에 잠겼다.

 한미루가 아무 생각 없이 이런 부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허민웅이 지금 하고 있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을 것이다.

 “허민웅이 무슨 일로 미국에 가 있나요?”

 그 물음에 박수찬 실장이 대답했다.

 “토머스 모터스와 협력을 위해 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수소차 회사죠?”

 “예. 현재 화안그룹 쪽과 수소인프라 분야에서 협력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분명 그 일과 관계가 있다!

 한미루는 모두가 좋다고 생각하던 펀드가 부실덩어리라는 것을 알아챘다. 또한 이미 망했다고 생각한 회사가 좋은 기술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렇다면 이번 역시 뭔가를 알아내고 움직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과연 뭘 하려는 걸까?’

 왠지 흥미가 생겼다.

 유재호는 지시를 내렸다.

 “토머스 모터스에 대한 자료 정리해서 올리세요. 화안그룹과 진행하고 있다는 사업에 대해서도.”

 박수찬 실장은 바로 답했다.

 “회의가 끝나기 전까지 준비해 놓겠습니다.”

 * * *

 화안에너지 해외투자팀장 허민웅.

 화안그룹 허성훈 회장의 둘째 아들인 그는 토머스 모터스와의 수소인프라 협력을 위해 미국 앨라바마주에 출장을 와있었다.

 21세기 들어서 환경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며, 각국 정부는 태양광, 풍력 등 친환경 에너지에 대한 투자와 동시에 내연기관차의 퇴출을 선언했다.

 EU 집행부는 향후 15년 안에 아예 내연기관차를 판매 금지시키겠다고 밝혔고, 미국은 각 제조사에 친환경차 판매 의무비율을 할당했다.

 전 세계 자동차업체들은 좋든 싫든 친환경차 개발에 나섰다.

 이는 헨리 포드가 자동차를 대중화시킨 이후 발생한 그야말로 대격변이었다. 덕분에 전기차와 배터리 업체들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전기차에 이어 주목을 받은 것은 바로 수소차.

 수소는 자연계에 무한히 존재하고 연소 후에는 질소와 물로 변한다. 그야말로 미래에 석유와 석탄을 대체할 만한 청정에너지다.

 이번 미국에서의 수소인프라 협력은 화안그룹의 수소 에너지 진출의 시작점이었다. 이후 이를 유럽과 아시아로 확대할 예정이었다.

 대연자동차는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수소차 생산기업이다. 때문에 한국 정부 역시 수소 에너지 투자에 적극적이었다.

 큰 틀에서의 합의는 이미 끝났고 세부내용을 실무진들이 조율 중인 만큼, 그가 할 일은 딱히 없었다.

 휴가 온 기분으로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유재호입니다.]

 전화를 받은 허민웅은 깜짝 놀랐다.

 재벌 공화국이라 불리는 한국에서도 그 정점에 있는 곳이 바로 유성그룹이다.

 시총도 시총이지만 정계와 재계뿐 아니라 법조계, 학계, 언론 등 대한민국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 거대 그룹을 이끄는 단 한 사람이 바로 유재호 회장이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갑자기 연락드려서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네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실례라니요.”

 허민웅은 유재호 회장과 약간의 인연이 있었다.

 몇 달 전, 그는 사석에서 우연히 유성전자 권혁준 부회장과 만났다.

 연배와 경력 모두 권혁준 부회장이 한참 위라 예의를 지켜야 했지만, 허민웅은 평소 오너 일가가 아니면 상대의 나이와 직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때문에 늘 하던 대로 아랫사람 대하듯 무시했다.

 권혁준 부회장은 웃으며 넘어갔지만,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을 통해 유재호 회장의 귀에 들어갔다.

 얘기를 전해들은 유재호 회장은 분노해 그의 아버지인 허성훈 회장에게 직접 전화해 항의했다.

 유성그룹 회장이 화를 냈다는 사실만으로 화안그룹에는 비상이 걸렸다.

 아버지에게 눈물이 빠지도록 혼난 허민웅은 바로 권혁준 부회장을 찾아가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숙이고 사과했다.

 그 일 이후 유재호 회장과는 따로 연락할 일이 없었는데, 오늘 갑자기 전화를 준 것이다.

 허민웅은 공손하게 말했다.

 “지난번 일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사죄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하하! 이미 지난 일인데요. 전 한참 전에 잊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지금 미국에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 회사 일로 현재 앨라바마에 와있습니다.”

 [바쁘시겠지만 부탁 하나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유재호 회장이 부탁을 하다니!

 일전의 잘못을 만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허민웅은 부디 자신이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기를 바라며 물었다.

 “아, 예. 무슨 일이십니까?”

 [사람 하나 만나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는 사람에게 소개시켜 달라는 부탁을 받아서요.]

 “저를 말입니까?”

 [예.]

 다행히 너무 쉬운 부탁이다.

 자신에게 직접 연락하지 않고 유재호 회장을 통해 말을 전달한다는 것은, 자신이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누구입니까?”

 그러자 유재호 회장은 농담처럼 말했다.

 [왜요? 누군지 확인한 다음 만날지 말지 결정하시게요?]

 허민웅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유재호 회장에게 부탁을 받은 시점에서 만남은 결정된 거나 다름없었다.

 가뜩이나 찍혀있는 주제에 어찌 감히 거절할 수 있겠는가?

 허민웅은 변명하듯 말했다.

 “아!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이유가 좀 궁금해서요.”

 유재호 회장은 웃으며 말했다.

 [하하! 사실 저도 이유는 모릅니다. 부탁만 받은 거라서요.]

 “아, 예. 그렇군요.”

 ‘대체 누가 부탁을 한 거지?’

 유성그룹 회장에게 이런 부탁을 할 정도면, 모르긴 몰라도 보통 사이는 아닐 것이다.

 “미리 말씀만 해주시면 시간 맞추겠습니다.”

 [갑작스러운 부탁이었는데 흔쾌히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도 면이 서겠네요.]

 “아! 아닙니다. 회장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당연히 만나야죠.”

 [감사의 의미로 한 가지 조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유재호 회장의 조언이라니!

 허민웅은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잘 들어두면 분명히 도움이 될 겁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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