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지분을 올려주세요 (2)
난 데이비드에게 물었다.
“인수비용을 최대한 낮출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첫째는 기업 자체의 가치를 낮추는 겁니다.”
예를 들어 기업의 핵심 프로그램에 대해 지적재산권 위반 소송과 함께 사용금지가처분 신청 같은 걸 하고 언론에 알리면 기업가치가 낮아지기 마련이다.
“둘째는요?”
“인수할 지분 자체를 줄이는 겁니다. 100퍼센트 지분을 다 인수하는 것에 비해 80퍼센트만 인수하면 비용을 그만큼 줄일 수 있죠.”
어차피 시드는 나와 끝까지 함께 가야 한다. 따라서 쿨라우드를 인수하고 나면 시드에게 지분을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시드가 지금 두 사람에게서 최대한 많은 지분을 받아낸다면? 그만큼 인수비용을 낮출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아이디어란 말이지.
데이비드는 나에게 물었다.
“왜 하필 20퍼센트입니까?”
“그 이상 달라고 하면 그냥 나가라고 하지 않겠어요?”
“제 생각에는 또 다른 이유가 하나 있는 것 같은데요.”
역시 눈치챘구나.
“생각하고 계신 거 맞을 거예요.”
요구가 통과되면 시드의 지분율은 20퍼센트로 올라간다. 이는 지분율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다.
“그쪽에서 제안을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협상은 아쉬운 쪽이 지는 거라면서요?”
시드는 쿨라우드를 떠나도 아쉬운 게 없지만, 쿨라우드는 많이 아쉽다. 결국 시드를 붙잡기 위해서 원하는 만큼의 지분을 내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알렉스와 롤프가 요구조건을 받아들지 않아 시드가 그만둬도 상관없다. 그때는 내가 쿨라우드를 인수해 시드를 CEO 자리에 앉히면 되니까.
어느 쪽이든 시드와 나 둘 다 손해 볼 것 없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난 일단 전화를 받아보았다.
“여보세요.”
통화버튼을 누르기가 무섭게 다짜고짜 귀에 욕부터 박혔다.
[시발! 너 뭐 하는 새끼야?]
굳이 자기소개를 듣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나한테 전화한 걸 보면 명함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전화 받자마자 욕이라니. 너무 예의가 없는 거 아닙니까?”
[예의? 남의 직원 빼가려는 새끼가 예의를 따져?]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사실 롤프 부치는 성격이 더럽기로 유명하다. 그는 카메라 앞이나 공식석상에서도 거침없이 화를 내고 욕을 했다.
일반인이 성격이 안 좋으면 욕먹기 딱 좋다. 하지만 천재는 그것도 개성으로 인정받기 마련이지.
[대체 시드한테 뭔 헛소리를 한 거야?]
“그저 회사를 차려주겠다는 제안을 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니가 뭔데 남의 직원에게 그런 제안을 하냐고?]
“그러면 안 됩니까?”
[뭐?]
“시드가 영원히 쿨라우드에서 일하겠다고 서약한 것도 아니고. 받아들이고 말고는 어차피 당사자의 선택 아닌가요?”
[이 사기꾼 같은 새끼가!]
“사기꾼이요?”
진짜 사기꾼에게 이런 말을 들으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누가 사기꾼인지는 지켜보면 알겠죠.”
[시발! 너, 내가 절대 가만히 안 둬!]
“좋을 대로 하세요.”
어차피 나도 가만히 둘 생각 없으니까.
난 더 이상 들을 것 없다는 듯 전화를 끊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데이비드가 물었다.
“누굽니까?”
“롤프 부치요.”
대충 예상했다는 듯 데이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전화해 난리치는 걸 보니 어지간히 아쉬운 모양이네요.”
* * *
롤프의 얘기를 전해들은 알렉스는 깜짝 놀랐다.
“컨티뉴 캐피탈에서 시드에게 회사를 만들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그렇다니까. 처음부터 시드를 빼 갈 목적으로 접근했던 거였어.”
알렉스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제대로 한 방 먹었군.’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미루와 데이비드는 이전까지 시드를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알고 그에게 접근하여 회사를 차려주겠다는 제안을 한 것일까?
“그 데이비드라는 새끼가 판을 짠 것 맞지?”
“아마 그렇겠지.”
설마 그 동양인 청년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은 아닐 것이다. 그저 지시대로 움직였을 뿐이겠지.
“그 한국인 새끼가 돈을 대고 있는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아.”
“뭐? 그럼 그 새끼는 뭔데?”
첫 만남에서 위화감을 느낀 알렉스는 한미루에 대해 조사를 좀 알아봤다.
상대가 미국인도 아닌 한국인이지만, 다행히 프레스턴 그룹을 통하니 어느 정도는 알아낼 수 있었다.
“한국대 경제학과 출신. 한국에서 DA증권이라는 IB에 다니다가 사모펀드 부실을 폭로하고 회사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건너온 모양이야.”
“사모펀드 부실?”
“프리머스 사태라고 있었어.”
프리머스 펀드 사기 사건은 미국에서도 뉴스로 나올 정도의 일이었다. 금융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면 웬만큼은 알고 있다.
‘그걸 일개 신입사원이 알아채고 폭로하다니.’
사기라는 게 막상 밝혀지고 나면 누가 저런 것에 속았나 싶은 일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모두가 속고 있는 상태에서 진실을 발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집안은 어떤데?”
“나오는 게 없는 걸 보면 그냥 평범한 집안인 것 같아.”
“뭐야? 그럼 개털이라는 거야?”
“아마도.”
“그런 놈이 대체 어떻게 미국에 와서 데이비드와 손을 잡은 건데?”
“그게 의문이야.”
그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데이비드가 한미루를 미국으로 부른 걸까, 아니면 한미루가 데이비드를 찾아온 걸까?’
두 사람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컨티뉴 캐피탈의 자본금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도 의문이다. 700억 달러에 인수를 제안한 것은 그만한 자본이 있기 때문일까?
‘대체 어디서 자본을 대주고 있는 거지?’
정보가 너무 모자라다.
투자에서 정보는 생명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진 자가 항상 우위를 점한다.
자신은 상대의 정보를 잘 모르는데, 어째서인지 저쪽은 자신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쨌거나 일은 벌어졌으니 수습을 해야 한다.
“설득은 해봤어?”
롤프는 고개를 저었다.
“몇 번이나 해봤는데 소용없었어. 지분 15퍼센트를 추가로 주지 않으면 무조건 그만두겠대.”
“이상하군. 시드는 돈 욕심이 없는 거 아니었어?”
돈 욕심이 있었다면 진작 뭔가를 요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드는 단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지금 가진 지분도 회사를 떠날까봐 걱정돼 떠넘기듯 준 것이다. 본인은 달라고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롤프는 화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그러니까 그 새끼들이 애한테 헛바람을 불어넣었다니까!”
알렉스 역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꾹 참았다.
“화낸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시드가 회사를 나간다고 하니 다른 직원들이 동요하고 있어. 일부는 시드를 따라갈 것 같은 분위기야.”
처음에는 고졸에 어리다고 무시하는 듯했던 직원들도 이제는 시드만 보며 따르고 있었다.
롤프는 일화를 하나 떠올렸다.
사업 초기에 갑자기 시스템이 먹통이 되는 일이 있었다. 야밤에 벌어진 일이라 급한 대로 롤프와 직원들이 출근해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 애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필이면 시드는 자느라 연락이 되지 않았고, 그동안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다행히 간신히 연락이 됐다.
롤프는 바로 회사로 오거나 컴퓨터를 켜서 작업을 하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시드는 자다 일어나서 컴퓨터를 켜기 귀찮다며 오류가 뭔지 물어보더니 입으로 코드를 수정했다.
모든 직원들이 한 시간 넘게 달려들어도 고치지 못한 걸, 자다 깨서 전화로 해결한 것이다.
알렉스가 물었다.
“시드가 없어도 쿨라우드가 지금처럼 돌아갈까?”
롤프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시드는 모든 시스템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어. 시드가 없다고 회사가 안 돌아가진 않아. 하지만 시드가 없으면 지금처럼 잘 돌아가진 않겠지.”
쿨라우드가 지금처럼 고속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낮은 비용에 고객사들의 요구를 맞춰줬기 때문이다.
당장 비슷한 매출의 다른 기업의 경우 직원이 1000명이 넘는다. 쿨라우드가 90명의 직원으로 같은 업무를 처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인공지능 프로그램 미네르바, 그리고 시드 루카스.
이 두 가지 덕분에 다른 회사 인력의 10분의 1만으로도 충분했다. 사람을 덜 뽑으면 인건비와 관리비가 절감된다. 원가절감 덕분에 비용을 더 낮춰 더 많은 고객사를 확보하고, 더 많은 고객사는 또다시 비용을 낮추는 선순환 구조를 형성했다.
실제로 쿨라우드는 초창기에 비해 20차례나 비용을 낮췄다. 이는 AMZ의 플라이휠(Flywheel) 전략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시드가 없는 상태에서 과연 이 전략을 지속할 수 있을까?
“그냥 나가는 것만 해도 문제인데 경쟁자가 되는 건 더 큰 문제야. 시드가 미네르바와 비슷한 프로그램을 만들어낼 가능성은?”
알렉스의 말에 롤프는 인상을 쓰며 말했다.
“충분히 가능할걸.”
시드만큼 클라우드 산업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옆에 있을 때 든든한 아군만큼 적이 되면 골치 아픈 존재도 없다.
“시드는 천재야.”
“나도 알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천재가 아니야.”
옆에서 지켜본 롤프는 시드가 어떤 존재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아이작 뉴턴이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또는 엘런 튜링이나 리처드 파인만 같은 세기의 천재가 아닐까?’
지금도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들 정도의 천재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성장 속도였다.
처음 면접을 보러 온 시드를 봤을 때만 해도 잘 가르치면 쓸 만할 것 같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뽑았다.
그런데 일한 지 1년 만에 그를 뛰어넘었다.
롤프는 아직도 미네르바가 어떤 프로그램인지 잘 몰랐다. 그런데 시드는 보자마자 그것이 어떤 프로그램인지, 어떻게 다뤄야 할지 정확하게 이해했다. 만약 시드가 없었다면 창업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롤프는 스스로를 천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만큼, 시드의 재능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 자신이 그 이상의 천재가 될 수 없다면, 계속 밑에 두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전에 있던 회사에서 시드를 데리고 나왔다.
“지금도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든 천재인데, 더 무서운 건 성장 속도야.”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시간이 지나면 성장이 둔화되기 마련이다.
100미터 달리기를 예로 들면, 재능과 노력이 있는 이들은 10초 안까지 쉽게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그 이후부터는 0.01초를 줄이기 위한 전쟁이 펼쳐진다.
“그런데 시드는 달라. 마치 오늘이 첫날이라는 듯 끝없이 성장하고 있어.”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몇 년 더 지나면 완전히 괴물이 되겠군.”
상장 이후에는 기업 상황에 대해 공시를 해야 하고, 그럼 시드 루카스의 가치를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어차피 퇴사 금지 조항이었던 5년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그 전에 추가로 스톡옵션을 부여할 생각이었다.
알렉스는 고개를 내저었다.
‘기껏해야 2~3퍼센트를 생각했는데 15퍼센트라니.’
현재 쿨라우드의 기업가치는 최소 1000억 달러.
지분 0.1퍼센트만 준다고 해도 실리콘밸리의 천재란 천재들은 다 달려올 것이다. 하지만 그들 100명이 온다고 해도 시드 한 명만큼의 역할을 한다는 보장은 없다.
두 사람은 시드 루카스의 가치에 대해 냉정하게 판단했다.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시드를 회사에 붙잡아둬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결국 그의 요구사항을 들어줄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알렉스는 이를 갈듯 말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확실하게 조치를 취해야겠지.”
요구를 들어주는 대가로 평생 쿨라우드를 위해 일하게 만들어야 한다.
61화. 직원 고용
처음 회귀를 했을 때만 해도 뭐든 쉽게 풀릴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부딪쳐보니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첫째로 내가 미래에서 일어난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다.
직접 겪은 일이 아닌 이상 전부 기사로 접했을 뿐이니,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알려진 내용과 진실이 다른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둘째로 내가 아는 일이라고 해도 남들에게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납득시키는 건 쉽지 않다.
예를 들어 브릿지월드 항공 엔진 폭발 사건의 경우 그 비행기에 직접 타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고 말했기 때문에 설득력이 있었던 거지, 전화로 알렸다면 당장 체포돼 테러범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셋째로 미래를 알고 타인에게 납득시킬 수 있어도 그걸 현실화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아무리 좋은 기회가 있으면 뭐 하나? 돈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다.
판은 깔렸으니 이제 돈만 있으면 된다.
당장 수백억 달러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계약금 정도는 마련해 놔야 한다. 그러려면 지금 가진 돈으로 어딘가에 투자해 불려야겠지.
마침 딱 이 시기에 투자할 만한 좋은 아이템이 있기도 하고.
“직원을 좀 고용하고 싶은데, 아는 사람 있어요?”
데이비드는 잠시 생각한 다음 말했다.
“빅토리 인베스트먼트에서 일했을 때 같이 일했던 팀원들이 있습니다. 몇 명은 다른 투자사에 취직했지만 몇 명은 쉬고 있는 중이죠.”
그는 실력만큼이나 좋은 성품을 지녔다.
1회차 때 데이비드가 샤크 매니지먼트에 취직하자 빅토리 인베스트먼트 재직 당시 함께 일했던 직원들 중 상당수는 그를 따라 이동했다.
그곳에서 높은 성과를 올린 것에는 동료들의 조력도 한몫했을 것이다.
“잘됐네요. 혹시 용돈벌이 할 생각 있는지 물어보세요.”
“조건이 어떻게 됩니까?”
“기간은 일주일에서 열흘. 10만 달러 준다고 하세요.”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데이비드는 여기저기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돌렸다.
두 시간 후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세 명이 바로 일할 수 있다고 합니다.”
난 직원들에 대한 정보를 받아보았다.
백인 남성과 흑인 남성, 그리고 히스패닉 여성이다.
난 혀를 내둘렀다.
학력만 봐도 눈이 부시다. 뉴욕대 회계학과, 스탠퍼드대 수학과, 예일대 경영대학원. 여기에 한국대 경제학과는 명함도 못 내밀겠는데.
“다들 일 잘하나요?”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그럼 됐어요. 이분들 고용하죠.”
데이비드는 나를 슬쩍 보며 물었다.
“뉴욕에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직접 만나서 얘기하게요?”
“그것도 있지만 딸 얼굴도 보고 싶어서요.”
그의 딸은 현재 뉴욕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다. 매일같이 화상통화와 전화를 해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겠지.
표정을 보니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이런 딸 바보 같으니라고.
“다녀오세요.”
데이비드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안에 돌아오겠습니다.”
* * *
데이비드는 비행기를 타고 떠났고, 난 낯선 미국 땅에 홀로 남았다.
호텔에 가만히 있기 심심해서 샌프란시스코를 관광하기로 했다. 마침 시드도 사직서를 내고 휴식 중인 터라 함께했다.
1회차 때였다면 증권사에서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에서 향후 세계를 이끌어나갈 천재와 관광을 하고 있다.
문득 시드가 방한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청와대에 초청을 받아 대통령과 단독으로 회담을 했고, 유력 정치인과 경제인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줄을 섰다.
1회차 때는 감히 말도 못 붙여봤을 존재와 편하게 형동생 하고 있다니. 이런 걸 보면 사람이든 기업이든 저평가 우량주에 대해 투자해야 한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햇볕은 강하게 내리쬈다.
“밖에 나오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언제 이렇게 추워졌지?”
시드는 티셔츠를 하나 걸치고, 맨발에 크록스를 신고 있었다. 얼어 죽을까봐 근처 매장에 들어가서 패딩을 하나 사줬다.
빽빽한 빌딩 숲이 들어서있는 뉴욕과는 달리, 샌프란시스코는 낮은 건물들이 대부분이었다.
이유는 지반이 약하고 지진의 위험성이 있기 때문.
도시 아래에 샌 안드레아스 단층이 있는 만큼 실제로 간간이 지진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대지진이 발생한 소설을 본 적이 있다. 주인공이 지진이 일어날 걸 알고 막기 위해 뛰어다니는 내용이었는데······ 제목이 뭐였더라?
우리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이렇게 앉아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니,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사는 도시라는 게 새삼 실감났다.
시드는 케이크를 먹으며 말했다.
“메타버스를 만들려면 꼭 필요한 기술이 있어요.”
“VR?”
“맞아요. 컴퓨터가 등장하고 수십 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입출력 장치는 그대로예요. 입력은 키보드와 마우스, 출력은 모니터. 스마트폰도 터치로 바뀌었을 뿐 메커니즘은 마찬가지구요.”
“그래도 요즘 음성인식 같은 것도 등장했잖아.”
내 말에 시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변화가 시작된 거죠. 앞으로는 생각만으로 컴퓨터를 움직이는 시대가 올 거예요.”
현재도 VR 기기는 속속들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아직 가상현실이라고 하기에는 한참 모자란 수준이다.
그러나 이후에는 뇌파를 이용한 입출력 장치가 활성화되고, 이는 IT산업 전체를 바꿔놓았다.
생각만으로 가상세계의 아바타를 움직이는 게 가능해지는 것이다.
“게임에도 활용할 수 있겠는데.”
“맞아요. 앞으로는 게임도 전부 클라우드를 기반으로 돌아가게 될 테니까요.”
현재 이쪽에 가장 적극적인 회사는 NS.
원래 NS는 자사의 PC OS 윈도어즈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사티아 샤말란이 3대CEO로 취임한 뒤 클라우드 중심으로 기업을 재편했다.
어느 운영체제를 사용하던 자사의 클라우드인 에이저에 접속해 데이터를 관리하고 프로그램을 돌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여기에 더해 게임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플랫폼과 디바이스에 상관없이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나 클라우드다. NS는 AMZ에 이어 클라우드 2위 기업으로 성장했고 주가 역시 폭등했다.
이것만 봐도 클라우드의 성장 가능성을 쉽게 알 수 있다.
“쿨라우드는 언제 인수할 거예요?”
“열흘 정도 걸릴 것 같아.”
인수에 필요한 돈을 어떻게 벌고, 어떻게 인수할지는 이미 다 짜놓았다.
한참 대화를 하는 와중에 테이블 위에 있는 시드의 핸드폰이 울렸다. 슬쩍 보니 롤프의 이름이 떠있었다.
“안 받아도 돼?”
“받아봐야 쓸데없는 소리할걸요. 밥 먹자, 커피 마시자, 얘기 좀 하자 등등.”
어지간히 아쉬운 모양이다.
하기야 롤프가 천재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건 전부 시드 덕분이다. 그러니 시드가 자신의 떠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어지간히 똥줄이 타겠지.
천재를 이용해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에 불과하다.
난 시드를 보았다.
겉으로 보기에 그냥 어수룩한 청년 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나, 아이작 뉴턴과 비교될 정도의 천재.
만약 그가 앞으로 이룰 업적을 몰랐다면 나 역시 롤프와 같은 착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시드는 고개를 내저었다.
“마음 같아서는 더 이상 얼굴을 마주 보고 싶지도 않아요.”
“지분 15퍼센트를 준다고 해도?”
“저한테는 별 필요도 없는데요.”
그는 돈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어쩌면 현실세계의 부란 정말로 그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가상세계의 창조자. 새로운 세계의 무한한 부가 그의 손에 있는 셈이니.
난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인수하면 바로 쫓아낼 거니까.”
쿨라우드의 핵심은 두 가지다.
첫째는 시드 루카스. 둘째는 미미르.
이 둘을 활용해 그냥 새로운 회사를 만들어도 될 것 같지만······.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어째서 요즘 IT 대기업들이 서비스를 베끼거나 직원을 빼오는 대신, 엄청난 돈을 주고 스타트업들을 사들이겠는가?
그 회사만이 가진 아이덴티티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미미르는 딥러닝을 통해 성장하는 프로그램이다.
똑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쌍둥이라도 성장 과정에서 어떤 일을 겪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어른이 될 수도 있다.
쿨라우드의 미네르바는 이미 3년에 걸친 딥러닝을 해왔다.
이걸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려면 3년이 걸릴지 얼마가 걸릴지 알 수 없고, 그렇게 만들어진 AI가 똑같이 기능한다는 보장도 없다.
게다가 이 시점에서 내가 쿨라우드를 인수하는 것부터가 1회차 때는 없었던 일이다. 가능하다면 변수는 줄이는 편이 좋겠지.
결국 쿨라우드를 그대로 인수하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게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이 새로운 회사를 만들어야겠지만.
“CEO가 되면 뭐부터 하고 싶어?”
“할 건 많죠.”
“인터넷은 언제나 오늘이 첫날(Day1)이니까?”
“어! 맞아요.”
판게아가 만들어진 이후 사람들은 시드에게 물었다.
‘이걸로 인터넷 세상이 완성되었습니까?’
그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이제 간신히 석기시대를 지나 청동기시대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골드러시는 마지막 금을 캐낸 순간 끝났다. 그러나 인터넷은 오늘이 가장 낙후되어있는 순간이다.
시드는 그 낙후된 세상의 문명을 끌어 올릴 선구자다.
“왠지 형은 다른 사람들과 좀 다른 것 같아요.”
“정말?”
“보자마자 그 두 사람이 얼간이인 걸 알아챈 것도 그렇고. 사실 저도 오래전부터 생각은 했는데 말은 못 했거든요. 그리고 다른 사람이랑 이렇게 편하게 얘기하는 건 처음이에요.”
“그래?”
“예. 제가 말하면 이해 못 하겠다는 반응이 대부분이거든요.”
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뭐든 아는 만큼 보이기 마련. 따라서 천재가 보는 세상은 일반인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아마 지금 시드가 보는 세상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세상과 전혀 다를 것이다. 그러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말하는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만들어낸 미래에서 살다 왔다. 그래서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천재도 뭐도 아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회귀를 했기 때문이다.
시드의 말대로 그 이후로도 인터넷 세상은 끝없이 발전했을 것이다.
내가 아는 미래는 언젠가는 끝이 난다. 그러니 그 전에 최대한 많은 것을 손에 넣어야 한다.
* * *
이틀 후.
데이비드 록허트가 실리콘밸리로 돌아왔다. 그의 옆에는 세 명의 남녀가 함께였다.
난 그들과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컨티뉴 캐피탈 공동대표 한미루입니다. 저에 대한 얘기는 대충 들으셨을 테니 자기소개는 생략하겠습니다.”
백인 남성의 이름은 모리스 피어슨, 흑인 남성의 에드워드 밴슨, 그리고 히스패닉 여성의 이름은 가브리엘라 차베즈다.
세 사람 다 빅토리 인베스트먼트에서 데이비드와 함께 일했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난 바로 본론을 얘기했다.
“컨티뉴 캐피탈의 자본은 약 1억 달러입니다. 이 돈을 짧은 기간 안에 최대한 불리는 게 목표입니다.”
모리스가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어느 정도의 수익률을 기대하시는 겁니까?”
“최소 열 배입니다.”
“······.”
다들 ‘뭔 헛소리냐’라고 묻는 것 같은 표정이다.
내 목표가 좀 크긴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