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지혜의 샘 (1)
제이슨은 몇 번의 창업을 했지만 실패했고 지금은 새로운 사업을 준비 중이라고 했다.
다행히 그는 제법 실력이 있는 개발자였고, 외주를 받아 일하며 생활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사실 NS나 엔플 같은 곳에 입사할까도 생각해봤지만, 제 회사를 만들고 싶다는 꿈이 있어서요.”
“멋진 꿈이네요. 그래서 뭘 하고 있는 거예요?”
“아! 이게 뭐냐면 클라우드 기반 데이터 관리 인공지능 프로그램이에요. 파편화되어 있는 데이터를 한곳에 모아 비정형 데이터를 추출해 정형 데이터로 전처리하는 방식인데, 딥러닝을 통해서 알고리즘을 개선하는······.”
“······.”
혼자 신나서 한 시간가량 설명했지만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한참 동안 떠들던 제이슨은 실수를 깨닫고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죄송해요. 재미없는 얘기였죠?”
“사실 컴퓨터는 잘 몰라요. 만져본 적도 별로 없고. 그래도 한 가지는 알 것 같아요.”
“뭘요?”
“당신이 그 일을 정말 좋아하고 있다는걸요.”
“하하······.”
제이슨은 평소에는 멍하고 어눌해 보였지만 일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또한 그녀가 이제까지 만난 어떤 남자보다도 다정했다.
두 사람은 어느새 사랑에 빠졌다.
쉬는 날에는 데이트를 했고, 쉬지 않는 날에는 그가 항상 레스토랑에 찾아왔다.
몇 달 후, 그녀의 뱃속에 아이가 생겼다.
제이슨은 큰 충격을 받았다.
“내, 내가 애 아빠가 된다고?”
“응.”
“자, 잠깐. 이건 너무 충격인데. 어, 어떡하지?”
“쌍둥이래.”
“뭐!?”
두 사람은 혼인신고만 하고 제이슨의 원룸에서 같이 살았다. 두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제이슨은 아내의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줘. 이번에는 분명히 대박이야.’
‘프로그램의 이름은 미미르로 지었어.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샘의 파수꾼이자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지. 어울리지 않아?’
‘천재로 유명한 대학 동기에게 내 프로그램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어.’
‘그가 동업을 제안했어. 자신이 돈을 투자할 테니 사업을 같이 하재!’
‘누군지 알면 깜짝 놀랄걸. IT업계에서는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만한 유명인이야. 누군지는 나중에 말해줄게.’
‘우리는 부자가 될 거야.’
‘돈을 벌면 바로 당신과 우리 아이들을 위한 집을 짓겠어.’
‘고생만 시켜서 미안해. 반드시 행복하게 해줄게.’
‘평생 돈 걱정 없이 살게 해줄게.’
‘사랑해, 줄리아.’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회사의 창업을 앞두고 제이슨은 교통사고로 죽었다. 마약에 취한 남자가 남의 차를 훔쳐서 낸 사고라서 별다른 보상도 받을 수 없었다.
줄리아는 홀로 쌍둥이를 낳았다. 건강한 남자아이들이었다.
그녀는 혼자의 몸으로 일을 하며 아이들을 키웠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형편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월세는 조금씩 밀렸고, 돈이 생기면 식료품을 먼저 사야 할지 기름을 먼저 넣어야 할지 고민을 해야 했다.
돈 계산을 해보던 줄리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을 부모님께 맡기고 일하는 시간을 더 늘리는 수밖에는 없었다.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은 적어지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 * *
줄리아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에이홉에 출근했다.
“어서 오세요.”
처음으로 들어온 손님은 20대 후반의 동양인과 30대 중반의 백인이었다.
그녀는 드립커피를 따라주며 물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동양인은 메뉴판을 보고는 간단한 음식을 주문했다. 그러고는 그녀에게 물었다.
“여기서 일한 지 오래되셨나요?”
“예. 어느새 4년째네요.”
“몇 시까지 일하시나요?”
“저녁 5시까지요. 왜 그러시죠?”
“혹시 일 끝나고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일을 하다 보면 치근덕대는 남자들을 만나는 건 익숙했다.
줄리아는 단호하게 말했다.
“일 끝나면 바로 다음 일을 가야 해서요.”
“잠깐이면 됩니다.”
그녀는 왼손에 낀 반지를 보여주었다.
“죄송하지만 결혼했어요.”
동양인은 메뉴판을 덮으며 말했다.
“남편분과 관련된 일입니다.”
그 말에 줄리아는 경계심을 내보였다.
“무슨 말이죠? 제 남편은······.”
“예. 지금은 돌아가셨죠. 제이슨 킴, 김재현 씨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 * *
우리는 근처 카페에 앉아 줄리아의 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데이비드는 나에게 물었다.
“정말로 제이슨이 미네르바를 개발했고, 그녀가 그 자료를 가지고 있을까요?”
“그건 이제부터 알아봐야죠.”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폭로라도 할 겁니까?”
폭로하면 그 순간 타격을 줄 수 있겠지만 어차피 돈으로 막으면 그만이다. 실제로 나중에 소송이 걸리자 거액의 합의금을 내고 프로그램의 권리를 사들였다.
그러니 내가 해야 할 건 폭로가 아니라······.
“미네르바의 권리를 살 겁니다.”
제이슨 킴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왔다. 대학 시절 아버지를 잃고 그 후 결혼했으니 아내와 아이들이 그의 유일한 상속자다.
“확실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구매 전 확인을 거쳐야 할 텐데요.”
“그걸 쿨라우드 측에서 받아들일까요?”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피하겠지.
괜히 시간을 끌다가 롤프가 이 사실을 알아채기라도 하면 수억 달러를 불러서라도 권리를 사갈 것이다.
어쩌면 란진 쿠마르를 통해 얘기가 새어나갈 수도 있을 테고. 나한테 떠벌렸을 정도면 이미 여기저기 말하고 다닌다고 봐야겠지.
실제로 그가 말한 내용 때문에 냄새를 맡고 달려든 곳도 있고.
“일단 권리를 확보하는 게 우선입니다.”
“베낀 게 아니라면 돈만 날리게 될 겁니다.”
나야 이후 벌어진 일들을 알고 있지만, 그는 모른다.
걱정하는 건 당연하겠지.
“걱정하지 마세요. 협상은 제가 할 테니 옆에서 지켜만 보고 계세요.”
데이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 *
그 뒤로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 모르겠다.
일하는 내내 각종 실수를 저지르던 그녀는 시간이 되자마자 바로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마트에는 내일부터 일하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맞은편 카페에는 아까 본 동양인과 백인이 앉아있었다.
“전 한미루라고 합니다.”
“데이비드 록허트입니다.”
줄리아는 그들에게 바로 물었다.
“제이슨에 대해 무슨 할 얘기가 있다는 거죠?”
“제이슨 씨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떤 프로그램을 개발 중이었습니다. 맞습니까?”
“맞아요.”
“혹시 어떤 프로그램이었는지 아시나요?”
줄리아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컴퓨터는 잘 몰라서요.”
심지어 그녀는 스마트폰도 잘 다루지 못하는 기계치였다.
“제이슨 씨가 사용하던 컴퓨터가 있나요?”
“예. 집에 노트북이 있어요. 죽기 전까지 항상 그걸로 작업했어요.”
한미루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을 지었고, 데이비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답을 하던 줄리아는 경계의 눈빛으로 그들을 보았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시는 거죠?”
그러자 한미루가 바로 대답했다.
“그 노트북을 구매하고 싶습니다.”
“예?”
“정확하게는 제이슨 씨가 만든 프로그램에 대한 권리를 사고 싶습니다.”
줄리아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남편이 죽은 지도 벌써 3년이 넘게 흘렀다. 그런데 어째서 이제 와서 그걸 사겠다고 하는 걸까?
팔 생각은 별로 없었지만 그녀는 궁금한 마음에 물어보았다.
“얼마에 말인가요?”
“100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
순간 잘못 들었나 했다.
‘100만 달러면 얼마지?’
잠시 후, 줄리아는 눈을 크게 떴다.
“배, 백만 달러요?”
“예.”
“저, 정말인가요? 정말 100만 달러를 주겠다는 건가요?”
뼈 빠지게 일해도 하루에 100달러 이상 벌기가 힘들다. 지금도 30달러를 더 벌기 위해 파트타임 캐셔 일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100만 달러라니!
하지만 그의 말은 끝난 게 아니었다.
“그리고 매해 제이슨 씨 기일에 맞춰 100만 달러를 지급하겠습니다. 만약 한 해라도 지급을 못 하는 상황이 된다면 매입한 권리를 반환하겠습니다. 물론 그 경우, 그때까지 지급 받은 금액에 대해서는 돌려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100만 달러를 주는 것도 모자라 매년 100만 달러를 지급하겠다니! 10년만 받아도 무려 1천만 달러다.
당장 집세도 밀려있는 그녀에게는 꿈만 같은 얘기였다.
데이비드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
‘대체 뭔 생각으로 처음부터 이렇게 큰 금액을 불러?’
줄리아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너무 엄청난 금액이다 보니 오히려 의문이 들었다.
“그 프로그램이 대체 뭔가요? 그걸로 뭘 하려는 거죠?”
한미루는 담담하게 말했다.
“사실 누군가 제이슨 씨의 프로그램을 훔쳐서 자신이 만들었다고 세상에 공표했습니다.”
“예?”
그녀는 남편이 그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열정을 쏟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걸 다른 사람이 훔쳤다니!
“그, 그게 사실인가요?”
“예. 이대로라면 그 프로그램은 영원히 다른 사람이 만든 것으로 기억될 겁니다.”
“이미 세상에 나왔다면 살 필요가 없지 않나요?”
“전 권리를 사서 모든 걸 바로 돌릴 생각입니다. 남편분은 천재였습니다. 제이슨 킴이 이룬 업적은 마땅히 세상에 알려지고 칭송받아야 합니다.”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얘기를 들었더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제이슨은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랄까?’
한미루는 설득하듯 말했다.
“남편분이 만든 프로그램을 파는 것에 거부감이 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계속 시간이 지나면 권리를 되찾기는 더욱 힘들어집니다.”
잠시 생각을 하던 줄리아는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물을게요.”
“예.”
“어째서 100만 달러를 얘기한 건가요? 그보다 적은 금액을 불러도 됐을 텐데.”
“솔직하게 말씀드릴까요?”
“예.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첫째로 제가 당장 드릴 수 있는 금액이 그 정도입니다. 둘째로 제이슨 씨가 만든 프로그램은 그 금액보다 수백 수천 배의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데이비드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깎지는 못할망정 그렇게 말하다니!’
이러면 누가 팔겠다고 하겠는가?
줄리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헐값을 제시하며 조금씩 금액을 올려도 됐겠지만, 상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남편이 만든 프로그램의 가치를 솔직하게 인정해주었다.
그녀는 제이슨이 했던 수많은 말들을 떠올렸다.
‘그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줄리아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죽어서도 약속을 지켰네요.”
남편은 죽은 뒤에도 가족들에게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이제 그녀와 아이들은 부자가 되고, 평생 돈 걱정 없이 살게 될 것이다.
“미미르예요.”
“예?”
“제이슨이 죽기 전에 만들던 프로그램의 이름이. 무슨 뜻인지 아시나요?”
한미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샘의 파수꾼이자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죠.”
남편도 그녀에게 그렇게 설명해주었다.
“그 이름을 되찾아줄 수 있나요?”
“약속드리겠습니다.”
한미루는 미리 준비해온 서류를 내밀었다.
“결정하셨습니까?”
“그렇게 할게요.”
더 이상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줄리아는 펜을 들고 서류에 사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