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가짜 천재 (2)
“제가 얘기했다는 게 알려지면 곤란한데······.”
만에 하나라도 자신에게 피해가 올까봐 걱정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롤프를 끌어내리고는 싶지만 그에게 밉보이는 건 싫다는 건가?
“우리가 만난 사실이 알려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제가 만났던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요.”
쿠마르는 말없이 술을 몇 잔 마셨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 눈치였지만, 일부러 모른 척 가만히 있었다.
역시나 그는 알아서 입을 열었다.
“MIT 동기 중에 제이슨 킴이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드디어 원하는 이름이 나왔다.
난 속마음을 감추며 물었다.
“제이슨 킴이요? 혹시 한국인인가요?”
“예. 한국 이름은 김 뭐였는데······.”
제이슨 킴이니 당연히 ‘김 뭐’겠지. 정확히는 김재현이다.
“어렸을 때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고 하는데, 숫기가 없는 친구였어요. 왜 그런 사람 있잖아요. 어딘가 음침하고, 사람들 앞에서 말도 잘 못하고, 말도 좀 어눌하고.”
“있죠.”
MIT 공대생이라고 하면 너드(Nerd) 같은 모습을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케바케다. 개중에는 잘생기고 사교성 좋은 사람도 있고, 골방에서 컴퓨터만 만지는 사람도 있겠지.
당연하게도 창업을 해서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은 전자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롤프 부치가 딱 그런 케이스.
쿠마르는 회상을 하듯 말했다.
“처음 봤을 때는 평범하거나 좀 모자라 보였어요. 그런데 가끔은 묘하게 핵심을 찌르는 부분이 있었거든요. 첫 학기 때는 낙제를 겨우 면하는 수준이었는데, 졸업할 때쯤 되니 학과장이 조교 자리를 제안했을 정도로 실력도 좋아졌죠.”
세상에는 어릴 때 천재 소리 듣다가 커서는 평범해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렸을 때는 별 볼 일 없다가 나이 들어서 천재가 되는 사람도 있다.
하나를 가르치면 하나만 깨우치지만, 대신 확실하게 깨우쳐 지식을 쌓아가다가 포텐이 터지는 것이다.
대기만성형 천재랄까?
“졸업 후에도 간간이 연락을 하긴 했어요. 그나마 저랑은 좀 친하게 지냈으니까요. 그러던 어느 날 연락이 왔어요. 얼마 전 오클랜드로 이사했다고 한 번 보자고 하더군요.”
“그래서 만났나요?”
“예.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죠. 그사이 결혼도 했더군요. 그 얘기를 듣고 좀 놀랐어요. 성격만 봤을 땐 평생 여자 손도 못 잡아볼 줄 알았거든요. 아무튼 저에게 롤프 부치를 소개해달라고 하더군요.”
“어째서요?”
“프로그램을 만들어 회사를 창업할 생각인데 사업성이 있는지 롤프에게 한번 자문을 구해보고 싶다구요. 제가 같이 사업하는 걸 아니까 다리를 놔달라고 한 거죠. 사실 좋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개발자는 널려 있어요. 중요한 건 그게 사업성이 있느냐죠. 솔직히 실력은 몰라도 롤프가 그런 건 귀신같이 알아채죠.”
별거 아닌 것처럼 말해도 실제로는 대단한 재능이다. 아무도 안 쓰는 앱을 개발하느라 허송세월 보내는 개발자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그러니 성공할 수 있었던 거겠지.
“그래서 소개시켜줬나요?”
“예.”
난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지금까지 하신 말씀 들어보면 롤프에 대해 안 좋게 생각하는 것 같은데, 왜 소개시켜준 건가요?”
내 물음에 쿠마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는 저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으니까요. 만나봤으면 알겠지만 롤프는 묘하게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어요.”
사실 실리콘밸리에서는 롤프와 비슷한 나이에 더 큰 성공을 거둔 이들도 여럿 있다.
스냅톡 공동창업자 스콧 브라운이나, 바비 코니. 에어씨앤비 창업자 브라이언 게빈, 조 체이서 등등.
그럼에도 롤프 부치가 실리콘밸리 창업자의 대명사로 알려진 것은 잘생긴 외모와 수려한 언변 덕분이다.
그는 각종 방송과 강연에 출연해 입담을 뽐냈고, 할리우드 유명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렸다. 현재 애인은 빅토리아 시크릿 모델로 활동하는 키아라 체스키.
여기에 투위터로 대중들과도 활발하게 소통했다.
때문에 그의 명성을 거품이라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쿨라우드의 성공으로 인해 쏙 들어갔다.
“롤프가 그의 프로그램을 베꼈다는 겁니까?”
쿠마르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르죠. 저야 제이슨이 만든 프로그램을 본 적이 없으니까요. 클라우드랑 빅데이터 관련 프로그램이라고 듣긴 했지만 그런 프로그램이 한두 개도 아니고. 어쨌거나 제가 아는 롤프라면 시스템이나 코드 일부를 베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롤프에 대해 의심하면서도 설마 프로그램을 통째로 훔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만큼 상식 밖의 행동이니까.
“베꼈는지 안 베꼈는지는 제이슨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지 않나요?”
쿠마르는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는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아······ 그렇군요.”
사실 알면서 물어봤다.
“제이슨이 죽은 지 반년도 지나지 않아서, 롤프 부치는 기존에 하던 사업을 정리하고 쿨라우드를 창업했죠.”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그러니 부담 없이 남이 만든 프로그램을 자신이 만들었다고 발표할 수 있었겠지.
난 가장 중요한 질문을 했다.
“혹시 제이슨 킴의 아내에 대해 아는 게 있나요?”
그에게는 아내와 자식이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언론에 알려진 사실이 없다. 그러니 그에 대한 정보를 얻어야 했다.
쿠마르는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그걸 묻는 건가요?”
“만나서 얘기를 좀 들어보고 싶어서요. 만약 롤프가 제이슨 킴의 프로그램을 훔치거나 도용한 게 맞다면 그건 범죄잖아요.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어요?”
쿠마르는 머뭇거리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말해줄 거라는 걸 알기에 난 차분하게 기다렸다. 그의 입장에서는 손 안 대고 코풀 수 있는 기회다.
잘되면 좋고, 안돼도 손해 볼 건 없으니까.
역시나 그는 입을 열었다.
“오클랜드 에이홉에서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이름은 줄리아 위더스푼. 결혼 후에도 성은 바꾸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별일 없으면 그곳에서 계속 일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군요.”
필요한 정보를 손에 넣은 난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 * *
호텔로 돌아온 나는 데이비드에게 란진 쿠마르를 만나서 들은 얘기를 전해주었다.
“그러니까 롤프 부치가 제이슨 킴이라는 사람이 만든 프로그램을 베껴서 창업했다는 겁니까?”
“예. 확실해요. 공동으로 창업하려 했던 제이슨 킴이 죽고 나자, 롤프는 하던 사업을 서둘러 정리하고 쿨라우드를 창업했죠. 이게 과연 우연일까요?”
“그렇다고 그게 베꼈다는 증거가 되지는 못합니다. 단순히 아이디어 도용이라면 별문제가 안 될 테구요.”
사실 이런 식의 폭로나 시비는 IT업계에서 흔한 일이다.
페이스노트를 만든 마이크 골든버그만 해도 동업자들과 아이디어 도용과 지분 문제를 놓고 여러 차례 소송에 휘말렸다.
“죽은 사람이 만든 걸 훔쳤으면 얘기가 다르지 않나요?”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시드에 이어 란진 쿠마르도 그렇게 말했죠. 확실히 베꼈대요. MIT 동기이자 같이 일했던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런 거 아니겠어요?”
사실 그렇게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그저 의혹을 품고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들었다고 하면 그런 거다.
난 란진 쿠마르가 했던 말은 잔뜩 부풀려서, 안 했던 말은 지어내서 전달했다. 이게 내가 혼자서 만나러 간 이유다.
“그가 제이슨이 만든 프로그램을 봤는데 미네르바 초창기 형태와 완전히 똑같았대요. 그러니까 롤프는 죽은 친구의 프로그램을 훔친 거죠.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니 이제까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은 거구요.”
데이비드는 신중하게 말했다.
“그게 사실이라면 책임을 물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입증할 만한 증거나 자료가 있습니까?”
“제이슨 킴이 사용했던 컴퓨터가 있을 겁니다. 그걸 뒤져보면 관련 자료가 나올 거예요.”
“그 컴퓨터가 어디 있습니까?”
“그의 아내가 가지고 있겠죠.”
이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나중에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 그러니 자료는 어딘가에 반드시 남아있다.
“어디를 가면 만날 수 있는지도 알아왔습니다. 일단 그녀를 만나러 가보죠.”
에이홉은 미국의 유명 팬케이크 하우스 프랜차이즈로, 오클랜드에는 지점이 한 곳밖에 없다.
아직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면 바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와 관련된 정보를 얻을 수 있겠지.
데이비드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탐정 놀이라도 하는 것 같군요.”
난 웃으며 말했다.
“재밌지 않나요?”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다는 표정이다.
* * *
오클랜드의 팬케이크 하우스 에이홉.
줄리아 위더스푼은 하이스쿨을 졸업한 뒤 이곳에서 서버로 일했다. 귀여운 외모에 상냥한 성격을 지닌 그녀는 손님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가게는 젊은 남자들로 붐볐다.
그중에는 20대 중반의 한 동양인 남성도 있었다. 그는 항상 같은 시간에 와서 같은 메뉴를 주문했고, 식사를 하면서도 항상 노트북으로 뭔가를 하고 있었다.
“반가워요.”
“아, 예예.”
숫기가 없는지 그는 그녀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다. 그저 노트북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뭘 하고 있는 거지?’
궁금한 마음에 줄리아는 슬쩍 보려다가 실수로 커피를 노트북에 엎질렀다.
“허억!”
“어머! 어떡해?”
재빨리 커피를 닦아냈지만, 노트북은 다시 켜지지 않았다.
줄리아는 허리를 숙이며 사과했다.
“정말 죄송해요. 제가 배상해드리겠습니다.”
남자는 손을 내저었다.
“괘, 괜찮습니다. 어차피 오래돼서 바꾸려고 했거든요.”
“안에 중요한 자료가 들어있지 않았나요?”
그녀의 물음에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요. 21세기에 중요한 데이터는 전부 클라우드에 있기 마련이니까요.”
“예?”
‘클라우드가 뭐지?’
줄리아가 계속해서 사과하자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그럼 혹시 저랑 영화 한 편 같이 보실래요? 평소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었는데 혼자 가기 심심해서요. 아, 아니 혼자 가도 상관없긴 한데, 같이 보면 더 재밌을 것 같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왠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요. 그럼 사과의 의미로 영화표는 제가 사게 해주세요.”
“아, 아닙니다! 제가 살게요.”
그렇게 두 사람은 첫 데이트를 했다.
그의 이름은 제이슨 킴. 한국 이름으로는 김재현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왔는데, 얼마 전 돌아가셨다.
“혹시 작가예요?”
“예?”
“항상 노트북으로 뭔가를 하고 있기에 글 쓰나 했죠.”
“아! 전 개발자예요.”
“개발자면 뭘 하는 건가요?”
“컴퓨터나 스마트폰에서 쓰는 프로그램이나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하는 일을 합니다.”
그는 무려 MIT를 나온 수재였다.
줄리아는 깜짝 놀랐다.
“MIT면 천재들만 가는 곳 아니에요?”
제이슨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렇긴 한데 사실 간신히 입학했어요. 졸업도 간신히 했고. 지금도 계속 하나씩 배워나가는 중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