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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가짜 천재 (1) (55/529)

 55화. 가짜 천재 (1)

 실리콘밸리만큼 창업과 투자가 활발하게 이뤄지는 곳도 없다.

 그렇다 보니 온갖 사기 사건들이 발생하고, 수익은 내지 못하면서도 투자자들 돈으로 연명하는 기업들도 한둘이 아니다.

 테라피스라는 메디컬 스타트업은 피 한 방울로 250종이 넘는 질병을 검사할 수 있는 신기술을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언론들은 앞다퉈서 의료계의 혁명이라며 찬사를 쏟아냈고, 스타트업의 성공 사례라며 한국 언론에까지 대대적으로 소개되었다.

 여기에는 창업자가 20대 후반의 금발 미녀라는 것도 한몫했다.

 실리콘밸리의 성공한 창업자들이 대부분 남성이고, 여자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데 외모와 실력 모두 뛰어난 여성 기업가가 혜성처럼 등장한 것이다.

 그녀는 직접 언론과 강연을 다니며 키트를 선전했고, 1년 안에 이를 제품으로 출시하겠다고 밝혔다.

 투자자들은 너도나도 투자하겠다고 줄을 섰고, 테라피스는 수십억 달러를 끌어모으며 기업가치가 100억 달러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결과는?

 그딴 거 없었다.

 테라피스가 개발했다고 하는 키트는 250종의 질병을 진단하기는커녕 15종밖에 진단하지 못했고, 이는 기존의 키트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신기술이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사실이 알려지자 테라피스의 기업가치는 하루아침에 100억 달러에서 0달러로 변했고, 투자자들은 투자금을 전부 날렸다.

 조금만 상식적으로 생각했다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처음 테라피스가 신기술을 발표했을 때부터 의학계와 과학계 전문가들은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며 의문을 제기했지만, 누구도 그들의 말을 귀담아 닫지 않았다.

 훗날 쿨라우드의 상장으로 롤프 부치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자 그에 대한 폭로나 뒷말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중요한 건 당시 폭로 중 미네르바 역시 누군가 만든 프로그램을 베꼈다는 얘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을 한 사람은 바로 란진 쿠마르.

 롤프 부치와는 MIT 컴퓨터과학과 동기이자 틴팅 창업 초기에 함께 일했고, 그가 쿨라우드를 만들기 전에 토크잇을 공동창업했다.

 난 위스키 바에서 그를 만났다.

 술을 좋아하는 걸 알고 일부러 약속 장소를 이곳으로 잡았다.

 “반갑습니다. 란진 쿠마르입니다.”

 “한미루입니다. 만나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이는 20대 후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인도계 미국인이다.

 미국이 다인종 국가라고 해도 인구의 과반은 여전히 백인이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와 실리콘밸리 일대만 놓고 보면 얘기가 다르다.

 이곳의 다수인종은 다름 아닌 동양인. 그리고 그 동양인 중 중국인과 인도인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인도의 경우 영어를 주언어로 쓰고 공과대학이 발달되어 있다 보니, 미국 IT업계에서 수많은 인도인들이 활약 중이다.

 NS 3대 CEO인 사티아 샤말란이 대표적이다.

 쿠마르는 웃으며 말했다.

 “알렉스 프레스턴과 롤프 부치에게 얼간이라고 말한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거든요.”

 “소문 빠르네요.”

 “이 업계가 원래 그렇죠.”

 하기야 그 자리에서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이것도 노림수 중 하나였다. 적의 적은 친구라고 두 사람에게 반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날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겠지.

 난 싱글몰트 위스키를 시켰다.

 “제가 살 테니 마음껏 드세요.”

 꽤나 비싼 가격이지만 정보료라고 생각하면 딱히 아깝진 않다.

 쿠마르는 사양하지 않고 마셨다. 술이 몇 잔 들어가자 표정이 바로 풀어지며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인도계 미국인 특유의 억양이 묘하게 중독성 있다. 괜히 한번 따라해 보고 싶어질 정도다.

 “그래서 절 만나자고 한 이유는 뭡니까?”

 “롤프 부치에 대해 궁금한 게 좀 있어서요.”

 쿠마르는 살짝 경계하는 빛을 내비쳤다.

 “어떤 걸 말입니까?”

 난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쿨라우드에 투자를 하기 위해 창업자들에 대한 뒷조사를 좀 해봤습니다.”

 “알렉스 프레스턴과 롤프 부치에 대해서요?”

 “예. 스타트업의 핵심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본이나 기술보다 사람을 보고 투자한다는 게 저희 회사의 방침이라서요.”

 사실 이런 방침은 없지만 내가 방금 정했다.

 “그래서요?”

 “알렉스 프레스턴은 별문제가 없는데, 롤프 부치에 대해서는 의문이 좀 들더군요.”

 “어떤 의문이요?”

 “그가 정말 천재 개발자인지에 대해서요.”

 쿠마르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난 모른 척하며 계속 말했다.

 “롤프 부치와 동업한 사람들을 여럿 만나봤는데 하나같이 이상한 말을 했습니다. 그는 천재가 아니라 남의 아이디어와 기술을 베끼는 사기꾼이라고.”

 “누가 그런 말을 했나요?”

 “그건 알려드릴 수 없습니다. 비밀을 지켜야 하니까요.”

 뻥이다. 다른 사람은 만난 적도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고 내가 비밀을 지킨다는 것을 안다면, 얘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제가 롤프를 만난 건 MIT에서였습니다. 나이는 동갑이지만 저보다 1년 먼저 입학했죠. 그때부터 그는 유명인이었어요. 남녀 할 것 없이 그와 친하게 지내고 싶어 했고, 교수들도 그를 특별하게 대했죠.”

 “그쯤 해서 틴팅을 창업하지 않았나요?”

 쿠마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롤프가 저에게 함께 일하자고 손을 내밀어줬을 때 뛸 듯이 기뻤습니다. 천재에게 인정을 받은 셈이니까요. 롤프가 한 건 초기 프로그램 제작이었어요. 당시에는 비슷한 앱이 없었기 때문에 금방 인기를 끌었죠. 업데이트와 서비스 개선은 거의 다 제 몫이었어요. 잠도 못 자고 프로그램을 뜯어고치는 일이 반복됐죠.”

 “그럼 롤프는 뭘 했나요?”

 “주로 홍보와 마케팅을 담당했죠. 투자자들을 만나러 다니기도 하고. 그런데 사람들은 모든 프로그램 작업을 롤프가 했다고 생각하더군요.”

 사실 창업자가 모든 프로그램을 다 만들 이유는 없다.

 아이디어만 제시하고 개발은 다른 사람을 시키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반대로 아이디어를 얻어서 개발은 자신이 하거나, 마무리 작업만 손대는 일도 있고.

 어느 쪽이든 딱히 잘못된 행동은 아니다.

 그런데 롤프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자신의 입으로 모든 걸 자신이 했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개발자들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리 없겠지.

 “어쨌거나 틴팅은 큰 성공을 거뒀어요. 회사가 매각되며 롤프는 12억 달러를 챙겼고, 저도 1억 5천만 달러를 벌었죠. 그 점에 대해서는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때 롤프가 끼워주지 않았다면 월급쟁이로 살았을 테니까요.”

 “그 후에도 사업을 같이 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예. 잘 안 됐지만요.”

 실리콘밸리에서는 하루에도 수백, 수천 개의 스타트업이 생겨나지만 그중 성공하는 것은 백 개 중 하나가 안 된다.

 쿠마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토크잇이라고 익명을 기반으로 소통할 수 있는 SNS를 만들 생각이었어요. 원래는 다른 사람과 함께할 생각이었는데 제가 만든 프로그램을 본 롤프가 동업을 제안해서 함께하게 됐죠. 초기에는 괜찮았어요. 롤프 부치가 창업했다고 하니 언론이 알아서 홍보를 해주었고 이용자는 꾸준히 늘었죠. 투자하겠다고 나선 벤처캐피탈도 많았고.”

 “그런데 왜 실패한 건가요?”

 “불량이용자들을 걸러내지 못했으니까요. 익명으로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다는 건 장점이자 단점이었죠. 멀쩡한 사람도 익명 뒤에 숨으면 못할 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요.”

 사이버불링은 흔한 일이 되었다. 심지어는 익명성을 이용한 마약 거래나 성매매까지 벌어졌다.

 그렇다고 운영진이 모든 대화를 실시간으로 감시하며 필터링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롤프는 문제가 되는 대화를 감시하고 차단할 수 있도록 개선하겠다고 자신했지만 그러지 못했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처럼, 불량이용자들이 늘어나자 일반 이용자들은 점점 토크잇을 멀리하게 되었다.

 뒤늦게 금칙어를 설정하고 필터링을 강화했지만 이는 선량한 이용자들의 피해로 이어졌다.

 결국 성장세는 둔화되고 이용자가 줄기 시작했다.

 “그래도 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문제는 조금씩 해결되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롤프가 쿨라우드를 창업하느라 손을 떼며 상황이 급격히 악화됐어요. 롤프가 떠난 것도 떠난 거지만, 직원 한 명을 빼갔거든요.”

 “시드 루카스요?”

 “맞습니다. 있을 때는 잘 몰랐는데, 없으니 그가 그동안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지 알겠더군요.”

 이런 걸 보면 정말이지 천재를 알아보는 눈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모양이다.

 쿠마르는 비웃듯 말했다.

 “롤프는 항상 자신이 성공한 사업가처럼 보이길 바랐어요. 그래서 비용은 신경 쓰지 않고 가장 좋은 곳에 사무실을 차리고 마케팅에 엄청난 돈을 쏟아부었죠. 투자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기꺼이 거액을 투자했구요. 이제야 깨달았는데, 투자자들은 실력을 보는 게 아니라 명성만 봅니다. 제 입으로 말하긴 뭐 하지만 실리콘밸리 창업자들 중 절반은 사기꾼일걸요.”

 스타트업들 대부분이 수익 없이 투자자들 돈으로 연명하는 게 현실이다. 여기서 성공하면 사업가가 되는 거고, 실패하면 사기꾼이 되는 거다.

 여기까지는 어차피 알고 있었던 얘기다.

 난 알고 싶은 얘기를 듣기 위해 슬슬 미끼를 던졌다.

 “롤프가 미네르바를 개발한 게 맞습니까?”

 그 말에 쿠마르의 표정이 변했다.

 난 그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그는 어째서 롤프 부치에 대해 폭로를 했을까?

 모두에게 진실을 알리고 싶어서? 정의를 위해서?

 천만에.

 롤프 부치가 나쁜 놈이라고 해서 그걸 폭로한 란진 쿠마르가 착하다는 건 아니다. 그는 그저 롤프를 끌어내리고 싶었을 뿐이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뒤에서 남의 성공에 대해 비난하는 건 쉬운 일이다. 상대가 정말로 잘못한 게 있다면 더더욱 그렇겠지.

 테라피스는 공개 시연을 거부하는 것은 물론이고, 투자자들에게도 기술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제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언론은 그녀의 성공 신화를 써재꼈고, 투자자들은 기꺼이 투자금을 밀어 넣었다.

 만약 그녀가 금발 미녀 CEO가 아니었어도 모두가 그렇게 관심을 가졌을까?

 결국 모두가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와 그럴듯한 비전에 속아 넘어갔을 뿐이다.

 여기서 웃긴 건 그 금발조차도 사실이 아니었다는 거다. 원래 머리카락은 검은색인데 금발로 염색했을 뿐이지.

 거품은 터지기 전까지는 거품인지 모른다.

 내가 롤프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건 훗날 폭로와 소송으로 인해 그의 실체가 드러났기 때문.

 데이비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사실 비슷한 서비스를 내놓거나 베끼는 건 IT업계에서 흔한 일입니다. 이런 일로 소송도 많이 벌어지곤 하죠.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명확한 증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조사를 좀 해보려구요.”

 “어떻게 말입니까?”

 난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롤프의 옛 동료를 한 번 만나보기로 했어요.”

 SNS 덕분에 모르는 사람에게도 연락하기가 쉬운 세상이다. 컨티뉴 캐피탈이라고 소개하자 바로 만나고 싶다는 답이 돌아왔다.

 “혼자 다녀올게요.”

 * * *

 사람은 성공할수록 친구와 친척이 많아진다. 동시에 시기 질투하는 적들 역시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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