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프리즈너 (2)
그전까지 번 돈을 전부 쏟아부은 것은 물론이고 대출까지 받았다.
지금은 퇴물로 불리지만 한때 잠깐 유명배우였던 네이트 호르비츠를 섭외해 주연으로 내세웠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좀비네이도다.
그런데······.
대박을 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성적은 저조했다. 케이블TV와 OTT 등에 배급하며 간신히 제작비 절반을 회수하긴 했지만, 나머지는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좀비네이도로 발생한 손실은 무려 100만 달러!
영화 한 편 제작에 1억 달러씩 쏟아붓는 대형 영화사 입장에서 100만 달러 손실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중소 영화사에게는 회사가 휘청거릴 정도의 충격이었다.
게다가 좀비네이도가 당연히 성공할 걸로 예상하고 바로 2편 제작에 들어간 것도 문제였다.
빚을 갚기 위해서는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미 망한 영화의 후속작에 누가 투자를 하겠는가?
스태프들 월급 주기도 힘든 상황이 되며 촬영은 무기한 중단됐다.
“아무래도 투자를 받아야 할 것 같아.”
“어쩔 수 없지.”
B급 영화사들은 하루에도 수없이 생겼다가 수없이 망한다. 투자를 받기 원하는 B급 영화사들은 널려있었다.
다행히 투자회사와 영화사 등에서 관심을 보였다.
문제는 조건. 투자자들은 좀비네이도2의 제작 중단과 시나리오 편집 권한 등을 요구했다.
이는 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고민하는 그들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 * *
LA 버뱅크의 허름한 창고.
한미루와 데이비드 록허트가 프리즈너의 본사에 들어서자 30대 중반의 남자 둘이 그들을 맞이했다.
한 명은 큰 키에 창백한 피부의 백인이고, 다른 한 명은 작은 키에 후덕하게 배가 나온 히스패닉계다.
이 둘이 바로 프리즈너의 공동 창업자이자 경영자인 사이먼 라이너스와 페르난도 산체스다.
“반갑습니다.”
네 사람은 반갑게 악수를 나눴다.
“저희 영화사에 투자를 하고 싶으시다구요?”
사이먼의 물음에 한미루가 말했다.
“단순 투자가 아니라, 프리즈너 영화사를 인수하고 싶습니다.”
그 말에 두 사람은 당황했다.
“저희는 영화사를 매각할 생각이······.”
“인수 금액으로 300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
사이먼은 재빨리 입을 다물었고, 페르난도는 놀라 소리쳤다.
“300만 달러!”
거절하기에는 너무 큰 금액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눈빛을 교환했다.
“그게 정말입니까?”
“예. 정확히는 지분을 인수하는 대가로 200만 달러를 드리고, 회사 빚 100만 달러를 상환하겠습니다.”
현재 프리즈너의 자산은 없다고 봐도 좋다.
그나마 돈이 될만한 건 이제까지 찍은 영화 열한 편. 이 영화들이 방영되거나 판매될 때마다 저작권료가 들어오고 있지만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다.
“어째서 저희 영화사를 인수하겠다는 겁니까?”
대답은 놀라웠다.
“제가 좀비네이도 팬라서요. 이번에 2편 제작이 중지됐다는 얘기를 듣고, 인수해서 제작을 지원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페르난드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영화사를 인수하는 것뿐 아니라 좀비네이도2 제작까지 지원하겠다니!
“정말입니까?”
“그럼요. 혹시 2편 제작비로 얼마를 생각하고 계신가요?”
“200만 달러인데······ 아! CG를 좀 줄이면 170만 달러로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한미루는 시원스럽게 말했다.
“좀비네이도2 제작을 위해 당장 200만 달러를 투자하겠습니다. 제작비가 없다고 CG를 줄여서야 쓰나요? 원하시는 CG 마음껏 넣으세요.”
“허억!”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영화를 찍고 싶어 커다란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그런데 이거 몇 편까지 제작할 예정인가요?”
“시나리오는 12편까지 구상해 놓았습니다.
“음······.”
데이비드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그런 영화를 11편이나 더 만들겠다고?’
한미루도 좀 놀랐다.
‘회귀하기 전에 8편까지 봤던 것 같은데. 그 뒤로 네 편이 더 있을 줄이야!’
사이먼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가 영화사를 설립한 건 자본에 휘둘리지 않고 저희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기 위함입니다.”
“투자는 하되 제작에는 아무 관여도 하지 말라는 겁니까?”
투자자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다.
보통 투자사는 시나리오부터 배우, 촬영, PPL까지 일일이 간섭한다. 할리우드 대형 영화사들만 해도 투자자들과의 의견충돌로 인해 감독이 하차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러나 사이먼은 이 부분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한미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예?”
“제작과 운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이 부분은 아예 계약서에 명시하겠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표정이었다.
사실 계약서에 쓴다고 해서 투자자의 간섭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말을 안 들으면 돈줄을 끊어버리면 그만이니까.
“또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매 편마다 최소 200만 달러의 제작비를 책정하겠습니다. 지금처럼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드시면 됩니다.”
페르난도가 먼저 반응했다.
“정말입니까?”
“예. 좀비네이도는 단지 영화가 아닌 하나의 예술입니다. 예술은 예술가의 손에 맡겨야지, 저 같은 문외한이 뭘 안다고 끼어들겠습니까? 제작에 간섭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데이비드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게 예술이었어?’
혹시 자신만 예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사이먼과 페르난도는 감격을 금치 못했다.
이렇게 자신들의 예술혼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더 이상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좋습니다. 계약하겠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데이비드는 가지고 온 계약서를 그들에게 내밀었고, 두 사람은 지분을 넘기는데 서명했다.
이제 프리즈너는 컨티뉴 캐피탈의 소유가 되었다.
한미루는 그들에게 말했다.
“라이너스 씨는 CEO로서 지금처럼 계속 영화사를 이끌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산체스 감독님께서는 가능한 빨리 좀비네이도2의 촬영을 재개해주세요. 많은 팬들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 * *
투자를 끝마친 우리는 근처 식당에 앉아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열심히 팬케이크와 오믈렛을 먹는데, 데이비드는 손을 대지 않았다.
“표정이 왜 그래요?”
“제 표정이 어떻습니까?”
“지금이라도 샤크 매니지먼트로 이직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 표정인데요.”
“······.”
왜 대답을 못 해? 설마 정곡을 찔렀나?
데이비드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정말로 좀비네이도를 재밌게 봐서 투자하신 겁니까?”
“그 이유도 있지만, 돈이 될 것 같아서 투자한 거죠.”
어차피 내가 투자하지 않아도 프리즈너는 매각되고 좀비네이도2는 제작된다. 지금은 그 역할을 내가 할 뿐이지.
“영화사를 인수한 300만 달러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럼 뭐가 문제인가요?”
“투자비가 지속적으로 들어간다는 게 문제입니다. 영화 제작비는 처음 예상과는 달리 불어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잘못하다가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상황이 될 겁니다.”
“좀비네이도2가 대박을 치면 되지 않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데, 좀비네이도는 그냥 제멋대로 만든 병맛 영화가 아니다. 의외로 스토리가 치밀하고 탄탄하고 개연성이 완벽하다.
1편에서 뜬금없이 보이는 장면도 6편쯤 되면 이유가 나오고, 뿌려놓은 떡밥도 완벽하게 회수한다.
괜히 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인기를 끈 게 아니지.
“말씀대로 대박을 친다 해도 케이블TV와 OTT에 판권을 팔아서 얻는 수익은 한계가 분명합니다.”
“그럼 극장 개봉을 하면 되지 않을까요?”
데이비드는 어이없어하며 물었다.
“1편도 극장 개봉을 안 했는데 2편을 극장 개봉하겠다구요?”
“안 될 것도 없죠.”
좀비네이도2는 출시 초기 1편과 마찬가지로 케이블TV와 OTT에 보급됐다.
그러다가 입소문을 타며 좀비 마니아들 사이에서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고, 소규모 극장 상영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좀 황당한 상황이 벌어졌다.
마침 극장가에 ‘퍼펙트네이도’라는 영화가 개봉한 것이다.
강력한 토네이도가 캘리포니아를 덮치는 재난영화로 스티븐 테일러가 감독을, 빈센트 버리와 제시카 에드워드라는 할리우드 최고스타가 주연을 맡았다.
제작비는 무려 2억 달러.
그야말로 할리우드 초대형 블록버스터로 여름 극장가를 휩쓸 최고의 작품이라고 모두가 기대하는 작품이었다.
그런데 좀비네이도2의 부제도 하필 ‘퍼펙트네이도’였다!
포스터에 부제를 더 크게 적어놓는 바람에 ‘퍼펙트네이도’를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은 관객들이 착각해서 ‘좀비네이도2’를 보는 상황이 벌어졌다.
재난 블록버스터 영화인 줄 알고 봤는데, 토네이도에서 좀비가 쏟아져 나오자 관객들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고, 여러 뉴스에 나올 정도였다.
퍼펙트네이도를 배급한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프리즈너를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놨지만, ‘퍼펙트네이도’라는 단어를 프리즈너가 먼저 썼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웃음거리가 되었다.
좀비네이도가 유명해지자 관객들이 몰리며 상영관은 급속도로 늘어났다. 퍼펙트네이도가 내려간 자리에 좀비네이도2가 걸렸다.
그렇게 좀비네이도2는 초대박을 치며 좀비네이도 시리즈는 회사를 먹여 살리는 프랜차이즈로 성장한다.
내가 회귀하기 전까지 8편에 스핀오프가 두 편 나왔으니, 1년에 한 편은 꾸준히 나온 셈이다.
그리고 한 광팬의 지원 덕분에 페르난도 산체스 감독은 나중에는 스타워즈를 능가하는 새로운 SF 프랜차이즈를 만들어낸다.
프리즈너는 디즈니의 아성을 위협하는 메이저 영화사로 성장하지만, 어차피 그건 나중의 이야기.
“사실 프리즈너를 인수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어요.”
“그게 뭡니까?”
난 팬케이크를 먹으며 말했다.
“조만간 알게 될 거예요.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 * *
다음 목적지는 산타모니카.
“이번에는 어디에 투자하러 가는 겁니까?”
데이비드의 물음에 난 대답 대신 질문했다.
“게임 좋아하세요?”
“즐겨하진 않습니다.”
하기야 그동안 공부하고 회사 다니고 아이 키우느라 게임을 즐길 만한 여유가 없었겠지.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게임을 즐겨한다.
“그럼 게임산업의 미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매우 유망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째서요?”
“여가시간이 점점 늘어나고 있으니까요. 여가시간 증가는 게임 수요 증가와 연결되죠. 아마 산업 규모는 향후 폭발적으로 커질 겁니다.”
지금도 매년 콘텐츠 산업은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중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폭의 성장을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게임.
게임이 애들 놀이라는 것도 다 옛말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음악과 영화가 훨씬 대중적이고, 게임은 소수의 마니아들만 즐긴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용자 수로 보면 이 말이 맞다. 그러나 산업 규모로 보면 전혀 다르다.
게임은 현재 세계적인 콘텐츠이자 IT산업의 핵심.
세계 게임산업 규모는 음악과 영화를 합친 것보다도 크다. 게다가 어느 정도 정체 상태인 다른 문화산업과는 달리 매년 20퍼센트 가까운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