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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프리즈너 (1) (46/529)

 46화. 프리즈너 (1)

 내 말에 데이비드는 피식 웃었다.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네요.”

 그는 나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뭔가요?”

 “제 고용계약서입니다. 제 손으로 이런 서류를 만들어오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난 그것을 한 번 훑어본 다음 사인했다.

 “제가 뭘 하면 되는 겁니까?”

 “대표로서 컨티뉴 캐피탈을 이끌어주시면 됩니다. 저와는 공동대표지만, 전 어차피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현재는 대표만 둘뿐인 회사인 셈이다.

 정식으로 고용계약이 이뤄진 만큼 난 바로 회사의 재무상황을 공개했다.

 “계약금을 지급하고 남은 돈은 1억 1200만 달러입니다.”

 “그렇군요.”

 데이비드는 살짝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1억 1200만 달러면 개인에게는 상상도 못 할 거액이지만, 사모펀드가 운용하기에는 적은 돈이다.

 어디 가서 투자사라고 명함이라도 내밀려면 10억 달러는 있어야 한다.

 투자회사에 있어서 자본 규모란 대단히 중요하다. 돈이 없으면 아예 판에 끼지도 못하니까.

 “그런데 이 돈은 어떻게 마련한 겁니까? 어디서 투자를 받은 겁니까?”

 “아니요. 제가 열심히 벌었습니다.”

 “정말입니까?”

 “예.”

 “······어떻게 말입니까?”

 개인이 1억 달러를 번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앞으로 계속 같이 일하려면 의문을 해소시켜줄 필요가 있다.

 난 그에게 말했다.

 “궁금한 거 있으면 마음껏 질문하세요.”

 * * *

 안 그래도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데이비드는 제일 먼저 프리머스 펀드에 대해 질문했다.

 “펀드 부실은 어떻게 알아낸 겁니까?”

 “트리플A 채권에만 투자하는 것치고는 수익률이 너무 높았거든요. 금리 변화와는 무관하게 계속 일정한 수익률을 보이기도 했구요. 그래서 매매내역을 좀 조사해봤는데 안 맞는 부분이 있어서 그때부터 의심을 품게 된 거죠.”

 알고 보면 우스울 정도로 간단하다. 오히려 그동안 아무도 이걸 눈치채지 못했다는 게 신기할 정도다.

 원래 사기라는 게 밝혀지고 나면 왜 속았나 싶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모두가 속고 있는 상황에서 진실을 밝혀낸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뒤의 얘기도 꽤나 흥미진진했다.

 “작전주에 올라타 10배를 벌고, 그다음 정크본드에 투자해 또 10배를 벌었다는 겁니까?”

 “예.”

 작전주에 투자해 10배를 번 건 그다지 대단할 게 없다. 정보만 확실하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정크본드 투자는 좀 달랐다.

 “유재호 회장을 직접 만났다는 겁니까?”

 “예. 유성그룹 본사가 저희 동네에 있어서요. 집에서 별로 안 멀더라구요.”

 “······유성그룹 회장이 같은 동네면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입니까?”

 유성전자는 글로벌 IT 대기업이자 반도체 시장의 최강자.

 때문에 유재호 회장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당연히 일반인이 만나고 싶다고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아! 다행히 아까 말씀드렸던 입사 동기가 연결시켜줬어요. 재벌들끼리는 서로 친분이 있거든요.”

 유재호 회장을 설득해서 동우정밀 인수를 성사시켰다는 부분에서는 저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하나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뭔가요?”

 “만약 유재호 회장이 인수를 거절했다면 BW는 휴지 조각이 됐을 거 아닙니까? 만날지 못 만날지 알 수 없었고, 설득을 할지 못 할지 알 수 없었을 텐데, 왜 먼저 매수를 한 다음 만난 겁니까? 유재호 회장을 만나 설득한 다음 매수를 했어야 하지 않나요?”

 그 물음에 한미루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잘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남에게 인수하라고 할 정도로 좋은 기업이라면 제가 먼저 사는 게 맞지 않겠어요?”

 말이 쉽지 웬만큼 배짱이 없이는 못할 일이다.

 ‘IB에 입사한 지 반년만에 부실을 폭로하고 회사를 나온 다음, 작전주와 정크본드 투자로 투자금을 100배로 불렸다니.’

 쉽게 믿기지 않는 얘기다.

 시장에는 10배씩 오르는 투자상품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거기에 뛰어들어 돈을 버는 사람은 극소수다.

 뭐든 말로 하는 건 쉽다. 실행에 옮기는 게 힘들 뿐이지.

 그런데 그는 그걸 해냈다.

 ‘역시 보통 사람은 아닌 건가?’

 데이비드는 곰곰이 생각한 다음 입을 열었다.

 “컨티뉴 캐피탈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한미루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세계 최고죠. 그게 아니었으면 이 돈 가지고 평생 놀고먹었지, 뭐 하러 회사를 차렸겠어요?”

 “하하.”

 데이비드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른 건 몰라도 이 사람과 함께 일하면 심심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됩니까?”

 “성장성이 높은 스타트업에 투자할 생각입니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텐데요.”

 “그렇겠죠.”

 역사와 전통이 있는 상장기업보다는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비상장기업의 성장세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만큼 위험성이 뒤따른다. 그게 쉬웠다면 너도나도 투자했겠지.

 스타트업 열 개 중 아홉은 3년 안에 망한다. 그중 대박이 터지는 곳은 또 열 개 중 하나.

 확률은 채 1퍼센트도 안 된다.

 실제로 데이비드가 몸담았던 빅토리 인베스트먼트는 스타트업에 잘못 투자했다가 망했다.

 전문가들이 철저한 분석을 통해 투자를 한 사모펀드들도 투자에 실패할 정도로 스타트업 투자가 만만하진 않다.

 그러나 한미루는 자신만만했다. 마치 무슨 기업이 잘될지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미 투자할 기업들을 골라놨습니다.”

 “예?”

 “자세한 얘기는 가면서 하죠.”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 * *

 목적지는 LA.

 예산을 아끼기 위해 우리는 이코노미석에 올라탔다. 다행히 데이비드는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좁은 좌석에 몸을 실으니 문득 크리스에게 양보한 ‘무료 비즈니스 탑승권’이 그리워졌다. 괜히 양보했나?

 난 비행기를 타고 가며 그에게 숀 오코너에게 보낼 계약서 작성을 부탁했다.

 데이비드는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어제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 청년에게 10만 달러를 투자했다는 겁니까?”

 “예.”

 “어째서요?”

 “거기 햄버거가 맛있었거든요.”

 내 말에 데이비드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햄버거가 맛있다는 이유로 투자를 결정했다는 겁니까?”

 난 태연하게 말했다.

 “하던 사업이 잘 안 되더라도, 그 햄버거만 만들어서 팔아도 원금 회수는 문제가 없을걸요. 뉴욕 최고의 햄버거였다니까요. 나중에 한번 꼭 먹어봐요.”

 “······.”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는 숀 오코너에게 보낼 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러면서 맛이 궁금하긴 한지 가게 이름과 위치를 물어보았다.

 “햄버거 좋아하시나 봐요?”

 “딸이 엄청 좋아합니다. 자주 먹지는 못하지만요. 그렇게 말씀하시니 꼭 사다주고 싶네요.”

 역시 딸바보답다.

 딸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웃음을 짓던 그는 나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떤 기업에 투자를 하러 가는 겁니까?”

 “영화 좋아하세요?”

 데이비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합니다. 시간이 없어서 많이는 못 봤지만요.”

 세상에 영화 싫어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

 “그럼 좋아하는 영화는요?”

 “가벼운 코미디나 액션을 좋아합니다.”

 “의외네요.”

 “그럼 어떤 영화를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습니까?”

 “시민 케인, 대부, 벤허, 쇼생크 탈출 같은?”

 내 말에 데이비드는 피식 웃었다.

 “싫어하진 않습니다. 다만 영화 보면서까지 복잡한 생각을 하고 싶지는 않아서요.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가 좋습니다.”

 “가벼운 영화 좋아한다니 다행이네요. 제가 영화 한 편 추천드릴게요.”

 “어떤 영화입니까?”

 “보면 아실 겁니다.”

 내가 태블릿을 꺼내 건네주자, 그가 물었다.

 “지금 보라는 겁니까?”

 “예. 업무라고 생각하고 보세요. 어차피 비행기 안에서 할 일도 없잖아요.”

 “알겠습니다. 영화 보는 것은 오랜만이로군요.”

 데이비드는 태블릿을 거치해 놓고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영화사 로고와 함께 영화가 시작됐다. 그렇게 5분이 지났을까? 그는 놀란 표정으로 플레이를 중단하고 이어폰을 빼며 나를 보았다.

 “이게 대체······.”

 난 그에게 말했다.

 “일단 계속 보세요. 얘기는 다 보고 나서 하죠.”

 “하지만······.”

 “끝까지 다 봐야 합니다.”

 “그러나······.”

 “어서 이어폰 끼세요.”

 내 강권에 그는 다시 이어폰을 꼈고, 난 친절하게 플레이를 눌러주었다.

 * * *

 2시간이 흘렀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자 데이비드는 다시 이어폰을 뺐다.

 한미루는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어땠나요?”

 엄청난 문화적 충격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 정도였다.

 한참 후, 그는 신음성처럼 말했다.

 “이게 대체 뭔 영화입니까?”

 영화 제목은 좀비네이도(Zombienado).

 대충 좀비를 빨아들인 토네이도가 도시를 덮치는 바람에 하늘에서 좀비가 비처럼 떨어지고, 주인공 가족이 맞서 싸운다는 내용이었다.

 스토리만 들어도 이 세상 감성이 아닌데, 여기에 엉망인 CG와 발연기는 덤이다.

 ‘이런 걸 B급 영화라고 하는 건가?’

 아니, 이건 B급 영화 그 이상이다!

 살면서 이런 영화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다.

 “재밌지 않아요?”

 “재미요? 이게 재밌다는 겁니까?”

 “어! 재밌다는 사람 많은데.”

 데이비드는 따지듯 물었다.

 “대체 이 영화를 왜 보라고 하신 겁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여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 이 영화를 만든 영화사를 인수하러 가는 길이거든요.”

 “예?”

 “지금 예산이 없어서 좀비네이도2 제작이 중단됐대요. 그래서 제가 인수해서 제작시키려구요.”

 “아······.”

 데이비드는 고지식할 정도로 원칙과 고집이 있었다. 그는 힘들 때 받은 은혜를 잊지 않았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컨티뉴 캐피탈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이 얘기를 듣자 생각이 좀 달라졌다.

 ‘젠장, 아무래도 잘못 들어온 것 같은데. 지금이라도 그만두겠다고 해야 하나?’

 * * *

 사이먼 라이너스와 페르난도 산체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대학 동아리에서였다. 그들은 영화광이었고 놀라울 정도로 취향이 비슷했다.

 무엇보다 둘은 할리우드에 대한 강한 반감을 지니고 있었다.

 “요즘 할리우드 영화들은 엉망이야.”

 “영화가 뭔지도 모르는 투자자들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말이나 돼?”

 “자본에 휘둘리는 영화는 진정한 영화가 아니야!”

 “할리우드 꺼지라고 해!”

 두 사람은 졸업한 뒤 의기투합해 영화사를 만들었다.

 그렇게 프리즈너가 탄생했다.

 할리우드 거대자본에 휘둘리는 않는 그들만의 영화를 만드는 게 목표였다.

 공동대표 체제지만 페르난도가 감독을 맡다 보니, 영화사를 꾸려나가는 것은 자연히 사이먼의 몫이 되었다.

 그들은 외부 투자를 전혀 받지 않고 저예산 영화를 제작했다.

 그렇게 만든 영화는 케이블TV와 OTT에 공급하며 제작비를 메우고, 다음 영화를 찍을 예산을 확보하는 식이었다.

 5년 동안 십여 편의 영화를 제작했고, 나름 프리즈너의 영화를 좋아하는 팬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스케일을 좀 더 키워보기로 했다.

 메가폰을 잡은 페르난도 산체스는 호기롭게 소리쳤다.

 “할리우드 머저리들에게 진정한 영화가 뭔지를 보여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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