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트리시 오코너 (1)
내 말에 트리시는 눈웃음을 지었다.
“돈도 있고, 사람 보는 눈도 있고. 기대가 크네요. 회사 이름이 뭐라고 했죠?”
“컨티뉴 캐피탈이요.”
“정말로 화이트로드보다 큰 투자회사로 만들 생각이에요?”
“그럼요. 생각해보니 대단히 운이 좋으시네요.”
“어째서요?”
“세계 최대 투자회사의 시작을 목격했으니까요.”
그녀는 웃음을 터트렸다.
“푸훗!”
“어! 비웃는 건 아니죠?”
트리시는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렇게 보였다면 미안해요.”
“저도 농담이에요. 보다시피 아직은 제대로 된 사무실도 없어서 카페에서 미팅 중이거든요.”
“그렇게 따지면 차고에서 친구와 함께 컴퓨터를 조립하며 창업한 회사가 세계 최대 IT기업이 됐죠. 작은 인터넷 서점은 지금 세계 최대 온라인마켓이 됐구요.”
“엔플과 AMZ 얘기네요.”
그 회사들도 시작은 초라했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내 목표는 그보다 크다.
10년 안에 그 둘을 합친 것보다 큰 기업을 만들 생각이니까.
트리시는 수첩을 꺼내 컨티뉴 캐피탈이라는 이름을 적었다.
“언젠가는 제가 컨티뉴 캐피탈에 대한 기사를 쓰게 될지도 모르겠네요.”
그 시기는 그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를 것이다.
“아! 이 사실은 당분간 비밀로 해주세요.”
“어째서요?”
난 씨익 웃으며 말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밝혀야 재밌잖아요.”
내 말에 그녀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흐음, 맨입으로요?”
“커피 한잔 사드릴까요?”
“이렇게 하죠. 기사 낼 게 생기면 월스트리트타임즈에 먼저 알려줘요.”
난 잠시 생각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더해서 나중에 독점 인터뷰까지요.”
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죠.”
트리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이제 일 끝나서 저녁 먹으러 갈 건데, 같이 갈래요?”
안 그래도 뭔가 먹으러 갈 생각이었다.
“뭐 먹을 거예요?”
“햄버거 어때요? 자주 가는 집이 있는데.”
“거기 맛있어요?”
“그럼요. 뉴요커로서 말하는데 뉴욕 최고의 햄버거집이에요.”
현지인의 맛집 추천은 못 참지.
난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죠.”
* * *
따라 들어간 곳은 골목길 안쪽에는 허름한 펍이었다.
가게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험상궂게 생긴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햄버거를 먹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쉽게 들어가기 힘든 분위기다.
왠지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온 것 같은 느낌인데.
내가 입구에서 머뭇거리자 트리시가 물었다.
“왜 그래요?”
“아니······.”
갑자기 모르는 사람이 맛있는 거 사준다고 하면 따라가지 말라고 한 엄마 말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지금이라도 돌아가려고 하는데 트리시가 내 어깨를 앞으로 밀었다.
“어서 들어가요.”
얼떨결에 안으로 들어가자 한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난 상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2미터는 될 법한 키에 얼굴 전체가 붉은색 수염으로 덮여 있고, 근육질 팔에는 타투가 가득했다.
누구지? 해적인가?
여긴 털어갈 것도 없어 보이는데.
트리시는 반갑게 소리쳤다.
“아빠!”
“오! 트리시!”
트리시는 거구의 중년 남자의 품에 안겼다.
“······.”
아빠였어? 전혀 안 닮았는데?
트리시는 남자를 소개시켜주었다.
“인사해요. 저희 아빠. 이 가게 주인이에요.”
“아빠요?”
뉴욕 최고의 햄버거집이라더니 자기 집이었어?
이렇게 낚일 줄이야!
그는 나를 보며 눈을 부라렸다.
“이 친구는 누구야? 설마 보이프렌드?”
재빨리 ‘그냥 프렌드도 아닙니다’라고 말하려는데, 트리시가 핀잔을 주듯 말했다.
“그냥 손님이에요.”
그는 솥뚜껑 같은 손으로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하하! 어서 오게.”
“······네.”
어깨가 아프다. 설마 멍들진 않겠지?
난 트리시와 함께 구석에 있는 자리에 앉았다.
“어때요?”
“분위기 좋은데요.”
“잠깐 기다려요. 맥주 가져올게요.”
가게 안을 둘러보니 벽 한쪽에는 아일랜드 국기가 걸려있었다. 여긴 아이리시펍인 건가?
그녀는 먼저 맥주를 가져왔다. 색이 짙은 흑맥주다.
“일단 한잔해요.”
우리는 잔을 부딪쳤다.
난 그녀에게 물었다.
“왜 거짓말했어요?”
“뭐가요?”
“뉴욕 최고의 햄버거집으로 안내한다면서요?”
트리시는 웃음을 지었다.
“맞아요. 먹어보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알걸요.”
자신만만하다.
잠시 후, 트리시는 햄버거를 가져다주었다.
특이하게도 안에 스크램블드에그가 들어가 있었다. 비주얼만 봐서는 큰 기대가 되지 않았다. 햄버거가 맛있어봐야 햄버거지.
어쨌거나 배가 고팠기에 일단 먹기로 했다.
난 햄버거를 들고 한입 베어 물었다. 그 순간 좀 놀랐다.
내 표정을 본 트리시는 웃으며 물었다.
“제 말이 맞죠?
난 인정했다.
“진짜 맛있네요.”
뉴욕 최고의 햄버거라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다.
빵은 부드럽고 패티는 촉촉하다. 양상추와 토마토의 상큼함과 패티의 기름기와 짠맛이 적절하게 어우러져 있었다.
이런 햄버거라면 줄을 서서라도 사먹을 만하다.
그런데 한 번 먹어본 것 같은 맛인데. 내가 이걸 어디서 먹었더라?
난 잠시 생각한 끝에 떠올렸다.
“아! 오코너 버거!”
실리콘밸리의 명물로 유명한 햄버거다.
강남에 1호점이 들어섰을 때 선우와 함께 줄서서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거 하나 먹겠다고 한여름 땡볕 아래 세 시간을 기다렸는데.
뉴욕의 한 펍에서 시작됐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그게 여기였구나.
내 기억에 이 정도로까지 맛있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여긴 본점이라 다른 건가?
트리시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메뉴 이름을 어떻게 알았어요? 혹시 먹어본 적 있어요?”
“아, 아니요.”
오코너 버거가 한국에 들어오는 건 5년 뒤쯤의 얘기다. 지금은 미국에서도 잘 안 알려져 있겠지.
난 계속해서 햄버거를 먹었다.
“정말 맛있네요. 빵이 좀 특이한 것 같은데.”
“감자가 들어가거든요.”
“감자요?”
트리시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아일랜드인은 감자를 좋아하잖아요.”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요?”
아일랜드와 감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한때는 감자가 주식이었으나 19세기 중반 감자 역병이 휩쓰는 바람에 아사자가 속출했다.
일명 아일랜드 대기근이다.
아일랜드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대거 미국으로 이주했다. 아마 그녀의 조상 역시 그때 미국으로 건너왔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미국 백인들 중에는 아일랜드계가 많은 편이다.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이런 허름한 펍에서 파는 햄버거가 몇 년 후면 세계인이 즐겨먹는 프랜차이즈가 되다니. 이 사실을 지금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겠지?
배가 고팠던지라 난 순식간에 햄버거를 다 먹었다.
제법 양이 많았는데도 왠지 아쉽다.
하나 더 시켜도 되나?
그렇게 생각하는데 한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붉은색 머리카락에 2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백인이다.
앞치마와 위생모를 보니 방금 주방에서 나온 듯한 모습이다.
그는 트리시를 향해 말했다.
“가게에는 웬일이야?”
트리시는 남자를 소개시켜주었다.
“여기는 제 오빠 숀이에요.”
난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한미루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햄버거는 어떠셨어요?”
“정말 맛있었습니다.”
“하하! 그렇죠? 하긴 맨날 먹은 저조차도 가끔 생각날 정도의 맛이니까요.”
트리시는 내 소개를 해주었다.
“이분은······ 한국에서 온 유명한 투자자예요.”
“정말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유명하진 않지만 투자자인 건 맞아요.”
앞치마를 풀고 트리시의 옆에 앉은 숀은 호기심을 나타냈다.
“어떤 투자를 하시나요?”
“벤처캐피탈이랄까요? 지금은 뜰 만한 기업을 찾아 투자 중이에요.”
“그래요? 사실 제가 얼마 전 실리콘밸리에서 친구와 함께 창업을 했는데.”
“여기서 일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잠깐 집에 돌아온 김에 도와드리는 거예요. 모레 다시 돌아갈 겁니다.”
이곳 맨해튼이 미국 금융의 중심지라면, 실리콘밸리는 미국 IT산업의 중심지. 지금도 수많은 스타트업들이 태어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어떤 아이템인가요?”
“푸드트럭을 추적하는 앱입니다.”
그는 신나서 설명을 해주었다.
실리콘밸리 주변에는 여러 푸드트럭들이 장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 트럭은 날짜에 따라 각각 영업시간과 위치가 다르다.
그래서 푸드트럭의 위치를 추적하고 실시간으로 예약과 결제를 할 수 있는 앱을 만들 생각이었다.
숀은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바쁘고, 그들에게 꼭 필요한 시스템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투자자로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음······.”
응. 그거 망해.
사실 아이디어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다.
문제는 비슷한 서비스가 이미 있다. 기존의 식당 예약 앱을 만든 회사가 범위를 푸드트럭으로 확장하면 그만이니까.
때문에 제대로 런칭도 못 해보고 망한다.
하지만 별로 걱정할 건 없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걸로 대박이 터지니까.
바로 방금 내가 먹은 햄버거다.
오코너 버거가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당시 홍보문구 중 하나가 ‘실리콘밸리의 명물’이다. 그렇다면 뉴욕에 있던 오코너 버거가 어떻게 실리콘밸리의 명물이 됐을까?
그 이유는 바로 눈앞에 있는 이 사람 덕분.
오코너펍의 사장 아들 숀 오코너는 풍운의 꿈을 안고 실리콘밸리로 건너가 친구와 함께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몇 달 못 가 쫄딱 망했다.
먹고 살길이 막막해진 그는 다음 사업을 준비할 때까지 임시방편으로 중고 푸드트럭을 빌려 아버지 가게에서 만들던 햄버거를 팔기 시작했다.
원래는 밀린 월세를 내고 사업자금이라도 조금 모으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는데, 이게 IT기업 종사자들에게 입소문을 타며 대박이 터졌다.
사람들은 감자를 넣어 구운 번과 신선한 계란으로 만든 스크램블드에그가 들어간 햄버거, 그리고 아일랜드식 흑맥주에 열광했다.
심지어는 지크 바런과 나이트 캐머런 등 유명 스타트업 창업자와 IT기업 CEO들까지도 줄을 서서 사먹을 정도였다.
이게 뉴스화되며 사람들은 더더욱 몰렸고.
그렇게 점점 유명해지자 숀 오코너는 아예 팔로알토에 가게를 차렸다.
이후 오코너 버거는 프랜차이즈화됐고 전 세계인이 즐겨먹는 햄버거가 됐다.
난 숀을 보며 잠시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하는 사업은 망할 테니 하지 말라고 말해줘야 하나? 하지만 그게 망해야지 그가 푸드트럭을 차려 대박을 칠 수 있는 게 아닐까?
지금 당장 일 그만두고 푸드트럭 차리라고 해봐야 내 말을 들을 리 없다. 그리고 창업을 했다가 망해서 푸드트럭을 차렸다는 스토리가 있어야 장사도 더 잘될 테고.
사실 세상에 맛있는 햄버거는 얼마든지 있다.
레시피를 그대로 베껴서 만드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프랜차이즈 업계에서는 미투 상품들이 판을 치는 거고.
하지만 똑같은 상품을 만든다고 해서 모두가 성공하는 건 아니다.
중요한 것은 마케팅과 아이덴티티.
같은 상품이라도 어떻게 마케팅을 하느냐에 따라 죽느냐 사느냐가 결정된다.
재밌는 사실은 한국에서는 오코너 버거가 ‘실리콘밸리의 명물’로 알려졌지만, 정작 실리콘밸리에서는 ‘맨해튼의 명물’로 알려졌다는 것이다.
서부 사람들 입장에서는 동부에서 유명한 버거라고 하니 먹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다.
즉, 오코너 버거는 아무나 차려서는 성공할 수 없다. ‘오코너 버거’라는 상표와 스토리를 가지고 숀 오커너가 창업을 해야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