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데이비드 록허트 (2)
너무 어이가 없는 얘기라서 저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매년 2배씩이면 10년 후 얼마가 되는지 아십니까?”
2배라는 숫자가 그리 크지 않아 보일지 몰라도, 계속 반복하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무리 큰 종이도 7번 이상은 접기 힘들다. 만약 어떤 종이를 42번 접는데 성공한다면 지구에서 달까지 닿는 높이가 될 것이다.
한미루는 고개를 끄덕였다.
“5120만 달러죠. 그러니까 10년 지나도 계속 일해주셨으면 합니다. 11년째는 1억 240만 달러, 12년째는 2억 480만 달러가 될 테니까요.”
“······진심입니까?”
“예. 계약서에 쓰겠습니다. 만약 어기면 바로 그만두시면 됩니다. 물론 계약금은 반환 안 하셔도 됩니다.”
“······.”
대체 얼마나 자신이 있으면 이런 말을 태연하게 할 수 있는 걸까?
당연하지만 이런 제안을 하는 기업이 정상일 리 없다.
“무슨 일을 하려는 겁니까?”
“투자회사가 하는 일이 뭐겠습니까? 당연히 투자죠.”
“제가 해야 할 일은 뭡니까?”
한미루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는 듯 말했다.
“혹시 불법적인 일을 시키지는 않을까 걱정하시는 건가요?”
“일하면서 금융계에서 벌어진 각종 사기 사건들을 많이 봐왔습니다. 그중에서는 불법적인 일도 있고, 불법이 아니더라도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 투자자들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요?”
데이비드는 적당한 예를 떠올렸다.
“얼마 전, 한국에서 한 사모펀드가 투자자들을 속인 사건이 있었죠. 공공기관 매출채권에 투자한다고 속인 다음 메자닌에 투자하고 돈을 빼돌렸다가 파산한 사건이었는데. 아시나요?”
그의 말에 한미루는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그럼요. 누구보다 잘 알죠.”
그러고는 한마디 덧붙였다.
“그거 제가 폭로했으니까요.”
데이비드는 당황했다.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제가 부실을 알아내서 폭로했습니다.”
한미루는 당시의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얘기해주었다. 어차피 조금만 조사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인 만큼 거짓은 아닐 것이다.
‘그 사람이 여기 왜 있어?’
대체 회사를 그만두고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기에?
한미루는 계속 설명했다.
“첫째로, 외부에서 자금을 모집할 생각은 없습니다. 전 패밀리 오피스를 추구하니까요. 둘째로, 그럴 생각이었다면 록허트 씨를 섭외하지 않았겠죠.”
하기야 그는 이미 실패자로 낙인찍힌 상황. 그를 내세워봐야 투자금을 끌어모으기는 힘들다.
그러자 또 다른 의문이 생겼다.
“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 물음에 한미루는 빙그레 웃었다.
“글쎄요. 남들보다는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빅토리 인베스트먼트 파산에 대해서는요?
“제 생각에는 경영진이 부실을 알고도 모른 척했을 겁니다. 일단 상장만 시키면 투자금을 회수할 있다고 생각했겠죠. 아닌가요?”
그런데 상장 심사과정에서 매출과 실적을 부풀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상장은 취소됐고, 회사는 파산했다. 거액을 투자한 투자회사 역시.
“만약 법에 저촉되는 일이 있다면 당국에 신고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대표는 저고, 책임도 제가 질 테니까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말대로라면 자신이 손해 볼 일은 없다. 어쨌거나 그에게는 당장 돈이 필요했다.
데이비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바로 계약서를 쓰시겠습니까?”
그의 말에 한미루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제가 아직 변호사가 없어서 계약서를 준비 못 했습니다. 일단 계약금부터 보내드릴 테니, 다음에 만날 때 직접 계약서 작성해서 가져오세요.”
데이비드는 깜짝 놀랐다.
“계약서도 쓰지 않고 100만 달러를 보내겠다구요?”
한미루는 태연하게 말했다.
“계약서를 안 쓰면 약속을 어기실 건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럼 됐습니다. 계좌 알려주세요.”
그는 변호사답게 모든 것은 계약 위에서 이뤄진다고 믿었다. 때문에 지금 상황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대체 처음 보는 나를 어떻게 믿는 거지?’
계좌를 알려주자 한미루는 그 자리에서 바로 계약금을 송금했다. 데이비드의 계좌에는 100만 달러가 찍혔다.
“보냈습니다.”
반신반의하던 데이비드는 문자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했습니다.”
아직 계약서는 안 썼어도, 돈을 받은 이상 계약은 이뤄진 셈이다.
더 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다.
데이비드는 혼란스러운 생각을 다잡으며 물었다.
“컨티뉴 캐피탈의 목표는 뭡니까?”
“세계 최대 사모펀드가 어딘지 아세요?”
“레드스톤이죠.”
“그럼 세계 최대 투자회사는요?”
“에런 베이커 회장이 이끄는 화이트로드입니다.”
한미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우리 목표는 10년 안에 그보다 큰 투자회사가 되는 겁니다.”
너무 어이가 없는 얘기라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정작 말을 꺼낸 사람의 표정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데이비드는 다시 한미루의 표정과 눈빛을 살폈다.
‘자신감인가?’
아니, 이건 그런 수준이 아니다.
상대가 가지고 있는 확신이었다. 조금의 의심과 불신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확신!
데이비드는 동양인 청년에게서 경외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한미루는 웃으며 말했다.
“그건 같이 일하다 보면 알게 될 겁니다.”
* * *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악수했다.
“주말 동안 개인적인 일 보시고, 우리는 월요일에 다시 만나죠. 며칠 동안 캘리포니아로 갈 거니까 준비하시구요.”
데이비드는 길게 묻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날 뵙겠습니다.”
우리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그가 카페를 나간 것을 확인한 다음, 난 속으로 환호를 내질렀다.
내가 데이비드 록허트를 고용하다니!
평소라면 만나기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실업자고, 당장 돈이 필요하다.
덕분에 쉽게 계약할 수 있었다.
만약 거절했다면 200만, 300만 달러라도 제시했을 것이다. 100만 달러면 싸게 데려온 셈이지.
왜냐하면 그는 향후 위대한 투자자로 유명세를 떨치게 될 테니까.
예전에 그에 대한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데이비드에게는 몸이 아픈 딸이 하나 있다. 그는 다니던 회사가 파산해 실직하고 일자리를 구하던 때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라 회상했다.
그는 딸의 치료비를 마련할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았을 거라고 말했다.
다행히 그는 마이클 프레스턴이 이끄는 샤크 매니지먼트에 취직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데이비드는 놀라운 능력을 발휘했다. 바로 몇몇 기업들의 회계부정을 적발해낸 것이다.
샤크 매니지먼트는 풋옵션을 잔뜩 매수하고 해당 기업을 공매도한 다음 이 사실을 폭로했다.
폭로 내용은 사실이었고 해당 기업 주가는 폭락했다. 샤크 매니지먼트는 투자금의 몇 배를 벌어들였다.
데이비드는 첫해에 320퍼센트, 그다음 해에는 550퍼센트의 수익을 올렸다.
그는 향후 성장할 산업에 대한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전기차, IT, 반도체, 클라우드 등등.
여기서도 데이비드 록허트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소문이 퍼지자 투자자들은 돈을 싸들고 찾아왔다.
그의 이름만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투자금이 100억 달러는 넘을 거라는 얘기도 있었다.
이게 농담만은 아닌 것이 30억 달러 규모의 블라인드 펀드는 모집하자마자 마감됐고, 그가 직접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진 록허트ETF에는 70억 달러의 자금이 밀려들었다.
데이비드의 이름이 높아지며 유수의 투자사들이 그를 영입하기 위해 움직였다.
백지수표를 내민 곳도 한둘이 아니었다.
칼나인 그룹은 바로 헤드 자리를 제안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샤크 매니지먼트에 충성을 바쳤다.
자신이 가장 힘들었을 시기에 받아줬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데이비드 록허트의 수완 덕분에 샤크 매니지먼트는 세계 3대 사모펀드로 성장한다.
“원래는 그랬겠지만······.”
이번에는 그의 앞에 내가 나타났다.
그는 이제 샤크 매니지먼트가 아니라 컨티뉴 캐피탈을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내 계획에 따라 움직일 최고의 말을 얻은 셈이다.
“일단 첫 단추는 잘 뀄군.”
앞으로의 일도 이렇게 술술 풀리면 좋겠는데.
커피를 다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난 고개를 들어 상대를 보았다.
금발에 피부가 새하얀 여성이다.
키는 약 165센티. 나이는 20대 초반쯤. 붉은색 머리는 올려서 하나로 묶었고, 커다란 안경을 꼈다. 콧잔등에는 약간의 주근깨가 남아있었다.
복장은 스키니진에 린넨셔츠를 빼입었고, 낡은 컨버스를 신었다.
꽤나 매력적인 스타일이다.
낯선 미국 땅에서 이런 미녀가 나에게 말을 걸다니!
이유가 뭘까?
설마······ 다단계인가?
“누구신가요?”
내 물음에 그녀는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전 월스트리트타임즈 기자 트리시 오코너예요.”
“월스트리트타임즈요?”
“예.”
이런 언론사는 처음 듣는다.
“월스트리트저널과 관계가 있나요?”
“아니요.”
“그럼 뉴욕타임즈랑은요?”
내 물음에 그녀는 당당하게 말했다.
“아무 관련 없어요. 저희는 작은 인터넷 신문사거든요.”
“그렇군요.”
작은 인터넷 신문사치고는 이름이 너무 거창하지 않나?
“그런데 무슨 일인가요?”
“뒤쪽에서 기사를 작성 중이었는데, 우연히 얘기를 듣게 됐어요. 실례가 됐다면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누군가 엿듣는 게 싫었다면 카페에서 미팅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
얼른 사무실을 내든지 해야지.
“그런데 무슨 기사를 쓰고 계셨나요?”
“어제 애틀랜타 공항에서 일어난 항공기 엔진 폭발 사건에 대해서요. 한국인이 이륙 직전 비행기를 돌렸다는데······.”
“풉!”
순간,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왜 그래요?”
“아, 아니요. 저도 어제 뉴스로 본 것 같아서요.”
설마 그 한국인이 나라고는 생각지 못하겠지.
트리시는 나에게 물었다.
“방금 얘기 나눈 사람이 빅토리 인베스트먼트에서 일했던 데이비드 록허트 변호사죠?”
“잘 아시네요.”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제가 조지아 다이나믹에 대해 기사를 썼거든요.”
“조지아 다이나믹이요?”
“그 회사 분식회계로 인해 빅토리 인베스트먼트가 파산했잖아요.”
“아, 맞아요.”
당연히 알고 있다.
사실 투자가 실패한다고 해서 투자사가 쉽게 망하진 않는다. 하지만 분노한 투자자들이 빅토리 인베스트먼트에 집단소송을 걸었고, 그로 인해 파산 신청까지 하게 된 것이다.
그 책임을 데이비드 록허트가 떠안은 거고.
“알면서도 그를 영입한 거예요?”
“예.”
그건 그의 잘못이 아니다.
내가 이 사실을 아는 건 데이비드가 샤크 매니지먼트에서 명성을 얻게 된 후 진실이 밝혀졌기 때문.
아랫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건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회사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정말로 계약서도 쓰지 않고 100만 달러를 지급한 거예요?”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좀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