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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데이비드 록허트 (1) (42/529)

 42화. 데이비드 록허트 (1)

 평생 비즈니스 탑승권은 양보했지만, 브릿지월드 항공에서는 이번에 한해 비즈니스 티켓을 발권해주었다.

 애틀랜타 공항에서 두 시간을 날아서 존 F. 케네디 공항에 도착한 나는 캐리어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체감상으로는 긴 여정을 끝마친 듯한데, 생각해보면 올랜도행 비행기 탑승 이후 이제 겨우 여섯 시간 지났다.

 “드디어 뉴욕이구나.”

 그대로 짐을 끌고 바로 월스트리트로 향했다.

 맨해튼 끝의 좁은 땅에는 수십 층짜리 고층빌딩들이 줄을 지어 늘어서 있었다.

 “어마어마하네.”

 이곳은 세계 금융의 중심지.

 CB와 IB들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모펀드와 헤지펀드들도 모여 있다. 저 높은 빌딩의 어딘가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수백만, 수천만 달러의 거래가 체결 중일 것이다.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돈이 돌고 있을지 짐작도 되지 않는다.

 “역시 사람은 큰물에서 놀아야 해.”

 미국에서 일하려면 미국 번호가 있는 게 편하다.

 난 먼저 통신사 지점에 들러서 선불 핸드폰을 하나 개통했다. 그리고 이어서 법인 설립 서류를 제출했다.

 총 자본금은 1억 1300만 달러!

 그동안 작전주랑 정크본드로 번 돈을 탈탈 털어 넣었다. 회사 이름은 미리 정한 대로 ‘컨티뉴 캐피탈(Continue Capital)’.

 난 선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법인 설립 끝났어.”

 [오! 감사. 그런데 난 뭐 안 해도 되는 거야?]

 “응.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어.”

 이게 나중에 얼마가 될지 상상도 못 하겠지.

 1회차 때는 내가 버스 탔으니 이번에는 태워줄 차례다.

 어제까지는 백수였지만 이제는 어엿한 투자회사 사장이 되었다. 아직은 직원도 사무실도 없는 유령회사지만.

 뭐, 처음에는 다들 이렇게 시작하는 거 아니겠나?

 그래도 내 회사를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책임감 같은 게 생겨나는 것 같기도 하고.

 [이젠 뭐할 건데?]

 “직원부터 채용해야지. 내일 면접 보자고 메일 보내놨어.”

 * * *

 최근 월가의 가장 큰 뉴스는 빅토리 인베스트먼트의 파산이었다.

 빅토리 인베스트먼트는 그동안 공격적인 투자로 월가에서 이름을 떨쳐왔다. 다양한 업종과 종목에 투자하는 대신 성장성이 높은 한두 개 종목에 집중 투자했고, 이는 높은 수익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방식이 잘될 때는 아무 문제 없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던 비상장기업이 분식회계로 무너지자, 빅토리 인베스트먼트 역시 같이 쓰러졌다.

 그리고 데이비드 록허트는 실업자가 되었다.

 그는 뉴욕대 로스쿨을 졸업해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빅토리 인베스트먼트에 입사했다.

 원래 로펌 취직을 희망했지만 사모펀드를 택한 이유는 그쪽이 더 높은 연봉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모펀드사에서 각종 법률자문을 맡으며 투자에 관한 지식들을 익혔고, 시장에서 큰 명성을 얻었다.

 변호사인 그는 회계에도 밝았다.

 해당 기업의 회계부정이 의심된다고 여러 차례 보고했지만 경영진에 의해 묵살당했다.

 그런데 막상 일이 터지자 책임소재가 그에게 돌아왔다.

 투자실패의 원인은 그가 재무제표를 제대로 확인하기 않았기 때문이라고 발표됐다.

 투자자들은 일제히 그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했고, 그는 시장에서 실패한 투자자로 낙인찍혔다.

 정작 투자를 담당했던 경영진들은 회사가 망하기 전 자리를 옮긴 뒤였다. 수백만 달러의 퇴직금까지 챙겨서 말이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회사에 남아서 뒷일을 수습했다.

 어쨌거나 회사가 망했으니 새로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데이비드는 구직사이트에 글을 올리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었다. 그러나 재취직은 쉽지 않았다.

 그의 잘못으로 인해 빅토리 인베스트먼트가 망했다고 월가에 소문이 쫙 퍼졌기 때문이다. 투자 실패로 회사를 망하게 만든 사람을 어느 투자사가 고용하겠는가?

 실직 기간이 길어지며 빚은 점점 늘어갔고, 은행에서는 독촉장이 날아왔다.

 데이비드는 점점 초조해졌다.

 ‘빨리 새 직장을 구해야 해.’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로스쿨에 재학 중이던 시절 여자친구와 딸을 낳았다. 여자친구가 떠난 뒤 그는 홀로 딸을 키웠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다.

 그에게 있어서 딸은 세상의 전부였다. 딸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었다.

 그런데 딸은 악성 림프종을 앓고 있었다. 학교를 가야 할 나이에도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는 제법 많은 연봉을 받았다. 하지만 그 연봉으로도 딸의 치료비를 감당하기는 만만치 않았다.

 실직을 한 이후에는 사실상 빚으로 병원비를 내야 했다.

 대출을 받은 것도 모자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돈을 빌렸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도 한계였다.

 매일같이 전화가 걸려오고 독촉장이 날아왔지만, 더 이상은 빌릴 데도 없었다.

 실직 상태가 길어지면 의료보험도 끊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끝장이야!’

 그는 신께 기도했다.

 ‘저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습니다. 제발 딸만은 도와주십시오!’

 다행히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한 곳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절망에 빠져 있는 그에게는 마치 신의 은총처럼 느껴졌다.

 “좋았어!”

 메일을 보내온 곳은 샤크 매니지먼트.

 금융재벌로 이름 높은 프레스턴가의 장남 마이클 프레스턴이 세운 헤지펀드로, 최근 월가에 떠오르는 신성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그에게는 최고의 기회였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기회를 잡아야 했다.

 데이비드는 오랜만에 이발과 면도를 하고, 양복을 세탁하고 구두를 닦았다. 그리고 철저하게 면접을 준비했다.

 그런데 면접을 보기 이틀 전.

 또 다른 곳에서 메일이 날아왔다.

 “컨티뉴 캐피탈? 여긴 뭐 하는 곳이야?”

 * * *

 데이비드 록허트는 정장을 갖춰 입고 약속 시간에 맞춰 나갔다.

 마음속으로는 당연히 샤크 매니지먼트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입사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혹시라도 면접에 떨어질 경우를 대비해야 했다.

 면접 장소는 회사 사무실이 아닌 센트럴파크 주변의 스타벅스였다.

 안으로 들어가서 주위를 둘러보자 한 동양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들었다.

 “데이비드 록허트 씨 맞나요?”

 “그렇습니다.”

 “반갑습니다. 전 한미루라고 합니다.”

 “한국인인가요?”

 “맞습니다. 일단 커피부터 한잔할까요?”

 데이비드는 자리에 앉아 상대를 자세히 살폈다.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 동양인이었다.

 “나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올리신 이력서를 보고 꼭 만나보고 싶었거든요.”

 “저를요?”

 한미루는 웃으며 말했다.

 “예. 투자 경력도 그렇고, 변호사인 점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이쪽 일을 하려면 법률적인 지식도 꽤 필요하겠더라구요.”

 데이비드는 상대의 영어 발음을 듣고는 이방인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뉴욕에 살고 계신 겁니까?”

 “아니요. 여기 온 지 몇 시간 안 됐습니다.”

 “그럼 저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서 오신 겁니까?”

 “예.”

 “회사 이름이 컨티뉴 캐피탈이라고 했죠?”

 “맞습니다.”

 “처음 들어봅니다. 검색해도 별다른 자료가 나오지 않더군요. 본사는 어디에 위치해 있습니까?”

 “지금 구하는 중입니다.”

 “한국에 본사가 있는데, 미국지사를 만드는 중이라는 건가요?”

 한미루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확하게 말씀드리면 컨티뉴 캐피탈은 제가 어제 설립한 투자법인입니다. 아직 본사는 없고 미국에 만들 생각입니다.”

 “······예?”

 “투자회사를 만들긴 했는데 제대로 운영해줄 사람이 필요해서요. 그래서 법인 설립을 마치자마자 록허트 씨에게 메일을 보낸 겁니다. 그러니까 저와 계약을 하시면 컨티뉴 캐피탈의 첫 직원이 되시는 셈이죠.”

 “······.”

 기가 막혀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정신을 차린 데이비드는 상대에게 대놓고 물었다.

 “지금 장난하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제가 지금 장난칠 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당장 아픈 딸의 병원비를 마련해야 한다. 여기서 이러고 있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장난이 아닙니다. 정말로 당신을 고용하고 싶습니다.”

 데이비드는 상대를 노려보듯 빤히 쳐다보았다. 한미루는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표정을 보니 장난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장난이 아니라고 해도 아무것도 없는 신생회사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는 당장 돈이 필요했다.

 ‘시간만 낭비했군.’

 더 이상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리는 그에게 한미루는 한마디했다.

 “계약금으로 100만 달러를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저절로 몸이 멈췄다.

 데이비드는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정말입니까?”

 “농담처럼 들리나요? 일단 앉아보세요.”

 엉거주춤한 자세로 있던 데이비드는 엉덩이를 다시 의자에 붙였다.

 “정말로 100만 달러를 주겠다는 겁니까?”

 “예. 어디까지나 계약금입니다. 연봉은 따로 지급하겠습니다.”

 ‘100만 달러라니!’

 그 돈만 있으면 당장의 문제가 해결된다.

 상대의 말을 믿기 힘들었지만 일단 물어보았다.

 “계약금은 몇 년 분할이고, 언제 지급해줄 수 있습니까?”

 “일시불이고 바로 지급하겠습니다.”

 데이비드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입니까?”

 “그럼요.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마치 농담 같은 가벼운 말투지만 눈은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데이비드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진심인가?’

 100만 달러면 딸을 더 좋은 병원으로 옮기고 최고의 치료를 받게 해줄 수 있다. 여기저기 빌린 돈을 갚고도 한동안 병원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딸을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것도 두렵지 않았다.

 “계약 조건은 어떻게 됩니까?”

 그의 물음에 한미루는 빙그레 웃었다.

 “컨티뉴 캐피탈을 맡아서 운영해주시면 됩니다. 직책은 공동대표가 적당하겠네요. 계약 기간은 10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그 이후에도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데이비드는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데 익숙했다.

 그래서 기업을 평가할 때도 겉으로 부풀려진 매출이나 실적보다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진정한 가치를 눈여겨보았다.

 그리고 이는 사람을 볼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눈앞의 남자는 도저히 파악이 되지 않았다.

 이런 적이 처음이다 보니 머릿속이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대체 왜 나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거지?’

 어쨌거나 중요한 건 그가 계약금 100만 달러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당장 그 돈이 필요했다.

 내일 샤크 매니지먼트의 면접을 본다고 해서 합격한다는 보장은 없다.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 하나?’

 한참의 생각 끝에 데이비드는 입을 열었다.

 “연봉은 어떻게 됩니까?”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당장 큰돈을 드리기는 힘드니 첫해는 연 10만 달러에서 시작하죠.”

 10만 달러면 일반 직장인에 비해서는 높은 편이지만 월가에서는 낮은 편이다. 그가 빅토리 인베스트먼트에서 받았던 연봉도 30만 달러가 넘었다.

 ‘적은 연봉을 지급하는 대신 성과급 비중을 높이겠다는 건가?’

 하지만 한미루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대신 매년 2배씩 올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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