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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비행기 사고 (4) (41/529)

 41화. 비행기 사고 (4)

 브릿지월드 항공사는 애틀랜타 국제공항 안에 본사를 두고 있다.

 때문에 본사 담당자들이 직접 나서서 피해배상을 안내했다. 일단 비행기표를 환불해주고, 탑승객 전원에게 600달러의 바우처를 제공하기로 했다. 또한 바로 대체 항공편을 마련해주었다.

 자신을 밥 아드레이라고 밝힌 백인 남성은 나에게 말했다.

 “이번 일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모든 승객들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뭘요.”

 “감사의 의미로 저희 항공사에서 평생 무료로 쓰실 수 있는 비즈니스 항공권을 지급해드리려고 합니다.”

 “오!”

 평생 무료 비즈니스 항공권이라니!

 돈 아끼려고 이코노미석만 타던 나에게는 그야말로 엄청난 혜택이다.

 “그런데 설마 한 장은 아니죠?”

 “예?”

 “언제까지 혼자 타진 않을 거 아닙니까? 동반자 거 따로 예매하려면 힘든데.”

 “동반자 것까지는 좀······.”

 난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만약 엔진이 터지지 않았다면 전 기내난동으로 체포되거나 미국에서 추방됐을 수도 있겠네요.”

 “그, 그건······.”

 “이런 사고가 언론에 계속 이슈화되고 그러면 항공사 이미지도 안 좋아지고 그럴 테구요.”

 “그, 그렇습니다.”

 “여기는 CNN 앞마당이니 기자들도 많을 테고.”

 “······.”

 그는 손수건으로 연신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아까 잠깐 핸드폰을 보니 속보가 주르륵 떠있었다. 오보까지 나갔으니, 모르긴 몰라도 지금 언론대응 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미국은 인터뷰나 TV쇼 같은데 나가서 이런 얘기하면 출연료 많이 준다고 들은 것 같은데.”

 그러자 밥은 바로 말했다.

 “동반자석까지 평생 무료로 해드리겠습니다.”

 “정말요?”

 “물론입니다. 꼭 받아주십시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제가 부끄러움이 많아서, 남들 앞에 서는 인터뷰나 TV쇼 같은 건 무리일 것 같네요.”

 딱히 무리한 요구도 아니다.

 이번 사고는 100퍼센트 항공사의 잘못. 만약 대형 인명사고가 났다면 인당 수백만 달러의 배상금과 함께 이미지가 바닥으로 추락했을 것이다.

 그걸 ‘평생 비즈니스 무료 탑승권(동반자 포함)’으로 막으면 싸게 먹히는 거지.

 난 손을 들어서 크리스를 불렀다.

 “크리스! 여기 좀 와 봐요!”

 “무슨 일인가?”

 난 그를 가리키며 말했다.

 “방금 말한 평생 비즈니스 무료 탑승권을 제가 아닌 이분께 주시기 바랍니다.”

 내 말에 크리스는 깜짝 놀라 두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난 괜찮네.”

 “사양하지 마세요.”

 처음에 사양하던 그는 내가 계속 권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았다.

 “저, 정말 내가 받아도 되겠나?”

 사양하기에는 너무 큰 혜택이겠지?

 “그럼요. 이게 다 크리스 덕분인데요.”

 “아까부터 자꾸 그렇게 말하던데, 대체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그러나?”

 난 웃음을 지었다.

 “한 게 없긴요. 정말 큰일을 하셨습니다.”

 원래는 내가 아니라 그가 엔진음의 이상을 눈치채고 비행기를 멈춰 세운다.

 그는 차기 미국 대통령과 시민을 구한 영웅이 되고, 마크 필립스는 대통령이 된 후 그를 백악관에 초청해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공을 내가 가로챈 셈이다. 당연히 혜택은 그가 누리는 게 맞다. 그리고 아무것도 안 받는 편이 모양새가 더 좋기도 하고.

 대가 없이 한 선행이야말로 빛을 발하는 법이지.

 “이거 뭐라고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군.”

 난 진심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감사는 제가 해야죠.”

 “평생 비즈니스 무료 탑승권이라니. 죽을 때까지 잘 쓰겠네.”

 “예. 내후년까지 열심히 여행 다니세요.”

 굳이 ‘내후년까지’라고 말한 이유는 안타깝게도 2년 뒤에 브릿지월드 항공이 파산해 세타 항공에 인수합병되기 때문.

 뭐, 그래서 양보한 건 아니고······.

 * * *

 대체 항공편은 금방 마련되었고 승객들은 각자 짐을 들고 떠났다. 난 크리스토퍼 로무와 인사를 나누고 연락처를 교환했다.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면 좋겠군. 언제든 연락하게.”

 “예. 즐거운 여행 되세요.”

 대부분의 승객들이 떠났지만 필립스 상원의원과 가족들은 아직 공항에 발이 묶여있었다.

 사건이 발생한 애틀랜타 공항은 필립스 상원의원의 지역구. 그가 책임자이자 당사자인 만큼 공항과 항공사의 높은 사람들이 줄을 지어 찾아왔고, 그들과 대책을 논의했다.

 난 핸드폰으로 기사와 댓글을 찾아보았다.

 -그대로 출발했으면 이륙 직후 엔진이 터졌을 거라는데 진짜 천만다행이네.

 -관계자들 전부 대가리 박고 있을 듯.

 -익명의 한국인이 모두를 살렸음.

 -대체 누굴까?

 -보통은 자기가 했다고 떠벌리지 않나?

 -비행기에 탔던 승객입니다. 필립스 상원의원님께서 원하는 게 있냐고 물었지만 ‘자신은 영웅이 아니고 정체가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다. 모든 건 공군 정비사 덕분이다’라며 공을 돌렸습니다.

 -맞습니다. 심지어는 브릿지월드 항공사에서 ‘평생 무료 비즈니스 탑승권’을 준다고 했는데 그것도 양보했습니다.

 -와아!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진짜 멋지다!

 -그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네요!

 -영화에나 보던 슈퍼 히어로가 실제로 있었네요.

 -이런 사람은 백악관으로 불러서 대통령이 상 줘야 한다!

 보고 있자니 낯이 뜨거울 정도다.

 살면서 이렇게 칭찬받아 본 적이 있었나 싶다.

 당연히 없다. 왜냐하면 그전에는 이런 일을 안 했으니까.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기사가 떴다.

 아무래도 한국인이 관련된 사건이다 보니 한국 언론들 역시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브릿지월드 항공 엔진 사고, 한국인이 막은 것으로 확인돼]

 [이륙 직전 비행기를 회항시킨 익명의 한국인]

 [한국인, 미국 상원의원과 승객들을 구하다!]

 [한국인 영웅, 자신은 당연한 일을 했을 뿐]

 [정체가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현지 언론들, 한국에 칭찬과 감사를 표해······]

 -뭐야? 한국인이 또 미국 공항 활주로에서 비행기를 빠꾸시켰어?

 -또라니?

 -작년에 LA공항에서 한국항공 회장 딸이 승무원이 땅콩 봉지 안 까서 줬다고 비행기 회항시켜서 내리게 했잖아.

 -아! 맞다!

 -남의 나라 공항에서 비행기도 유턴시키는 한국 재벌의 위엄과 권능!

 -ㅋㅋㅋ 처음 보고 기사 보고 땅콩회항 2탄인 줄 알았네.

 -누구는 승무원이 땅콩 봉지 안 뜯어서 줬다고 회항시켰는데, 누구는 승객들 살리려고 회항시킴.

 -이번에는 착한 회항 인정!

 -지가 살려고 그랬던 거 아님? 그대로 출발했으면 자기도 죽었을 거 아니야?

 -어쨌든 덕분에 모두가 살았으면 된 거지.

 -뭐 이렇게 따지는 게 많아?

 한창 신나게 댓글을 보고 있는데 두 명의 미녀가 나에게 다가왔다.

 오른쪽의 여성은 어깨까지 오는 갈색 생머리에 차분한 표정을 지녔고, 왼쪽 여성은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청바지에 패딩을 입었다.

 엘레나 필립스와 리아나 필립스.

 언니 쪽이 좀 더 키가 크고 어른스러워 보이고, 동생은 키가 작고 개구쟁이 같은 분위기다.

 둘 다 나랑은 몇 살 차이 안 나지만 왠지 어려 보였다. 이건 내가 회귀했기 때문이겠지?

 리아나 필립스가 먼저 말했다.

 “구해줘서 고마워요.”

 엘레나 필립스는 나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아까 한 말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릴게요.”

 “괜찮아요. 몰랐으면 그럴 수도 있죠.”

 뉴스에서 가끔 봤는데 실제로 보니 더 미인이다.

 엘레나가 물었다.

 “올랜도에는 무슨 일로 가시는 거예요?”

 “아! 그냥 혼자 놀러 가는 거였어요.”

 그러자 리아나가 말했다.

 “그럼 저희랑 같이 다닐래요?”

 솔깃한 제안인데.

 하지만 내가 남의 가족여행에 낄 만큼 눈치가 없진 않다. 앞으로 해야 할 일도 있고.

 난 고개를 저었다.

 “원래는 그러려고 했는데, 그냥 바로 뉴욕으로 가려구요.”

 “뉴욕에는 왜요?”

 “꿈을 이루기 위해서랄까요?”

 “꿈이 뭔데요?”

 “세계 최고의 투자자요.”

 “꿈이 너무 큰 거 아니에요?”

 엘레나는 무례한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동생의 옆구리를 살짝 찌르며 말했다.

 “죄송해요.”

 “괜찮습니다. 그래서 그 시작을 위해 뉴욕에 가서 투자회사를 하나 만들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엘레나가 호기심을 나타냈다.

 “원래 그쪽 일을 하셨나요?”

 “얼마 전까지 한국의 한 증권사에서 일했어요. 일이 생겨서 그만뒀지만요.”

 리아나가 불쑥 물었다.

 “무슨 일이요?”

 “얘기하자면 좀 긴데요.”

 “비행기 타려면 시간이 있으니 그때까지 말해 봐요.”

 딱히 비밀도 아니라서 무슨 일이었는지 말해주었다.

 리아나는 깜짝 놀랐다.

 “펀드 부실을 폭로하고 회사를 그만뒀다구요?”

 “예.”

 엘레나는 손뼉을 쳤다.

 “저 기사로 봤어요. 꽤 큰 사건이었잖아요.”

 조 단위의 금융 사기 사건이 날이면 날마다 일어나는 게 아니다 보니 해외언론에도 다 알려졌다.

 “호오! 이제 보니 유명인이었네요.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해보려는 거예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도 똑같은 꿈이 있었는데 그때는 실패했어요. 생각해보니 말로만 하겠다고 했지, 실제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더라구요. 그래서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해보려구요.”

 “멋진데요.”

 한창 얘기를 나누는데, 필립스 상원의원이 나타났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고 있어?”

 “아빠!”

 그는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 번 모두를 대신해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런데 정말로 아무것도 필요한 게 없습니까? 공항과 항공사 측에서 표창을 하고 싶다고 하는데.”

 “예. 모두가 무사했으니 그걸로 충분합니다.”

 표창 같은 거 받아봐야 쓸 데도 없고 둘 데도 없다.

 필립스 상원의원은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가족들을 구해준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연락처를 드릴 테니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 연락 주십시오.”

 “예. 감사합니다.”

 이건 쓸데가 있지.

 난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 * *

 사고로 인해 원래 출발 시간에 비해 4시간이 지체됐지만 가족 여행은 예정대로 가기로 했다. 이번이 아니면 언제 또 놀러 갈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필립스 상원의원은 가족들과 함께 다시 올랜도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리아나는 괜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비행기는 엔진 이상 없겠지?”

 엘레나는 동생을 타일렀다.

 “그런 말하면 안 돼. 다른 사람이 들으면 불안해할 수도 있잖아.”

 “흥! 알았어.”

 리아나는 언니에게 말했다.

 “그런데 진짜 이상하지 않아?”

 “뭐가?”

 “그 사람 말이야. 보통 그런 일 생기면 자기가 했다고 막 자랑하지 않나?”

 맞는 말이다.

 언론들은 출발 직전 비행기를 멈춰 세운 한국인에 대해 궁금해했지만, 그는 인터뷰를 거절하고 모든 공을 옆자리에 앉은 공군 정비사에게 돌렸다.

 ‘정말 신기한 사람이야.’

 필립스 상원의원 역시 한국인 청년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미루라고 했지?’

 정치를 오래 하다 보면 사람 보는 눈이 어느 정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청년에 대해서는 쉽게 평가를 내리기가 힘들었다.

 나이는 어려 보이는데 경험은 많아 보였고, 원하는 게 있어 보이는데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딸들과 대화를 하는 걸 살짝 들었다.

 ‘투자회사를 만들 거라고 했지?’

 진짜 제대로 해볼 거라는 말이 농담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필립스 상원의원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왠지 또 만나게 될 것 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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