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비행기 사고 (2)
비행기가 움직이자 필립스 상원의원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마음이 들떴다. 그 역시 놀이공원에 데려가 달라고 부모님을 조르던 시절이 있었다.
‘가족여행이라······.’
이번 여행에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푹 쉴 생각이었다.
‘뉴스도 보지 말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야지.’
그렇게 다짐하는데 뒤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승무원들이 왔다 갔다 하더니 조종실에서 부기장까지 달려 나왔다.
뭔가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살펴보고 오겠습니다.”
경호원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코노미석으로 향했다.
잠시 후, 돌아온 경호원이 보고했다.
“한 승객이 내려달라고 난동을 피우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엔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난다고 합니다. 승무원들은 물론 부기장까지 나서서 아무 이상 없다고 설득했는데도 무조건 내리겠다고 합니다.”
그 순간,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우리 비행기는 다시 탑승구로 돌아갑니다. 승객분들은 자리에 앉은 채 승무원들의 지시에 따라 주시기 바랍니다.]
활주로에 들어섰던 비행기는 머리를 돌려 다시 탑승구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분노와 짜증 섞인 고성이 튀어나왔다.
리아나는 투정 부리듯 말했다.
“그냥 활주로에 내리라고 하면 안 돼?”
엘리나 역시 인상을 찌푸렸다.
“한 명이 내리려면 모든 승객들이 내리고, 짐 검사와 비행기 내부 검사, 발권과 수속 등을 다시 해야 하는데.”
“진짜? 얼마나 걸리는데?
“빨라도 두 시간쯤.”
리아나는 짜증을 냈다.
“그럼 스케줄 다 망가지잖아. 도착하자마자 디즈니월드로 갈 생각이었는데. 아, 뭐야 진짜!”
딸들이 울상을 짓는 것을 본 필립스 상원의원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중한 가족여행이 시작부터 엉망이 되다니.’
대체 어떤 놈인지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은 심정이다.
잠시 후, 비행기가 멈춰 섰다.
[우리 비행기는 탑승구로 돌아왔습니다. 승객분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짐을 가지고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재탑승에 대해서는 항공사에서 다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기내용 캐리어를 든 승객들은 투덜거리며 계단을 내려왔다.
“젠장!”
“빌어먹을!”
“한 놈 때문에 이게 대체 뭐야?”
“별 미친놈을 다 보겠네.”
마크 필립스 상원의원 역시 가족들을 데리고 비행기에서 내렸다.
한 동양인이 안전요원에게 붙들린 채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래에는 이미 그를 데려가기 위해 공항 경비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 사람 때문인가?’
즐거운 여행이 엉망이 된 건 모두가 마찬가지.
승객들은 짜증 섞인 표정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몇몇 아이들은 울음을 터트렸고, 부모는 아이들을 달래주었다.
그런데도 그는 반성은커녕 계속해서 소리쳤다.
“진짜라니까요! 정말로 엔진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어요!”
참다못한 엘레나는 그를 향해 소리쳤다.
“사과하세요!”
“예?”
“당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봤는지 아세요?”
“제가 무슨 피해를 줬나요?”
그 말에 엘레나는 기가 찼다.
“아이들 우는 거 안 보여요? 다들 소중한 여행이 엉망이 됐어요. 이분들의 시간을 책임질 수 있어요?”
그 말에 한미루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그럼 이대로 출발해서 엔진이 폭발하기라도 하면 그쪽이 책임질래요?”
“뭐, 뭐라구요?”
한미루는 재빨리 한 흑인 남성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만 들은 게 아닙니다. 저분이 세계 최고의 엔진 전문가인데 이상한 소리가 났다고 했습니다! 크리스! 제 말이 맞다고 말 좀 해줘요!”
“아, 아니······.”
어느새 미국 최고에서 세계 최고가 됐다.
‘자꾸 이러면 내가 시킨 줄 알 거 아니야?’
부담을 못 이긴 크리스토퍼는 못 들은 척 슬쩍 고개를 돌렸고 한미루는 당황했다.
“저기요! 크리스! 아저씨!”
끝까지 자기 말이 맞다고 우기는 그의 뻔뻔한 행동에 승객들은 욕을 퍼부었다.
“대체 뭐 하는 놈이야?”
“너네 나라로 돌아가!”
“왜 미국에 와서 난동을 피우는 거냐?”
“빌어먹을 노란 원숭이!”
“이 더러운 중국놈아!”
“중국으로 꺼져!”
아무리 화가 나도 인종차별적 발언을 내뱉는 건 미국의 국격을 떨어트리는 일이다.
“진정하십시오, 여러분.”
마크 필립스 상원의원이 앞으로 나서자 그를 알아본 이코노미석 승객들은 깜짝 놀랐다.
“필립스 상원의원이다!”
“어! 진짜네.”
“의원님께서 왜 여기에?”
“설마 같은 비행기에 타고 계셨을 줄이야.”
한미루는 필립스 상원의원에게 말했다.
“저 한국인입니다.”
“응?”
“중국인이 아니라 한국인이라구요. 인종차별이나 욕하실 거면 참고해주세요.”
“······.”
혹시 좀 모자란 청년인가?
‘하긴 그러니 이렇게 난동을 부리며 비행기를 멈춰 세웠겠지.’
그가 모든 승객들을 대신해 따끔하게 한마디 하려는데, 바로 그 순간······.
콰아앙!
폭발음과 함께 왼쪽 엔진에 불이 붙었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비행기를 쳐다보았다. 화재경보음이 시끄럽게 울리며 활주로에 대기하던 소방차가 달려왔다.
“어서 불 꺼!”
“긴급상황입니다!”
“여기는 위험합니다! 어서 공항 안으로 이동하세요.”
승객들이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는 가운데, 처음 소란을 일으켰던 동양인은 태연하게 말했다.
“거봐요. 제 말이 맞잖아요. 엔진 소리가 이상했다니까.”
* * *
[(속보) 애틀랜타 공항에서 올랜도행 비행기 엔진 폭발!]
[(단독) 조지아주 상원의원이 탄 비행기]
[필립스 상원의원 생사 불명]
[브릿지월드 항공 BW130편 폭발 사건! ‘13의 저주’인가?]
[상원의원을 노린 테러일 가능성은?]
[탑승객 전원 사망 추정]
기사가 뜨자 미국 전역은 난리가 났다.
테러로 비행기가 폭발하고 상원의원이 사망하다니!
그야말로 911 이후 발생한 초유의 사태다!
기사를 본 미국 시민들은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비행기가 허공에서 폭발한 건가?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끔찍한 일이!
-마크 필립스 상원의원이 가족들과 함께 타고 있다고 합니다!
-오! 하느님!
-테러라니! 대체 어떤 놈들이야?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된다!
-안 돼! 오늘 동생이 가족들과 올랜도로 여행 간다고 했는데!
-저희 부모님이 저 비행기에 타고 있을 수도 있어요! 지금 계속 전화하고 있는데 통화가 안 되네요.
-맙소사!
-제발 승객들이 무사하기를······.
-당신들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애틀랜타 공항은 미국의 주요 허브공항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공항.
일일 이용객만도 30만 명에 육박했다.
기사가 나가자마자 승객들의 생사를 묻는 전화와 비행기가 제대로 이착륙이 가능한지 묻는 전화가 빗발치며 공항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하지만 채 3분도 안 돼 새로운 기사가 주르륵 올라왔다.
[(속보) 브릿지월드 항공사 긴급성명 발표, 항공기 이륙 전에 엔진 결함 발견으로 승객 전원 무사]
[이륙 직전에 회항한 것으로 알려져. 승객 중 다친 사람 없어]
[국토안보부 관계자, 테러일 가능성 극히 적어]
[애틀란타 공항, 다른 항공기들 정상적으로 이착륙 중이라고 밝혀······]
[브릿지월드 항공사, 승객들에게 사과와 배상 약속]
[마크 필립스 상원의원과 가족들 무사]
[한국인 승객이 회항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져]
[필립스 상원의원, 승객들이 다치지 않아서 무엇보다 다행······]
CNN과 NBC, FOX뉴스 등은 즉시 정정보도를 내보냈다.
활주로에서 엔진이 터지는 장면과 소방차가 불을 끄는 장면을 찍은 화면이 TV와 인터넷을 통해 나갔다.
이륙 직전 비행기를 돌려 극적으로 사고를 막았고, 테러가 아니라는 얘기에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처음 기사 낸 새끼 누구냐?
-엎드려!!!
-아오! 이 기레기 새끼들!
-오보 낸 놈들 전부 해고시켜라!
-뭔 언론사가 가짜뉴스를 내고 있냐?
-그런데 엔진 소리만 듣고 이상을 알아챘다는 게 뭔가 이상하지 않아?
-그 한국인 최소 절대음감.
-이게 말이 돼? 일반인이 어떻게 그걸 알아챔?
-혹시 자기가 폭탄 설치한 거 아님?
-기사 자세히 보니까 옆에 앉은 공군 정비사가 먼저 눈치챘다고 함.
-어쨌든 회항시켜 달라고 한 건 한국인이니 엄청난 일을 했네.
-마크 필립스 의원을 구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아이 러브 코리아!
-대체 누군가요?
-그 비행기에 타고 있던 승객입니다. 출발 직전에 웬 아시아인이 비행기 돌리라고 난동을 피우기에 ‘그만해, 미친놈아’라고 욕했는데 덕분에 목숨을 건졌네요.
* * *
비록 비행기 엔진은 터졌지만 내 덕분에 모두가 무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난 그 자리에서 바로 풀려나고, 박수갈채와 함께 무수히 많은 악수 요청을 받았을까?
천만에.
그대로 경비원들 손에 이끌려 조사실 같은 곳에 감금되었다.
있는 거라고는 책상과 의자가 전부다. 한쪽 벽은 거울로 되어있는데, 아마도 매직미러가 아닌가 싶다.
반대쪽에서는 이쪽이 훤히 보이겠지?
그야말로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조사실이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몸수색을 당했고, 스마트폰과 여권, 지갑을 빼앗겼다.
그나마 수갑 안 채운 게 어디냐?
지금쯤이면 언론에서 기사가 쏟아지고 있겠구나.
난 1회차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기레기 보존의 법칙에 따라 어느 나라나 기레기는 있는 법.
오보의 원인은 마침 공항에 있던 기자가 앞뒤 다 자르고 ‘항공기 엔진 폭발’이라는 기사를 냈기 때문.
이걸 다른 언론사들이 확인 없이 받아 적었고, 어느새 테러로 인해 비행기가 공중에서 폭발한 걸로 됐다.
심지어는 탑승객 전원 사망했다는 기사까지 나갔다!
문제는 이 오보로 인해 금융시장이 발칵 뒤집혔다는 것.
테러일 수도 있다는 말에 완만하게 상상하던 미국 3대 지수는 나오자 하락세로 돌아섰고, 브릿지월드 항공의 주가는 30퍼센트 넘게 폭락했다.
미국이 기침하면 한국은 폐렴에 걸린다는 말처럼 미국증시가 출렁거리자 한국증시까지도 충격을 받았고, 증권사는 비상이 걸렸다.
당시 점심 먹으려다가 말고 동호 선배와 다른 직원들과 함께 CNN 뉴스를 봤었다.
다행히 오보임이 밝혀지자 증시는 바로 안정세로 돌아섰고, 브릿지월드 항공 주가는 불꽃처럼 반등해 가까스로 마이너스 5퍼센트로 마감했다.
마침 내 생일에 일어난 일인 데다가 몇몇 기사들이 ‘13의 저주’라는 것과 엮어서 보도하는 바람에 편명까지 정확히 기억났다. 하필 항공사 코드명이 BW다 보니 부장이 신주인수권부사채항공이냐는 아재개그를 치기도 했었고.
그래서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있는 거다.
“음······.”
생각해보니 좀 아깝다. 잘만 배팅했으면 짭짤하게 벌 수 있었을 텐데.
난 그 대신 일부러 그 비행기에 타는 것을 택했다.
사실 내가 비행기를 타지 않았어도 결과는 전혀 달라질 게 없다. 다만 그 자리에 내가 있고 없고의 차이일 뿐.
그럼에도 내가 이 비행기에 올라탄 이유는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함이다.
지금이야 그렇다 쳐도, 향후 더 많은 돈을 벌게 되면 견제나 공격을 받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를 대비해 미리 내 편을 만들어놓을 필요가 있다.
누구도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