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미국행
유성전자의 동우정밀 인수는 한동안 뉴스였다.
원리금을 다 받을 가능성이 열리며 쓰레기 채권은 순식간에 우량 채권으로 변했다. 등급은 여전히 BB-지만 후순위채권들의 거래가마저 발행가 이상으로 올랐다.
발행 당시엔 등급이 낮았던 만큼 금리가 높고 신주인수권까지 붙어있었다. 그러나 유성전자의 인수로 인해 동우정밀의 회사채는 이제 사실상 유성전자의 회사채와 동급이 되었다.
기업의 신용도가 올라간 만큼 이전과 동일한 조건으로 회사채가 발행될 리는 없다. 이렇게 되면 기존에 발행된 채권의 가격이 올라가게 된다.
신주인수권이라는 워런트는 분리해서 회사채만 매각했음에도 발행가 이상으로 잘만 팔렸다. 그도 그럴 것이, 금리 7.6퍼센트 주는 회사채가 어디 흔하겠나?
우리가 투자한 130억 원은 이제 1243억으로 변했다.
금액을 확인한 선우는 말을 제대로 못 하고 소리만 질러댔다.
“우와! 우와아! 이거 실화냐?”
사실 나도 잘 믿기지가 않는다.
이 정도로 액수가 커지니 돈이 아니라 그냥 숫자처럼 보인다.
여전히 성에는 안 차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이제 뭔가 해볼 만한 금액이 됐다.
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잠시 고민했다.
좀 더 불려야 하나, 아니면 이쯤에서 투자회사를 설립해야 하나? 회사를 설립하면 해야 할 일이 많아진다. 사람도 고용해야 할 테고.
한참 동안 소리를 지르던 선우는 제풀에 지쳤는지 소파에 누웠다.
“배고픈데 밥이나 먹자.”
“뭐 먹게?”
“치킨 먹을까?”
“······.”
뭔 기승전치킨이야?
“오늘은 떡볶이 먹자.”
“아! 거기도 좋지.”
선우는 어플로 주문했다.
한창 밥을 먹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윤아 씨.”
[뭐 하고 있어요?]
“친구랑 밥 먹고 있어요.”
[뭐 먹는데요?]
“떡볶이요.”
[설마 지난번에 말한 맛집이라는 곳이요?]
“맞아요.”
[좀 비싼 거 먹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돈을 그렇게 벌었는데.]
“다 윤아 씨 덕분이에요.”
정말이지 그녀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성윤아가 없었다면 유재호 회장을 만나지 못했을 테고, 이렇게 잘 해결되기도 힘들었겠지.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고 해도 부족할 정도다.
[금요일에는 뭐해요?]
“별다른 일정은 없는데요.”
[약속 같은 거 없어요?]
“약속이요?”
[생일이잖아요.]
“아! 그날 윤아 씨 생일이에요?”
[아니요. 미루 씨 말이에요.]
“아······.”
내 생일이구나.
돈 버느라 정신이 없다 보니, 며칠 후면 생일이라는 것도 까먹고 있었다.
“그런데 제 생일은 어떻게 알았어요?”
내 물음에 성윤아는 당황했다.
[어! 그, 그게······.]
“혹시 연수원에서 자기소개할 때 제가 말했었나요?”
[아! 마, 맞아요. 그래서 기억하고 있어요.]
그게 언제 적인데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니. 기억력 좋은데.
1회차 때 생일에 내가 뭘 했었더라?
낮에는 당연히 출근해서 일했을 테고······.
“아!”
그 순간, 난 중요한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올해 내 생일에 미국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 어쩌면 향후 미국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는 중요한 사건이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성윤아가 물었다.
[왜 그래요?]
“미안한데 그날은 못 볼 것 같아요.”
[어째서요? 혹시 약속 있어요?]
“생각해보니 한동안 미국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요.”
[미국이요?]
“예.”
[왜요?]
“할 일이 좀 있어서요.”
잠시 대답이 없었다.
기껏 생일이라고 보자고 했는데 미안한 마음이다.
“정말 미안해요. 제가 돌아와서 맛있는 거 살게요.”
[설마 떡볶이는 아니죠?]
“······그럴 리가요.”
내가 그 정도로 양심이 없지는 않다.
[약속한 거예요.]
“네. 돌아오면 바로 연락할게요.”
[알았어요.]
난 전화를 끊은 다음 선우에게 말했다.
“나 미국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아.”
“응? 밥 먹다가 갑자기 뭔 소리야?”
생각 같아서는 한국에서 몇 번 더 투자해서 자산을 불리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지금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으니까.
“어차피 회사를 만들 생각이긴 했어. 개인이 움직이기에는 금액이 너무 커졌으니까. 일단 투자법인부터 설립하자.”
사실 회사를 설립을 위해 꼭 미국까지 갈 필요는 없다. 서류만 보내도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하지만 기왕 가는 김에 사람도 섭외하고, 투자도 할 생각이다.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 만들게?”
“응.”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한국에 만들면 당장 자금 출처부터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향후 계획을 고려하면 미국에 있는 편이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기왕 하는 거 큰물에서 놀아야 하지 않겠는가?
금융시장에서 큰물은 당연히 미국이다.
“이름도 이미 정해놨어.”
“뭔데?”
난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컨티뉴 캐피탈(Continue Capital).”
“무슨 이름이 그래?”
게임에서 죽고 나서 다시 시작하는 걸 컨티뉴(Continue)라고 한다.
인생 2회차인 만큼 이만한 이름도 없다.
“니 지분 20퍼센트 태워줄게. 불만 없지?”
선우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반적으로 투자회사를 만드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먼저 시장에서 투자자로서 시장에서 명성을 쌓는다. 이후 투자를 받아 회사를 차리고, 명성을 이용해 자금을 끌어모은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투자에 성공하면, 더 큰 자금을 끌어모은다.
난 이 과정들을 전부 건너뛰기로 했다.
명성을 쌓을 만한 시간도 없고 자금을 모집할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외부 투자를 받으면 여러 의무가 뒤따른다.
때문에 철저하게 우리 자본으로 운영하는 패밀리 오피스를 만들 생각이다.
이렇게 하면 각종 공시나 규제를 피해 투자할 수 있다. 하지만 외부 투자를 받지 않으려면 그만큼 자기 자본이 많아야 한다.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 서둘러야 한다.
다행히 세상은 넓고 돈 벌 방법은 널려 있다.
모든 일들을 다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웬만큼 큰 사건들은 기억에 남아있다. 이것만 잘 활용해도 얼마든지 재산을 불릴 수 있다.
“언제 가게?”
“내일 바로 출발하게.”
“잘 다녀와.”
선우는 계속 먹으며 물었다.
“그런데 아까 생일 어쩌구 하던 건 뭐야?”
“금요일이 내 생일이래. 알고 있었어?”
“아니. 그럼 넌 내 생일이 언제인지 알아?”
“······.”
당연히 모른다.
원래 진정한 친구는 서로의 생일을 챙기지 않는다.
* * *
난 바로 미국행 티켓을 끊었다.
출발을 앞두고 인천공항 터미널에서 대기하는데 동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니가 웬일로 전화냐?”
세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엄마가 금요일에 집에 오래.]
“응?”
[오빠 생일이라며? 같이 밥 먹재.]
그래도 내 생일이라고 챙겨주는 건 가족들밖에 없다.
아! 한 명 더 있긴 하구나.
“나 바빠. 나중에 가겠다고 전해줘.”
[백수가 뭐가 바빠?]
“······.”
백수라는 말에 상처받을 뻔했다. 이런 때일수록 가족들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이 필요한 법이거늘.
“지금 비행기 타야 하니까 나중에 통화하자.”
그 말에 세나는 깜짝 놀랐다.
[뭐? 비행기? 어디 가는데?]
“미국 애틀랜타.”
[애틀랜타! 나 항상 애틀랜타 가보고 싶었는데.]
“영어는 할 줄 아니?”
[영어 할 줄 알아야만 미국 가? 거기 코리아타운도 있잖아.]
“······.”
뭐, 코리아타운이 있긴 하겠지만, 혹시 LA랑 착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데 미국은 왜 가는 거야?]
“할 일이 좀 있어서.”
[나도 데려가면 안 돼?]
“너 학교 안 가니?”
[방학 중이야. 며칠이나 가는 거야? 나 지금 바로 공항으로 달려갈까?]
정말로 달려올까봐 난 못 들은 척하며 말했다.
“돌아와서 연락할게.”
[뭐!? 오빠. 그럼 돌아올 때 면세점에서······.]
“끊는다.”
난 쓸데없는 단어가 나오기 전에 재빨리 전화를 끊고 비행기에 올라탔다.
한마디만 더 들었으면 큰일 날 뻔.
* * *
인천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14시간을 날아서 애틀랜타에 도착했다.
이코노미석에 낑겨 있었더니 온몸이 쑤신다. 얼른 돈 벌어서 비즈니스석을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전용기도 한 대 뽑아야지. 그러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겠구나.
입국 수속을 끝마친 나는 미국 대륙에 발을 디뎠다.
“미국도 오랜만이구나.”
1회차 때 언제 마지막으로 왔었더라?
미국에 몇 차례 온 적이 있긴 해도 애틀랜타는 처음이다.
애틀랜타는 조지아주 최대의 도시이자 주도. CNN과 코카콜라 같은 글로벌 기업의 본사가 위치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은 표면적으로는 관광.
관광지로 그렇게 유명한 곳은 아니지만, 꼭 한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기도 하다.
근처 소도시인 와킨스빌(Watkinsville) 때문이다. 에런 베이커의 고향이자 화이트로드의 본사가 위치해 있는 곳.
매년 주주총회가 여기서 열리고, 전 세계의 주주들이 한자리에 모여든다.
그때가 되면 작은 소도시는 마치 축제장 같은 곳으로 변한다. 에런 베이커는 직접 등장해 주주들에게 한 해의 성과와 앞으로의 비전에 대해 얘기한다.
한때 화이트로드 주식을 사서 주총에 참가하는 것을 꿈꿨었다. 1회차 때는 그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다르겠지?
가성비 좋은 시내 비즈니스호텔에 짐을 푼 나는 먼저 CNN 본사로 향했다. 일하면서 질리도록 보긴 했는데 본사에 와보는 건 처음이다.
나름 기대를 하고 왔는데 딱히 볼 건 없었다.
이어서 옆에 있는 코카콜라 본사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평생 코카콜라를 마셨고, 심지어 치킨집 할 때도 코카콜라를 사용했지만 본사에 와보는 건 처음.
역시나 볼 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입장료가 아까워 콜라는 실컷 마시고 나왔다.
둘째 날 오전에는 케이블카를 타고 스톤 마운틴에 올라갔다.
추운 날씨임에도 관광객들과 놀러 온 사람들이 많았다. 하이킹을 하는 사람들도 보였다.
혼자 오니 왠지 심심하다. 이런 곳은 애인과 함께 와야 하는데.
난 연인들이 넘쳐나는 곳에서 혼자 셀카봉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그래도 여행 오니 좋긴 좋다.
생각해보면 대체 얼마만의 여행이지?
증권사에서 일할 땐 바빠서 여행을 못 다녔고, 백수일 때는 돈이 없어서 못 다녔다. 치킨집을 차린 뒤에는 휴일 없이 일하느라 못 다녔고.
이번 생에는 여행도 열심히 다녀야지.
난 미국의 크고 아름다운 자연을 보며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했다.
향후 10년 안에 뜰 만한 기업 이름 대보라고 하면 100개는 댈 수 있다. 돈만 많으면 이거저거 다 사도 되겠지만, 그럴 만한 돈이 없다.
결국 중요한 건 선택과 집중이겠지?
이어서 조지아 대학교도 방문했다.
이곳은 미국 최초의 공립대이자 조지아주 최고의 명문.
수많은 유명인들을 배출했지만,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바로 현존 최고의 투자자로 불리는 에런 베이커.
에런 베이커 회장의 모교에 왔다고 생각하니 왠지 감회가 새롭다. 그는 모교 사랑이 남달라 기부도 많이 하고 자주 방문해 연설을 한다고 한다.
나도 언젠가 한국대에서 연설할 날이 오려나?
적당히 관광을 끝마친 나는 일찍 호텔로 돌아와 잠자리에 누웠다.
내일은 비행기를 타고 올랜도로 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