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유성그룹 회장 (6)
[(속보) 유성전자, 동우정밀 전격 투자 결정!]
[유성전자의 깜짝 대규모 투자]
[동우정밀 거래재개 가능성은?]
[반도체주 일제히 상승!]
[반도체 소부장주, 기지개 켜나?]
유성전자가 인수자로 나선다는 발표를 하자마자 언론사들을 너나 할 것 없이 속보를 올렸다.
애널리스트들은 발 빠르게 향후 전망을 내놓았고, 소재, 부품, 장비에 대한 투자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며 반도체 섹터 전체가 들썩거렸다.
동우정밀에 물려 있던 소액주주들은 두 팔을 들어올리며 격렬하게 환호했다.
-유성전자라니! 유성전자가 인수를 하다니!
-제엔장! 믿고 있었다구!
-이거 왜 거래가 안 되나요? 살 방법 없나요?
-거래정지 언제 풀리죠?
-풀리는 날 상한가 예약이네.
-이제부터 날아오른다! 꽉 잡아라!
-ㅅㅂ 한강 가던 도중 기사 보고 유턴했다~ 뛰어내렸으면 억울할 뻔~
-재타이거 형ㅜㅜ 너무 고마워. 나 앞으로 착하게 살게.
-앞으로 재타이거 형 욕하지 마라.
-이제부터 부모님 욕은 참아도 재타이거 형 욕은 참지 않겠다!
-그럼그럼. 사람이 살다 보면 탈세나 불법승계 할 수도 있지.
-일전에 와이프 몰래 전세자금 꼬라박았다가 걸려서 이혼서류에 도장 찍었다는 사람입니다. 가정법원에 제출 직전에 기사 뜬 거 보고 다시 잘 살아보기로 했습니다. 못난 남편을 둔 아내에게······ 사랑한다!!!
-오늘 당장 엔폰 버리고 유성전자 코스믹폰으로 바꾼다!
-이제 막 주식투자 시작한 주린이인데 소부장이 뭘 뜻하는 건가요?
-아! 그건 소형주는 소부장, 대형주는 대부장으로 부르는 겁니다~
-이게 뭔 개소리야?
-잉? 그럼 금융주는 금부장임?
-소재, 부품, 장비를 합쳐서 부르는 말 아니야?
-모르는데 아는 척하는 새끼가 세상에서 제일 나쁨 ㅡㅡ;
기사를 보던 도중 난 회사에 있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저 기사 진짜야?]
“진짜겠지?”
유성전자가 나선 이상 XRT세미콘의 인수는 물 건너갔다고 봐도 좋다. 아무리 높은 금액을 부른다 한들 인수허가가 나올 리 없으니.
선우는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와아! 이게 되네.]
난 웃으며 말했다.
“내가 된다 그랬잖아.”
* * *
XRT세미콘은 계속해서 인수 의사를 내비쳤으나 사실상 유성전자로 확정됐다는 분위기였다.
금액을 크게 부르면 되지 않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경우 자금 마련 계획이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중국 업체의 지원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도 없고.
그리고 반도체 기업은 돈만 있다고 인수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실제로 CMIC는 미국 반도체업체 나노트론의 파운드리 부문을 인수하려 했으나 허가가 나오지 않아 실패했다.
아무리 정부가 막장이라도, 자국 대기업이 인수하겠다고 나섰는데 외국기업에 넘길 리 있나?
동우정밀 주식은 여전히 거래정지 상태라 매매가 불가능했다. 하지만 회사채는 거래가 가능했다.
동우정밀의 신용도는 여전히 투자부적격 등급.
언제 공장이 정상화될지, 수익을 낼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유성전자가 인수한다는데 그게 뭔 상관이겠는가?
비유를 하자면 빚에 허덕이는 청년에게 부자 부모가 나타난 상황. 대출쯤이야 돈 많은 부모가 대신 갚아주면 그만이다.
유성전자의 인수 소식이 뜨자마자 회사채는 순식간에 발행가로 치솟았다.
난 두 손을 들어 올리며 환호했다.
“좋아! 이 맛에 정크본드 투자하는구나!”
하이일드 펀드를 운용하는 펀드매니저들 심정을 알 것 같다.
이번 일로 인해 향후 반도체 산업의 역사가 바뀌었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세상을 바꿔놓을 수 있는 것이다.
혼자 신나 하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난 일단 받아보았다.
“누구세요?”
상대는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유재호입니다.]
잠시 유재호가 누군지 생각하다가 유성전자 회장 이름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 안녕하세요, 회장님.”
[그날 하신 말씀이 맞았습니다.]
“뭐가요?”
[동우정밀은 정말로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더군요.]
“다행이네요.”
그가 알아봐서 정말 다행이다.
덕분에 채권을 제값 받고 팔 수 있게 됐다.
[동우정밀 회사채는 어떻게 할 겁니까?]
난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매각할 겁니다.”
[후순위 BW를 샀다고 들었는데 지금 팔기는 좀 아깝지 않나요? 만기까지 가져가면 신주를 받을 수 있을 텐데요.]
BW는 만기까지 들고 있으면 정해진 가격에 신주를 살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만기시에 주가가 행사가 이하면 아무런 가치가 없지만, 이상이면 차익을 먹을 수 있다.
아직 거래정지는 풀리지 않았지만 거래가 재개되면 주가는 분명 워런트 이상으로 치솟을 것이다.
난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워런트는 분리해서 채권만 매각할 생각입니다. 나중에 주식은 받아야죠.”
내 말에 유재호 회장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런 방법이 있군요.]
채권은 채권대로 팔아 일단 수익을 챙기고, 워런트는 나중에 주식으로 받거나 차익을 받고 매각해도 된다.
동우정밀 후순위채 금리는 연 7.6퍼센트. 워런트를 제외해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일전에 말씀한 것도 고려하고 있습니다.]
“어떤 건가요?”
[팹리스사 인수입니다. 유망한 회사들을 인수해서 키워보려고 합니다.]
난 그 말에 적잖이 놀랐다.
유성전자는 인수합병에 그다지 적극적인 편이 아니다. 다른 IT기업들이 활발하게 스타트업 인수전을 벌일 때도 자체 R&D와 설비투자에 집중했다.
설계 역시 M&A보다는 자체 설계역량을 키우는데 투자했다. 안타깝게도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런데 어째서 생각이 바뀐 걸까?
유재호 회장의 생각이 바뀐다는 것은 향후 유성전자의 사업전략이 통째로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잠시 생각해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동우정밀 때문인가?
돌멩이라고 생각했던 기업이 알고 보니 다이아몬드였다. 이번 일을 계기로, 직접 기술을 개발하기보다 좋은 기업을 골라 인수하거나 투자하면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추천해 주실 만한 기업이 있나요?]
“음, 쉽게 말씀드릴 만한 건 아니네요.”
미래에 어떤 기업이 잘될지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내 말 한마디가 수백억씩 주고 맡기는 컨설팅보다 가치가 있다.
어쩌면 이제부터 유성전자는 이전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될지도 모른다.
[신세는 잊지 않고 반드시 갚겠습니다.]
유성그룹 회장쯤 되는 사람이 허언을 하진 않겠지.
뭐, 유성전자가 성장하는 게 내 입장에서 나쁠 건 없다. 덕분에 투자에 성공하기도 했으니, 이번 기회에 빚을 지워놓는 것도 괜찮겠지.
난 그에게 말했다.
“RD쿼넷을 추천합니다.”
[들어본 것 같군요. 차량용 반도체를 설계하는 회사인가요?]
“맞습니다.”
속으로 좀 놀랐다.
설마 이 기업을 알고 있을 줄이야.
RD쿼넷은 원래 쿨컴에 있던 직원 네 명이 나와서 세운 회사다. 공동창업자이자 CTO(최고기술책임자) 피터 샌드퍼드는 반도체 업계의 신성으로 유명하다.
당장은 실적이라 할 만한 건 없고 그냥저냥 이름이 알려진 정도지만, 이후 차량용 반도체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급성장한다.
내년쯤 나스닥에 상장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가 되면 합병승인 문제로 돈이 있어도 못 살 것이다.
“NP세미도 추천합니다.”
이곳은 엔플에 인수되어, 이후 NP1 칩셋을 개발한다. 이 기업이 유성전자에 인수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그리고 ADM에 지분투자를 늘리시는 것도 좋을 겁니다.”
ADM은 CPU 시장에서 안텔과 경쟁하던 회사.
뭐, 경쟁이라고는 해도 실제 점유율은 20퍼센트 미만으로 안텔의 독점을 견제하는 정도였다.
그런데 그나마도 불스 아키텍처가 실패하며 망했다.
하지만 CEO가 대만계 미국인 쟈넷 수로 바뀐 뒤 강력한 구조조정에 들어갔다. 우선 팹을 매각해 IDM에서 팹리스로 전환해 덩치를 줄였고, 그다음 설계에 올인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REN 아키텍처.
REN 아키텍처는 불스 아키텍처의 악몽을 씻어내며 시장에 ADM의 부활을 알렸다.
간신히 되살아나긴 했지만 아직 시장의 절대강자 안텔을 상대할 정도는 아니다. 현재ADM은 ‘안텔에 비해 성능은 떨어지지만 가격은 저렴하다’는 가성비 이미지.
그러나 이것도 올해까지 얘기다.
당장 내년 초에 공개될 REN2 아키텍처만 해도 성능 면에서 동세대 안텔을 압살한다.
게다가 GPU 설계에서도 엔도비아에 비견될 정도로 괄목한 성장을 보이며 ADM은 그야말로 날아오른다.
[ADM에 그만한 가치가 있겠습니까?]
“그 이상의 가치가 있습니다.”
현재 ADM의 시총은 250억 달러 수준.
이 정도면 유성전자가 통째로 인수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반도체는 국가기간산업. 안보와도 직결되고, 독과점 문제도 있는 만큼 해당 국가는 물론이고 관련국들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미국 정부가 허가할 리 없으니 사실상 인수합병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분투자를 늘리는 건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ADM 투자에는 두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뭡니까?]
“첫째는 설계 분야에서 협력을 할 수 있습니다. 유성전자가 자체 설계 역량을 키우고 있지만 아직은 한계가 분명합니다. 반면 ADM은 CPU는 물론 GPU 설계까지 하고 있죠. 이쪽 역시 모바일 분야 진출을 준비하고 있으니 좋은 파트너가 될 겁니다.”
실제로 유성전자는 이후 모바일용 GPU 설계에 난항을 겪으며 ADM과 파트너십을 맺는다. 말이 좋아 파트너십이지, ADM이 설계자산을 제공하고 라이선스 비용과 로열티를 지불하는 조건이니 사실상 설계를 위탁한 셈이다.
[둘째는요?]
“ADM은 팹리스죠. 지분을 인수한다면 향후 생산물량을 위탁받기도 쉽지 않을까요?”
이건 그냥 내 예상.
원래 ADM은 생산물량을 전부 CSMT에 몰아줬으니까.
[안텔과의 관계가 문제군요.]
유성전자는 안텔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구축하고 있다.
보통 컴퓨터에는 안텔의 CPU와 유성전자의 D램이 들어간다. ADM에 지분투자를 늘리면 안텔과의 관계가 틀어질 위험이 있다.
뭐, 그런 문제는 회장이 알아서 잘 조율하겠지.
그런 거 하라고 월급 주는 거 아니겠나?
이 정도로 떠먹여 줬는데도 못 먹으면 어쩔 수 없겠지.
“투자를 하실 거라면 서두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시장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중이니까요.”
[알겠습니다. 날 잡아서 밥이라도 한번 사야겠군요.]
“밥 정도로는 안 될걸요.”
만약 내 말대로 한다면 1년도 지나지 않아 나에게 절을 하게 될 것이다. 내 말대로 안 한다면 땅을 치며 후회할 테고.
내 말에 유재호 회장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럼 술까지 사야겠군요.]
“잘 얻어먹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요?”
[혹시 유성전자에 입사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
유성그룹 회장이 직접 취업을 제안하다니.
이건 회장 특채라고 해야 하나?
이전 생이었다면 바로 콜했겠지만, 이번 생은 내가 좀 바쁘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따로 하고 있는 일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아쉽군요. 이건 제 번호니 저장 부탁드립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
“알겠습니다.”
재벌이라고 해도 유재호 회장과 직접 연락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1회차 때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인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