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유성그룹 회장 (5)
유재호 회장이 인수를 결정하자, 유성전자 M&A 부서는 바로 움직였다.
권혁준 부회장은 직원들과 함께 직접 동우정밀의 생산시설과 연구소를 살펴보러 향했다.
그는 유성반도체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입사해서 반도체 초격차 전략을 이끈 장본인이었다.
그의 노력과 열정 덕분에 유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세계 1위라는 자리에 올라설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혁준 부회장은 70대의 고령임에도 여전히 현역에서 연구개발과 후학 양성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유재호 회장은 그에게 깊은 존경을 표했다.
그래서 유재호 회장은 전화가 걸려오자 미팅 중임에도 일어나서 바로 전화를 받았다.
“예, 권 부회장님.”
[알고 계셨던 겁니까?]
유재호 회장은 당황하며 물었다.
“뭘 말입니까?”
[동우정밀 말입니다. 사정을 좀 자세히 알아보니 아무래도 중국 쪽에서 장난질을 친 것 같습니다.]
“장난질이요?”
[스탬프 마모도가 빠른 건 사실이지만 충분히 사전에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시제품이 나오자마자 납품을 하라고 종용한 건 YMCT 쪽이었구요.]
그 말에 유재호 회장은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설마 일부러 손실을 발생시킨 건가? 동우정밀을 위기로 몰기 위해?’
어째서 그렇게까지 해서 동우정밀을 인수하려 한 걸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권혁준 부회장이 설명을 해주었다.
[처음 회장님께서 결정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의아하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살펴보니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노광장비 쪽의 기술력이 상당합니다. 만약 동우정밀이 중국 쪽에 넘어갔다면 기술격차가 크게 좁혀졌을 겁니다. 최악의 경우에는 몇 년 후 유성전자가 중국 반도체를 쫓아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 정도인가요?”
들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동우정밀에 그 정도 가치가 있었다고?
[예. 그동안 미세공정에서는 EUV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다고 생각했고, NIL 방식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직접 기술을 확인하고 연구원들을 만나 얘기를 해보니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재호는 깜짝 놀랐다.
“그게 정말입니까?”
‘불가능하다’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천지 차이다.
‘불가능’은 무슨 수를 써도 안 되는 거지만, ‘가능할 수도 있다’는 돈과 시간을 쏟아붓는다면 되게 만들 수 있으니까.
권혁준 부회장은 평소 항상 신중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린아이처럼 들뜬 목소리였다.
[난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았으니, 제가 은퇴하기 전까지 반드시 유성전자 파운드리에 쓰일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통화가 끝난 뒤, 유재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기업이 정말로 편자의 못이었을 줄이야.”
그날 만나서 얘기를 듣지 않았다면 동우정밀이 망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 말을 듣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정말로 못 하나 때문에 왕국이 무너질 수도 있지 않을까?
사업을 하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 중에는 도움이 되는 이도 있고, 아닌 이도 있다.
그리고 아주 가끔은 귀인이라 할 만한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만나는 것도 힘들고, 알아보는 것은 더더욱 힘들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제 발로 찾아왔다.
유재호는 성윤아와 함께 온 청년을 떠올렸다.
‘프리머스 펀드 부실을 밝혀낸 건 우연이 아니었다는 건가?’
그는 자신도 몰랐던 동우정밀의 가치를 정확하게 알아보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가 그동안 했던 말들을 허투루 흘려들을 수 없게 되었다.
‘파운드리 투자를 늘리고, 팹리스사를 인수하라고 했지?’
* * *
DA금융그룹 양현성 회장의 장녀인 양자은은 프리머스 사태가 터진 뒤 정신없이 바빠졌다.
더해서 맡은 일 중 하나는 물러난 양정욱 전무를 대신해 사태를 수습하는 것이었다.
금감원은 우선 판매사들이 피해 금액의 70퍼센트를 피해자들에게 지급하라고 권고했다.
따지고 보면 운용사와 공모를 한 것도 아닌 만큼, 어떻게 보면 판매사도 피해자다. 하지만 감시를 소홀히 한 책임을 피하기는 힘들었다.
DA증권은 금감원의 권고에 따라 펀드 원금의 70퍼센트를 우선 지급했고, 이후에도 절차에 따라 추가 배상을 약속하며 여론을 수습하려 했다.
양자은 상무는 프리머스 사태의 여파가 가라앉으면 지금의 자리를 떠나 DA은행으로 영전할 예정이었다.
그룹 중요 회의를 끝마치고 나온 그녀는 차에 올라타 여의도에 있는 DA증권 본사로 향했다.
오랜만에 딸과 함께 저녁을 먹기 위해서다.
차에 올라탄 딸은 핀잔을 주듯 말했다.
“약속장소로 간다니까 뭐 하러 회사로 데리러 와요?”
“어차피 가는 길인데 차 한 대로 가면 편하잖아.”
“다른 직원들 보면 어떡해?”
“어차피 다 알려졌다며?”
“그래도. 자식 회사에 찾아오는 부모가 어디 있어?”
양자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다음부터는 조심할게. 우리 딸 뭐 먹고 싶어?”
저녁 메뉴는 한정식이었다.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양자은은 딸에게 물었다.
“요즘 일은 어때?”
“똑같지 뭐.”
“마음에 드는 남자는 없고?”
“없어.”
양자은은 딸이 관심을 가졌던 남자를 떠올렸다. 한동안은 집에서 그 남자 얘기만 계속했을 정도였다.
“혹시 그 사람이랑 연락해?”
“누구요?”
“한미루 씨 말이야.”
“아.”
“진짜 신기한 사람이야. 펀드 부실 폭로하고 할 일 다 했다는 듯 미련 없이 회사를 떠나다니. 그 뒤로 뭔가 요구할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없고.”
“······.”
뭔가 요구를 하긴 했었다. 워낙 뜬금없는 것들이라 그렇지.
“엄마, 사실은······.”
성윤아는 그사이 있었던 일에 대해 말했다.
딸의 얘기를 전해 듣는 내내 양자은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정크본드를 매입한 다음, 유재호 회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고?”
“응.”
그 뒤의 얘기는 더 황당했다.
“유재호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동우정밀을 인수하라고 했다고?”
“응.”
그야말로 상식 밖의 일이고, 대단히 실례되는 행동이다.
“인수합병이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알아? 유 회장님이 그 일로 화내시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려고?”
재계에서 유재호 회장이 지닌 영향력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냥 화 한 번 내고 끝나면, 다행이지만 잘못했다가는 딸에게까지 피해가 갈 수도 있다.
다행히 그는 소탈하고 뒤끝 없는 성격으로 알려져 있다. 다소 불쾌했더라도 웬만하면 웃으며 넘길 것이다.
양자은은 교육 차원에서 야단을 치듯 말했다.
“넌 그런 일이 있으면 엄마한테 미리 얘기를 했어야지.”
성윤아는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엄마 바쁜데 괜히 신경 쓸까봐 그랬지.”
“유재호 회장님 반응은 어땠어?”
“기분 나빠하는 것 같진 않았어요. 오히려 재미있어하는 것 같던데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사업하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를 일이야. 앞에서 웃으면서 뒤에서는 찌를 수도 있다.”
그 말을 들으니 성윤아도 조금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미루 씨는 괜찮으려나?’
양자은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왜 하필 동우정밀이래?”
“기술력이 좋아 쉽게 안 망할 거라던데.”
“정말?”
“응. 최근에 XRT세미콘이라는 싱가포르 회사가 인수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있어.”
“그건 결정되기 전까지는 모르는 거지.”
인수 직전에 엎어지는 게 어디 한둘이겠는가?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채권 값은 일단 오르던데. 지금 팔아도 두 배는 벌걸.”
“그래?”
부실채권들 사이에서 우량채권을 골라낸다는 건 로또 번호 맞추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애초에 그게 쉬웠다면 기관들이 미쳤다고 헐값에 매도를 하겠는가?
그런데······.
한미루는 아무도 몰랐던 펀드 부실을 정확하게 밝혀냈다.
‘하긴, 그 정도 통찰력이 있다면 망해가는 기업들 사이에서도 살아남을 기업을 찾아낼 수 있을지도.’
정크본드를 사서 대박을 터트리는 건 종종 있는 일이기도 하고.
대화를 하던 도중 양자은의 핸드폰이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본 그녀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 모습을 본 성윤아가 물었다.
“왜 그래요? 누군데?”
“유재호 회장님.”
“뭐? 진짜?”
양자은은 놀라는 딸을 보며 생각했다.
재계 모임에서 여러 차례 얼굴을 보고 연락처를 교환하긴 했지만, 딱히 사적으로 연락을 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전화를 걸어왔다.
이유가 뭘까?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상대는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상무님. 유성그룹 유재호입니다.]
“예. 안녕하세요, 회장님. 오래간만이에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잠깐 통화 괜찮으신가요?]
“그럼요.”
잠시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지던 중 유재호 회장이 말했다.
[일전에 따님분께서 회사로 찾아왔었습니다.]
‘역시 그 일 때문이구나!’
양자은은 속으로 당황하면서도 최대한 신중하게 말했다.
“안 그래도 저도 얘기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따님이 어머님을 닮아 정말 훌륭하던데요.]
“감사합니다.”
‘비꼬는 건가?’
[혹시 지금 따님과 같이 계신가요?]
“예.”
[마침 잘됐네요. 바꿔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날 일은 없었던 일로 해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바꿔달라고까지 하는 걸 보니 절대 대충 넘어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딸이라고 해도 다 큰 성인. 본인의 잘못은 본인이 사과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딸에게 핸드폰을 건네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조건 잘못했다고 말씀드려.”
“아, 알았어요.”
성윤아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지난번 일은 진작 사과를 드렸어야······.”
[사과요? 아! 그날 먼저 일어나게 돼서 죄송했습니다.]
사과를 하려다가 받게 되자 성윤아는 깜짝 놀랐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사과를······.”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큰 도움을 받았네요. 이번에 신세 진 건 잊지 않겠습니다.]
“······예?”
당황하는 성윤아에게 유재호는 계속 말했다.
[언제 어머님과 함께 식사하시는 건 어떤가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아름이와 자리 한번 마련하겠습니다.]
“아, 예. 전 언제든 괜찮습니다.”
[아! 그리고 혹시 한미루 씨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요?]
“왜, 왜요?”
‘설마 전화해서 욕하려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따로 물어볼 것도 좀 있어서요.]
“아, 네. 바로 문자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통화가 끝나고 나자 양자은은 딸에게 바로 물었다.
“뭐라고 하셔?”
성윤아는 고개를 들며 말했다.
“감사하다고 하시는데.”
“뭐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리고 미루 씨 연락처 좀 알려달래.”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