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유성그룹 회장 (4)
대기업은 같은 부품과 소재라도 여러 업체들로부터 나눠서 납품을 받는다.
경쟁을 통해 가격을 낮추고, 만에 하나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노광공정에 쓰이는 EUV 장비만큼은 다른 대안이 없었다.
한 기업에 기술이 종속되는 상황이 달가울 리 없다.
때문에 진작 NIL이나 DSA 등 여러 기술을 개발 중에 있으나 아직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그런데 만약 비접촉 방식으로 회로도를 전사하는 게 가능하다면?
어쩌면 EUV 방식을 대체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갑자기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부채 규모가 얼마라고 했죠?”
“회사채 원리금과 은행 대출은 3800억 규모입니다. YMCT 쪽에 물어줘야 할 배상금은 약 1500억 규모로 추정 중입니다.”
임원들은 혀를 차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산 규모를 생각한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이다.
만약 인수를 한다면 이걸 그대로 갚아줘야 할지 모른다.
조준호 사장이 말했다.
“최근 싱가포르의 XRT세미콘이라는 회사가 인수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XRT세미콘이면 팹리스사 아닙니까? 그쪽에 그만한 자금력이 있습니까?”
“CMIC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유재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중국 자본이 뒤에 있다는 겁니까?”
“예. 현재 최대주주가 홍콩계 사모펀드 빅타워 캐피탈인데, 주로 반도체 기업들에 투자하고 있습니다.”
중국 업체들은 전 세계 반도체 기업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M&A하는 중이고, 그 뒤에 중국 정부의 지원이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
XRT세미콘의 창업자인 잭키 황은 화교다.
싱가포르인의 70퍼센트가 중국계인 만큼 딱히 이상할 건 없지만, 그는 중국 공산당 인사들과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XRT세미콘 뒤에 중국이 있는 건가?’
현재 중국의 반도체 기술력은 제조 분야에는 3년, 설계 분야에서는 2년가량 뒤처져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다.
첨단산업에서 이 정도 격차면 엄청난 수준이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제조 분야에서는 5년, 설계 분야에서는 3년가량 뒤처져 있다고 평가됐는데, 불과 1년 사이 그 격차가 크게 좁혀진 것이다.
중국 정부가 반도체 굴기를 위해 쏟아붓는 돈은 상상을 초월했다. 미국의 제재 조치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반도체 생산량은 엄청난 속도로 증가했다.
그나마 미세공정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는 게 위안이지만, 과연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중국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의 제재로 인해 EUV 장비를 단 한 대도 들여오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이를 대체할 만한 기술 개발에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유재호는 한미루의 말을 떠올렸다.
‘지금 쓰이고 있는 기술들도 처음에는 모두가 안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라고 했지?’
그렇다면 이 기술은 어떨까?
동우정밀이 가진 기술들이 유성전자에 얼마나 쓸모가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CMIC에게는 분명 쓸모가 있을 것이다.
가만히 앉아 CMIC가 기술을 빼가도록 놔둬도 되는 걸까?
유재호는 곰곰이 생각했다.
‘동우정밀이 중국에 넘어갔는데, NIL이 향후 기술 표준이 된다면?’
어쩌면 후발주자라 생각했던 중국 업체에 뒷덜미를 잡힐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기우일 수도 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시장에 있는 모든 기업을 인수해야 할 수도 있으니까.
유성전자가 반도체 산업에 뛰어든 것은 1970년대 말.
이미 일본과 미국의 대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는 이 시장에서 유성전자는 밑바닥부터 하나씩 쌓아올렸다.
모든 것이 선택의 연속이었다.
메모리냐 비메모리냐, DDR이냐 램버스냐, 스택 공법(Stack Method)이냐 트랜치 공법(Trench Method)이냐 등등.
만약 하나라도 잘못된 선택을 했다면, 지금의 유성전자는 없었을 것이다.
동우정밀을 인수하지 않는다고 해서 당장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로 편자의 못이라면?’
못 하나 때문에 말을 잃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말을 잃다 보면 거대한 왕국도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만다.
유성전자가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회의실에 모인 임원들은 입을 굳게 다문 채 회장이 입을 열기만을 기다렸다.
결정은 그의 몫이고 그에 따른 책임 역시 그가 져야 한다.
회장이라는 자리는 그런 것이다.
생각을 끝마친 유재호는 입을 열었다.
“비밀리에 동우정밀 경영진들을 만나 인수를 추진하세요.”
* * *
[XRT세미콘, 동우정밀 인수에 관심 보여]
[동우정밀, 상장폐지는 면하나?]
[막대한 부채와 배상금이 문제. 인수까지 난항 예상]
[XRT세미콘, 아직 결정된 건 아무것도 없어······.]
기사를 본 소액주주들은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XRT세미콘이 대체 뭐 하는 곳이여? 나만 모르고 있나?
-어디든 좋으니 제발 사 가라!
-그런데 이거 외국기업이 사게 놔둬도 되는 건가?
-쌍호자동차 때처럼 기술만 다 빨아먹고 다시 뱉는 거 아님?
-ㅋㅋㅋ 동우정밀에게 빨아먹을 기술력이나 있긴 함?
-코스닥 기업 기술력이라고 해봐야 뻔하지~
-그래도 싱가포르 기업이 사가는 거면 괜찮을 듯.
-중국 기업만 아님 됨!
-누가 사도 좋으니 살려주세요ㅜㅜ
-20층에 사람 있어요! 구조대 좀 보내주세요!!
-거기까지 올라간 놈은 대체 뭐냐? 구조대도 올라가다 쓰러지것다.
-제발 상폐만은 ㄷㄷㄷ
XRT세미콘이 채권단과 협의에 들어갈 거라는 얘기가 나오며 동우정밀 회사채 가격은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액면가의 10퍼센트까지 떨어졌던 회사채는 이제 30퍼센트 수준까지 올라섰다.
전문가들은 대부분 XRT세미콘의 동우정밀 인수 가능성을 높게 점쳤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소식이 전해졌다.
* * *
류우녕 소장.
그는 중국 최고의 명문대라는 칭화대 교수이자 중화반도체연구소 소장으로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진두지휘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지휘 아래 중국 정부와 대학, 기업들은 협력해서 기술개발과 함께 잇따른 인수합병을 벌였다.
중국은 계획경제로 15억 인구를 먹여 살리는 나라다.
전기차, 드론, 통신장비, 항공우주 등의 첨단산업 분야에서도 선진국을 바짝 쫓거나 추월했다.
하지만 정작 산업의 기반이라 할 수 있는 반도체는 중국 경제의 가장 취약점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중국은 반도체 굴기를 선언하고, 반도체 자급을 목표로 투자를 시작했다.
이를 위해 중국 내의 반도체 전문가들이 모여 철저한 전략을 수립해 R&D와 M&A를 진행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미국이 제동을 건 것이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며, 미국 기업뿐 아니라 미국 기술로 만들어진 반도체는 미국 정부의 제재 조치를 따라야 한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세상에 미국 기술로 만들어지지 않은 반도체가 어디 있겠는가?
당장 미국이 전면 수출금지를 선언하면 중국 경제는 말라 죽게 될 것이다.
특정 국가를 대상으로 모든 반도체를 전면 수출금지하는 건 사실상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때문에 미국 상무부는 거래금지 기업을 지정해 소재, 부품, 장비를 통제하며 중국을 압박하는 방식을 취했다.
마치 명확한 선을 그어놓고 넘어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미국은 첨단기술 분야에서 중국의 경쟁력을 상실시키겠다는 목적을 분명하게 드러냈고, 이는 반도체 굴기에 엄청난 타격을 안겨주었다.
당장 인수합병과 기술 이전부터 제동이 걸렸다.
위기감을 느낀 중국은 반도체 굴기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린위샹 국가주석은 ‘반도체는 중국 경제의 심장이다. 심장을 외부에 의존할 수는 없다’라는 말로 반도체 국산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노력은 어느 정도 결실을 거둬 중국 반도체 생산량은 매년 두 자리씩 늘어났고 소재, 부품, 장비들의 국산화도 착착 진행되었다.
문제는 역시나 미세공정이었다.
CMIC는 중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7nm 공장 착공에 들어갔지만, 거기에 들어가야 할 장비는 구할 수가 없는 상황.
PSMC와 유성전자가 7nm를 넘어서 5nm 경쟁을 벌이는 사이, CMIC의 최신 공정이라고 해봐야 몇 세대 뒤처진 14nm에 머물고 있었다.
그 가장 큰 원인은 노광장비를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
‘미국이 EUV 장비 수출을 허가할 리 없어. 중국 반도체가 미세공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NIL 방식을 고도화시켜야 해.’
류우녕 소장은 필요한 기업을 물색했다.
그러던 도중 한국의 한 중견기업이 눈에 들어왔다. 동우정밀에 대한 분석을 끝마친 류우녕 소장은 강력하게 주장했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기업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인수해야 합니다!”
이때부터 동우정밀을 인수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갔다.
YMCT를 통해 납품계약을 맺으며 기술과 설비투자를 유도했고, 시제품 단계에서 납품을 종용했다.
다행히(?) 납품받은 장비부품에서 불량이 발생했다. YMCT는 일부러 공장을 멈춰 세우고 피해를 키웠다.
그로 인해 동우정밀은 생산과 납품이 중단된 것은 물론이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마침 한국에서는 프리머스 사태로 인해 회사채 발행이 정지된 상황. 동우정밀은 회사채 발행에 실패하며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이는 절호의 기회였다.
중국 기업이 인수한다고 하면 견제가 있을 게 뻔하다.
때문에 싱가포르 기업인 XRT세미콘을 움직였다. 어차피 자체 회생은 불가능한 만큼 쉽게 품에 안을 수 있을 것이다.
XRT세미콘의 경영진은 동우정밀 경영진들과 접촉해 조건을 조율했다. 표면적으로는 부채감면에 대한 협의였지만 속내는 따로 있었다.
바로 기술 이전.
인수 후 CMIC로 기술을 이전시키고, 기술진들과 연구원들에게도 두세 배의 연봉을 제시해 이직시킬 생각이었다.
‘모든 게 계획대로군.’
그런데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바로 유성전자가 인수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소식을 들은 류우녕 소장은 놀라 소리쳤다.
“유성전자가 대체 왜!?”
XRT세미콘 잭키 황 사장이 말했다.
[유재호 회장이 직접 지시했다고 합니다. 권혁준 부회장이 연구원들을 데리고 생산설비와 연구소를 둘러보는 중입니다.]
유성전자는 장기적으로 중국 반도체 기업들의 경쟁자인 만큼 항상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동우정밀의 기술은 CMIC에 반드시 필요한 반면 유성전자에게는 별 쓸모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유성전자가 나설 이유는 없었다.
유성전자는 이미 반도체 수직계열화를 이루고 있는 만큼, 유재호 회장은 인수합병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다.
만약 생각이 있었다면 진작 관심을 보였겠지. 그런데 이 시점에서 갑자기 나섰다고?
분명 뭔가 계기가 있었을 것이다.
‘대체 며칠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류우녕 소장은 내심 유재호 회장을 우습게 생각하고 있었다. 유명훈 전 회장이라면 모를까, 그의 아들인 유재호는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 여겼다.
언젠가는 유성전자도 중국 반도체 굴기에 무릎을 꿇게 될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일격을 얻어맞았다.
어쨌거나 유성전자가 나선 이상 인수는 물 건너갔다고 봐도 좋다. 중국 반도체 굴기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업을 코앞에서 놓친 것이다.
류우녕 소장은 울분을 터트렸다.
“어째서! 어째서 유재호 회장이 움직인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