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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유성그룹 회장 (3) (33/529)

 33화. 유성그룹 회장 (3)

 이후에 미팅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유재호는 약속을 전부 취소했다.

 그가 호출하자 기획조정실 박수찬 실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만남은 어떠셨습니까?”

 그 말에 유재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생각보다 훨씬 재밌었습니다.”

 처음에는 차기 DA금융그룹 회장의 외동딸인 만큼 얼굴이나 봐두자는 생각이었다. 동행인에 대한 얘기를 듣고 나자 흥미가 생기기도 했고.

 ‘그 청년이 프리머스 사태를 폭로했다고?’

 그게 우연이었던 건지, 아니면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던 건지. 그리고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인지 궁금증이 일었다.

 막상 만나보니 모든 게 예상 밖이었다.

 망해가는 회사의 회사채를 헐값에 산 다음, 회사를 인수하라고 제안하다니.

 ‘배짱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어느 누가 유성그룹 회장 앞에서 그럴 수 있겠는가?

 하지만 배짱이 마음에 드는 것과 부탁을 들어주는 건 별개의 문제다.

 유성전자는 전 세계인이 아는 글로벌 기업이다.

 연관을 맺고 있는 기업만도 수천, 수만 개다. 유성전자는 거대한 덩치만큼이나 슈퍼갑의 위치에 있고, 수많은 기업들이 유성전자의 투자를 원하고 있다.

 굳이 망해가는 기업을 인수할 이유는 없다. 아마 평소라면 그냥 흘려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재호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편자의 못이라······.”

 그의 중얼거림에 박수찬 실장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유재호는 계속해서 말했다.

 “작은 못이 없으면 말에 편자를 달지 못합니다. 편자가 없으면 말을 잃고, 말을 잃으면 전령을 잃고, 전령을 잃으면 전서를 잃고, 전서를 잃으면 전쟁에서 지고, 그렇게 왕국은 무너집니다. 이 모든 일이 작은 못 하나 때문이죠.”

 “영국 속담이로군요.”

 “아버지의 유언장에 적혀있던 얘기입니다.”

 박수찬 실장은 깜짝 놀랐다.

 “전 회장님께서 그런 말씀을 남기셨습니까?”

 “예.”

 경영에 대한 조언이 담긴 짧은 유언장의 마지막에 적힌 내용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남긴 유언장이었고, 그밖에 보지 않았다. 이제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설마 오늘 처음 본 청년에게 이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작은 못으로 인해 거대한 왕국도 무너질 수 있다. 따라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작은 못부터 챙겨야 한다.

 실제로 그의 아버지는 그렇게 해왔고, 지금의 유성그룹을 만들었다.

 ‘그 회사가 편자의 못이라고?’

 동우정밀 인수에 대해 검토나 고려 정도는 해볼 수 있겠지만, 직접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 말을 듣고 나니 쉽게 흘려들을 수가 없다.

 잠시 생각하던 유재호는 박수찬 실장에게 지시했다.

 “동우정밀이라는 기업에 대해 알아보세요. 회사 정보, 설비, 기술, 특허 등등.”

 어째서 갑자기 전 회장의 유언을 떠올렸고, 그건 동우정밀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박수찬 실장은 의문이 들었지만 묻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즉시 조사해서 보고서 올리겠습니다.”

 * * *

 난 회귀하기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기회를 놓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전체가 미래 산업에서 뒤처졌다. 그중 하나가 바로 반도체다.

 한국은 모두가 인정하는 반도체 강국.

 산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고 수출 또한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러한 반도체 산업이 중국에 추월당했으니 한국 경제 전체가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1회차 때와 조금 다르게 흘러가는 중이다.

 내가 프리머스 사태를 폭로하는 바람에 동우정밀 워크아웃 시기가 1년가량 빨라졌고, 유성전자 회장에게 직접 인수 제안을 넣었으니까.

 유재호 회장을 만나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걸로 끝났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XRT세미콘이나 CMIC에 인수하라고 할 수는 없고.”

 사실상 나라 팔아먹는 짓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나로 인해 동우정밀이 중국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21세기 이완용’으로 불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 채권값을 날리는 것보단 낫지 않을까?

 국가 경제를 우선시하느냐, 내 채권값을 우선시하느냐 고민하는데, 선우가 집에 돌아왔다.

 개발이 끝났기 때문에 요즘은 퇴근 시간이 빠르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얼굴만 봐서는 세상의 모든 근심과 걱정을 다 안고 있는 것 같다.

 “회사에서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아니, 회사가 아니라 집에 안 좋은 일이 있어.”

 “응? 무슨 안 좋은 일?”

 “동우정밀 말이야. 망할 거라는 얘기밖에 없던데.”

 “아아, 그거 걱정하고 있었어?”

 “그럼 30억이 쓰레기 채권으로 변했는데 걱정이 안 되겠니?”

 어쩐지 며칠 사이 맛이 간 것 같아 보이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소파에 앉은 선우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 30억······. 만져보지도 못했는데.”

 원래 돈이라는 게 만져보기 쉽지 않다. 계좌에 찍힌 거 잠깐 봤으면 된 거지.

 “걱정 마. 나한테 다 계획이 있으니까.”

 “무슨 계획? 돈 많은 기업에 인수시키겠다는 계획?”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유재호 회장 만나고 왔어.”

 “유재호가 누구야? 설마 유성전자 회장?”

 “응.”

 “헛소리하지 말고.”

 “진짜야.

 선우는 입을 쩍 벌렸다.

 “재타이거를 만났다고?”

 “왜? 난 재타이거 만나면 안 돼?”

 “안 되는 것까진 아닌데······.”

 여전히 못 믿겠다는 표정이다.

 “그래서 인수하겠대?”

 “그야······.”

 나도 모르지.

 만약 유성전자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다음 대안은 LK그룹 차태완 회장을 만나는 것이다. 그래도 안 되면 안텔이나 CSMT 쪽에 메일이라도 보내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채권값은 건져야 하지 않겠는가?

 “일단 저녁이나 먹자. 뭐 먹을래?”

 “치킨이나 먹자.”

 “······.”

 그놈의 치킨.

 치킨집 하다가 본사 갑질로 망해봐야 치킨 먹자는 소리를 안 하지.

 저녁을 먹기 위해 나가려는데, 성윤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액정에 뜬 이름을 본 선우는 깜짝 놀랐다.

 “어! 성윤아가 누구야?”

 “전 직장동료야.”

 “아니, 회사 그만둔 지가 언젠데 전 직장동료가 왜 연락을 해?”

 “왜긴 왜겠냐? 일 때문이지.”

 난 일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성윤아는 다급하게 말했다.

 [동우정밀 회사채 말이에요.]

 “그게 왜요?”

 [그거 지금 두 배 넘게 올랐는데요.]

 “예?”

 두 배라고 해봐야 여전히 발행가의 30퍼센트 미만으로 정크본드인 건 마찬가지다. 그래도 갑자기 가격이 뛴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유가 뭐예요?”

 [아직 ‘카더라’긴 한데, 싱가포르에 있는 XRT세미콘이라는 데서 관심을 보이고 있나 봐요.]

 그 말에 난 깜짝 놀랐다.

 “정말요?”

 [예. 조만간 경영진과 채권단과 접촉할 거라는 소문이 있어요. 팔려고 내놨던 기관들도 일단 지켜보자는 분위기예요.]

 1회차 때보다 워크아웃이 1년이나 앞당겨졌는데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인수에 나섰다.

 그 순간,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동우정밀은 투자를 많이 해서 망했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막대한 돈을 R&D와 설비증설에 쏟아부었다.

 애초에 이렇게 투자를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개발한 제품을 YMCT에 납품하도록 계약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YMCT는 중국 7위의 파운드리사.

 반도체 제조공정은 부품 하나, 소재 하나만 문제가 생겨도 공장 전체가 멈춰서고 생산품을 전량 폐기해야 할 정도로 민감하다.

 이렇다 보니 제조업체들은 쉽게 거래처를 바꾸지 않았고, 신규 사업자가 진입하기 대단히 힘들다.

 그런데 동우정밀은 NIL 방식의 스탬프를 개발해 바로 납품에 성공했다. 한 번 납품에 성공하자 NB하이텍 등 국내회사들 역시 부품을 주문했다.

 새로운 장비를 납품받았으면 라인 한두 곳에 먼저 투입해 사전검사를 거쳐야 하지만, YMCT는 바로 전 공장에 적용했다.

 결과는 모두가 아는 대로다.

 설마······ 처음부터 모든 게 계획된 거였나?

 그래서 기술과 설비투자를 종용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제품을 별다른 검사 없이 바로 양산라인에 투입한 건가?

 역시나 불량이 발생했고, 공장은 멈춰 섰고, 납품은 중단됐고, 배상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한참을 생각하는데 성윤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요?]

 난 적당히 둘러댔다.

 “그럴 리가요. 그냥 좋은 기술을 가지고 있으니, 망하기보다는 인수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어요.”

 성윤아는 놀라움을 감추지 않았다.

 [그 예상이 정확히 맞았네요.]

 통화가 끝나고 나자 선우가 물었다.

 “무슨 얘기 했어?”

 “채권값 날릴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는데.”

 “······응?”

 문제는 1회차 때와 마찬가지 상황이 펼쳐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XRT세미콘이 동우정밀을 인수하고, 기술을 상용화시킨 다음, 한국 기업들을 상대로 세기의 소송전을 벌이겠지.

 이걸 막을 방법은 국내 대기업이 인수자로 나서는 수밖에 없다.

 과연 유재호 회장은 어떤 결정을 내릴까?

 * * *

 유성전자 화성사업장.

 강남 유성타운이 상징적이긴 하지만, 실제 유성전자 본사는 수원 화성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반도체 부문 임원회의가 열렸다.

 유성전자는 초거대 기업이고, 네 개의 사업부문으로 나뉘어 있다.

 유재호는 각 부문의 사장에게 최대한 권한을 일임하는 편이었고, 그가 직접 인수합병 문제를 챙기는 일은 드물었다.

 때문에 회의실에 모인 반도체 부문 임원들과 조준호 사장은 살짝 긴장한 표정이었다.

 잠시 후, 유재호 회장이 안으로 들어서자 그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편하게 앉으세요.”

 유재호가 먼저 자리에 앉고 나자 임원들은 자리에 앉았다.

 연구원 출신인 오현성 상무가 앞으로 나섰다.

 “동우정밀 실사 결과를 보고 드리겠습니다.”

 회사의 재무제표를 비롯한 여러 사항에 대한 보고가 이어지는 가운데 유재호는 앞에 놓인 자료를 훑어보았다. 딱히 눈에 띄는 건 없었다.

 굳이 이런 기업을 돈 들여 인수할 필요가 있을까?

 유재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질문을 던졌다.

 “NIL 관련 기술은 어떻습니까?”

 “연구개발에 투자를 많이 하긴 했는데, 저희 쪽에 당장 적용할 만한 기술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잠시 머뭇거리던 오현성 상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재밌는 특허가 하나 있었습니다.”

 “뭡니까?”

 “스탬프를 웨이퍼에 접촉하지 않고 전사하는 방식의 특허입니다.”

 그 말에 유재호는 깜짝 놀랐다.

 “그게 정말입니까?”

 그러자 오현성 상무는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거고, 실제로는 구현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당연한 얘기다.

 그게 그렇게 간단한 기술이라면 다른 기업들이 이미 개발해서 상용화했을 테니.

 “만약 상용화가 가능하다면요? 시스템 반도체나 미세공정에 쓰일 수도 있나요?”

 오현성 상무는 살짝 당황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적으로는 그렇습니다. NIL의 가장 큰 문제점이 접촉시 발생하는 손상과 마모인데, 비접촉 방식이라면 그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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