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유성그룹 회장 (1)
사실 향후 10년 동안의 반도체 시장 전망에 대해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다.
난 바로 대답하는 대신 물었다.
“그룹 내의 많은 전문가들과 유성경제연구소의 연구원들이 의견을 내지 않나요?”
유성경제연구소는 국내 최대 경제연구소. 한국 경제와 산업에 대해 다양한 리포트를 낸다. 증권사에 일하면서 질리도록 읽어보았다.
내 말에 유재호 회장은 웃음을 지었다.
“내부의 시선과 외부의 시선은 다른 법이죠. 사업을 하며 가장 위험한 순간은 모두가 한목소리를 내는 때입니다.”
맞는 말이다.
CEO라면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겠지.
높은 분이 눈치 보지 말고 말해보라고 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정말로 눈치 보지 않고 말했다가는 눈 밖에 나는 수가 있으니.
하지만 어차피 난 외부인인 관계로, 정말로 눈치 보지 않고 말하기로 했다.
“유성전자는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최강자입니다. 하지만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메모리 반도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30퍼센트에 불과합니다. 시스템 반도체는 수익성이 크고 수요가 안정적이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장에 적극적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도체 산업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메모리고, 다른 하나는 비메모리다. 사실상 D램과 낸드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비메모리 반도체다.
컴퓨터나 서버 등에 들어가는 중앙처리장치(CPU)나 그래픽카드(GPU), 스마트폰과 자율주행차 등에 쓰이는 카메라이미지센서(CIS) 등등.
유재호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부분은 이미 파운드리 투자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반도체 산업을 키우기 위해서는 기술도 기술이지만, 수조, 수십조 원의 자본이 있어야 한다.
다행히 유성전자는 메모리 반도체와 스마트폰으로 벌어들이는 막대한 수익이 있다.
이를 기반으로 유성전자는 향후 100조 원을 시스템 반도체 육성에 투자하겠다고 선언했다.
지금 진행 중인 투자는 전문가들의 냉정한 수요예측을 거쳐 결정했을 것이다. 투자액만 해도 무려 40조 원.
전 세계에서 이 정도 규모의 설비투자를 할 수 있을 만한 기술과 자본을 지닌 기업이 몇 곳이나 되겠는가?
유성전자쯤 되니까 가능한 일이겠지.
난 딱 잘라 말했다.
“지금보다 두 배는 늘려야 합니다.”
내 말에 성윤아는 놀란 표정을 지었고, 유재호 회장은 흥미를 보였다.
그는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나요?”
“미래에는 모든 것이 디지털화될 테니까요.”
이건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예측하고 있는 일.
문제는 속도다. 디지털화의 속도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빨리 이뤄진다.
3년 전부터 반도체 슈퍼사이클이라는 얘기가 나왔지만, 지금은 시작에 불과하다. 몇 년만 지나면 시장은 그야말로 미쳐 돌아간다.
사실상 전기로 움직이는 모든 제품에는 반도체가 들어가게 되며, 반도체는 품귀현상을 겪는다.
반도체가 없어서 자동차 공장이 멈춰서고, 게임기가 생산되지 않을 정도다.
“얼마나 고객사를 확보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작정 설비투자를 늘린다는 것은 무리입니다. 게다가 파운드리 시장에서는 이미 강력한 기업이 존재하죠.”
반도체 기업은 크게 3가지로 나뉜다.
설계만 하는 회사, 제조만 하는 회사, 그리고 설계와 제조를 함께하는 회사다.
이를 각각 팹리스(Fabless), 파운드리(Foundry), 그리고 종합반도체기업(IDM, Integrated Device Manufacturer)이라고 한다.
유성전자는 직접 설계와 제조를 하는 만큼 IDM에 속한다.
유재호 회장이 말한 기업은 바로 대만의 PSMC.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지닌 세계최대 파운드리 기업이다. 유성전자가 파운드리 시장에 진출한다면 필연적으로 PSMC와 맞붙게 될 것이다.
특히 10nm 이하 미세공정에서는 사실상 PSMC와 유성전자의 양강구도가 펼쳐진다. 양강구도라고 해도 7대3 정도로 PSMC가 우세를 점하긴 하지만.
“확실히 PSMC와 직접 경쟁하기에 유성전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당연히 아는 얘기일 텐데도 유재호 회장은 마치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어떤 약점입니까?”
“PSMC의 모토는 ‘고객과 경쟁하지 않는다’입니다. 하지만 유성전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위탁생산을 맡기는 기업들이 가장 우려하는 부분은 자신들의 설계나 기술이 유출되는 것이다.
때문에 PSMC는 자체 설계를 하지 않는다고 선언했고, 이는 고객사들의 신뢰로 이어졌다. 엔플이나 쿨컴, 엔도비아 같은 초거대 팹리스 기업들은 기꺼이 PSMC를 믿고 생산을 맡겼다.
그런데 유성전자는 종합반도체기업(IDM)이다.
설계를 보호하기 위한 여러 장치가 있겠지만, 생산 과정에서 얻은 노하우를 유성전자가 자신들의 설계에 적용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고객사 입장에서는 왠지 찝찝한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유성전자와 경쟁관계에 있는 회사라면 더더욱.
유재호 회장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다고 자체 설계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약점을 강점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고객사의 필요에 맞춰서 설계를 대행해주거나 보완해주는 겁니다. 유성전자는 설계에도 상당한 노하우를 지니고 있으니까요.”
메모리 반도체는 전자기기에 공통적으로 사용되는 표준 부품이다. 반면 비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PC, 노트북, 스마트폰, 차량 등 어디에 쓰이느냐에 따라 설계가 달라진다.
따라서 메모리 반도체가 소품종 대량생산이라면, 시스템 반도체는 다품종 소량생산.
생산과 설계를 함께한다는 약점을, 오히려 설계를 대행하거나 보완해줄 수 있다는 강점으로 변환시키는 것이다.
유재호 회장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오, 발상의 전환이로군요.”
말은 그렇게 해도 별로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말한 건 이미 진행 중에 있다. 유성전자에 똑똑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실제로 유성전자는 물론이고, 훗날 파운드리 경쟁에 뛰어드는 안텔 역시 같은 방식을 취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계 역량을 지금보다 더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설계에 투자를 늘리라는 건가요?”
제조 분야는 대체로 돈을 쓴 만큼 성과가 나온다. 하지만 설계 분야는 꼭 그렇지가 않다. 돈만 들이고 망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이걸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팹리스 회사들을 적극적으로 인수해야 합니다.”
유재호 회장은 고개를 저었다.
“안 좋은 기업들은 너무 많고, 좋은 기업들은 이미 시장에서 고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팹리스’라고 하면 뭔가 거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시장에 널리고 널린 게 바로 이 팹리스다.
반도체 산업은 한 명의 천재가 1만 명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공장이 없으니 자본이 크게 필요하지 않고, 기반이 되는 설계를 제공하는 회사들도 있다 보니, 팹리스 업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그런데 이 많은 업체들 중 실제 수익을 내는 곳이 얼마나 되겠는가?
반대로 수익을 내는 곳은 이미 엄청난 몸값을 자랑한다.
“또한 그런 기업들은 돈만 있다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죠.”
반도체는 국가기간산업.
안보와도 직결되고, 독과점 문제도 있는 만큼 해당 국가는 물론이고 관련국들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실제로 이런 문제로 인해 매각 직전 무산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스타트업들 중에서 찾아보면 괜찮은 기업들이 많습니다. 직원 몇 명짜리 작은 회사가 나중에는 크게 성장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그중에서 좋은 기업들을 골라내 인수해야 합니다.”
이 경우에는 딱히 승인을 받을 필요도 없다.
유재호 회장은 농담처럼 말했다.
“아무래도 전 그런 능력이 부족한가 봅니다.”
성윤아는 깜짝 놀라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닙니다, 회장님. 무슨 말씀이세요.”
사실 맞는 말이다.
그가 잘했다면 훗날 유성전자가 발목 잡히는 일도 없었겠지.
“파운드리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싶어도 현실적인 제약이 많습니다. 반도체 공장은 짓는다고 다가 아니니까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에 들어갈 설비와 인력이 있어야겠죠.”
“특히 EUV 장비의 경우는 생산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공장을 지어도 EUV 장비가 들어오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죠.”
반도체 공장 안에 들어가는 장비들의 가격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중 가장 비싼 장비가 바로 노광공정에서 쓰이는 EUV 장비다.
가격은 그야말로 상상초월.
최근 나온 장비는 대당 1억 5천만 달러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비싼 이유는 그만큼 제조가 까다롭기도 하지만, 전 세계에서 이 장비를 생산하는 회사가 딱 한 곳이기 때문이다.
바로 네덜란드 소재의 ESML.
가격보다 더 큰 문제는 생산량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 워낙 제조가 까다로운 장비다 보니 제 때 물량을 대기가 힘들었다.
유성전자는 반도체 분야의 슈퍼갑인 만큼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 할 일이 없다. 그러나ESML만은 예외였다.
실제로 몇 년 후면 유성전자는 공장을 다 짓고도 EUV 장비를 들여오지 못해 가동을 못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나중에는 서로 웃돈을 부르며 장비를 가져가기 위한 경쟁을 벌일 정도였다.
이제 슬슬 본론을 꺼낼 차례다.
“EUV 외에 대체 기술을 찾아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관련 기술을 가진 기업을 인수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그런 기업이 있습니까?”
그제야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챘는지, 성윤아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난 개의치 않고 말했다.
“예. 있습니다.”
유재호 회장은 흥미를 나타냈다.
“어떤 기업입니까?”
“동우정밀입니다.”
“얼마 전 거래정지된 기업이로군요.”
동우정밀은 반도체 부품주들 중 꽤 사이즈가 있는 기업이다. 그런 만큼 모를 리 없을 것이다.
“혹시 그 회사와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기에 난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은 제가 친구와 함께 그 회사의 회사채를 샀거든요.”
유재호 회장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그러니까 지금 저보고 대신 빚을 갚아 달라는 겁니까?”
농담처럼 말하지만 속에는 뼈가 담겨 있었다. 여기서 말 한마디 잘못하면 쫓겨나지 않을까?
하지만 난 돌려 말하지 않았다.
“맞습니다.”
“미루 씨!”
성윤아는 깜짝 놀라 소리쳤고, 유재호 회장은 질문을 던졌다.
“제가 그래야 하는 이유는요?”
난 그 이유를 단 한마디로 얘기해주었다.
“500억 달러.”
“예?”
“동우정밀이 가진 기술은 500억 달러 이상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기업이 나서기 전에 유성전자가 먼저 인수해야 합니다.”
지금은 나밖에 모르는 사실이지만, XRT세미콘의 동우정밀 인수는 훗날 한국 반도체 산업의 재앙으로 불린다.
그 이유는 XRT세미콘 뒤에 CMIC라는 중국 최대의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