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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동우정밀 (4) (30/529)

 30화. 동우정밀 (4)

 성윤아는 채권 브로커를 통해 알아봐주었고, 덕분에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수월하게130억 원어치 동우정밀 회사채를 매수할 수 있었다.

 내가 산 가격을 기준으로 130억 원이지, 이 채권들의 발행가를 합치면 1200억 원이 넘는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 회사채가 1200억 원이 될 수 있고, 휴지 조각이 될 수도 있으니까.

 난 퇴근하고 돌아온 선우에게 투자계획을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얘기를 들은 선우는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자, 잠깐만. 그러니까 다 망해가는 회사의 채권을 샀다고?”

 “응.”

 선우는 경악하며 소리쳤다.

 “정크본드에 130억을 태워!?”

 놀랄 만도 하지. 심정은 이해가 된다.

 눈빛이 흔들리는 걸 보니 돈을 빼고 싶어진 모양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난 선우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

 “그 회사가 빚을 갚을 능력은 있고?”

 “전혀 없어.”

 “아······.”

 “꼭 돈을 벌어야만 빚을 갚을 수 있는 건 아니지.”

 “뭔 개소리야? 돈을 안 벌면 빚을 어떻게 갚아?”

 “누군가 대신 갚아주면 돼.”

 “누가 대신 갚아줘?”

 난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러니까 돈 많은 부모한테 입양 보내야지.”

 “······응?”

 내 계획은 간단하다.

 바로 동우정밀을 인수할 수 있는 기업을 찾아가 인수하게 만드는 것. 그다음 그 기업이 빚을 대신 갚아주면 모든 게 해결된다.

 선우는 여전히 영혼이 빠져나간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음, 그렇게 들으니 되게 쉬워 보인다.”

 원래 말로 하는 건 항상 쉽다. 실행에 옮기기가 힘들 뿐이지.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어서 그렇지, 사실 동우정밀은 뛰어난 기술력을 지닌 회사야. 분명 탐내는 기업들이 있을 거야.”

 “무슨 기술을 지니고 있는데?”

 “노광공정에 쓰이는 기술. 이 방식이 몇 가지로 나뉘는데, 그중에서 동우정밀은 나노임프린트 리소그래피(NanoImprint Lithography) 방식의 부품을 생산해. 비록 불량이 발생해 이 사달이 나긴 했지만, 그동안 동우정밀이 NIL 스탬프 연구개발에 투자해 쌓은 기술력과 노하우는 사실 엄청나지.”

 내 설명을 들은 선우는 놀란 듯 물었다.

 “너 반도체에 대해 왜 이렇게 잘 알아?”

 난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일하면서 공부 좀 했으니까.”

 사실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쥐뿔도 몰랐다. 하지만 증권사에서 일하다 보면 용어 정도는 자연스럽게 익숙해진다.

 왜냐하면 한국 증시 섹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반도체니까.

 오죽하면 주식투자 처음 하는 주린이들이 가장 먼저 하는 질문이 ‘유성전자 사도 되나요?’다.

 현재 동우정밀이 보유하고 있는 NIL 핵심기술과 특허의 가치는 5년 안에 100조 원을 넘어서고, 훗날 한국 반도체 산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인수했으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돈이 없다. 그리고 돈만 있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동우정밀이 노광장비 분야 1위로 올라서기까지에는 모기업의 지속적인 투자와 지원이 있었다.

 다시 말해 돈은 물론이고 키워줄 만한 기술력도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한국에는 돈이 많고 기술력도 뛰어난 반도체 기업이 존재한다. 이 기업에 인수를 제안한다면?

 몰라서 그렇지 호박을 넝쿨째 굴려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어떻게 접촉을 하느냐인데······.

 무작정 본사로 찾아가서 ‘좋은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라고 해봐야 만나줄 리 없겠지?

 재벌을 만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재벌에게 부탁하는 거다.

 마침 아는 재벌에게서 전화가 왔다.

 “덕분에 매수 잘 끝냈어요.”

 성윤아는 걱정 어린 투로 말했다.

 [미루 씨 부탁이라 들어주긴 했는데, 정말 괜찮겠어요?]

 “그럼요.”

 [이러다가 동우정밀 망하면 친구한테 원망 듣는 거 아니에요?]

 그녀는 그게 전부 내 친구 돈이라고 생각 중이다. 그중 100억이 내 돈이라는 걸 알면 깜짝 놀라겠지?

 “아! 기왕 부탁한 김에 혹시 하나만 더 부탁해도 될까요?”

 [뭔데요?]

 “유성그룹 유재호 회장님을 좀 만날 수 있을까요?”

 대답은 잠시 후 들려왔다.

 [예? 유재호 회장님은 왜요?]

 “꼭 해야 할 얘기가 좀 있어요.”

 [무슨 얘기요?]

 내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알면 자리를 주선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

 “당장 설명하기는 힘든데 중요한 얘기예요. 약속하는데 절대 윤아 씨에게 피해 끼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성윤아는 한숨을 내쉬듯 말했다.

 [알았어요. 장담은 못 하겠지만 한번 알아볼게요.]

 아무리 그녀가 DA금융그룹 차기 회장의 딸이라고 해도 유재호 회장과의 자리를 주선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정말 고마워요.”

 [고마우면 밥이나 한번 사요.]

 난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뭐 먹고 싶어요? 다 사줄게요.”

 * * *

 성윤아는 전화를 끊고 중얼거렸다.

 “아니, 대체 뭘 하려는 거야?”

 회사 그만두고 나가서 뭘 하고 사나 걱정했더니, 행보가 종잡을 수 없었다.

 거래정지 상태인 동우정밀 후순위 BW를 매입하질 않나, 이번에는 유재호 회장을 만나게 해달라니.

 ‘꼭 해야 하는 중요한 얘기라는 게 뭐지?’

 이쯤 되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재벌공화국이라는 한국에서도 유성그룹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한다.

 그룹사 전체의 시총 규모는 약 700조 원으로, 유성전자 하나만으로 코스피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0퍼센트가 넘는다.

 이 거대 그룹의 회장은 유재호.

 재벌 중의 재벌이고, 재계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린 시절 한두 번 정도는 본 적이 있지만, 직접적인 인연은 없었다. 그러나 연락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잠시 생각하던 성윤아는 핸드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예요, 언니.”

 * * *

 유재호 회장은 내가 만나고 싶다고 해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국내외 기업인들과 투자자들은 물론이고 정치인들까지도 만나고 싶다고 줄을 서 있지 않을까?

 지금 번호표를 뽑고 기다린다고 해도 만날 때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알 수 없다.

 사실 DA금융그룹 손녀라는 지위는 엄청난 거다.

 DA은행은 국내 3대 은행 중 하나.

 은행은 금융자본이라는 특성상 시총의 수십, 수백 배의 자금을 움직인다.

 때문에 웬만한 기업들은 은행권과 친하게 지내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유성그룹쯤 되면 얘기가 다르다.

 왜냐하면 ‘웬만한 기업’이 아니니까.

 유성전자는 비메모리 분야에서는 세계 1위, 반도체 시장 전체로 따져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초거대 기업이다.

 오죽하면 한국이 망해도 유성전자는 안 망하지만, 유성전자가 망하면 한국이 망한다는 얘기까지 있겠는가?

 물론 실제로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만큼 유성전자가 한국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뜻이다.

 쌓아놓은 현금성 자산만도 170조 원이 넘는다. 오히려 이 돈을 지금 어디에 투자할지 고민 중이다.

 만약 현금이 필요하다 해도 채권을 발행하면 그만이다.

 유성전자의 회사채는 사실상 국채와 동급으로 취급되는 만큼 굳이 은행 눈치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다행히 성윤아는 유재호 회장의 사촌여동생과 친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쪽을 통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어떻게 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플랜B를 짜는데, 의외로 바로 약속이 잡혔다.

 [내일 3시에 만나기로 했어요.]

 “정말요?”

 [예. 제가 강남으로 데리러 갈게요.]

 통화가 끝난 뒤 난 두 손을 쥐며 소리쳤다.

 “좋았어!”

 * * *

 다음 날.

 난 퇴사한 이후로 줄곧 옷장에 처박아놨던 정장을 꺼내 입고 나왔다. 잠시 기다리자 성윤아는 직접 차를 몰고 강남으로 왔다.

 “타요.”

 난 차를 보며 말했다.

 “오! 차 좋네요.”

 차종은 무려 벤츠 S클래스.

 성윤아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머니 차 빌려왔어요.”

 그녀 역시 머리는 하나로 단정하게 묶고, 빈틈없이 정장을 갖춰 입었다.

 내가 올라타자 그녀는 유성타운을 향해 차를 몰았다.

 “그러고 보니 미루 씨 강남에 살지 않아요?”

 “예. 친구 집에 얹혀서 살고 있어요.”

 그녀는 내 뒤로 보이는 브랜드 아파트를 가리켰다.

 “혹시 저기 살아요?”

 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우리 집은 투룸 빌라.

 강남에 산다고 해서 모두가 대단지 아파트에 사는 건 아니지.

 차는 바로 유성타운 뒤쪽으로 돌아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이쪽 입구는 미리 등록한 차량만 출입할 수 있는 곳이다.

 지하 2층으로 들어서자 그곳에는 이미 직원이 대기 중이었다.

 “저를 따라오시면 됩니다.”

 우리는 직원을 따라 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유성그룹 회장실은 A동 46층 전체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복도를 걸어가 문 안으로 들어가자 널찍한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나이는 47세. 키는 175센티.

 체격은 평범하지만, 평소 관리를 잘하는지 혈색이 좋아보였다.

 얼굴은 광대가 약간 도드라지고 턱이 둥글었다. 알이 작은 은테안경을 꼈고, 입은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연예인 얼굴은 몰라도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유재호.

 바로 유성그룹의 회장이다.

 TV에서나 보던 사람을 실제로 만나니 좀 신기하다. 회귀하고 나니 다양한 경험을 해보게 되는구나.

 유재호 회장은 반갑게 우리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오는데 불편함은 없었나요?”

 날 때부터 재벌가의 후계자였기 때문인지 몸짓 하나 표정 하나에도 여유가 넘쳤다.

 성윤아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회장님.”

 “저도 만나서 반갑습니다. 그러고 보니 양자은 상무님 못 뵌 지도 꽤 오래됐네요. 어머님은 잘 지내시죠?”

 “예. 잘 지내십니다.”

 “사적인 자리니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얘기하세요.”

 그 말에도 불구하고 성윤아는 잔뜩 긴장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하긴 같은 재벌이라고 해도 급이 다르니.

 유재호 회장은 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재호라고 합니다.”

 난 재벌이 아닌 관계로 편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전 한미루라고 합니다.”

 유재호 회장은 눈을 빛냈다.

 “얘기는 들었습니다. 덕분에 프리머스 펀드 부실을 일찍 발견해 회사의 손실을 크게 줄일 수 있었다구요. 훌륭한 일을 하셨네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인사를 끝낸 우리는 자리에 앉았고, 비서가 차와 커피를 내오고 내왔다.

 “죄송하지만 이후 약속이 있어서 시간이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혹시 먼저 일어나게 되더라도 양해 부탁드립니다.”

 “물론입니다. 이렇게 시간 내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그룹 내 대소사를 챙겨야 하는 만큼 스케줄은 분 단위로 짜여 있을 것이다. 그나마 이렇게 만날 수라도 있는 건 전부 성윤아 덕분이다.

 “한눈에 펀드 부실을 파악한 걸 보면 뛰어난 안목을 지니고 있는 모양입니다.”

 난 겸손하게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닙니다.”

 유재호 회장은 커피를 마시며 물었다.

 “혹시 유성전자의 전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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