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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동우정밀 (3) (29/529)

 29화. 동우정밀 (3)

 DA증권에서는 때아닌 대규모 인사이동이 이뤄졌다.

 양정욱 전무가 자리에서 물러났고, 그 라인을 타고 있던 임원들은 줄줄이 물갈이됐다. 그 과정에서 여러 혼란이 생기긴 했지만, 다행히 하나씩 정리되어 가는 중이었다.

 성윤아는 달라진 주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한순간에 그룹 후계자가 된 어머니는 정신없이 바빠져서 이제는 집에서도 얼굴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녀의 신분 역시 달라져 여기저기서 혼담이 밀려들었다.

 이대로라면 정체를 계속 숨기고 있기도 힘들 것이다.

 한동안은 지금처럼 평범하게 회사를 다니고 싶었지만······ 그 바람은 금방 깨졌다.

 인사이동 과정에서 한 임원이 그녀의 정체를 얘기했고, 순식간에 사내 전체에 소문이 퍼진 것이다.

 신입사원의 정체가 회장의 손녀이자, 차기 회장의 외동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회사는 발칵 뒤집혔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녀에게 일 좀 똑바로 하라며 소리치던 상사는 순한 양처럼 변했고, 괜히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리거나 휴일에도 쓸데없는 안부 문자를 보내는 등 치근거렸던 과장은 그녀와 눈만 마주쳐도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점심시간이 되자 성윤아는 회사 뒷문으로 나왔다.

 삼삼오오 모여 즐겁게 얘기를 나누던 직원들은 긴장하는 기색으로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이런 것도 시간이 지나면 적응되겠지.’

 그녀는 흡연구역에 있는 황영민과 배근석에게로 다가갔다.

 배근석은 놀란 표정으로 황급히 담배를 뒤로 숨기며 고개를 숙였다.

 “오, 오셨습니까?”

 성윤아는 어이가 없어서 물었다.

 “‘오셨습니까’는 뭐예요?”

 그러자 배근석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아, 아니. 저도 모르게.”

 “동기끼리 이러기예요?”

 그녀의 말에 옆에서 같이 담배를 피우고 있던 황영민은 당당하게 말했다.

 “맞습니다. 윤아 씨 부모님이 누구든 무슨 상관입니까? 우리에게는 그저 입사 동기일 뿐이죠. 다들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담배는 왜 꺼요?”

 “그게······ 간접흡연은 건강에 안 좋다고 하잖아요.”

 성윤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예전과 똑같이 대하라고 하는 건 무리겠지.

 “점심이나 먹으러 가요.”

 메뉴는 부대찌개였다.

 이곳에 오니 한 사람이 생각났다.

 성윤아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 사람 지금 뭐 하고 있을까요?”

 이름을 말하지 않았음에도 두 사람은 누군지 바로 알아들었다.

 “미루 씨요?”

 “왠지 잘살고 있을 것 같은데요.”

 황영민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미루 씨 원래 성격이 그랬나요?”

 “무슨 말이에요?”

 “아니, 그전까지는 조용했던 것 같아서요.”

 배근석이 동의하며 물었다.

 “눈에도 별로 안 띄고?”

 “맞아요. 그런데 최근 한두 달 사이 사람이 완전 바뀐 것 같더라구요.”

 “어! 저도 그렇게 느꼈는데.”

 “원래 성격이 좀 있었는데, 그동안 참고 있었던 걸 수도 있죠.”

 성윤아가 한미루에 대해 가진 인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디를 가도 튀지 않는 무난한 사람.

 그런데 그런 사람이 회사를 발칵 뒤집어 놓고 나간 것이다.

 그는 프리머스 펀드의 부실을 알아내고 그 사실을 폭로했다. 하지만 그로 인해 본인이 얻은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직장만 잃었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그 일에 필사적으로 매달린 걸까? 어떠한 사명감 같은 게 느껴질 정도였다.

 생각할수록 의문투성이였다.

 잠시 멍하니 생각하고 있는데 황영민이 말했다.

 “핸드폰 울리는 것 같은데요.”

 “괜찮아요. 나중에 받아도 돼요.”

 배근석이 한마디 덧붙였다.

 “미루 씨 전화인 것 같은데요.”

 “뭐라구요?”

 그 말에 성윤아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다급하게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저 한미루예요. 지금 점심시간이죠? 잠깐 통화 괜찮아요?]

 그녀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네, 미루 씨. 무슨 일이에요?”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데 만날 수 있을까요?]

 ‘할 얘기가 있다고? 나한테?’

 성윤아는 속으로 당황하면서 물었다.

 “어, 언제 볼까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그, 그럼 일 끝나고 봐요.”

 [네. 시간이랑 장소 말해주면 제가 갈게요.]

 “알았어요.”

 통화가 끝나고 나자 성윤아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황영민과 배근석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미루 씨는 왜 전화했대요?”

 “뭐라고 했기에 그렇게 당황해요?”

 그 말에 성유아는 정말로 당황했다.

 “제, 제가 언제 당황했다 그래요?”

 “지금 당황하고 있는 것 같은데요.”

 “어서 밥이나 먹어요.”

 성윤아는 부대찌개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머릿속으로 생각했다.

 ‘뭐 입고 나가지? 집에 입고 갈 만한 옷이 있으려나?’

 * * *

 난 약속을 잡은 다음 전화를 끊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자 만나는데 거지 같은 몰골로 나갈 수는 없는 노릇. 오랜만에 수염을 깎고 옷을 챙겨 입었다.

 그 모습을 본 선우가 물었다.

 “누구 만나러 가? 여친?”

 “뭔 여친?”

 “수진이.”

 “아! 헤어졌어.”

 선우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걔랑 결혼할 거라며?”

 “······.”

 내가 그런 말을 했었어?

 “인륜지대사를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 있나?”

 “그럼 누구 만나러 가는데?”

 “전 직장동료.”

 * * *

 난 한남동의 한 카페에서 성윤아를 만났다.

 흰색 스웨터에 H라인 롱스커트를 입고, 그 위에 캐시미어 코트를 걸쳐 입었다. 맨날 정장 입은 모습만 보다가 사복을 입은 모습을 보니 색다르다.

 아니, 색다른 걸 넘어서 예쁘다. 밖에서 보면 이런 느낌이구나.

 성윤아는 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지냈어요?”

 “나름 바쁘게 지냈어요.”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면 아마 깜짝 놀랄 거다.

 우리는 커피를 마시며 얘기를 나눴다. 그녀는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1회차 때는 그냥 스쳐 지나가며 가끔 인사나 하는 사이였는데, 지금은 이렇게 밖에서 따로 만나 커피를 마시고 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 같은 느낌이다.

 이전과는 많은 게 바뀌었구나.

 “그런데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거예요?”

 난 조심스럽게 말했다.

 “사실 윤아 씨한테 할 얘기가 좀 있어서요.”

 “하, 할 얘기요?”

 “예. 이런 얘기를 해도 되나 생각을 좀 해봤는데, 아무래도 윤아 씨 생각밖에 안 나서요.”

 “그, 그래요?”

 어째서인지 그녀는 잔뜩 긴장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퇴사한 직장동료가 갑자기 보자고 해서 할 얘기라는 게 뭐가 있겠는가?

 “안심해요. 돈 빌려달라는 얘기는 아니니까.”

 내 말에 성윤아는 피식 웃었다.

 “그럼 뭔데요?”

 “이런 얘기한다고 오해하지 마요.”

 “알았어요. 오해 안 할 테니 말해 봐요.”

 난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동우정밀 회사채를 매수하고 싶은데, 윤아 씨가 좀 알아봐줄 수 있어요?”

 역시나 예상치 못한 얘기였는지 그녀의 표정은 그대로 굳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성윤아는 신음성을 내듯 물었다.

 “······예?”

 심하게 당황한 것 같은 모습이다.

 하기야 갑자기 이런 부탁을 받으니 황당하기도 하겠지.

 주식과는 다르게 채권은 일반인의 접근이 쉽지 않다.

 같은 회사에서 발행한 회사채라고 해도 발행 시기에 따라 금리, 만기, 조건 등이 천차만별이다 보니, 채권 브로커가 이를 전문적으로 중개한다.

 정크본드를 대량 매수하려면 어쩔 수 없이 기관의 힘을 빌려야 한다.

 성윤아는 잠시 한숨을 내쉬는 듯하더니 나에게 물었다.

 “갑자기 동우정밀 회사채는 왜요?”

 난 적당히 둘러댔다.

 “부자인 친구가 하나 있는데, 투자하는 걸 좀 도와주고 있거든요.”

 “자산관리요?”

 “뭐, 비슷한 일을 하는 셈이죠.”

 성윤아가 물었다.

 “얼마나 부자인데요?”

 “들으면 놀랄걸요.”

 “안 놀랄게요.”

 난 조심스럽게 말했다.

 “현금으로 130억 정도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정말로 하나도 안 놀란 것 같은 표정이다.

 하기야 나 같은 일반인 입장에서야 130억이 엄청난 돈이지, 그녀가 보기에 부자 친구라면 그 정도쯤은 있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려나?

 “그런데 동우정밀 지금 거래정지 아니에요? 조만간 파산할 텐데.”

 “어! 알고 있네요.”

 “프리머스 사태 이후 금감원이 전담 검사반을 구성해서 조사를 시작했어요. 그 때문에 운용사들이 일제히 부실채권을 매각 중이에요. 그중에는 동우정밀 회사채도 포함되어 있구요. 회사채 등급은 CCC-까지 떨어졌을 거예요.”

 보통 BBB-까지가 투자적격 등급이고, 그 이하는 투자부적격 등급이다. CCC-면 거의 바닥이나 다름없다.

 역시 감사팀이라서 잘 알고 있구나.

 “얼마나 매수하려는 건데요?”

 “130억 원 전부요.”

 성윤아는 눈을 크게 떴다.

 “그 정도면 발행가로는 1천억이 넘을 텐데요.”

 아직 놀라기는 이르다.

 “작년과 재작년에 발행한 후순위 BW를 중심으로 매수할 생각이에요.”

 이번에는 입을 쩍 벌렸다.

 “진심이에요?”

 그녀가 이렇게 놀라는 이유는 간단하다.

 주식회사는 유한책임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회사가 빚을 갚지 못하고 망하더라도 주주가 손실을 물어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만약 회사가 망한 뒤 남은 자산이 있다면?

 이 경우 주주가 아닌 채권자들이 나눠 가진다. 그런데 채권에 따라 돈을 받아가는 순서가 있다.

 후순위채권은 말 그대로 ‘후순위’다.

 선순위채권자들이 자신들의 원금과 이자를 다 챙기고 나서도 남은 게 있다면, 후순위채권자들 몫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그렇게 남아있는 게 많은 회사가 망할 리 있나?

 결국 후순위채권을 들고 있으면, 회사가 망할 경우 한 푼도 못 건진다고 보면 된다. 정크본드 중에서도 가장 최악이라고 할 수 있다.

 대신 위험성이 큰 만큼 수익도 크다. 후순위는 선순위에 비해 금리가 1~2퍼센트 높거나 여러 조건이 붙어있다.

 “왜 동우정밀 회사채인지 물어봐도 돼요?”

 망할 거라고 생각하는 회사의 채권을 사는 바보는 없다.

 이 회사채를 사는 이유는 당연히······.

 “동우정밀은 회생할 거예요.”

 성윤아는 또다시 깜짝 놀랐다.

 “그게 정말이에요?”

 “자세한 사정은 나중에 얘기해줄게요. 해줄 수 있어요?”

 잠시 내 얼굴을 보던 성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바로 알아볼게요.”

 난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요.”

 * * *

 동우정밀은 역사가 30년이 넘은 중견기업.

 1990년 후반에 반도체 시장에 처음 진출해 탄탄한 기술력으로 반도체 부품 국산화에 일조하며 강소기업으로 이름을 떨쳤다.

 동우정밀은 신제품 R&D 투자와 함께 신규공장을 지으며 주로 채권을 통해 자금을 조달했다.

 작년과 재작년은 반도체 슈퍼사이클이라는 얘기가 나올 만큼 업황이 좋았던 만큼, 이때 발행한 3천억 규모의 후순위 BW는 쉽게 완판되었다.

 그랬던 회사채를 이제는 너도나도 팔려고 내던지는 중이다.

 BW(신주인수권부사채)란 회사채의 일종.

 일반 회사채에 비해 금리가 낮은 대신, 만기 때 정해진 가격에 신주를 인수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만약 만기 때 주가가 행사가 이상이면 신주를 받아서 팔아 그만큼의 차익을 얻을 수 있고, 행사가 이하면 권리를 행사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동우정밀 BW는 5년 만기에 연 7.6퍼센트. 복리는 아니고 3개월마다 이자를 지급하는 방식이다.

 금리도 좋고 워런트까지 붙어있다.

 현재 금리 상황을 생각했을 때 이 정도 채권이면 발행가 이상으로 거래가 돼야 정상이다. 그런데 실제 채권가격은 발행가의 10~15퍼센트 수준.

 신주인수권 역시 인수가는 1만 2천 원인데 주가는 현재 6580원에서 거래정지 상태. 사실상 권리 행사가 불가능하다.

 어차피 회사가 망하면 한 푼도 못 건질 테니, 당장 헐값에 팔아서 현금화시키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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