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동우정밀 (2)
일반적으로 투자라고 하면 주식을 떠올리기 마련이고, 채권은 좀 생소하다.
하지만 실제 시장 규모는 채권이 훨씬 크다.
왜냐하면 이쪽은 회사채뿐 아니라 국채와 지방채까지 포함되어 있으니까.
거래액이 크다 보니 기관이 주로 투자하고, 개인들의 투자는 보통 펀드를 통해 간접적으로 이뤄진다.
한때 국민펀드로 불리며 개인투자자들이 많이 투자한 프리머스 펀드 역시 채권형 펀드였고.
채권형 펀드는 안정성이 뛰어난 대신, 주식형에 비해 수익이 낮다. 일반적인 채권투자로는 주식처럼 단기간에 몇 배씩 수익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일반적이지 않은 투자라면 주식보다 높은 수익을 거두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채권시장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건 금리다.
금리가 오르면 채권가격은 내려가고, 금리가 내리면 채권가격은 오른다.
하지만 개별 채권만 놓고 보면 그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치는 요인이 하나 있으니, 바로 발행기관의 안정성이다.
주식과는 다르게 채권은 이자와 만기가 정해져 있다. 따라서 만기까지만 들고 있으면 원금과 이자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만기 전 발행한 주체가 망하면?
그때는 돈을 받을 방법이 사라진다.
채권은 발행기관의 안정성을 바탕으로 발행하고, 따라서 국가가 발행하는 국채는 가장 안전한 채권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국채라고 해서 모든 국채가 안전한 건 아니다.
가끔 나라가 망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아예 돈 못 주겠다고 배 째라고 하기도 하고, 적당히 원금의 일부만 갚을 테니 이걸로 끝내자고 하는 경우도 있다.
국가도 이런 지경인데 회사는 오죽하겠는가?
하루에도 수많은 회사들이 생겨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회사가 망하면 회사채는 휴지 조각이 된다.
신용도가 낮은 기업이 발행하거나, 악재로 인해 기업의 신용도가 하락할 경우 원리금 상환 불이행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런 회사채의 경우 발행가의 한참 이하로 거래된다.
일명 정크본드(Junk Bond)다.
직역하자면 ‘쓰레기 채권’이다.
어감이 워낙 안 좋다 보니 투자자들에게 설명할 때는 하이일드 채권(High Yield Bonds)라고 순화해서 표현하기도 한다.
그게 그 말이긴 하지만.
성공하면 열 배를 벌 수도 있지만, 실패하면 단 한 푼도 못 건진다는 뜻이다.
일반 채권 투자가 ‘로우 리스크 로우 리턴’이라면, 정크본드 투자는 전형적인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공모펀드의 경우 아예 일정 등급 이하의 채권은 매수를 못 하도록 정해져 있다. 하지만 사모펀드의 경우 이러한 규제에서 좀 자유로운 편이다.
워낙 리스크가 크다 보니 정상적인 펀드들은 정크본드를 찍먹도 안 하지만, 반대로 리턴이 크다 보니 정크본드만 찾아다니는 펀드도 존재한다.
정식용어로는 하이일드 펀드((High Yield Fund)지만, 보통 벌처펀드(Vulture Fund)라 부른다.
벌처란 대머리독수리.
남들은 건드리지 않는 썩은 고기에 모여든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다.
잘나가는 벌처펀드의 경우 정크본드 투자로 한 달 만에 100퍼센트씩 수익을 내는 일도 있다. 물론 이건 극소수이고 원금 까먹는 펀드들이 대부분이지만.
어쨌거나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정크본드 투자는 꽤나 매력적이다.
* * *
난 동우정밀에 대한 자료를 살펴보았다.
반도체는 다양한 공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웨이퍼, 산화, 포토, 식각, 박막, 금속배선, EDS, 패키징.
보통 웨이퍼 가공까지를 전공정, 그 이후를 후공정으로 본다. 이중 포토공정에서 거치는 과정 중 하나가 바로 노광공정.
노광공정이란 감광액이 코팅된 웨이퍼에 빛을 사용해 회로패턴을 그리는 것으로, 반도체 전체 생산시간 중 60퍼센트, 비용으로는 30퍼센트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작업이다.
좁은 공간 안에 미세한 회로도를 새기는 일인 만큼 매우 정교한 기술력이 요구된다.
리포트를 보면 대충 ‘필름 사진을 현상하는 과정과 흡사하다’고 하는데, 애초에 필름 사진을 어떻게 현상하는지를 잘 모르니 비유가 잘 와닿지는 않는다.
요즘 필름카메라를 쓰는 사람이 있긴 한가?
어쨌거나 동우정밀은 바로 이 노광장비 관련 부품을 생산하는 회사다.
시장의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경영진은 채권과 대출로 조달한 자금으로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해 NIL 방식에 쓰이는 스탬프 개발에 성공했고, 이를 중국 파운드리사에 납품했다.
경쟁력이 입증되며 한국 파운드리사에도 납품을 하는 등 승승장구할 일만 남았나 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납품한 부품에서 심각한 불량이 발생한 것이다.
회로를 새기는 스탬프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마모가 되는데, 그 마모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된 게 원인이었다.
반도체 생산은 하나만 삐끗해도 공장이 중단되고 생산품을 전부 폐기해야 한다.
동우정밀 장비부품을 납품받은 파운드리사의 공장이 줄줄이 멈췄다. 동우정밀은 책임을 지고 리콜을 진행했지만, 고객사들은 일제히 등을 돌렸다.
높은 기술력이 요구되는 반도체 시장에서 신뢰 하락은 치명적이다.
납품은 일제히 중단됐고, 기존에 납품한 부품에 대한 전수조사가 시작됐다. 수주는커녕 오히려 배상금을 물어내야 할 판이다.
운영자금이 바닥나자 동우정밀은 급하게 자금조달에 나섰다.
원래대로라면 이때 800억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하고 대출을 연장하며 한숨 돌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프리머스 사태로 인해 회사채 시장이 완전히 얼어붙은 상황. 신규 회사채 발행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은행들은 대출 연장과 추가 대출을 거부했다.
결국 동우정밀은 만기가 돌아온 회사채 상환에 실패했고,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코발트 게이트에 묻히는 바람에 잘 보도되지 않았을 뿐이지, 찾아보니 기사가 꽤 있었다.
[동우정밀 수요미달로 신규 회사채 발행 실패]
[동우정밀 600억 규모 회사채 만기 도래. 기관들에게 롤오버 요청]
[스탬프 점검으로 인해 NB하이텍 공장 두 곳 멈춰서. 피해액 약 160억 원]
[고객사들 동우정밀 장비부품 사용 중단. 앞으로가 더 큰 문제]
[동우정밀 상장폐지 위기. 기업회생 가능성은?]
부채비율은 무려 1900퍼센트. 주식은 거래정지 상태다.
동우정밀 종목게시판에서는 소액주주들의 곡소리가 터져 나왔다.
-ㅅㅂ 거래정지 언제 풀리냐?
-애널리스트 개새끼들아!!! 반도체 소부장 중 대장주라며? 주가 상승여력이 높다며?
-현실은 거래정지ㅜㅜ
-상폐 각 날카롭다~
-부채비율 실화냐? 대체 돈을 얼마나 끌어다 쓴 거야?
-거래정지된 거에 감사해라. 거래정지 풀리는 순간 10연속 하한가 감.
-ㅋㅋㅋ 개미지옥 코스닥.
-이게 KNC인터내셔널과 다를 게 뭐냐?
-코발트 게이트에 이어 스탬프 게이트인가?
-증권사에서 전망이 좋다는 얘기 듣고 전세금 넣었다가 이혼당하게 생겼네요. 와이프가 오늘 이혼서류 내밀었습니다. 제 잘못이니 할 말이 없네요ㅜㅜ 못난 남편을 둔 아내에게······ 미안하다!!!
-30층에 사람 있어요!
-제발 살려만 주세요ㅜㅜ
-응, 안 돼. 살려줄 생각 없어. 돌아가~
회사채와 대출 만기는 속속 돌아오고 있는데 기관들은 롤오버에 난색을 표했다. 만기 채권 상환은커녕 기존 채권에 대한 이자 지급마저 중단되었다.
공장과 연구소 모두 올스톱. 직원들은 출근해서 할 일 없이 놀고 있는 상황이다.
이쯤 되면 망하는 일만 남았다고 봐도 좋다.
난 자료를 살펴보던 도중 동호 선배의 전화를 받았다.
[어제 말한 동우정밀 말이야.]
“알아보셨어요?”
[지금 거래정지 중인 건 알지?]
“예.”
[그동안 발행한 회사채가 어마어마해. 만기일 넘었는데 상환 안 된 것만 해도 500억이 넘어.]
“그래서 얼마예요?”
[채권브로커로 일하는 친구에게 물어봤는데, 대충 발행가의 10~15퍼센트 선에서 거래되는 모양이야. 어차피 회사 망하면 휴지 조각이니까. 지금 기관들마다 못 팔아서 안달이야.]
“그렇군요.”
난 속으로 웃음을 지었다.
동호 선배는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런데 이건 왜 물어본 거야?]
“그건······.”
왜냐하면 망할 거라는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동우정밀은 안 망하기 때문이지.
난 대충 둘러댔다.
“누가 좀 물어봐서요.”
[알겠지만 이런 정크본드는 손대는 거 아니야.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한 방에 가는 거야.]
“알았어요. 고마워요, 선배.”
난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했다.
망해가는 회사의 회사채를 헐값에 샀는데 그 회사가 살아난다면? 그럼 원리금을 다 받아낼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발행가의 10퍼센트에 산다면 10배를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렇다면 동우정밀은 어떻게 부활할 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싱가포르의 XRT세미콘이라는 회사가 인수를 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바닥까지 떨어졌던 채권가격은 바로 액면가로 치솟았다.
당시 동우정밀 회사채에 투자했던 이들은 10배 가까운 수익을 남겼고, 헐값에 팔아치웠던 기관들은 땅을 치며 후회했다.
“원래대로라면 그렇게 돼야 하는데······.”
여기서 걸리는 점이 하나 있다.
원래 동우정밀의 유동성 위기는 1년 후에나 발생한다. 그런데 2년 후에 터졌어야 할 프리머스 사태가 지금 터지는 바람에 위기가 지금 발생했다.
시기가 달라졌는데 과연 XRT세미콘이 그때와 마찬가지로 인수에 나설까?
이미 역사가 바뀐 만큼 그때의 상황이 그대로 벌어질 거라는 보장은 없다. 설사 인수를 한다고 해도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고.
1회차 때도 인수가를 놓고 협상을 지지부진하게 끌다가 6개월 후에나 도장을 찍었다.
지금 동우정밀 회사채를 사면 인수가 될 때까지 6개월이고 1년이고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나마 인수가 이뤄지면 다행이다.
만에 하나 1회차 때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바람에 회사가 망하기라도 한다면 회사채는 그대로 휴지 조각이 된다.
따라서 이런 건 아예 건드리지 않는 게 현명한 일이지만······.
“그러기에는 좀 아까운데.”
동호 선배 말에 따르면 프리머스 사태로 인해 기관들은 채권 부실을 털어내는 중이다. 그만큼 부실회사채의 가격은 내려갔고, 한 번에 대량 매수하는 것도 가능하다.
지금 투자하기에 딱 좋은 상품이라 할 수 있다.
“생각해보니 XRT세미콘이 인수하는 게 더 문제잖아.”
지금은 나 외에는 아무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동우정밀은 3년 안에 반도체 산업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기업으로 거듭난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서 이 기업으로 인해 반도체의 역사가 바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좋은 방법이 없을까?
어차피 나로 인해 역사가 바뀐 거라면, 아예 비틀어 버리면 되지 않을까?
“가만히 앉아서 인수가 되길 기다릴 게 아니라, 내가 나서서 인수를 시키면 되는 거 아닌가?”
발상의 전환이랄까?
그렇게 생각하자 방법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난 머릿속으로 대충 계획을 짜본 다음, 핸드폰을 들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