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프리머스 사태 (3)
프리머스 펀드는 공공기관 매출채권에만 투자한다는 당초의 설명과는 달리, 부실기업의CB와 BW를 대거 사들인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펀드를 돌려막기하고 있었던 정황도 드러났다.
1조 원이 넘는 운용자금 중 얼마나 남아있는지 확인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다. 서류와 실제 자산 중 맞는 걸 찾는 게 힘들 정도였다.
공공기관 매출채권에만 투자한다는 말을 믿고 투자한 투자자들은 하루아침에 날벼락을 맞았다.
기업고객들의 항의가 쏟아졌고, 지점마다 고객들이 들이닥쳐 환매를 요구했다. 프리머스 펀드뿐 아니라, 다른 상품들까지도 환매요청이 줄을 이었다.
고객대응팀 직원들은 걸려오는 전화를 받느라 다른 업무를 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개인 피해자들은 일제히 DA증권으로 몰려와 배상하라며 항의했다.
엄밀히 말하면 DA증권도 피해자였다.
하지만 모르고 팔았다고 해서 배상책임까지 피하기는 힘들었다. 이러한 우려는 주가에도 반영돼, DA증권 주가는 하한가까지 떨어졌다.
언론에서도 그룹 내에서도 양정욱 전무의 책임론이 불거졌다. 그동안 프리머스 펀드를 자신의 실적으로 홍보해 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DA증권 주주들은 일제히 들고 일어나 양정욱 전무의 해임을 요구했다.
며칠 동안 프리머스 사태 관련 뉴스가 신문 1면을 장식했고, 여의도는 그 일로 한동안 시끌시끌했다.
처음 조사가 시작됐을 때만 해도 부실규모는 20퍼센트 안팎이고, 많아야 30퍼센트를 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막상 조사를 시작하자 부실규모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한 펀드에는 발행사가 부도나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는 채권들만 남아 있었고, 다른 펀드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추정 부실 규모는 90퍼센트. 남은 10퍼센트라도 건질 수 있으면 다행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그나마 박태일 대표와 관련자들이 체포된 덕분에 자산 회수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건 다행이었다.
한때 뛰어난 투자자이자 사모펀드의 대중화를 이끌었던 박태일 대표는 구속돼 조사받는 신세가 되었다.
“회사에 남은 자산이 얼마나 됩니까?”
“DA증권과 공모했습니까?”
“왜 해외로 도주하려 했습니까?”
“피해자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포토라인에 선 박태일 대표는 쏟아지는 기자들의 질문에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말했다.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
대체 얼마나 성실하게 조사에 임할 작정인지, 전직 검사와 판사로 이뤄진 초호화 변호인단을 구성했고, 그 모습을 본 피해자들은 분통을 터트렸다.
이는 금융사기의 문제점 중 하나였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사기 친 돈으로 변호사를 여럿 고용해 자신을 방어하지만, 재산을 잃을 피해자는 대응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번 사태로 인해 DA금융그룹의 후계자 구도가 바뀔 거라는 전망까지 나오며 인터넷은 난리가 났다.
-대체 뭔 놈의 나라가 심심하면 수천억대 금융사기가 터지냐?
-금융사기꾼들은 그냥 깔끔하게 사형시키자.
-그런데 신입사원이 저걸 터트렸다고?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아니, 그런데 대체 부실을 어떻게 알아낸 거야?
-보나마나 양자은이 뒤에서 지시했겠지. 그렇지 않고서는 알아낼 수가 없음.
-양정욱은 어카냐? 펀드도 날아가고, 회장 자리도 날아갔네.
-ㅋㅋㅋ 미쳤네.
-이병이 국방부 비리 터트려서 국방부장관 교체시키는 거랑 비슷한 셈인가?
-미친놈인 건 맞는데 왠지 나중에 크게 될 것 같음. 내가 암.
-근데 저러고도 회사 계속 다닐 수 있나?
조사 과정에서 박태일 대표가 예탁결제원과 수탁기관, 그리고 유력 정치인들과 관료들에게 로비를 한 사실이 밝혀지며 불똥은 정치권으로까지 튀었다.
이중에는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감독관들은 물론, 청와대 인사들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박태일 대표가 김봉준 정무수석과 윤준기 민정수석과의 친분을 과시했다는 녹취가 나오고, 금감원에서 청와대로 파견 나간 김명현 경제수석실 행정관이 로비의 핵심 당사자로 지목되자, 청와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검찰은 관련자들을 줄줄이 소환했고, 야당인 우리국민당은 이를 ‘박태일 게이트’로 부르며 오영환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해명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특검을 실시해서 철저하게 진상을 밝혀야 합니다.”
금융위원회와 금융감독원으로도 비난이 쏟아졌다. 금융시장 감시를 제대로 못한 것을 넘어서 부실을 사전에 인지하고도 묵인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장진행 금감원장은 프리머스 부실에 대해 몰랐고, 알고도 묵인한 일은 절대 없다고 밝혔지만,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ㅅㅂ 그럼 그 증권사 직원은 어떻게 알았냐?
-입사한 지 1년도 안 된 신입사원도 아는 걸 금감원이 몰랐다는 게 말이 되냐?
-대체 얼마나 받아먹은 거야?
-알면서도 모른 척한 게 분명하다!
-알면서 모른 척했다면 범죄고, 정말로 몰랐다면 무능한 거지.
-그런데 진짜 모르긴 했을 듯. 까놓고 장진행 금감원장이나 김천수 금융위원장이나 전문성도 없는데 측근이라서 임명된 거임.
-이러니까 한국에 금융사기꾼들이 넘쳐나지.
-얼마 받았는지 솔직하게 까봐라~
가뜩이나 지지율이 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갑작스레 터진 프리머스 사태는 정권의 크나큰 악재였다.
만약 신입사원의 폭로가 없었다면, 임기가 끝날 때까지 터지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지금 터지는 바람에 대통령 측근 비리로까지 커졌다.
오영환 대통령은 보고받은 자료를 보며 중얼거렸다.
“한미루라······.”
이 신입사원은 자신이 얼마나 큰일을 저질렀는지 알기나 할까?
* * *
양현성.
DA금융그룹 회장인 그는 집무실에서 아들을 향해 호통을 쳤다.
“실적 쌓으라고 보내놨더니 이런 대형사고를 쳐! 지금 손실이 얼마인지 알기나 해?”
양정욱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누나가 배후에서 지시한 겁니다! 후계자 자리가 탐나서 일을 벌인 거라구요.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양현성 회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자은이가 지시했다 치자. 그런데 넌 그거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해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지금 주주들이 전문경영인 내세워야 한다고 난리치고 있는 거 몰라?”
한국 재벌들이 얼마 안 되는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주주들의 동의가 있기 때문이다.
주주들은 양현성 회장은 인정하지만, 후계자인 양정욱의 경영능력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일단은 두고 보는 상황이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반대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만약 멋대로 그 의견을 무시했다가는 우호지분들이 전부 등을 돌릴 것이다.
“그리고 프리머스 펀드 부실은? 설마 그것도 자은이 짓이라고 말하고 싶은 게냐?”
“그, 그건······.”
“부실이 있다는 걸 왜 몰랐어!?”
차라리 지금 터져서 다행이지, 모르고 계속 판매했다면 DA증권이 망했을 수도 있다.
양정욱은 변명하듯 말했다.
“자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금감원도 수탁기관도 몰랐던 일이구요.”
양현성 회장은 다시 호통을 쳤다.
“그럼 그 신입사원은 어떻게 알았는데!”
“······.”
양정욱 역시 그게 가장 큰 의문이었다.
사태가 터진 뒤 일의 전말에 대해 알 수 있었다. 해당 직원은 DA카드로 찾아가 양자은과 접촉했고, 그녀는 그 이후 프리머스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다시 말해 일을 키운 것은 양자은이지만, 처음 이를 알아낸 사람은 한미루다.
양현성 회장은 아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룹 경영하다 보면 사방이 다 적일 텐데, 그때마다 때린 놈 탓하며 징징댈 거냐?”
이번 일을 지켜보며 아들에 대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반면 딸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바로 움직였다.
이렇게 되자 후계자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양정욱은 다급하게 말했다.
“설마 누나한테 그룹을 물려주시려는 건 아니죠?”
“자식이라고는 둘뿐인데 한 놈이 사고 쳤으면 어떻게 해야 하냐? 아직 시간이 있으니 그때까지 한번 잘해 보거라.”
양현성 회장은 지병인 뇌종양을 앓고 있다.
과연 아버지가 얼마나 더 회장직을 수행할 수 있을까? 그때까지 이미지를 회복하고 아버지와 주주들의 신뢰를 얻어, 다시 후계자 자리를 쟁취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회의적이었다.
“아버지!”
양현성 회장은 더 듣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만하고 나가봐.”
결국 양정욱은 힘없이 집무실을 나갔다.
그는 구내식당에서 만난 신입사원을 떠올렸다.
신입 주제에 감히 건방지게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며 당돌한 질문을 던진 게 인상 깊어서 기억에 남아있었다.
‘그놈은 그때 이미 모든 걸 알고 터트릴 준비를 하고 있었어.’
문제가 있으면 자신에게 먼저 보고하는 것이 순서다. 그랬다면 빠져나갈 방법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는 양자은을 찾아갔다. 그러고는 자신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함정을 깊게 파놓은 다음 일을 터트린 것이다.
‘대체 왜?’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신이 그 신입사원과 직접적으로 얽힌 일이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얼굴 본 것도 몇 번 안 된다.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어서!’
설마 신입사원에게 뒤통수를 맞아 모든 걸 잃게 될 줄이야.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모르긴 몰라도 재계에서 완전 웃음거리가 됐을 것이다.
그는 주먹을 꽉 쥐며 이를 갈았다.
* * *
진세연은 올라오는 기사를 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뭐야? 그날 미루가 말한 게 정말이었어?’
사실 펀드가 망하든 말든 투자하지 않은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그녀와 친한 사람들은 달랐다.
그녀에게 임준일을 소개시켜준 아나운서 언니는 물론이고, 그 주변인들까지 믿고 돈을 넣었기 때문이다.
“뭐야? 이거 사기였어?”
“어떡해? 나 거기에 2억 넣었는데.”
“내 돈 어떻게 되는 거야?”
“프리머스 펀드는 안전하다고 하지 않았어?”
“정말로 부실기업에 투자해서 다 날려먹은 거야?”
진세연은 잠시 멍하니 앉아있었다.
임준일이 자신에게 호감이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남자가 펀드 사기 사건에 연루되어 있을 줄이야.
매일같이 전화와 문자를 하던 남자는 기사가 뜬 이후 연락이 뚝 끊겼다. 전화를 걸어 봐도 받지 않았다.
만약 이 사실을 모르고 임준일을 계속 만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DA증권 신입 애널리스트가 터트렸다고?’
기사에 직접 이름이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폭로한 사람이 한미루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진세연은 그날 그의 행동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설마 나 때문에 그런 거야? 날 위해서 터트린 거야?’
······오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