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DA카드 상무 (2)
양자은 상무는 충고를 해주듯 말했다.
“신입사원이라 모를 수 있는데 조직은 조직의 생리를 우선시해요. 내부고발자가 회사에서 어떤 일을 당하는지 알고 있나요?”
“상관없습니다. 회사는 그만둘 생각이니까요.”
“······.”
내 대답에 그녀는 살짝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본인이 터트리기로 결심했다면, 그 사실을 왜 저한테 말하는 건가요?”
“부실을 지적해도 제대로 된 조사가 이뤄지지 않으면 의미가 없으니까요. 그룹 내에서 철저한 조사와 함께 책임자를 처벌해야 합니다. 또한 일이 터지면 프리머스 자산운용사 박태일 대표는 바로 해외로 도주할 겁니다. 그러니 그전에 붙잡아, 남은 자산을 최대한 빠르게 회수해야 합니다.”
실제로 박태일 대표는 일이 터지기 직전, 펀드에 남은 자산마저 급하게 빼내서 베트남으로 도주했다.
이후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그는 환매가 어려워진 수개월 전부터 도주를 준비했다고 한다. 그가 한국으로 송환된 것은 그로부터 5년 뒤였다. 그러나 은닉한 재산은 한 푼도 찾지 못했다.
양자은 상무는 나에게 물었다.
“제가 그 일을 하라는 건가요?”
“예. 사태가 터지면 책임자는 언론을 막고 금감원 수사를 지연시키는 등 최대한 시간을 끌려 할 겁니다.”
여기서 말한 책임자는 당연히 양정욱 전무다.
그는 이미 차기 회장으로 낙점된 상황. DA증권으로 자리를 옮긴 이유도 이사회와 주주들에게 보여줄 실적을 쌓기 위함이다.
그리고 그 실적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프리머스 펀드다. 그런데 이게 사기라면?
그야말로 사상초유의 사태다.
운용사를 제대로 감시하지 않아서 회사에 수천억 손실을 발생시킨 사람이 금융그룹 회장직에 앉는 것에 동의할 주주가 누가 있겠는가?
시간이 충분하다면 자숙하다가 사건이 잠잠해질 때쯤 복귀할 수도 있겠지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언론에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현재 양현성 회장은 지병인 뇌종양을 앓고 있다. 앞으로 4년 뒤 사망하고 양정욱 전무는 무사히 회사를 물려받는다.
“언론이 제대로 보도를 하고, 금감원이 빠르게 수사할 수 있도록 DA금융그룹 내에서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게 상무님께도 좋은 일일 겁니다.”
“지금 하는 말에 책임질 수 있나요?”
어느새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바보가 아닌 이상 이게 얼마나 엄청난 기회인지 직감했겠지.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겠죠.”
양자은 상무는 입을 다문 채 한참을 생각하는 듯했고, 난 그녀가 먼저 말하기를 기다렸다.
“저한테 바라는 게 있나요?”
“예.”
내 대답에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뭔가요?”
“먼저 프리머스 펀드 피해자들에게 제대로 배상이 이뤄져야 합니다. 사태가 터지면 금감원에서도 그렇게 권고할 겁니다.”
어차피 해야 할 배상이라면 미룰 필요가 없다. 또한 회사가 입는 손실이 크면 클수록 양정욱 전무의 책임도 커지게 된다.
“그리고요?”
“DA증권을 끝까지 책임져주시기 바랍니다. 일반 직원들은 잘못이 없으니까요.”
당장 4천억 대의 손실이 발생했다 해도 그룹 차원에서 감당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이미 쏟아부은 돈이 있는 만큼, 이번 위기만 잘 넘기면 매각하거나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100퍼센트 장담은 못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다할게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습니다.”
그녀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게 다인가요?”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가 더 필요한가요?”
그녀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물었다.
“이 일들이 당신한테는 무슨 이익이 되는 거죠?”
사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이익을 보는 것은 하나도 없다.
펀드 부실을 밝혀냈다고 누가 상 줄 것도 아니고. 오히려 욕은 욕대로 먹고 회사를 나가야 한다.
그렇다고 한자리 챙겨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가는 그녀가 모든 일을 배후에서 지시한 것처럼 보일 테니까.
뭐, 뒤로 좀 챙겨달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난 웃음을 지었다.
“잘못을 고칠 수 있고,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을 일어나지 않게 만들 수 있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자리에 앉는 걸 막을 수 있습니다. 그거면 충분합니다.”
양정욱 전무가 날아가면, 그녀가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뒷돈 챙기는 것보다DA금융그룹 차기 회장에게 빚을 지워놓는 편이 낫겠지.
* * *
DA증권 신입사원은 인사를 하고 나갔다.
홀로 남은 양자은 상무는 그 뒤로도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저 사람은 대체 뭐지?’
얼굴에서는 사회초년생 티가 나는데, 말과 행동이 신입사원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이번 사태가 불러올 파장과 그 뒤의 일어날 일까지 명확히 내다보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동생의 성격을 잘 알았다. 동생이 회장직에 앉을 경우 과연 지금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회의적이었다.
동생이 회장직에 오른 뒤라면 이 사태가 터진다 한들 별다른 타격을 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랫사람 몇 명 희생양 삼아 빠져나갔겠지.
‘하지만 지금 터진다면······?’
그녀는 동생보다 먼저 태어났고 동생보다 빨리 그룹을 위해 일했다. 실력적으로도 동생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후계자는 동생의 몫이었다. 이유는 오직 하나. 그녀가 여자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금융그룹 CEO 자리에 앉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녀도 마음속으로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절대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일이 현실로 일어나려고 하고 있다.
DA금융그룹 회장직이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양자은 상무는 신입사원이 놓고 간 자료를 다시 살펴보았다.
‘이게 정말 사실일까?’
일부 의심될 만한 거래내역이 있긴 하지만, 이것만으로 전체 부실을 판단하기는 이르다.
일단 조사를 해보고 아니라고 판단되면 가만히 있으면 그만이고, 맞다고 판단된다면······.
‘폭로 시점에 맞춰서 언론과 금감원을 움직여서 최대한 사태를 키워야 해.’
물론 양정욱은 반대로 움직일 것이다. 사태를 최대한 축소하고 운용사 책임으로 몰아가겠지.
하지만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있는 반면 그녀는 알고 있다. 그러니 동생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한다.
양자은 상무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채권 거래내역을 좀 확인해 봐야겠어요. 제가 말하는 기업들의 사모사채를 어디가 사갔는지 알아보세요. 이 일은 아무도 모르게 비밀리에 진행해주세요.”
* * *
중흥경제신문.
중흥미디어그룹 계열로 5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경제 전문 일간지로, 종편채널까지 소유하고 있다.
경제부 기자 민홍수는 점심을 먹으며 기삿거리를 찾아 여러 사이트를 뒤졌다. 예전에는 기업, 경찰청, 검찰청, 금감원 등에 죽치고 앉아 정보를 모았지만, 21세기에 중요한 정보는 대체로 인터넷을 타고 흐르기 마련.
‘오늘도 쓸데없는 내용만 올라오는구나.’
그러던 도중 방금 올라온 리포트를 열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DA증권 리포트) 프리머스 펀드 투자주의 요망]
(전략) 프리머스 펀드의 자산 매입내역 중 의심스러운 부분이 다수 발견되었다. 공공기관 매출채권에만 투자한다는 설명과는 달리 부실기업 사모사채에 투자했을 가능성이 높은 만큼 투자자들의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최근 코스닥에서 거래정지 된 이피엔케이는 직전에 300억 규모의 CB를 발행했고, 이를 프리머스 펀드가 매입했다. 또한 파라다이스피크, 에이트캐쉬, 와이엠씨머니, 나인오리온 등이 프리머스 주주 및 임원들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 만큼, 이에 대해 금융감독원이 철저한 조사를 시작해야······.
“······응?”
리포트를 읽어본 그는 소리쳤다.
“선배! 이것 한번 보세요!”
그 외침에 선배 기자인 박광일이 뒤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뭔데?”
“DA증권에서 펀드 관련 리포트를 냈는데······.”
“왜? 수익률 좋은 펀드 나왔대?”
“그, 그게 아니라, 프리머스 펀드가 위험하다고 투자에 주의하라는데요.”
“뭐? 프리머스 펀드면 거기 맞지? 박태일 대표?”
“예. 맞아요.”
경제부 기자라면 프리머스에 대해 웬만큼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박태일 대표는 채권시장에서 유명인이다. 그리고 프리머스 자산운용사는 최근 몇 년 사이 가장 크게 성공한 사모펀드였다.
중흥경제신문에서 박태일 대표를 직접 인터뷰도 했고, DA증권의 의뢰를 받아 기사를 빙자한 펀드 홍보글을 쓰기도 했다.
“운용금액만 1조가 넘는데, 그 펀드가 위험하다고?”
“예.”
“이거 쓴 애널리스트가 누구야?”
“리포트에 이름이 나와 있진 않은데, 알아보니까 올해 리서치부서에 입사한 RA인 모양인데요.”
“뭐? 그럼 신입이 멋대로 이런 리포트를 올렸단 말이야?”
증권사에서 자사가 독점판매하는 펀드가 위험하다고 투자주의 리포트를 내는 것은 사상초유의 일이다.
“미친놈인가?”
“그냥 미친놈은 아닌 것 같은데요. 첨부된 자료들 보면 나름 근거가 있어요.”
“자, 잠깐. 환매가 지연되는 게 자산 매각에 시간이 걸려서가 아니라, 자산이 없어서일 가능성이 있다고?”
“프리머스가 비상장기업들 사모사채를 매입했다고 금감원 수사까지 촉구하는데요.”
“제대로 미친놈이네.”
이쯤 되면 단순히 투자주의 리포트가 아니다. 만약 내용이 거짓일 경우 회사에서 잘리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정도면 허위사실 유포로 고소당해도 할 말 없다.
“이거 기사로 써도 되나요?”
“일단 DA증권 쪽에 문의해서 상황을 알아봐야지.”
“당연히 아니라고 하지 않겠어요?”
“그렇겠지.”
그래도 괜히 잘못된 기사 썼다가 여기저기서 항의 받고 시말서와 정정기사를 쓰는 것보다는 낫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용민 부장이 달려와 다급하게 말했다.
“뭐 하고 있어? 지금 프리머스 펀드 부실 폭로 리포트 올라온 거 빨리 기사 써. 다른 곳보다 1초라도 빨리 내야 해.”
“예? 설마 이 내용이 진짜예요?”
“난 잘 모르겠는데 국장님께서 뭔가 알고 계신 모양이야.”
국장 선에서 지시가 내려왔다는 건 확실한 정보가 있다는 뜻이다.
“정말 써도 돼요? 지난번에 대연보험 소비자분쟁 기사 썼다가 대연그룹에서 광고 다 내리겠다고 난리 쳤잖아요.”
언론은 구독자의 사랑이 아닌 광고주의 광고를 받아먹고 산다. 때문에 재벌그룹들을 비판하는 기사를 쓰기가 힘들었다.
“누구랑 통화했는지 몰라도 이미 얘기가 된 것 같아. 얼른 기사 써서 바로 나한테 보내.”
“아, 알겠습니다.”
민홍수는 바로 기사를 작성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