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대학 동기 (2)
12시쯤 되자 자연스레 파장 분위기가 됐다.
새벽까지 술 마시는 건 대학생 때나 가능한 일이지. 진세연은 잠시 누군가와 톡을 나눴다. 그러자 옆에 있는 여자애들이 물었다.
“어! 근처라서 데리러 온다고? 누구야?”
“설마 남친?”
“오! 진세연 애인 생겼어?”
진세연은 고개를 저었다.
“애인은 무슨. 그냥 아는 오빠야.”
“데리러 온다며? 그럼 사귀는 거 아니야?”
“아니라니까.”
“뭐 하는 사람이야?”
친구들이 일제히 묻자 진세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지금은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
“아버지 회사가 어딘데?”
“프리머스 자산운용사. 아버지가 부대표로 계신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할 수도 있지만 경제학과다 보니 다들 프리머스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우와! 프리머스!”
“거기 요즘 엄청나던데.”
“프리머스? 사모펀드?”
“최근 가장 뜨고 있는 사모펀드잖아.”
“그 회사 성과급 많이 주기로 유명하지 않나?”
“부대표 아들이라니! 완전 대박이네.”
“어떻게 만난 거야?”
연애 얘기가 나오자 어느새 화제가 그쪽으로 옮겨붙었다.
“잠깐 오라고 해봐.”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최한별은 하경태의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너 예전에 세연이 좋아해서 고백했었잖아.”
하경태는 당황하며 말했다.
“에이, 그게 언제적 얘기야?”
그러자 다른 애들이 일제히 놀려댔다.
“맞다. 얘 술 처먹고 고백했었지.”
“차이고 나서 이틀 동안 강의도 안 들어왔잖아.”
“난 휴학한 줄 알았어.”
하경태는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세연이한테 고백한 애들이 어디 한둘이야? 미루 너도 고백했었잖아.”
“······.”
갑자기 왜 날 끌어들여?
진세연은 웃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난 술을 마시며 말했다.
“맞아. 그랬었지.”
한때는 정말 좋아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진짜 시간이 많이 흐르긴 흐른 모양이다.
잠시 후, 은테 안경을 쓴 20대 후반의 남자가 나타났다.
“안녕하세요. 친구분들끼리 노시는데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적당한 키에 평범한 외모지만, 피부가 깨끗하고 인상이 좋았다. 표정과 행동에서는 자신감과 신중함이 자연스레 배어났다.
그는 자기소개를 하며 명함을 건네주었다.
“전 임준일이라고 합니다.”
명함을 보니 ‘프리머스 자산운용사 해외채권팀장’이라고 적혀 있다.
친구들은 일제히 그에게 물었다.
“우와! 팀장이시면 투자에 대해 되게 잘 아시겠다.”
“제가 최근에 주식투자 시작했는데, 요즘 괜찮은 주식 있나요?”
“프리머스는 새로 직원 안 뽑나요?”
“사모펀드 쪽으로 가려면······.”
다들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고 그는 친절하게 대답했다.
이렇게 보면 그냥 건실한 사람처럼 보인다. 원래 사기꾼들의 공통적인 특징 중 하나가 사기를 안 치게 생겼다는 것이다.
현재 프리머스 펀드의 최소 가입금액이 1억 원이지만, 2년 뒤에는 1천만 원으로 내려간다.
수년 동안 안정적으로 꾸준히 수익을 내온 신뢰까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투자하며 국민적 펀드가 되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애들 중 세 명도 저놈 말만 믿고 상당한 돈을 넣었다.
박정연이 질문했다.
“혹시 세연이랑 사귀어요?”
그 질문에는 진세연이 재빨리 손을 저었다.
“그냥 친한 오빠라니까.”
그 말대로 아직 사귀는 사이는 아니다. 나중에는 그렇게 되겠지만.
임준일은 아직 사회 초년생인 우리에 비해 어른 같은 모습이었다. 1회차 때는 되게 커보였던 것 같은데, 지금 보니 그냥 평균적인 체격이다.
역시 사람은 보는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난 그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지금 프리머스 펀드에 관한 리포트를 작성 중인데, 혹시 몇 가지 질문을 좀 드려도 될까요?”
“리포트요?”
“예. DA증권 RA로 일하고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처음 써보는 리포트라서 잘 쓰고 싶어서요.”
임준일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세연이 친구분인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대부분의 투자상품이 안정성이 높으면 수익성이 떨어지기 마련인데, 프리머스 펀드는 다르더라구요.”
“그게 프리머스 펀드의 최대 장점이죠. 저희 회사처럼 안정적으로 수익을 내는 곳은 전 세계에 몇 곳 안 될 겁니다.”
자신감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사실 그 부분에 대해 좀 의문이 있어서요.”
“의문이라니요?”
“최근 채권형 펀드들의 수익률이 죽 쑤는 상황에서도 프리머스만 안정적으로 고수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비슷하게 트리플A등급 채권에만 투자하는 다른 펀드와 비교해 봐도 지나치게 높단 말이죠.”
내 말을 들은 다른 동기들이 말했다.
“에이, 그게 뭐가 이상해?”
“수익 잘 나오면 좋은 거지.”
“뭐가 문제라는 거야?”
임준일은 웃음을 지었다.
“수익률이 너무 좋아서 문제라는 얘기는 처음 듣네요. 그야 당연히 안정성 높고 금리가 좋은 채권만 선별해서 투자하기 때문이죠.”
“이상하네요. 안정성과 수익성은 반비례하기 마련인데. 시장에 그런 채권이 널려있지도 않을 텐데요. 일시적이라면 모를까, 그게 장기적으로는 가능할까요?”
그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혹시 자산을 다른 곳에 투자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서요.”
지금 시점에서 그가 회사 일에 어디까지 관여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머리가 있다면 부실이 있고 자산을 다른 곳으로 빼돌리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사실 얼마 전 프리머스 펀드에 부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순간, 그의 표정이 살짝 움찔했다.
2년 6개월 후와는 달리, 현재 이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나와 성윤아를 포함해 몇 명 안 된다. 당연히 소문 같은 건 없다.
임준일은 대놓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들은 겁니까?”
프리머스 사태가 터진 뒤 그는 임태훈 부대표와 함께 해외로 도주했다가 이후 한국으로 송환되었고, 횡령혐의가 인정돼 징역 3년을 받았다.
수백억을 해먹고도 고작 징역 3년이라니.
이러니 대한민국에 사기꾼들이 판을 치는 거겠지.
분위기가 점점 안 좋아지는 걸 느꼈는지 친구들이 나를 말렸다.
“야야, 너 왜 그래?”
“미루 너 좀 취한 것 같다.”
허경태가 농담처럼 말했다.
“너 설마 아직 세연이 좋아해서 그러는 거야?”
“······.”
이 새끼, 분위기 파악 못 하고 나대는 건 여전하구나.
난 신경 쓰지 않고 계속 말했다.
“아시겠지만 요즘 금융권에 사기 사건들이 워낙 많아서요. 사기꾼들도 넘쳐나고. 그래서인지 리포트 쓸 때 신중을 기하게 되네요.”
내 말에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사기꾼이요? 지금 저한테 하는 얘기입니까?”
난 잔에 남아있는 맥주를 마시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그런데 혹시 찔리는 건 아니죠?”
임준일의 표정이 일그러지는데, 진세연이 벌떡 일어나 나를 향해 소리쳤다.
“야! 한미루! 그만 좀 해!”
그 외침에 한순간 주위가 조용해졌다.
난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들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축하해주러 온 자리에서 이게 뭔 짓인가 싶겠지.
진세연의 표정을 보니 화가 많이 것 같다.
이 자리에서 더 말해봐야 소용없을 것이다. 어차피 조금만 있으면 내 말이 맞다는 걸 모두가 알게 될 테니까.
어쨌거나 내가 할 말은 다 했다.
난 옷을 챙겨서 일어났다.
“취해서 쓸데없는 말을 한 것 같네요.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가게를 나와 계단을 내려가는데 뒤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축하하는 자리에서 꼭 그렇게 해야 했나요?”
고개를 돌려 보니 지유가 서 있었다.
그녀는 눈을 치켜뜬 채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라도 언니한테 오늘 일에 대해 사과하셨으면 좋겠어요.”
화난 건가?
무섭다기보다는 귀엽다는 느낌이다.
난 피식 웃었다.
“왜 웃어요?”
“아니에요.”
방송에서는 착하게만 보였는데 제법 성격이 있는 모양이다.
난 그녀에게 말했다.
“일주일만 기다려 봐요.”
“예?”
“그때도 제 말이 틀렸다고 생각된다면 전화해서 사과하죠.”
내 말에 그녀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정말로 저 사람이 사기꾼이라고 생각해서 그랬단 말이에요?”
난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그럼 설마 질투해서 그랬겠어요? 제가 그 정도로 찌질해 보여요?”
지유는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렇게 생각했구만.
연예인 이미지가 있을 텐데 나한테 이렇게 말하는 걸 보면 세연이를 많이 생각해주는 모양이다.
사촌언니를 생각해주는 마음이 기특해서 난 조언을 해줬다.
“웬만하면 씨랩 피처링은 하지 마요.”
뜬금없는 얘기에 그녀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엔터 쪽 담당하는 애널리스트 형한테 들었는데, 소문이 별로 안 좋아요.”
“무슨 소문이요?”
“여자 문제가 좀 있어요. 몇 달 안에 터질 것 같으니까, 괜히 피 보지 않으려면 거리 두는 게 좋을 거예요.”
내 말에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대체 뭘 안다고 남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거죠?”
이것도 지금은 그냥 생사람 험담하는 걸로밖에는 들리지 않겠지. 내 말을 믿고 안 믿고는 그녀의 자유다.
“제 말이 맞는지 틀린지는 두고 보면 알겠죠.”
* * *
한미루가 나간 뒤.
친구들은 다들 놀란 듯 말했다.
“쟤 왜 저래?”
“왜 뜬금없이 시비지?”
“이제 RA인 애가 뭘 안다고 저래?”
“많이 취한 모양인데.”
“정말로 세연이 좋아해서 저러나?”
얘기를 듣던 지유는 먼저 가보겠다고 바로 일어났다.
하경태는 임준일에게 말했다.
“미루 쟤 취해서 그런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전 괜찮습니다.”
임준일은 억지로 태연한 척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못했다.
‘저놈이 대체 뭘 알고 있는 거지?’
알려진 바와는 달리 프리머스는 위험자산에 투자하고, 그렇게 얻은 수익을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빼돌리고 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회사 내에서도 몇 명 되지 않았다.
사실은 그 역시 이런 일이 어느 정도 규모로 이뤄지는지 잘 몰랐다. 그저 자산의 일부를 그렇게 하고 있다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신입사원이라고 했지?’
프리머스 펀드가 유명한 만큼 관련된 소문들도 많았다. 악재나 호재 관련 루머들은 시장에 항상 넘쳐난다.
신입이 얻을 수 있는 정보란 뻔하다.
주변 사람들의 얘기에 그는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여자 앞에서 잘 보이기 위해 어디서 들은 소문을 대충 끼워 맞춰서 아는 척한 거겠지.’
굳이 이런 일까지 보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임준일은 이내 한미루의 말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