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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대학 동기 (1) (8/529)

 8화. 대학 동기 (1)

 내가 나서서 부실을 폭로해봐야 잠깐 이슈가 될지는 몰라도 금방 가라앉을 것이다.

 신입사원 말을 누가 귀담아 듣겠는가?

 그리고 회사는 최선을 다해 은폐하려 들겠지. 당시에도 의혹이 불거진 뒤 터지기까지 반년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결국 제대로 터트리려면 윗선이 움직여야 한다.

 현재 그룹 내에서 양정욱 전무를 저격할 수 있는 사람은 DA카드 양자은 상무밖에 없다. 그녀는 양정욱 전무의 누나.

 한마디로 누나에게 동생을 공격하라고 부탁해야 하는 셈이다.

 과연 그녀가 내 말을 들어줄까?

 표면적으로 둘 사이는 아무 문제가 없다.

 “재벌가 남매라는 게 아무리 겉으로 친해보일지라도 속은 전혀 그렇지 않지.”

 양정욱 전무는 회장이 된 뒤 양자은 상무를 그룹 내에서 완전히 쫓아냈다. 그녀가 바보가 아닌 이상, 동생이 회장이 되면 자리보전이 힘들다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일단 양자은 상무랑 접촉을 해봐야 한다.

 문제는 어떻게 만나느냐다. 다짜고짜 찾아가서 만나자고 해봐야 바로 독대하기는 힘들겠지?

 그 전에 내 행동이 회사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문제가 될 테고.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할 좋은 방법이 없을까? 아니면, 다리 놔달라고 부탁이라도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는데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액정에 뜬 이름은 박승훈.

 한국대 경제학과 동기로, 현재는 네오틴이라는 포털사이트에서 일하는 중이다. 얘가 무슨 일이지?

 전화를 받자마자 승훈이가 물었다.

 [너 이따 올 거냐?]

 “응? 어디를?”

 [오늘 세연이가 동기들한테 한턱 쏜다고 했잖아.]

 세연이가 누구지? 아! 진세연.

 역시 내 과동기다. 얼굴도 예쁘고 성격도 좋아서 과에서 인기가 많은 애다.

 “걔가 왜 쏴?”

 [아나운서 시험 합격했다고.]

 “그랬나?”

 [기억 안 나?]

 “기억 나는 것 같아.”

 진세연은 졸업 후 유성전자에 입사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아나운서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보란 듯이 한 번에 합격했다.

 난 안 간다고 말하려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그날 분명히······.

 “몇 시 어디라고 했지?”

 [8시 강남. 자세한 주소는 톡으로 찍어줄게.]

 “알았어. 이따 보자.”

 난 전화를 끊은 다음 생각했다.

 진세연.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중학교 2학년 때.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엄청 예뻤다. 근처 중학교와 고등학교 학생들이 그녀를 보기 위해 하교 시간에 학교 앞을 기웃거릴 정도였다.

 많은 남학생들이 그녀를 좋아했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같은 반이었지만 가끔 인사하는 게 전부였다. 고백할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못했고, 반이 나눠지며 자연스레 멀어졌다.

 이후에는 여고로 진학했다고 들었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국대 경제학과 신입생 환영회 때 다시 만났다. 서로 알아보고 둘 다 깜짝 놀랐다.

 설마 중학교 동창이 같은 대학 같은 과에 합격했을 줄이야!

 다시 만난 우리는 빠르게 친해졌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사귀게 되었다. 그렇게 1년을 좀 넘게 만났고, 또 어쩌다 보니 헤어졌다.

 그래도 그 뒤로 어색하지 않게 잘 지냈다.

 시험 때는 다 같이 모여 공부했고, 축제 때는 다 함께 열심히 놀고 뒤풀이도 했다.

 졸업 후에도 간간이 연락하며 지냈고.

 이후 그녀는 아나운서로 꽤 잘나갔다. 하지만 프리머스 사태 이후 모든 프로그램에서 하차하고 일도 그만두었다.

 원인은 그녀가 만나던 남자 때문.

 그는 프리머스 자산운용사의 경영진이었고, 그녀는 자기 돈을 투자한 것도 모자라 주변의 지인들까지 소개시켜주었다.

 동료 아나운서들은 물론 친한 동기들도 투자했고, 다 같이 사이좋게 날려먹었다.

 난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프리머스가 진짜 여러 사람 인생 망쳤구나.”

 마침 잘 됐다.

 * * *

 약속장소는 강남의 한 이자카야였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열 명 정도 모여 있었다. 동기들은 나를 보더니 반갑게 말했다.

 “오랜만이네.”

 “이게 대체 몇 달 만이야?”

 “학교 다닐 땐 매일같이 봤는데, 졸업하고 나니 다들 얼굴 보기가 힘드네.”

 “그러게. 다들 잘 살고 있지?”

 얘들한테는 몇 달 만일지 몰라도 나한테는 그보다 훨씬 긴 시간이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진세연이 웃으며 말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165센티 정도의 키에 늘씬한 몸매, 작은 얼굴과 커다란 눈, 어깨까지 닿는 생머리와 새하얀 피부.

 여전히 예쁜 모습이다.

 난 아주 오랜만에 그녀와 인사를 나눴다.

 “축하해. 진작 연락했어야 했는데.”

 “뭘. 와준 것만으로 고마워.”

 “술 사준다는데 당연히 와야지.”

 여자애들은 옆에서 물었다.

 “내 친구가 SBC 아나운서라니.”

 “너 그럼 이제 TV에 나오는 거야?”

 “에이, 방송 나가려면 한참 멀었지.”

 진세연은 술잔을 들며 말했다.

 “오늘 내가 쏘는 거니까 마음껏 먹어.”

 “합격 축하해!”

 우리는 다 같이 술잔을 부딪쳤다.

 그동안 밀린 얘기가 많은지 술자리는 금방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변했다. 프리머스 사태 이후 나는 동기들과 연락을 끊고 지냈다.

 그래서인지 더욱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하경태가 출싹거리며 말했다.

 “자자, 일단 소맥 한 잔씩 하자.”

 최한별이 말했다.

 “소맥은 뭔 소맥이야?”

 “내가 우리 사수한테 기가 막히게 소맥 마는 법을 배웠거든.”

 “됐으니까 맥주나 마셔. 너 MT 때 소맥 마시고 내 옷에 토한 거 기억 안 나?”

 “아니, 뭔 1학년 때 있었던 일을 아직까지······.”

 난 구시렁거리는 하경태에게 말했다.

 “너 지금 최한별이랑 사귀고 있지?”

 내 말에 두 사람은 화들짝 놀랐다.

 “어떻게 알았어?”

 “아, 아니야!”

 하경태의 말에 최한별이 재빨리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다른 친구들은 깜짝 놀랐다.

 “뭐야? 너네 사귄다고?”

 “진짜? 언제부터?”

 “누가 먼저 고백했어?”

 “학교 다닐 때는 맨날 싸우더니.”

 “아니, 우리가 언제 싸웠다고······.”

 둘은 과 내의 유명한 앙숙이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톰과 제리였겠나? 그러니 둘이 사귄다는 사실에 모두가 놀랄 수밖에.

 최한별은 울상을 지었다.

 “내가 이래서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러더니 이내 하경태를 향해 쏘아붙이듯 말했다.

 “니가 미루한테 말했지?”

 하경태는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야. 나 얘랑 연락도 안 했어. 너 대체 어떻게 안 거야?”

 “왠지 그런 것 같아서 한번 찔러봤어.”

 이 둘은 내년에 속도위반으로 결혼한다. 청첩장 줄 때까지 비밀로 해서 다들 깜짝 놀랐지.

 술을 마시다 보니 이때 있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이 자리에 연예인도 한 명 오지 않았던가? 누구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진세연이 전화를 받았다.

 “어! 지유야!”

 그녀는 잠시 통화를 하다가 우리를 보며 말했다.

 “지유가 와도 되냐고 하는데?”

 “와! 정말?”

 “진짜 온대?”

 남자 동기들은 입을 모아 소리쳤다.

 “당연히 와도 되지.”

 “오라고 해!”

 난 옆에 있는 박승훈에게 물었다.

 “우리 과에 지유라는 애가 있었나?”

 “뭔 헛소리야? 가수 지유 몰라? 언론학과 연예인.”

 “걔 은퇴하지 않았어?”

 박승훈은 어이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작년에 데뷔했는데 뭔 벌써 은퇴야? 일한다고 TV도 안 보냐?”

 “아······.”

 맞다. 지금은 데뷔한 지 얼마 안 됐을 때구나.

 지유.

 현재 한국대 언론학과 2학년으로 작년에 데뷔했다.

 아이돌그룹이 대세인 요즘 시대에 혼자 작사 작곡을 하고 노래까지 부르는 싱어송라이터다.

 노래를 시작한 것은 고등학생 때부터였다고 한다.

 원래는 무명에 가까웠으나 예쁜 외모에 출중한 노래 실력, 그리고 한국대라는 간판까지 더해지며, 신인가수로서 대중들에게 조금씩 이름을 알리는 중이다.

 진세연이 지유를 아는 이유는 사촌여동생이기 때문. 어쩌다 보니 고등학교와 대학교 후배기도 하고.

 30분 후쯤.

 정말로 지유가 나타났다.

 그녀는 우리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들.”

 청바지에 패딩을 입은 수수한 차림이다.

 160센티 정도의 키에 둥근 얼굴. 쌍꺼풀 없는 커다란 눈에 오뚝한 코, 붉은 입술.

 체형은 TV에서 보던 것보다 더 마른 편이었고, 얼굴이 작아 실제 키에 비해 비율이 훨씬 좋게 보였다.

 1회차 때 봤을 때도 생각했지만, 역시 연예인은 연예인이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았다.

 “어서 와요.”

 “내 집처럼 편하게 앉아요.”

 술집은 미닫이문이 있는 방으로 되어 있어서 다른 손님들과 마주칠 일은 없었다.

 진세연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흔들며 반가워했다.

 “스케줄 바쁠 텐데 어떻게 왔어?”

 “아무리 바빠도 언니 합격 축하는 해줘야죠.”

 “고마워.”

 다른 여자 동기들 몇 명은 일전에 본 적이 있는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지유는 진세연의 옆자리에 앉았고, 동기들은 한마디씩 건넸다.

 “노래 잘 듣고 있어요.”

 “TV도 잘 보고 있습니다.”

 “조만간 드라마도 찍는다면서요?”

 “감사합니다.”

 진세연이 물었다.

 “아! 씨랩 노래에 피처링할 수도 있다며? 진짜야?”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그렇게 될 것 같아요. 씨랩 선배님께서 제 목소리가 마음에 들었대요.”

 난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거 안 하는 게 좋을 텐데.

 씨랩은 현재도 최고인기를 누리고 있는 7년 차 아이돌그룹 KDK의 래퍼이자 작사 작곡가. 내놓는 곡마다 엄청난 히트를 쳤다.

 지유가 피처링한 노래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의 사진’은 각종 음원차트 1위를 찍고, 방송 3사와 케이블에서도 1위를 했고, 피처링을 맡은 지유의 인기와 인지도도 크게 올라갔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씨랩 쪽에서 문제가 터졌다.

 단순 스캔들 정도가 아니라 KDK가 해체되고, 관련 연예인들 여러 명이 구속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었다.

 그녀는 그 일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었고, 출연이 확정된 드라마에서 하차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드라마는 한류열풍이라 할 정도로 세계적인 대박을 터트렸지.

 지유는 한동안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했고, 2년 후 드라마 OST와 함께 조연으로 복귀했다.

 연기는 호평이었지만 그때의 안 좋은 이미지는 계속 따라다녔고, 게시판에는 악플이 넘쳐났다.

 충격이 컸는지 그녀는 방송 출연은 거의 하지 않고 가끔씩 음원만 발표했다. 워낙 노래가 좋아서 발표할 때마다 상위에 랭크되긴 했다.

 하지만 내가 회귀하기 3년 전부터는 그마저도 끊겼다.

 만약 그때 씨랩 피처링을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으려나?

 미래를 모르는 입장에서는 좋은 기회라 여기는 게 당연하다. 아는 입장에서는 짐 싸들고 뜯어말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대뜸 ‘그거 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면 뭐라고 생각할까?

 “······.”

 미친놈이라고 생각하겠지.

 오늘 처음 본 사이에 뭐라고 조언을 하겠는가? 그냥 입 다물고 있어야지.

 원래 연예인 걱정은 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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