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사신 (2)
5화 사신 (2)
말했듯 태준의 목표는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보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1레벨에 하운드를 택했고, 1레벨부터 오크를 사냥했다.
그럼에도 게임의 난이도가 아직도 어렵게 느껴지질 않았다.
그런데 이 순간···, 태준의 관심을 사로잡는 글자가 눈앞에 아른거리고 있다.
'가혹한 시련이라고?'
그 단어를 본 순간,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변태라 욕해도 좋다.
하지만, 이 순간 태준은 지난 수년간 억눌러 왔던 모든 욕구들을 풀어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나도 내 손으로 우승컵을 들고 싶었다고.'
감독으로 훌륭한 커리어를 마치고 은퇴했다지만.
그의 진정한 욕구는 지도하고 가르치는 쪽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뛰는 플레이어 쪽에 있었다.
강한 적과 마주칠 때마다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던 그 순간의 감각을 도무지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태준은 시선을 들어 올렸다.
가혹한 시련이란 대체 무엇인가 확인하기 위해.
[시련의 난이도를 선택 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
[매우 어려움]
[극악]
[사신]
총 네 개의 난이도.
[어려움]
-몬스터의 전투력이 50% 증가합니다.
-획득 경험치, 스킬의 숙련도 증가 속도가 각각 20% 증가합니다.
'음···, 난이도를 올리고 빠르게 성장 할 수 있는 시스템인가?'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태준은 그 아래의 난이도도 살폈다.
[매우 어려움]
-몬스터의 전투력이 100% 증가합니다.
-획득 경험치, 스킬의 숙련도 증가 속도가 각각 30% 증가합니다.
'흠···, 별로 안 땡기는데?'
몬스터가 강해진다는 건, 분명 게임의 난이도가 높아지는 일이긴 할 테지만 큰 의미는 없다.
어차피 사냥터야 널리고 널렸다.
강한 몬스터도 마찬가지.
게임이 오픈한 지 벌써 2년여가 지났음에도 아직도 개척되지 않은 맵이 산더미다.
저 정도는 태준에게 큰 매력으로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어?'
[극악]
-사망 시 캐릭터가 삭제됩니다.
-레벨 차이 10레벨 이하의 몬스터에게서는 경험치를 획득 할 수 없습니다.
-획득 경험치, 스킬의 숙련도 증가 속도가 각각 70% 증가합니다.
태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이것 봐라?'
사망시 캐릭터 삭제?
레벨 다운 따위가 아닌, 캐릭터 삭제라니?
심지어, 무조건 10레벨보다 높은 몬스터를 사냥해야 한다.
그래야 경험치를 획득 할 수 있단다.
'그럼···?'
가장 아래의 사신 난이도는 대체 무슨 조건이 달려 있을까.
태준은 흥분된 마음으로 사신 난이도를 살폈다.
[사신]
-사망 시 캐릭터가 삭제됩니다.
-레벨 차이 15레벨 이하의 몬스터에게서는 경험치를 획득 할 수 없습니다.
-획득 경험치, 스킬의 숙련도 증가 속도가 각각 150% 증가합니다.
-'사신'의 시련을 겪은 플레이어에게 사망 시 대상의 캐릭터가 삭제됩니다.
'이거다.'
태준의 눈이 번쩍 뜨였다.
캐릭터 삭제.
거기에 무조건 15레벨 이상의 몬스터를 사냥해야 하는 말도 안 될 정도로 괴상망측한 조건이 달린 시련.
'이 정도면···, 확실히 쫄깃하겠는데?'
목숨이 걸려 있지 않은 세상이다.
누군가는 라스트 엠파이어 증후군에 빠져 허우적 거린다고 해도, 결국 게임은 게임이다.
죽어도 죽지 않는 세상.
하지만 사신 난이도를 택한 이상, 더 이상 게임이라고 안심 할 수 없게 된다.
말 그대로 캐릭터가 삭제되어 버리니까.
목숨이 한 개라는 말이다.
그리고 가장 아래엔 꽤나 흥미로운 문구가 하나 적혀 있다.
'상대도 캐릭터 삭제?'
이건 정말 사신이라는 이름이 적절한 시련이 아닌가?
'그래. 그 정도 마음가짐은 돼야지. 게임은 게임이라고? 그건 아니지.'
태준에게 게임은 인생이었고, 삶이었고, 투쟁이었고, 전쟁이었다.
싸움을 걸려면 목숨을 걸어야지, 아무렴.
그러니 이런 조건은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들었다.
물론 그만큼 그에 상응하는 보상 역시 어마어마했다.
경험치, 숙련도 150% 증가.
아마 다른 플레이어도 이 수치를 봤으면 눈이 돌아가 사신을 고르지 않았을까?
그만큼이나 어쩌면 누군가에겐 가장 중요 할지도 모를 옵션이다.
솔직히 말해서 태준의 관심을 크게 사로잡지 못했다.
이내 태준은 망설이지 않고 사신 난이도를 택했다.
[가혹한 시련 '사신' 난이도를 선택하시겠습니까?]
[한 번 선택한 난이도는 변경 할 수 없습니다.]
"그래."
[사신 난이도의 시련을 선택했습니다.]
자, 이제 태준은 말도 안 되는 족쇄를 온 몸에 두르게 된 셈이었다.
무려 캐릭터 삭제를 각오하는 족쇄.
두근! 두근!
그 순간에 잠자고 있던 태준의 승부욕은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가자.'
이젠 의로소로 향할 차례다.
튜토리얼이 끝난 뒤, 들었던 의뢰소장을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
의뢰소는 북적이고 있었다.
이 순간에도 많은 플레이어들이 의뢰를 수령하고, 의뢰를 완료한 플레이어들이 보상을 수령했다.
"파티원 구합니다!"
파티를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플레이어들의 모습이 보였다.
어쨌든 그런 플레이어들을 뒤로 한 채, 태준은 의뢰소장을 향해 움직였다.
의뢰소장의 이름은 타호.
타호는 대략 삼십대 중반 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올빽으로 쓸어 넘긴 머리가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은 권태감에 찌들어 있었다.
지루해 죽겠다는 그런 얼굴.
태준은 타호를 향해 걸어갔다.
"음?"
타호는 무슨 일이냐는 듯 태준을 바라봤다.
아직까지는 별 관심 없어 보이는 얼굴이다.
"저쪽으로 가 봐. 직원들이 안내 해 줄 거야."
그러더니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귀찮음이 잔뜩 묻어 나오는 태도다.
"튜토리얼에서 추천을 받아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태준은 명패를 보여줬다.
"명패?"
순간, 타호의 눈이 커졌다.
타호는 한참이나 명패를 들여다 봤다.
순간.
"설마, 아슬란이라면 튜토리얼 마스터 아니야?"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허, 이런 미친."
그제야 타호는 자세를 바로잡은 채 태준을 바라봤다.
"실례했어. 이렇게 대단한 녀석인 줄은 몰랐군."
그때, 두 사람의 근처에 있던 플레이어들이 놀란 얼굴로 타호를 바라봤다.
'뭐지?'
그들도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타호, 저 인간이 얼마나 성의 없는 인간인 지를 말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있다.
'튜토리얼 마스터? 그게 뭐지?'
교관도 아니고, 튜토리얼 마스터라니?
그런 이름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거 명패 맞지?'
지금까지 명패를 받아 온 게 태준이 처음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수는 결코 많지 않다.
라스트 엠파이어의 수억 명의 유저를 통틀어서도 얼마 되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그들이 모르는 사실 하나가 있다.
태준의 명패는 교관의 명패가 아니라, 튜토리얼 마스터의 명패라는 것.
"명패라고?"
"정말이야?"
그 순간, 삽시간에 의뢰소는 소란스러워졌다.
누군가가 명패를 입에 담은 순간 그 단어는 마지 전염병처럼 그 내부에 빠르게 퍼져나간 것이다.
"누군데?"
"저 사람이야?"
"얼굴 좀 보여 주세요!"
플레이어들은 명패를 받아 왔다는 사람의 얼굴이라도 보기 위해 개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누군가는 푸념어린 말들을 쏟아내기도 했고.
"재능이지, 재능···."
"그래서 동화율이 몇일까?"
"못 해도 95는 넘겠지?"
태준의 동화율을 추측하는 플레이어들도 많았다.
누군가는 95를 이야기 했고, 또 누군가는 96, 97을 입에 담았다.
하지만 98은 없다.
왜냐고?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 98%의 동화율을 손에 넣은 건 단 한 명 뿐이니까.
현 랭킹 1위.
라스트 엠파이어의 전설.
그 남자는 그야말로 홀몸으로 길드 이상의 전력을 보유한, 살아 움직이는 공성 병기 아니던가?
이내 타호가 말했다.
"아슬란의 명패라면···, 분명 평범한 실력은 아닐 테니. 어때, 붉은 오크를 사냥해 보겠나?"
그렇게 말하는 타호는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이다.
그 말에 플레이어들은 수군댔다.
"5레벨에 붉은 오크를 잡아 오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네."
"그걸 어떻게 잡으라고···."
당연한 반응이다.
5레벨에 오크 한 마리 사냥하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게 현실이건만, 오크보다 훨씬 강력한 붉은 오크를 사냥하라니.
이건 그냥 퀘스트를 수행하지 말라는 것과도 다르지 않다.
그런데.
"붉은 오크 레벨이 몇이죠?"
"음? 붉은 오크의 레벨은 15레벨이지. 왜 그러지? 혹시 무서운가?"
"아, 그럼 곤란하겠는데요···."
타호는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태준이 겁을 먹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물론 그건 타호의 착각이다.
"아뇨. 무서운 게 아니라 20레벨로 맞춰 주셨으면 해서요."
"···뭐?"
타호의 눈이 커졌다.
플레이어들도 마찬가지다.
"미친 소리!"
"20레벨 몬스터를 사냥한다고?"
"정신 나간 것 아냐?"
5레벨 짜리 어떻게 20레벨의 몬스터를 사냥하겠다는 말인가?
그건 정말이지 얼토당토 않는 소리였다.
하지만 태준에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래야 경험치를 획득하고, 스킬의 숙련도를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심인가?"
타호가 되물었다.
"예."
"···좋아. 그렇다면 오크 전사를 사냥해 오게. 녀석은 마침 20레벨의 몬스터지. 오크 전사 한 마리를 사냥하고 오크 전사의 뿔투구를 내게 가져오면 돼."
[오크 전사 사냥!]
-등급 : 일반
-달성 조건 : 오크 전사 사냥
-보상 : 의뢰소장의 무기
그런데 그때.
[아슬란의 명패로 인한 추가 미션이 생성되었습니다.]
-추가 달성 조건 : 피격횟수 0회로 사냥 성공
-추가 달성 보상 : 전직 시험
'······!'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사신 등급 시련으로 인해 새로운 퀘스트 내용이 추가되었고, 그 보상은 전직 시험.
'전직 시험이라고?'
이 게임에 전직이라는 게 있었던가?
처음 듣는 이야기다.
그 순간, 튜토리얼 마스터의 한 마디가 떠올랐다.
-어쩌면 자네를 그 누구도 닿지 못한 곳으로 이끌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겠지···.
그 누구도 닿지 못한 곳.
그렇다면, 말 그대로 이 게임에서 최초로 등장한 콘텐츠라는 뜻.
궁금해 미칠 것만 같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저 퀘스트를 수행하고 전직 시험에 대해서 알아보고 싶었다.
"다녀오겠습니다."
그러니 망설일 이유는 없었고, 태준은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보며 타호는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객기인가? 자신감인가?'
아직은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만약, 저것이 자신감이고 정말로 실력을 증명한다면···.'
어쩌면 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다.
*
태준은 곧바로 오크의 필드로 향했다.
오크 전사는 오크 부락과 오크 필드 모두에 서식하는 녀석이었는데, 오크 부락은 현재 태준이 사냥할 만한 곳이 아니다.
오크 전사가 일반 몹으로 등장하는 곳이니까.
'반면 오크 필드에선 네임드 몬스터로 나타나고.'
높은 난이도를 추구한다곤 하지만, 사지로 뛰어 들 정도로 대책없는 인간은 아니다.
어느새 태준은 사냥터에 진입했고, 오크를 하나 둘씩 물리치며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여기 저기에서 플레이어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부러움 가득한 시선들이다.
아마 태준의 소문이 퍼지고 있는 듯 했다.
태준은 계속해서 나아갔고, 한참을 더 필드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그리고 이내 태준의 시야에 오크 전사가 눈에 들어왔다.
오크 전사는 평범한 오크보다 덩치가 더 컸다.
그리고 뿔 달린 투구와 함께 양 손엔 커다란 대검을 쥐고 있는 녀석이었다.
취이이익!
이내 오크 전사가 태준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놈은 검을 휘두르며 달렸다.
한 손으로 드는 것도 엄청나게 어려워 보이는데 무려 두 개의 검을 자유자재로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엄청나게 위협적인 모습이다.
태준은 지금 방어구조차 없다.
착용한 방어구라곤 기본으로 제공되는 천쪼가리가 전부.
스치기만 해도 중상을 면할 수 없는 상황.
하지만 태준은 오히려 히죽 웃었다.
'재밌겠어.'
그래서 더 좋았다.
심지어 퀘스트의 추가 달성 조건은 피격 횟수 0회로 클리어 하는 것이었으니.
더욱 더 상황이 쫄깃해진 지금이다.
'나도 스킬 한 번 써 볼까.'
처음으로 손에 넣은 액티브 스킬, 부스터.
그 능력을 시험해 볼 시간이다.
파스스슷!
이내 태준의 몸 위로 증기가 피어 올랐다.
피부는 붉게 물들었고, 근육은 꿈틀댄다.
'느낌 좋은데?'
전신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몸 깊은 곳에서부터 강렬한 힘이 끓어올랐다.
[민첩성이 10% 증가했습니다.]
현재의 민첩성은 23.
거기에 10%라면 대략 2.
평범한 유저라면 2레벨이 오른 효과를 스킬 한 번의 사용으로 얻어낸 지금.
부웅!
순간, 오크 전사의 공격이 태준에게 쏟아졌다.
느리다.
눈 감고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홱!
당연히 태준은 오크 전사의 공격을 가볍게 피해냈다.
공격을 피하기 무섭게 태준의 주먹이 움직였다.
부스터가 더해진 태준의 공격!
콰아앙!
태준의 주먹은 여지없이 오크 전사의 맹점을 강타했다.
레벨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맹점을 노리는 태준의 일격은 눈으로 보고도 막아 낼 수 없는 공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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