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4. 리버스 >
“헉··· 헉··· 허헉···.”
퍼스티스트의 리더, 오다는 입에서 단내가 느껴지고, 전신에서 끊임없이 땀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당장이라도 지쳐 쓰러질 것 같은 훈련 속에서도, 퍼스티스트 멤버들은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묵묵히 하드 트레이닝을 버텨내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그들이 과거에 경험했던 트레이닝보다 훨씬 하드한 수준의 훈련이었지만, 불평을 내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고생하고 있는 것은 자신들만이 아니었기에.
“신체 기능 수준 55% 저하. 심박수와 체온이 지나치게 높습니다.”
“슈트의 냉각장치 출력을 올리고 산소 공급량도 늘리도록.”
스포츠 선수의 훈련을 위해 특별히 제작된 PRS를 입은 퍼스티스트 멤버들의 곁에서 지속적으로 신체 상태를 체크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
그들은 짧은 기간 안에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는 퍼스트멤버들을 위해 상혁이 데려온 세계 정상급의 트레이너와 의사들이었다.
8년 전의 전설을 다시 한번 현실에 불러오려는 PTW의 전폭적인 지원.
그것은 체력 훈련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았다.
“메르세데스 버닝 스타즈의 감독 블레어 마틴입니다. 이번 개막전을 위해 PTW의 초대를 받아 이렇게 오게 되었습니다.”
“버닝 스타즈면 작년 준우승팀 아닙니까?!”
“예, 저 말고도 이번 이벤트를 위해 버닝 스타즈 현역 파일럿 전원이 여러분의 훈련을 돕게 될 겁니다.”
“하지만 올해 경기 준비로 바쁘신게···.”
“사실은 저도 처음에 그 이유로 거절했었는데, 상혁 씨가 직접 찾아와서 설득하더군요. 은퇴했던 퍼스티스트 멤버들을 데리고 마션즈를 이길 정도의 완벽한 전략을 짤 수 있다면, 올해 우승팀은 버닝 스타즈가 될 수 있을 거라고요.”
선수들을 설득하는 과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KOH의 프로 선수 중에, 퍼스티스트의 팬이 아닌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으니까.
트레이너, 물리치료사, 가장 최근에 있었던 경기에서 상대팀을 상대로 종이 한 장의 승부를 펼쳤던 준우승 팀의 현역 선수들까지.
상혁은 세계 최고 수준의 서포팅 멤버들을 모집하여 퍼스티스트 멤버들에게 제공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모든 나이츠의 아버지라 불리는 김기열 교수 역시 8년 전 현역 기체였던 퍼스티스트 멤버들의 나이츠를 8세대에 걸맞은 스펙으로 개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교수님이 복귀하실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1세대 나이츠의 완성 이후로, 완전히 경영자로 돌아서신 줄 알았거든요.”
4세대부터 8세대까지의 나이츠 개발을 총괄한 로봇 엔지니어 케이시 윈스턴은, 자신의 눈앞에 있는 기열을 보며 꿈이라도 꾸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가 지금까지 나이츠 개발을 하면서 사용한 모든 기술의 근원을 따라가면, 그 끝에는 항상 김기열교수의 발자취가 있었기 때문에.
기열은 그의 영웅이었다.
원하는 바를 어떻게 구현해야 할지 고민될 때마다 언제나 바른 답과 아이디어를 제시해주던 매뉴얼 속의 영웅.
세계 최초로 ‘실전용 거대 로봇’을 완성해낸 기열의 연구 자료는 이미 전 세계의 로봇 공학자들 사이에서 일종의 바이블처럼 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바로 그 전설의 로봇 제작자가 바로 자신의 앞에 서서 자신이 만든 개조 플랜을 손에 들고 있었고.
설계도를 든 기열은 주변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무시무시한 집중력으로 손에 든 청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설계도에서 눈을 떼며 윈스턴을 향해 말했다.
“잘 짰군요. 이 정도면 8세대 나이츠의 스펙에 비벼볼 만 하겠습니다.”
“아! 정말입니까?! 그럼 정말 다행···.”
“하지만 이 정도론 부족합니다. 파일럿의 신체 스펙과 반사 능력이 부족한 만큼, 동일한 스펙으로는 제대로 된 경기가 이루어지기 힘들 테니까요.”
기열이 지적한 부분에 대해서는 윈스턴도 잘 알고 있었다.
해결법이 없어 그대로 진행했을 뿐, 나이가 들어 신체 능력이 떨어진 퍼스티스트 멤버들이 전년도 우승팀인 마션즈와 ‘대등한 수준’의 경기를 펼치기 위해서는 8세대 나이츠를 뛰어넘는, 9세대 수준의 스펙을 가진 나이츠가 필요하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었기에.
그러나 이미 8세대 나이츠조차도 가질 수 있는 스펙의 한계를 쥐어짜듯 만들어진 기체였기에, 아무리 개조작업을 한다 해도 1세대 나이츠들이 8세대 나이츠들의 스펙을 뛰어넘게 개조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윈스턴은 존경하는 영웅의 앞에서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
“이미 1세대 기체의 설계를 바탕으로 8세대 수준의 움직임을 구현하는 것 자체가 프레임과 구동부에 엄청난 부하를 줍니다.
지금보다 더 강력한 모터를 사용하면 메인 프레임이 뒤틀릴 수도 있고요.”
“그야 기존 구조를 그대로 사용하면 그렇게 되겠죠. 하지만 ‘개조’가 아닌 ‘재탄생’이 된다면 어떨까요?”
“재탄생이라면···.”
“이건 저희 연구소에서 개발 중인 최신형 모터의 스펙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양산을 준비 중인 전고체 배터리의 출력 데이터고요. 8세대 나이츠까지는 아직 플라이휠을 사용하고 있는 거로 아는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나이츠 수준의 무게를 움직이는데 필요한 동력을 그토록 빠르게 저장할 수 있는 기술은 그것뿐이니까요.”
기열이 언급한 플라이 휠이란, 말 그대로 엄청나게 무거운 회전축을 고속으로 회전시켜 에너지를 저장하는 기술이었다.
그것은 기체의 무게가 엄청나게 늘어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반대로 단 2초 만에 풀 충전이 가능하다는 강점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기열은 1세대 나이츠를 개발할 때 콜로세움 바닥에서 지속적으로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도록 설계했고, 그 구조는 지금까지 이어져 8세대 나이츠의 메인 동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기열은 자신이 스스로 만든 기술을 구세대의 유물 취급하며 윈스턴에게 새로운 기술의 사용을 제안하고 있었다.
“만약 새 시스템으로 동력계를 완전히 교체하면 플라이 휠에 들어가는 중량을 1/3이하로 줄일 수 있습니다. 그럼 전체 중량이 줄어드니 프레임에 요구되는 강도도 줄어들고, 결과적으로 전보다 훨씬 빠르고 가벼운 나이츠를 완성할 수 있겠죠.
개조로는 안 됩니다.
아예 바닥부터 새로 만든다는 발상으로 가보죠.”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데이터가 전부 무용지물이 될 텐데요? 엄청난 비용이 들 겁니다. 과거 1세대 나이츠를 만들었을 때처럼 수없이 많은 로봇을 만들고 부숴야 할 거고요.”
1세대를 개발할 때와는 달랐다.
그때는 세계 어디에도 실물 크기의 로봇을 만드는 기술이 없었기에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서 시행착오를 해야했지만, 지금은 이미 잘 굴러가고 있는 기술을 보유한 상태였으니까.
그로 인해 쌓인 모든 데이터와 노하우를 버리고 바닥부터 새로 설계된 기체를 만들고 싶다는 기열의 제안은, 윈스턴의 귀에 너무나도 터무니 없는 제안처럼 들렸다.
그러나 기열은 마치 이미 약속이라도 받은 것 같은 말투로 윈스턴을 향해 말했다.
“로봇을 로켓에 태워서 우주로 날리겠다는 마당에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기체 질량이 줄어들면 우주에서의 동작 제어에 드는 에너지도 훨씬 줄어들겠죠. PTW의 CCO 이상혁 씨도 반드시 이 제안에 동의할 겁니다.”
“그럴 리가요. 말씀하신 대로 9세대 나이츠를 개발하려면 1, 2조 수준의 금액으로는 어림도 없을 겁니다. 게다가 그렇게 만들어진 나이츠 자체도 경량화로 인한 성능 상승 외에는 별다른 강점이 없을 거고요. 안 그래도 빠른 로봇을 조금 더 빠르게 만들겠다고 수십조를 태우는 미친 인간은···.”
그러나 기열은 윈스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를 무시한 채 전화기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리고는 윈스턴이 태어나서 들어본 대화 중 가장 황당하고 어이없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 상혁 씨? 저 기열입니다. 예. 이번 개막전을 위해 나이츠의 기본 설계를 싹 갈아엎으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예? 좋다고요? 아직 예산은 말씀 안 드렸는데요? 예? 10조든 20조든 사내 유보금 다 털어도 괜찮으니까 마음대로 하라고요? 알겠습니다. 사실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죠.”
그렇게 대화를 마친 기열은 마치 미친놈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윈스턴을 향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자, 그럼 지금부터 이 고물들을 차세대 기체로 ‘새로’ 만들어볼까요?”
***
오로지 멋진 개막전, 단 한 경기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퍼스티스트 멤버들이 육체적인 비명을 지르고, 나이츠 개발팀의 연구원들이 정신적인 비명을 지르는 사이, PTW의 KOH 개발팀 역시 고통을 분담하고 있었다.
기열에 의해 갑작스레 차세대기의 개발이 결정되면서, 기존의 KOH에 적용된 물리적 피드백 데이터를 완전히 업데이트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실제 기체의 움직임에서 물리적 피드백 데이터를 따올 수 있었던 이전과는 다르게, 기체 개발과 프로그램 수정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는 이번 개발에서는 모든 물리적 피드백의 양을 오로지 시뮬레이션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었다.
새 기체의 개선된 스펙으로 기체를 회전시킬 때 파일럿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벼워진 기체로 기존 나이츠의 공격을 받았을 때 얼마만큼의 물리적 충격이 가해져야 하는지.
온갖 데이터를 시뮬레이션하며 새 데이터를 입력하는 과정에서, KOH의 개발자들은 자신들이 지금까지 나이츠의 세대 구분을 완전히 잘못 하고 있던 게 아닐까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8세대와 9세대가 가지는 스펙 차이를 생각하면, 이전에 이루어진 세대 구분은 아예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기에.
“그러니까 사실은 8세대 나이츠가 1.8 세대쯤 되는 거고 9세대 나이츠가 진정한 2세대 나이츠인 거네.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는데?”
강도 높은 야근 속에 자조 섞인 농담을 하면서도, 개발팀의 눈빛은 누구 한 명 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9세대 나이츠의 동력시스템과 구동 계열이 완전히 바뀌면서 생겨난 스펙상의 여유.
그것은 물리적 한계 때문에 기존의 나이츠에 적용하지 못했던 수많은 아이디어를 재검토 할 수 있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예전에 개발은 완료했는데 너무 무겁다고 업데이트 못 했던 멀티 타게팅 장거리 미사일 포드. 지금 스펙이면 장착할 수 있지 않아?”
“그러고 보니 모터 출력도 늘었으니 6중 복합 매트릭스 실드도 쓸 수 있겠는데?”
물론 기열의 계획대로 새로운 나이츠가 예상한 스펙대로 동작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KOH의 개발자들은 당연히 그 스펙대로 기체가 완성될 것이라고 믿는 것처럼, 미친 듯이 컨셉으로만 남겨 놓았던 수많은 장비 데이터를 꺼내와 검토하기 시작했다.
기열의 손에 ‘나이츠’가 완전히 새로 태어나고 있는 것처럼, 8년이 지난 게임인 KOH를 완전히 새로운 게임으로 환골탈태시키기 위해.
그리고 그런 밸런스 팀의 움직임은, 마치 마른 숲속에 던져진 작은 불꽃처럼 순식간에 다른 개발팀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기왕 KOH 자체를 크게 업그레이드 하는 거니, 싱글 미션도 2부 형식으로 추가로 개발하죠.
새로운 스토리, 새로운 캐릭터. 그리고 새로운 나이츠.
기존과 비슷하면서 아예 새 게임을 하는 느낌으로, 8년이 지난 게임을 다시 꺼내서 플레이할 수 있도록.”
“그건 아예 게임을 새로 만드는 수준이 될지도 모르는데? 확장팩으로 만들어서 새로 팔겠다는 것도 아니고, 기존 게임을 업데이트하는데 그 정도 폼을 들이는 건···.”
남은 시간도 짧고, 개발품은 너무 많이 들며, 심지어 돈도 안 되는 비효율의 극치라 부를 수 있는 작업.
“그건 진짜 정신 나간 생각이네.”
그러나 8년 전 즐겁게 즐겼던 게임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다시 한번 즐기게 하고 싶다는 밸런스팀의 제안은, 게임에 미친 PTW의 개발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타입의, 말 그대로 ‘정신 나간 아이디어’였다.
“당장 하자.”
그것은 ‘파일럿’ ‘나이츠’ ‘게임 본편’이라는, KOH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의 초 대규모 업데이트가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 484. 리버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