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3. 어셈블 >
“와, 진짜 오랜만이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요?”
오다는 자신을 향해 반갑게 인사하는 현희를 보며 미소지었다.
“현희 씨는 하나도 안 변했네요. 여전히 아름다우신데요?”
“에이, 화장해서 그렇지 사실 요즘은 거울 볼 때마다 나이 먹은 게 실감되고 그래요.”
“다들 여기 모여있었네. 오랜만입니다.”
박현민의 즈라드와 함께 퍼스티스트에서 가장 인기가 많던 기체인 RebirthDP의 파일럿, 마성준이 인사를 받은 두 사람은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했다.
그렇게 하나 둘 씩 퍼스티스트 멤버들이 모여가는 가운데, 오다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표정으로 연신 문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다 씨? 누굴 그렇게 기다리세요? 혹시···.”
“아마 현희 씨가 생각하는 사람이 맞을 겁니다. 물론 지금도 프로팀에서 활약중인 사람이니 참가는 어려울 거라고 생각하지만요.”
오다가 말하는 사람은 퍼스티스트 해체 직후 테슬라 마션즈에 스카우트 되어 지금도 현역으로 뛰고 있는 유일한 파일럿.
박현민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개막전 상대가 테슬라 마션즈인데 마션즈 주전 선수를 데려올 순 없었겠죠. 구단주가 허락할 리도 없을 거고요.”
“역시 그렇죠? 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해하던 오다는 그의 뒤통수에서 들려온 목소리를 듣고 그대로 동작을 멈췄다.
매년 TV에서 한 시즌도 놓치지 않고 응원했던 과거의 동료.
지금은 슈퍼스타가 되어 스피커로만 들을 수 있었던 그의 목소리가, 바로 자신의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늦었습니다. 제가 마지막인가요?”
“현민 씨!?!”
“진짜 박현민?! 어떻게?!”
모여있는 멤버들이 일제히 일어나 놀란 표정을 하는 것을 보며, 현민은 과거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모두가 모여 함께 싸우고, 함께 밥을 먹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고, 때로는 울기도 했던 나날들.
그때의 추억을 그대로 보는 듯한 기분에 현민은 자신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지는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다른 데도 아니고 퍼스티스트 멤버들이 다시 뭉친다는데 제가 빠질 순 없죠. 다들 조종실력이 엉망일텐데 저까지 빠지면 어떻게 이기겠어요? 그것도 현역 최강이라는 작년 시즌 우승팀을 상대로?”
순간, 현민의 말 속에 담긴 ‘이긴다’라는 단어를 들은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과거의 즐거운 추억 때문에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어 제안을 수락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의 자신들로는 제대로 된 경기를 펼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에.
그러자 순식간에 침울해진 분위기를 알아차린 현민이 일부러 호탕하게 웃으며 모두를 격려했다.
“뭐야, 설마 진짜로 이길 생각 없이 모인 겁니까? 에이! 굳이 쫄 거 없다니까요? 게다가 저쪽은 아주 큰 약점을 안고 있지 않습니까!”
“현역 최강팀이 가진 약점이요?”
“지금 저쪽 팀엔 에이스 중의 에이스, 저 박현민이 없다는 거요.”
물론 박현민이 에이스였던 적도 있긴 했지만, 지금의 에이스는 그가 아닌 박재원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호탕하게 자신을 마션즈의 에이스라고 칭하는 현민의 모습은, 모두의 긴장감을 풀어주기에 충분한 따스함을 품고 있었다.
“그렇네! 즈라드 없는 마션즈라니, 그건 팥 없는 찐빵이지!”
“게다가 현민 씨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잖아요? 상대 팀원들의 습관이나 기체의 약점도 전부 알고 있을 거고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데 당연히 승산이 있겠죠!”
모두가 한마디씩 거들자, 순식간에 훈훈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뒤이어 등장한 익숙한 얼굴의 남자는, 그런 훈훈한 분위기를 한번에 날려버릴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와, 진짜 실화인가? 이 멤버들을 데리고 개막전에서 우승하라고?”
말 한마디로 모두가 힘들게 만들어낸 분위기를 단번에 깨트린 남자.
그는 PTW의 마스터 클래스 개발자이자 나이츠 개발 과정에서 시범 파일럿을 맡았던 PTW의 ‘소드마스터’, 칼 구스타프였다.
“구스타프 씨!”
“도와주러 오신 겁니까?!”
모두가 반갑게 맞아주는 모습을 보면서도, 구스타프는 찡그린 인상을 펴지 않았다.
생각없이 추억놀이에 빠져 있는 퍼스티스트 멤버들과는 반대로, 그에게는 상혁이 내린 ‘특명’이 주어져 있었기 때문에.
상혁과 했던 대화를 떠올리며, 구스타프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
“퍼스티스트 멤버들을 개막전에 내보내고 싶으시다고요!?”
마치 뭔 개소리를 하는 것이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구스타프를 보며, 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겼으면 좋겠습니다.”
“가상전입니까?”
“실전입니다.”
구스타프는 기가 찬 듯 상혁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격앙된 말투로 상혁의 희망이 왜 실현 불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초창기 기체라면 몰라도, 8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나이츠의 평균 성능이 무시무시하게 올라갔습니다. 그에 따라 파일럿에게 가해지는 신체 부담도 엄청나게 세졌고요. 그래서 시즌이 지날수록 프로 파일럿의 평균 연령이 낮아지고 있지 않습니까?”
“압니다.”
“그런데도 이제는 일반인이 되어버린 파일럿들을 끌어모아 팀을 만들겠다고요? 그것도 모자라 그 팀으로 전 시즌 우승팀을 상대로 이기고 싶다고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마 10분만 탑승해도 못 버티고 토할걸요?”
투덜대는 구스타프에게 상혁이 내민 것은 여러 장의 사진 뭉치였다.
예전 퍼스티스트 멤버들의 최신 근황이 찍혀 있는 사진 뭉치.
그것을 자세히 살펴본 구스타프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바로 멤버들 중 그 누구 한 명도 살찐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이건···.”
“맞아요. 잘 다져진 팔 근육.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들은 그들이 비록 현역에서 은퇴하기는 했어도, KOH를 계속 플레이하고 있었다는 걸 의미하죠. 실제로 현민 씨는 즈라드 Mk-6를 타고 현역 파일럿으로 뛰고 있기도 하고요.”
“나머지 멤버들의 티어는요?”
“대부분은 플레티넘이지만 다이아도 몇 명 있습니다. 그들의 평균 플레이 타임을 생각하면 괜찮은 승률이죠. 다만···.”
“다만?”
“당연한 이야기지만 현민 씨를 제외하면 그들이 다뤘던 마지막 현실 기체는 1세대 나이츠가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지금은 8세대 나이츠가 주류를 이루고 있죠.”
“그게 이길 수 없다는 말 아닙니까? 상대는 최강의 프로팀이라고요?”
“단순히 예전 기체에 태워서 경기를 치른다면 그렇게 되겠죠. 하지만 1세대 기체를 8세대 스펙으로 개장한 신형 기체를 타게 한다면···.”
구스타프가 아는 상혁은, 절대로 승산 없는 도박에 베팅할 사람이 아니었기에, 구스타프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상혁이 자신을 찾아왔단 이야기는, 못해도 2할 이상의 승률이 확보된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기에.
그런 구스타를 본 상혁은 씨익 웃으며 들고 있던 타블렛을 건네주었다.
거기엔 8세대 스펙으로 개장된 퍼스티스트 멤버들의 나이츠가 테슬라 마션즈의 선수들과 가상으로 벌인 싸움의 시뮬레이션 데이터가 띄워져 있었다.
“절 찾아오셨길래 적어도 2할은 될 줄 알았는데, 고작 1할의 승리 가능성뿐이군요. 그것도 모든 조건이 다 맞아떨어진 상태에서만 가능한 승리요.”
“그래서 찾아온 겁니다. 그 1할의 가능성을, 2할, 아니 3할의 가능성으로 늘려달라는 부탁을 하려고요.”
상혁의 부탁을 들은 구스타프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상혁에게 말했다.
“젠장, 매번 사람이 혹할만한 부탁만 하니까 지옥길이 빤히 보이는데도 거절할 수가 없다니까! 미리 말해두지만, 훈련은 엄청 빡셀 겁니다. 단 한 명이라도 낙오하면 절대 통과할 수 없는 길이니까요.”
“다들 각오하고 있을 겁니다.”
구스타프는 눈앞에 모인 퍼스티스트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세계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들로 꼽혔지만, 지금은 그냥저냥 게임 좀 하는 일반인이 되어버린 멤버들을.
그들은 아직도 과거의 즐거운 추억만을 떠올리며 이번 경험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 믿고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구스타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런 멤버들의 망상을 깨부수는 일이었다.
“예전 퍼스티스트 멤버일 때 훈련 받았던 정도로 상대를 이길 수 있을 거로 생각한다면 그냥 돌아가 주십시오. 요즘은 프로 파일럿들도 개인 트레이너가 붙어 있을 정도로, 나이츠 조종의 난이도가 빡세졌으니까.”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유일한 현역 멤버인 현민에게로 쏠렸고, 현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구스타프의 말이 맞다고 인정했다.
“나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요즘은 나이츠 조종 훈련 하는 식나보다 근육 트레이닝 받는 시간이 길어요. 떨어지는 피지컬을 보충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
현민의 말이 끝나자마자 구스타프가 그의 말을 이어받았다.
“그 말대로, 여러분이 만약 진짜로 개막전에 참가하고 싶다면, 여러분은 지옥 같은 트레이닝을 버텨내야 할 겁니다. 땀이 비 오르듯 흐르다 못해 피부로 숨도 쉬지 못할 지경이 되고,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 밤에 잠도 자지 못할 정도의 훈련을.”
구스타프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현재 나이츠 리그에 몸담은 프로 파일럿들은, 말 그대로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과 피지컬을 지닌 선수들이었기에.
그런 선수들 중에서도 가장 강하다는 것을 입증한 전 시즌 우승팀에게 도전하기 위해서는, 그 선수들의 몇 배에 달하는 노력을 쏟아부어야만 했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운 훈련을 버텨낸 끝에 얻을 수 있는 것은 단 10%안 되는 작은 승리의 가능성.
그것은 단순히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 지급해야 하는 대가로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나이츠 리그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지금의 리그는 8년 전 여러분이 나이츠의 조종간을 잡았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리그이니까요. 그러니 지금 부탁드리죠. 지옥불 위를 건널 각오가 없다면, 제발 돌아가 달라고.”
‘추억은 추억일 때가 가장 아름다운 법이니까.’
구스타프는 마지막 말을 혼자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퍼스티스트 멤버들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기에.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이곳에 모인 퍼스티스트 멤버들은 모두가 KOH리그의 열렬한 팬이었다.
그렇기에 가끔은 직접 대전까지 본선을 구경하러 오기도 하고, 자신들을 알아보는 팬들에게 싸인을 해 주기도 하면서.
그렇게 매년 발전하는 리그를 보며 그들이 느낀 것은, 다름 아닌 세월의 벽이었다.
점점 진화하는 기술들, 더욱 빨라진 나이츠의 움직임.
눈으로 훑기도 어려울 정도의 화려한 공격들과 초창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진 전략들.
그 거대한 ‘변화’ 앞에서, 그들은 스스로 은퇴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은퇴 당할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구스타프는 어느새 말이 없어진 멤버들을 바라보며, 조금은 쓸쓸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 역시 과거의 추억을 그리워하는 남자였기에.
그리고 그 순간, 구스타프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한마디가 들려왔다.
“할게요.”
침묵을 깨는 목소리에 고개를 든 구스타프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오다 츠요시의 모습이었다.
“할게요. 아니, 할 겁니다. 그리고 아마 여기 있는 멤버들 중 누구도 지금 이 기회를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는 오다의 목소리는, 자신이 아는 퍼스티스트 멤버들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옥훈련이요? 웃기지 마십쇼. 저흰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게임을 하면서 단 하루 만에 수십만 명을 제치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태어나서 처음 보는 거대 로봇에 탄 채 목숨을 걸고 싸워달라는 제안을 수락한 사람들이고요!”
“맞아! 심지어 그때는 아예 안전성도 검증 안 되는 머신을 타야 했다고요!”
“바로 앞에서 생전 처음 보는 로봇이 10톤이 넘는 양날 도끼로 대가리를 찍으려 할 때의 공포가 뭔지 아십니까?!”
“맞아! 나이츠 리그를 무시하지 말라고요? 오히려 저희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구스타프 씨. 팀 퍼스티스트를 무시하지 마십시오. 저희는 지금의 프로 선수들보다 훨씬 원시적인 기체를 타고도 전 세계를 누비며 목숨걸고 싸웠던 선구자들이란 말입니다!”
“그때는 조종 기술도 연구가 안 돼서 아예 스킬을 만들어서 써야 했다고!”
“맞아!”
마성준, 이정열, 최지연, 그리고 이다희까지.
모두가 한마음으로 각오를 불태우는 모습을 본 구스타프의 눈에 한줄기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눈에 비친 퍼스티스트 멤버들의 모습이, 태어나서 처음 보는 로봇을 앞에 두고 의지를 불태우던 그들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서.
구스타프는 미소를 지으며 멤버들에게 말했다.
“좋습니다. 하지만 알아두십쇼. 여러분들이 그 모든 훈련을 마치더라도, 저희에게 주어진 승산은 2할이 안 된다는 걸.”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스승님!”
스승님.
과거 자신이 그들에게 나이츠 조종의 기초를 가르쳐 주었을 때 불렸던 그리운 호칭을 들으며, 구스타프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리고는 8년 전의 기적을 다시 한 번 만들어달라고 부탁하던 상혁의 얼굴을 떠올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젠장, 매번 사람이 혹할만한 부탁만 하니까 지옥 길이 빤히 보이는데도 거절할 수가 없다니까.’
< 483. 어셈블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