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0. 미지의 신작 >
게임의 개발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PTW 직원들이 AWC를 플레이하는 방식은 자연스럽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플레이하는 월드를 AI와 함께 수정하며 월드의 문제점을 수정하는 대신, AI가 제공하는 세계를 문자 그대로 즐기게 된 것이다.
그것은 AWC의 초창기 시절을 생각하면 정말 터무니없는 변화라 할 수 있었는데, 초창기 AWC는 우주 전함 내부에 클래식 피아노를 배치해놓는다던가 중세 판타지 배경의 주점 안에 마스터 치프 같은 SF 스타일 갑옷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는 등 한눈에 보기에도 제대로 완성된 게임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이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수만 명의 PTW 직원들이 온갖 종류의 세계를 창조하는 방법을 AI에게 학습시키면서, 그러한 눈에 띄는 버그들은 빠르게 사라져갔고, 그 덕에 현재 완성된 AWC의 인공지능은 거의 완벽에 가까운 수준으로 유저가 원하는 월드를 만들 수 있었다.
게임이 완성에 다다른 지금에서는, 개발자가 터치할 부분을 눈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들 정도로.
애당초 이 AWC라는 게임의 가장 핵심 개발 과정이 개발자가 매의 눈으로 월드의 오류를 찾아내어 AI에게 수정하게 하는 것이므로, 딱히 수정할 부분을 찾지 못한 경우 개발자들은 자연스레 게임 플레이를 즐기게 되어 있었다.
뭔가 또 어색한 부분이나 수정해야 할 만한 부분이 나올 때까지, 게이머의 기분으로 즐겁게 AI가 자신이 주문에 맞춰 창조한 월드를 즐기는 것.
그것이 PTW 직원들이 게임 발매 직전의 시기를 보내는 방법이었다.
다른 회사였다면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정도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어야겠지만, 여긴 PTW니까.
그런 상황에서, 가장 바빠야 할 발매 직전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오히려 할 일이 없어진 직원들이 게임의 오픈 홍보에 관심을 끌게 된 것 역시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자신들이 만든 게임은 너무나도 멋진 게임이었고, 그 멋진 게임을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선보이고 싶은 것이 모두의 공통된 마음이었기 때문에.
게다가 이번 프로젝트는 PTW의 프로젝트치고도 역대 최고급으로 긴 개발 기간과 인력이 투입된 프로젝트였기에, 역대 최고의 오픈 이벤트를 직원들이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떻게 홍보를 진행하게 될까.
매일 가상공간과 오프라인 공간에서 직원들이 대화를 나누게 될 때마다, 가장 핫한 토픽이 바로 ‘게임의 홍보’에 대한 내용이었기에, 직원들은 틈날 때마다 친한 동료들과 함께 다양한 의견을 교환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역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의견은 ‘6차 NE 컨벤션’이 열릴 것이란 예상이었다.
분명 상혁이 5차 NE 컨벤션을 마지막으로 자신이 주관하는 NE 컨벤션은 두 번 다시 열지 않겠다고 선언했지만, 그로부터 몇 년의 시간이 흘렀으니까.
그러나 상혁의 마음이 변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일부 직원들이 상혁을 찾아가 6차 NE컨벤션의 개최 여부에 관해 묻자, 상혁은 단호한 어조로 그들의 의견을 부정했다.
어째서 6차 NE 컨벤션을 열지 않으려는 것인지, 그 이유에 대한 설명과 함께.
“여러분이 오해하고 계신 게 하나 있는데, 역대 NE 컨벤션은 저희가 개발한 신형 하드웨어나 기술을 홍보하기 위한 행사였어요.
1차 NE 컨벤션에서는 코넥트가, 2차 NE 컨벤션에서는 커뮤니케이션 엔진이, 3차 NE컨벤션에서는 딥 다이버가, 그리고 4차 NE 컨벤션에서는 PRD가 주인공이었죠.
5차 NE 컨벤션에서는 실물 크기의 거대 로봇인 나이츠가 주인공이었고요.
그리고 그 모든 행사는, 단순히 홍보를 위해서 진행한 행사가 아니었죠.”
“홍보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겁니까?”
“당시 공개했던 것들 모두, 그때까지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개념을 품고 있는 물건들이었습니다.
처음 보는 물건을 세상에 공개하는 거니,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가장 최고의 경험을 선사할 수 있을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죠.
기본적으로 인간이란 존재는 자신이 전혀 모르는 것에 대해서 동경이나 열망을 가지지 않아요.
일단 가지고 싶고 하고 싶게 만들려면 자신이 눈앞에 놓인 물건이 어떤 물건인지 알아야 하죠.
NE 컨벤션은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하는 겁니다.
‘이 새로운 기기는 이런 형태로 사용하는 겁니다.’라는, 일종의 데몬스트레이션 행사인 거죠.”
“그럼 AWC의 경우는 더욱 더 그런 가이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아마도 일반적인 게이머라면 이게 어떤 게임인지 이해조차 하기 어려울 만한 게임이니까요.”
“문제는 그겁니다.
기본적으로 데몬스트레이션이란 건 최적의 경험을 전달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계산된 각본에 의해 진행하는 거죠.
하지만 개인마다 게임을 즐기는 방식이 천차만별인 AWC의 경우, 그런 형태의 짜여진 각본은 오히려 게이머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선입견을 품게 할 수 있어요.
저희가 만든 것은 세상의 어떤 요리도 만들어 낼 수 있는 만능 조리기구인데, 사람들은 저희가 행사에서 공개한 비프 웰링턴만 계속 먹게 되는 거죠.
그리고 그건 AWC의 올바른 사용법이 아니고요.
그러니 AWC를 위해서는 NE 컨벤션을 따로 개최하지 않을 겁니다.
예전처럼 저희가 비정기적으로 오프라인 행사를 했을 때라면 몰라도, 지금은 1년 365일 오픈되어 돌아가는 PTW 파크가 있고, 매년 8월마다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방문하는 나이츠 리그의 월드 파이널이 대전에서 열리니까요.”
“그럼 어떤 방식으로 AWC라는 독특한 게임을 홍보하실 생각입니까?
말씀하신 대로라면 저희가 공개하는 어떤 데모도 유저에게 선입견을 품게 하기에 충분할 것 같은데, 그럼 데모 공개 없이 게임을 바로 오픈하실 건가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
상혁은 고개를 저었다.
“뭐, 저도 나름대로 준비하고 있는 게 있으니까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여러분께 부탁해야 할 것도 있고요.”
“부탁이요?”
“예. 이번 AWC의 홍보엔, 개발에 참여한 여러분 모두의 힘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상혁의 입가엔,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이제는 월드컵에 비견되는 국제 스포츠로 발전한 ‘나이츠 리그’는, 풀 다이브 VR 게임에 바탕을 두고 있는 스포츠답게 대부분의 지역 리그가 가상 스타디움에서 펼쳐지는 게이밍 리그였다.
그러나 하루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간을 PRD에 매달려 지내는 KOH 팬들도, 1년에 한 번은 몸에 달라붙는 PRS를 벗고 평상복을 입은 채 행복한 표정으로 집을 떠나곤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나이츠 리그의 월드 파이널이 개최되는 7월이었다.
나이츠 리그가 완전히 글로벌 스포츠로 자리잡은 지금은, 자신의 국가를 대표하는 나이츠 파일럿들이 고국을 떠나 한국에서 다른 국가 리그의 선수들과 싸우는 월드 파이널을 보기 위해, 1년에 수백만이 넘는 관중들이 대한민국 대전을 찾고 있었다.
굳이 경기장 티켓을 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월드 파이널 기간은 볼거리가 넘처 흐르는 모든 게이머의 축제나 다름없는 기간이었기 때문에.
오로지 경기 말고는 볼거리가 없는 다른 프로스포츠와는 다르게, 나이츠 리그의 월드 파이널은 정말 즐길 거리가 많은 행사였다.
그중 대표적인 번외 행사가 바로 ‘전용기 쇼케이스’이다.
매년 나이츠 리그를 통해 배출되는 월드 파이널 우승팀 멤버들은 PTW로부터 자신만을 위해 만들어진 전용기를 주문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는다.
그렇게 권리를 부여받은 파일럿들은 결승전이 끝난 이후 몇 달간 대전의 PTW 파크 지하에 있는 ‘팩토리’에 머물며 세계 최고의 로봇 전문가들과 함께 자신이 탈 전용기의 설계작업에 참여하게 된다.
외형부터 컬러, 특수한 전용 무장까지.
선수들 개개인의 전투 취향이 천차만별인 만큼 전용기의 바리에이션도 무한에 가까웠기에, 각 선수들은 평소에 범용 기체를 사용하며 불만스러웠던 부분이라던가 자신이 해보고 싶었지만 지원하지 않는 기능이기에 장착하지 못했던 수많은 기능의 커스터마이징을 수행한다.
그리고 그렇게 선수의 요청 사항이 접수되면, 다음은 개발팀에서 해당 기체를 가상의 기체로 구현하여 수없이 많은 테스트를 거치게 한다.
PTW에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프로 나이츠 리그 선수로 뛰어도 될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지닌 나이츠 파일럿들이 여럿 있기 때문에, 전용기 제작에 참가한 파일럿은 그런 PTW 소속 테스트 파일럿들과 싸우며 전투 데이터를 쌓아 나가게 된다.
그렇게 수없이 벌어지는 연속 전투의 목적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파일럿이 자신이 주문한 전용기의 조작과 전술에 익숙해지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밸런스 팀이 전투 데이터를 통해 해당 전용기가 오버 밸런스 기체가 되지 않도록 조정하는 것.
그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쳐 완성된 전용기는 매년 7월, 나이츠 리그의 월드 파이널 기간에 대전에 있는 PTW 파크에서 쇼케이스를 통해 공개되었다.
전년도 우승팀의 정당한 권리인 ‘본선 시드’를 부여받은 상태로.
그 말은 매년 공개되는 전용기가 하나도 빠짐없이 올해 월드 파이널의 본선에 등장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월드 파이널에 참가하는 수많은 프로팀들은 대전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신형 전용기에 대한 정보를 필사적으로 수집하여 경기 전략을 수정해야 했다.
그리고 전 세계에 있는 수많은 ‘나이츠 리그’ 전문가들도, 새로 공개된 전용기의 정보를 분석하여 시청자들에게 장황한 설명을 해야 했고.
그것은 자연스럽게 매년 펼쳐지는 월드 파이널이 한 달이란 긴 기간 동안 매 경기 새로운 느낌을 줄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고 있었다.
시즌 내내 완벽한 강함을 보여주는 강팀이 있다 하더라도, 새로 공개된 전용기가 그에 대한 극 카운터 성향을 가지고 있는 기기라면 미리 세운 전략이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새로 공개된 전용기의 참전으로 인한 전황 변화에 대한 예측과 분석, 그리고 그 모든 이변 속에서 ‘누가 우승자가 될 것인가’를 예상하는 것은 나이츠 리그만이 가진 고유한 특성이라 할 수 있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실력 좋은 선수들이 모두 모여있는 프로팀이라도, 무명 팀의 빈틈없는 카운터 전략으로 예선에서 허무하게 탈락할 수 있는 것이 나이츠 리그였기 때문에.
게다가 나이츠 리그는 각국 선수들의 구성 역시 다른 글로벌 스포츠와는 다른 구성을 하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자국 국적을 가진 선수들끼리 팀을 구성하여 국가를 대표하여 싸우는 월드컵이나 올림픽과는 다르게, 나이츠 리그의 ‘프로팀’은 철저하게 상업용 구단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나이츠 리그의 월드 파이널은 굳이 비유하자면 월드컵 보다는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전 세계 각국에서 펼쳐지는 개별 리그의 우승팀들이 모여, 세계 최고의 클럽이 어디인지를 겨루는 경기.
미국에 거주하는 나이츠 리그의 팬, 빈스 본 역시 그런 나이츠 리그의 매력에 푹 빠진 팬 중의 한 명이었다.
다른 많은 PTW 팬들이 그러고 있는 것처럼, 원래 있던 자신의 직업을 버리고 프로 YAS 플레이어로 전향한 그는 하루 24시간 중 평균 12시간 정도를 YAS를 플레이하며 게임 내 재화를 버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 시간은 PRD에 매달린 채로 가상공간에 있는 그의 100평이 넘는 저택 거실에서 편안한 쇼파에 앉아 나이츠 리그를 시청하는 것을 취미로 하는 플레이어였다.
그런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현실에서의 삶이 주는 스트레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는데, 실제 그가 PRD를 놓고 생활하는 공간은 더럽고 퀴퀴한 낡은 아파트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PRD에 접속하는 순간, 그가 사는 공간은 마치 꿈에서나 볼 수 있는 편안한 저택이 되었고, YAS에 접속할 때마다 그는 아름다운 가상의 자연이 주는 심신의 휴식을 마음껏 즐기며 여유롭게 낚시를 즐기거나 자신의 집에 딸린 작은 정원을 가꾸는 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심지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음식의 맛과 질감을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구현할 수 있는 TRD가 구현되면서, 그는 자신의 좁은 집에 있는 냉장고까지 버려버렸다.
어차피 푸드 카트리지만 제때제때 교환해주면 물이든 음료든 가상공간에서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데다가, 조금 더 고급형의 패키지를 사용하면 가상공간에서 알코올과 탄산이 포함된 술까지 먹을 수 있었으니까.
물론 그것을 위해서는 YAS에 접속하여 재료가 되는 작물이나 조미료를 다른 플레이어에게 구매해서 조리하거나, 혹은 TRD를 지원하는 PTW의 다른 게임에 접속해 그 안에서 제공되는 음식을 사 먹을 필요가 있었지만, 그에게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못했다.
현실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들어가는 노력보다, 가상공간에서 맛있는 음식을 구하기 위한 노력이 훨씬 적게 들었기 때문에.
그렇기에 가상공간에서의 삶을 제외하면, 빈스의 삶은 극도로 정제된 생활 패턴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매일 아침마다 마치 해먹에 매달려 자는 것처럼 PRD안에서 와이어에 고정된 채 둥둥 떠 있는 상태로 잠에서 깨어나면, 가상공간 안에서 PRD의 관리 메뉴를 호출하여 푸드 카트리지의 상태를 확인한다.
그리고는 PRD를 끄고 몸에 달린 와이어를 해제한 뒤, 화장실에 가서 양치질하고 몸에 쌓인 배설물을 처리한다.
이 ‘배설물 처리’는 식사부터 수면까지 모든 것을 지원하는 PRD에서 유일하게 처리하지 못하는 문제 중의 하나였지만, 그건 빈스에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일부 게이머들은 최대한 접속을 길게 유지하기 위해 일부 기업에서 판매하고 있는 배설물 처리 솔루션을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그는 적어도 ‘똥싸는 것’만큼은 클래식한 스타일로 처리하는 것이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배설물을 비우고 나면, 그의 집에 갈 린 작은 화장실에서 샤워를하고 몸을 말린다.
그리고는 입고 있던 PRS를 벗어 세탁 업체에서 받은 박스에 넣은 뒤, 옆에 있는 다른 박스에서 세탁이 완료된 PRS를 꺼내 갈아입었다.
한 업체가 시작한 이 ‘세탁 서비스’는 공전절후의 히트를 기록하며 전국의 수많은 PRD 이용자들이 애용하는 서비스가 되었는데, 한 달에 4만 5천 원 정도의 비용만 내면 매일 아침 각 고객의 집으로 찾아가 그들이 종일 입었던 PRS를 회수해 대신 세탁해주는 서비스였다.
그것도 일반적인 세탁기가 아닌 특수 공정을 거친 특별한 세탁 방식으로.
기본적으로 내부에 수많은 기어와 와이어가 내장된 특수 복장인 PRS는, 세탁기에서 돌리는 것만으로는 내부에 낀 때까지 완벽하게 제거하기 어려웠기에, 그런 특수 서비스는 곧 전 세계 유저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으며 글로벌 서비스로 발전할 수 있었다.
유저 역시 종일 피부에 닿는 PRS란 물건의 특성상, 최대한 깨끗한 것을 입고 싶어 하는 특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PRS를 새것으로 갈아입고 나면, 남은 것은 푸드 카트리지를 교체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인간이 1년간 먹고 마시는 양은 대략 1톤 정도.
물론 그 대부분은 제대로 소화 흡수되지 못한 채 장까지 흘러가 대변이 되어 배출된다.
그러나 TRD는 음식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식감’을 수천 개의 미세 튜브들의 조합으로 구현하면서, 액체를 삼키면서도 고기를 씹는 느낌을 그대로 즐길 수 있는 장비였기에, 최소한의 성분으로 최대한의 맛을 즐길 수 있게 하는 기기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TRD에서 사용되는 푸드 카트리지는 현실에서의 식사를 대체할 수 있도록 필수적인 영양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지만, 한 번의 식사에 사용되는 양은 현실에서의 그것보다 훨씬 적은 양만 가지고도 식사를 마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게다가 푸드 카트리지 생산 업체에서 제공하는 온라인 연동 기능을 사용하면, 그나마 매일 카트리지를 체크하여 부족한 카트리지를 교체할 필요도 없었고.
각 카트리지의 남은 잔량과 개개인의 소모 속도를 파악하여 알아서 교체 시기에 집 앞으로 카트리지가 도착하게 만드는 배송 서비스가 이미 활성화 되어 있었기 때문에, 빈스가 할 일은 오직 자신의 집의 문을 열고 나가 세탁이 완료된 PRS 박스와 푸드 카트리지 박스를 회수하여 TRD의 카트리지를 교환하는 것 뿐이었다.
그것은 마치 영화 ‘매트릭스’처럼 암울한 미래 세계를 다룬 이야기의 주민의 삶 같은 일상이었지만, 빈스는 진심으로 현재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었다.
말마따나 남들이 보기엔 그의 삶이 ‘시궁창 같은 현실’일지 몰라도, 적어도 빈스가 생각하는 자신은 현재 하루의 대부분을 ‘가상의 세계’안에서 화려한 삶을 즐기며 행복한 인생을 누리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YAS에 지불되는 계정비와 자신이 사는 집의 월세, 그리고 푸드 카트리지 리필 서비스와 PRS의 세탁 서비스를 이용하는 비용, 수도세와 가스비, 전기세 등의 공과금과 새 인터넷을 사용하기 위한 통신비를 모두 포함하여 그가 한달에 지출하는 비용은 대략 100만원 정도.
그가 YAS를 통해 한 달에 벌고 있는 금액이 400만 원 정도였기 때문에, 그의 통장에는 자꾸만 쓰지 않아 남는 금액이 점점 쌓여가는 중이었다.
딱히 소비를 절제하거나, 돈을 아끼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는 그렇게 쌓인 돈을 1년 동안 모아 매년 7월에 화려한 한국 여행을 즐기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비록 KOH라는 게임이 점점 고인물화 되면서 프로 파일럿의 꿈을 접어야 하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이츠 리그는 직접 눈으로 볼 때 가장 강렬한 박력을 보여주는 스포츠였으니까.
그렇기에 빈스는 올해도 7월 초부터 일찌감치 한국에 방문해 대전 근처의 맛집을 돌며 점점 달아오르고 있는 월드 파이널의 분위기를 마음껏 만끽하고 있었다.
도시 곳곳에 세워져 있는 거대한 나이츠 형태의 조형물들, 음식점마다 걸려 있는 유명 파일럿들의 방문 인증 사진과 빈스 같은 방문자를 위해 만들어진 다양한 관광 프로그램을 돌다 보면, 현재의 대전이 왜 ‘노잼의 도시’에서 ‘나이츠의 도시’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체험 프로그램의 꽃은, 역시나 PTW에서 진행하는 ‘전용기 공개 행사’였고.
전신 15미터짜리 로봇이 거대한 휘장을 벗고 대중들이 앞에서는 광경은, 그것이 몇 번을 반복해서 본 광경이라 해도 절대 질리지 않는 경외감을 선사한다.
그 거대한 크기는, 몰려든 인파 때문에 공개 위치에서 상당히 먼 곳에 자리를 잡더라도 육안으로 상세한 디테일을 전부 감상할 수 있을 정도의 압도적인 크기를 가지고 있어서.
그중에서도, 작년에 합류해 극적인 우승을 따낸 뒤 전용기 구매 권한을 따낸 테슬러 마션즈의 루키 박재원을 위해 특별히 주문된 전용기의 공개 행사는 특별히 많은 관심을 받는 행사라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클럽을 창설한 이후로 거의 조 단위의 투자금을 쏟아붓고 있는 거대 기업 ‘테슬러’의 신형 전용기 오픈 이벤트이기도 했고, 수없이 많은 전용기들을 상대로 통상 기체만을 가지고 결승까지 분전했던 프로 나이츠 파일럿 박재원의 작년 경기가 워낙 인상에 남았으니까.
팬들의 입장에서는 무려 통상기를 탄 상태로 작년 시즌 MVP와 파이널 MVP를 동시에 수상한 대형 루키에 대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이 무리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빈스 역시 대전에 도착하기 전 테슬러 마션즈의 신규 전용기 공개 행사 일정을 꼼꼼히 체크했고, 다른 전용기 공개 행사를 놓치더라도 그것만큼은 참가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여행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런 빈스의 계획은 대전의 호텔 방에서 나오는 TV 뉴스를 시청하는 순간 산산이 무너지고 말았다.
딥 다이버를 통해 실시간으로 번역되어 전달되는 한국의 뉴스 프로에서, PTW의 팬들이 그토록 오래 기다리던 ‘그 뉴스’에 대한 정보가 흘러나왔기 때문에.
그것은 그가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장시간 비행을 하는 사이 PTW에서 긴급 발표한, 수년 동안 PTW에서 철저하게 감추고 있던 ‘미지의 신작’에 대한 정보였다.
[오늘 아침 PTW 홈페이지에 공개된 정보로 인해 인터넷이 뒤집혔는데요, PTW에서 6년 가까이 개발하고 있던 신작에 대한 정보를 공개한다고요?]
[그렇습니다. 그 덕에 아직 파이널 시즌이 시작조차 하지 않은 대전에 아침부터 엄청난 수의 관광객들이 전국에서 몰려오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나이츠 리그의 월드 파이널 시즌을 보기 위해 방문하는 국제 관광객들로 7월부터는 호텔 예약조차 잡기 힘든 곳이 대전이지만, 이번 공개 이벤트는 그토록 오래 침묵했던 PTW의 신작 정보에 관한 내용을 다루는 만큼 그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여기 내일 이벤트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달려온 팬분을 모시고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간단하게 자기 소개 부탁드립니다.]
[서울 금천구에서 프로 YAS 플레이어로 일하고 있는 배덕천이라고 합니다.
오늘은 PTW의 신작에 대한 공개 이벤트 소식을 듣고 대전으로 차를 몰고 왔고요.]
[다른 일을 다 제쳐두고 바로 대전으로 달려오신 이유가 있습니까?]
[PTW 팬이라면 당연히 와야죠.
제가 알기로 KOH의 개발 기간이 2년이 조금 넘는 거로 아는데, 그 2년이란 기간에 PTW는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로봇 스포츠를 만들어 냈죠.
이제는 월드컵 결승전보다 많은 시청자들이 나이츠 리그의 파이널 시즌을 감상하고 있고요.
그리고 저 같은 경우도, 지금은 원래의 직장을 그만두고 YAS의 세계에서 돈을 벌며 가상 세계에서의 판타지 라이프를 즐기고 있습니다.
PTW는 굳이 말하면 그런 식으로 게이머의 삶 자체를 변화시키는 회사죠.
그런 회사에서 무려 6년이란 긴 시간 동안 게임을 만들었다는데, 어찌 기대되지 않겠어요?
분명 모든 게이머가 상상할 수 있는 인지의 영역을 벗어난 엄청난 물건이 될 겁니다.]
잔뜩 흥분해서 떠드는 덕천의 모습을 보며, 아나운서가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마이크를 자신에게 가져가며 질문을 던졌다.
[그 정도로 긴 개발 기간을 가지고 게임을 개발하는 많은 게임 회사에서, 중간에 프로젝트가 엎어졌다거나 하는 이유로 대단하지 않은 결과물을 내놓는 경우도 많은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십니까?]
[적어도 PTW라는 회사에 있어서만큼은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믿습니다.
분명 이번에 나올 게임도 엄청난 게임일 테고, 제 삶의 모습을 180도 바꿔버릴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게임일 테니까요.]
[그 말씀을 들으니 저도 기대가 되네요.
현재 신작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겠다는 발표 외에는 아무것도 공개되어 있지 않은데, 혹시 PTW의 신작에 대해 기대하고 계신 부분이 있으십니까?]
[뭘 기대하든 그 기대를 넘어서는 결과물을 내놓는 회사가 PTW이니 딱히 기대하는 건 없습니다.
그냥 무엇을 내놓던 엄청난 것을 내놓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을 뿐이죠.]
뉴스를 보던 빈스는 딥다이버를 쓴 채로 다급하게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냈다.
그리고는 PTW의 홈페이지에 접속해 공지를 살폈다.
거기엔 자신이 비행기에서 자는 동안 올라온 따끈따끈한 공지가, 메인 페이지의 가장 잘 보이는 공간에 떡 하니 걸려 있었다.
“진짜네?!”
비록 어떤 게임인지에 대한 정보도, 단 하나의 힌트도 없이 정보 공개 날짜와 함께 단 두 줄의 텍스트만 적혀있었지만, 그 텍스트의 내용은 PTW팬들의 가슴을 순식간에 두근대게 만드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올해 나이츠 리그의 월드 파이널에서, PTW의 신작 게임에 대한 정보가 공개될 것입니다.
새로운 정보 공개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번 신작 게임 공개 이벤트를 100% 만끽하실 수 있도록, 신작에 대한 정보를 얻는 방법을 다음 날짜에 함께 공개합니다.]
그리고 그 날짜를 확인한 빈스는,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의 일정표를 다시 점검해야 했다.
PTW에서 신작 정보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겠다고 알린 시각.
그 시각이 정확히 테슬러 마션즈에서 신규 전용기를 공개하기로 했던 시간과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잠시 고민하던 그는 굳은 결심이 담긴 표정으로 자신이 프린트해온 일정표에 취소 선을 그었다.
비록 자신이 응원하는 테슬러 마션즈의 슈퍼 루키 박재원의 전용기 공개를 애타게 기다려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단지 1년짜리 기다림일 뿐, 이건 무려 6년을 이어온 기나긴 기다림이었으니까.
그 공개 행사를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빈스에게는 한없이 운 좋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공지를 본 전 세계 수억 명에 달하는 PTW 팬들이 행복한 망상에 잠겨있었지만, 그 공지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든 것은 아니었다.
그 공지는 같은 시각 빈스와 같은 공지를 보고 있던 테슬러 마션즈의 오너, 일런 모스크를 깊은 분노에 잠기게 했기 때문에.
자칫하면 자신이 공들여 투자한 신형 전용기의 공개행사가 PTW의 신작 소식에 완전히 묻혀버릴 수 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 그는 항의차원에서 상혁의 휴대폰으로 직접 전화를 걸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그리고는 번호를 누르기 직전,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잠깐, 내가 아는 이상혁이란 인간은 이런 식으로 아무 이유없이 협력사에 빅 엿을 먹일만한 인물은 아닌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전화기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전화를 받은 상혁의 밝은 목소리가 모스크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오랜만이네요. 모스크 씨.-
“부탁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전화를 거세요.
이런 식으로 사람 놀라게 하지 말고.”
-그럼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역시나, 자신의 예상대로 자신이 전화를 걸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상혁의 목소리를 들으며, 모스크는 흥미가 동한다는 듯 전화기를 향해 말했다.
“그래서, 이번엔 무슨 재미있는 계획을 세우려고 이런 서프라이즈를 준비하셨습니까?”
-뭐 별건 아니고, 작은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됩니다.-
“그 부탁을 들어드리면 제 쇼케이스 이후로 공개 시간을 조정해주실겁니까?”
-이후로 조정하는 게 아니라 아예 공개 과정에 신규 전용기의 쇼케이스를 넣어드리죠.
아시다시피 이번 신작 공개는 6년만에 이루어지는 행사입니다.
아마도 저희가 진행할 공개 행사는 전 세계 수억 명이 동시에 시청하는 거대 이벤트가 되겠죠.
그런 주목 속에서 테슬라 마션즈의 새로운 전용기가 발표되는 것.
모스크 씨라면 아주 좋아할 만한 제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젠장.”
-음?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가끔 보면 상혁 씨가 날 너무 잘 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좋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군요.
부탁할 게 뭔지는 몰라도, 그 제안, 받도록 하죠.”
-좋습니다. 그럼 내일 바로 대전에 있는 PTW 파크에서 보는게 어떨까요?-
“제가 지금 한국에 있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번 전용기에 모스크 씨가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잘 아니까요.
제가 아는 모스크 씨는 그런 자리에 빠질 만한 사람이 아니죠.
당연히 쇼케이스를 위해 한국에 계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분하지만 부정하지 못하겠네요.
좋습니다. 그럼 내일 PTW 파크에서 뵙죠.”
모스크는 그렇게 전화를 끊은 뒤, 의자에 앉아 자신의 앞에 있는 노트북을 보았다.
거기엔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단 두 줄의 텍스트만 딸랑 떠 있던 페이지가, 테슬러 마션즈의 로고와 함께 신형 전용기의 멋진 실루엣이 그려져 있는 합동 이벤트 페이지로 변화되어 있었다.
마치 그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을 미리 알고 만들어두기라도 한 것처럼.
그 모습을 본 모스크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리고는 천장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역시, 수상할 정도로 날 너무 잘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