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5. 세상이 바뀌어도 변치 않는 것 >
“5년입니다. 허먼 씨. 무려 5년이요.
그동안 PTW는 PTW LAB에서 나오는 몇몇 게임들을 제외하면 단 하나의 메인 타이틀도 내놓지 않고 있어요.
그 말은, 그 대단한 PTW 조차도 결국 새로운 타이틀을 내놓을 원동력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겠죠.
대부분의 위대했던 게임 개발사가 그러하듯이요.
솔직히 말하면, 이제 PTW를 게임회사라고 불러야 하는지도 의문입니다.
이 오랜 침묵의 시간 동안 정말 많은 활동을 해왔음에도 불구하고, 게임과 관련된 활동은 전혀 하지 않고 있으니까요.”
전 세계 게이머들의 압도적인 주목을 받으며 제1회 나이츠 리그 월드 파이널이 개최된 지 5년의 세월이 지나자, PTW의 팬들은 매일같이 PTW의 신작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해를 거듭할수록 기대감에서 간절함으로, 간절함에서 배신감으로 변질되어가기 시작했다.
PTW에서 뭔가 큰 발표가 있다는 정보가 돌 때마다 엄청난 기대감을 품고 행사를 지켜보았지만, 매번 발표되는 내용이 새로운 신작에 대한 정보가 아닌 PTW에서 추진 중이었던 게임 외적인 사업에 대한 발표였기 때문에.
물론 그 발표들이 혁신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KOH가 발매된 지 1년 후에 이루어진 KOHA의 첫 월드 파이널 이벤트에서, PTW가 발표한 새 디바이스 ‘TRD(Taste Realization Device)’는 가상현실에서의 음식 체험에 굶주려 있던 수많은 유저들의 뇌리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다주었으니까.
입안에 들어가는 작은 크기에 수천 개의 부품이 정교하게 조립되어 현실의 음식이 가지는 식감과 맛을 그대로 재현해주는 TRD의 등장은, 말 그대로 가상현실 세계의 혁명을 가져올 발표라고 할 수 있었다.
정말 현실에서의 맛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까.
입에 물고 있으면 이질감이 들지 않을까.
수많은 우려와 기대 속에서 반년 후에 FDA의 승인을 거쳐 정식 발매된 TRD는 말 그대로 컬쳐 쇼크 수준의 충격을 선사하며 폭발적으로 성장 중인 풀 다이브 VR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하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PTW에서 판매하기 시작한 ‘TRD용 푸드 카트리지’의 수요도 미친 듯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물론 VR 세계에서 현실의 맛을 구현해내는 데 성공한 것에 따른 부작용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가상 세계에서 현실 속의 음식 맛을 비슷하게나마 느낄 수 있게 된 게이머들은 굳이 현실의 음식점에 갈 필요성을 못 느끼게 되었고, 덕분에 PRD가 서비스되는 수많은 국가에서 외식 서비스업계 전체가 큰 타격을 받았으니까.
그리고 그 외식 서비스업계에 음식 재료를 조달하는 유통 업체들도 엄청난 손해를 보았고.
결국, 시위에서 소송으로, 소송에서 국정감사로 이어진 그 반향 속에서 상혁은 매일같이 전 세계의 법원과 국회를 왕복하며 사태 수습에 힘써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상혁이 출석한 국회 청문회에서 연설한 내용들은 미래 세계가 지향해야 할 아젠다를 다루는 명연설로 수많은 논문과 방송에서 인용되게 되었는데, 그것은 현재의 PTW가 가려고 하는 방향이 상혁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미래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혁은 미국 하원에서 이루어진 청문회에서, 자신에게 PTW가 그리는 미래는 모든 인간이 PRD 안에 인형처럼 매달려 가상 세계 안의 허구 속 인생을 살아가는 매트릭스 같은 세계냐고 묻는 의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예. 저는 그편이 자연과 환경에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완전한 진공 및 멸균 상태로 제공되는 TRD의 카트리지는, 유통기한이 몇 년을 넘어가죠.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서, TRD를 사용하는 유저들은 언제나 자신이 원하는 맛을 적당한 영양성분에 맞춰 제공받을 수 있습니다.
TRD의 카트리지는 맛의 구현을 위한 재료와 영양공급을 위한 재료로 구성되어 있죠.
유저가 외부에서 별다른 식사를 하지 않는 이상, TRD의 운영 시스템은 유저가 하루에 소모하는 칼로리와 제공받은 영양소의 양을 완벽하게 표시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일정 수치를 넘어갈 경우, 영양소의 공급을 중단하고 맛만을 구현하여 유저에게 제공하죠.
말 그대로, VR 세계 속에서는 아무리 음식을 먹어도 배는 부를 수 있지만, 살이 찌지 않습니다.
유저가 실제로 씹는 것은 단지 음식의 식감을 그대로 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풍선껌 같은 물체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씹는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삼키게 되는 건, 그 풍선 안에서 절묘한 비율로 혼합되어 제공되는 일종의 유동식이고요.
그 과정에서, TRD는 어떠한 음식 쓰레기도 남기지 않습니다.
음식을 포장하는데 사용되는 플라스틱 컵이나 종이 포장도 사용되지 않죠.
물론 그 말은 플라스틱 용기를 생산하는 업체나 종이 포장을 만드는 업체에도 타격이 간다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건 다른 문제입니다.
현실에서의 제조업이 쇠퇴하는 만큼, 가상 세계에서의 제조업이 성행하게 되니까요.”
“그건 무슨 의미입니까?”
“가상 세계에서 음식을 담는 용기 역시 유저가 재료를 모아 생산해야 한다는 이야기죠.
현재 TRD의 기능을 완벽하게 지원하는 게임은 오직 YAS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YAS내의 모든 자원은, 유저의 활동을 통해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되게 되어 있죠.
그 말은 도시락 상자를 만들던 대나무 컵을 만들던 어느 단계에서는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 과정에서 노동에 따른 대가가 발생하고, 직업이 생성되게 되죠.
단지 현실에서 하던 일의 배경이 가상 세계로 옮겨졌을 뿐입니다.
누군가가 직업을 잃는 만큼, 누군가는 직업을 얻게 되는 거죠.
게다가 실제로 현재 수많은 음식점 주인들이 YAS의 세계 속에 점포를 개설하여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기도 하고요.
여기 준비된 자료를 보시면, 현실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다 가상 세계의 음식점으로 업종을 바꾼 유저분들의 후기를 볼 수 있습니다.
브루클린에서 피자집을 운영하던 A씨는 이렇게 말했죠.
‘가상 세계 속에서 음식점을 경영하는 것은 현실의 그것과 그리 다르지 않다.
세금과 임대료를 내야 하는 것도 동일하고, 매일 아침 가게에 배송되어 오는 음식 재료의 퀄리티를 점검해야 하는 것도 똑같으며, 내가 원하는 맛이 나오도록 신경써서 레시피를 따라 음식을 조리해야 하는 것도 똑같으니까.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현실적인 부분은, 가상 세계 속 손님들 역시 현실의 예전 단골들과 똑같이 내 피자를 행복한 표정으로 먹어준다는 것이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벌리는 돈의 차이랄까.
브루클린의 피자집은 이미 레드 오션이지만, VR 세계에서의 음식점은 열자마자 손님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블루 오션이니까.
게다가 매일 같은 맛을 만들어야 하는 현실의 음식점과는 다르게, 게임 속 세계에서는 내 스킬이 올라갈수록 음식이 주는 능력치도 함께 올라간다.
그리고 그건, 꽤 재미있는 경험이고.’
마찬가지로 3번의 프랜차이즈 창업 경험이 있지만 3번 모두 폐업하고 YAS 안에서 제4의 인생을 살고 있는 B씨는 이렇게 말했죠.
‘풀 다이브 기술에 의한 VR 요식업이야말로, 앞으로의 요식 업계가 지향해야 할 미래의 시장이다.’라고요.”
상혁은 그렇게 수많은 유저들의 사례를 들어가며 미국 하원 의원들을 설득해나갔고, 그 내용은 생방송을 통해 전 세계의 시청자들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 청문회를 통해, 시위를 이어나가던 수많은 요식 업계 종사자들은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파리, 바퀴벌레, 냉동실에서 썩고 있는 재고들과 수많은 음식 쓰레기들이 존재하는 현실 세계에서의 음식점 영업보다, 가상 세계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것이 훨씬 즐겁고 돈이 많이 벌린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이후로 한동안 YAS안에서는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수많은 음식점들로 인해 음식 재료의 값이 폭등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그것은 자연스레 현실에서 농사를 짓던 농부들이 YAS 안에서 농사를 시도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고.
그렇게 2025년을 ‘가상현실의 원년’으로 만든 PTW는 다음 해 월드 파이널 종료 후 이전보다 더욱 충격적인 발표를 하였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할 일을 대신 해주는 로봇인 ‘워커 봇’에 대한 발표였다.
“현재까지의 워커 봇은 PTW 내부에서만 실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대전의 아레나 스타디움의 건설도 워커봇에 의해 진행되었고, 지금은 세계 1위의 인기 스포츠가 된 나이츠 리그의 나이츠들도 워커 봇이 생산하고 있죠.
그리고 엄격한 위생 관리 하에서 생산되어야 하는 TRD의 푸드 카트리지 역시, 워커봇에 의해 생산되고 있었습니다.
그 오랜 기간의 테스트를 거쳐, 저희는 워커 봇의 상용화를 결정하였으며 이제부터 시장에 본격적으로 공급하고자 합니다.
우선 시범적으로 아마존에서 새로 건설할 12개의 대형 물류 센터에 1250만대의 워커 봇이 투입될 예정이며, 테슬러가 TRD의 생산을 위해 새로 확장한 기가 펙토리에서도 워커봇이 사용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기업들의 요청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그 수를 늘려갈 예정이고요.
하지만 기본적으로 워커 봇 자체는 기업에서 일시불로 구매할 수 없습니다.
저희가 그렇게 팔지 않을 거니까요.
워커봇은 인간 노동자의 일을 대신하기 위하여 생산된 물건으로, 인간이 할 일을 대신하는 대신 인간이 받아야 할 인건비를 그대로 받게 될 겁니다.
물론 워커봇은 로봇이니 고용보험료를 따로 내지 않고, 건강 보험 대신 PTW에서 따로 제공하는 메인터넌스 보험에 가입하며, 식사를 하지 않으니 식대 대신 충전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등의 다양한 차이점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도입 기업과의 합의를 통해 정한 특정 시급을 기준으로 임금을 받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렇게 벌어들인 돈은, 해당 워커 봇이 일하는 지역의 지방세와 소득세를 제외한 후 YAS를 플레이하는 유저들에게 제공될 예정입니다.
여러분은 게임 안에서 벌어들인 게임머니를 이용하여 워커 봇의 ‘연봉’에 대한 지분을 살 수 있으며, 그 지분의 양에 따라 정해진 양의 현금을 해당 국가의 돈으로 획득하실 수 있습니다.
이 금액은 이미 워커 봇이 해당 국가에서 소득세를 지불한 금액이기 때문에, 별도의 추가 과세는 이루어지지 않을 예정입니다.”
이 계약을 위해, 상혁은 각 국가의 국세청과 다이렉트로 연결되는 거대한 네트워크를 구축해야 했다.
가상현실에서 벌어진 소득 행위에 대해 해당 국가의 국민이 정당한 세금을 자신이 사는 국가에 지불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물론 해당 워커봇의 지분을 가진 게이머가 세금을 내게 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상혁은 굳이 워커봇이 일하는 지역에서 워커 봇이 소득세를 내도록 각 국가 정부들과 협의를 마쳤다.
어찌 되었건 워커 봇의 도입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게 되는 것은 그 지역의 주민들이니, 세금으로라도 어느정도 손해를 만회해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일은 로봇이 하고, 돈은 게이머가 벌고, 세금은 국가가 가져가는 구조를 완성한 상혁은 마침내 긴 기다림을 끝내고 YAS의 정식 서비스를 개시했다.
월 10만 6천 원의 정액제 요금을 받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풀 다이브 VRMMMORPG의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정식 서비스는, 그 압도적인 명성에 걸맞게 유료 전환율 90.44%라는 말도 안 되는 수치를 달성하며 성공적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공개 시험 중이던 게임이 유료화를 들어가며 유저 수가 줄어드는 것과 비교하면 터무니없이 높은 수치였는데, YAS의 높은 유료 전환율에 대해 전문가들은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어놓았다.
첫째, 오픈 베타 기간이 길어지면서 게임에 질린 유저들은 이미 다 빠져나가고 충성 고객만 남아 있었다는 것.
둘째, 애당초 PC만 있으면 게임이 가능한 대부분의 MMORPG와는 다르게 3천만 원에 달하는 고가 콘솔이 필요한 게임인 만큼 유저 대부분이 월 10만 원 정도는 가볍게 지급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셋째로 이미 게임내 화폐 가치가 현실 화폐에 맞먹을 정도로 높은 가치를 형성하고 있는 만큼 유저들이 월 10만 원의 이용료에 대해 딱히 부담을 가지기 않게 되었다는 것.
그 3가지 이유로 인해, YAS를 무료로 플레이하던 대부분의 유저들은 월 10만 6천 원의 월정액 요금을 PTW에 내고 게임을 유료로 플레이하는 데 동의하게 되었다.
그리고 PTW는, 그 순간부터 매달 1700만 명에 가까운 유저들에게 10만 6천 원을 받아낼 수 있는 희대의 캐쉬 플로우를 가진 기업이 되었고.
그것은 월 단위로 환산하면 매달 1800억 이상, 연 단위로 환산하면 21조6천억 이상의 금액을 고정적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압도적인 자금력을 PTW에 제공해 주었다.
물론 그렇게 벌어들인 비용 중 상당 부분이 미친 듯이 주문량이 폭주 중인 워커 봇의 생산과 정비에 들어가고 있긴 했지만, 그렇게 사용한 비용으로도 남는 자금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돈이 남아 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자 당연하게도 게이머들의 관심은 PTW의 차기작이 무엇일지에 관해 쏠리게 되었다.
안 그래도 게임에 돈을 미친 듯이 쓰는 기업에서, 압도적인 자금력으로 만들어낼 ‘차기작’이 어떤 스케일의 게임일지 너무나도 궁금했기 때문에.
그러나 그 높은 관심에도 불구하고, PTW는 신작에 대한 어떠한 정보도 내어놓지 않으며 게이머들의 갈증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TRD가 공개되었던 KOHA의 첫 월드 파이널, 그리고 워커 봇과 YAS의 정식 서비스가 공개되었던 두 번째 월드 파이널과는 다르게, 세 번째 월드 파이널에서는 어떠한 발표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4번째 월드 파이널에서, PTW는 유저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신작 대신 드디어 완성된 레벨 5의 자율 주행기술을 공개함으로써 유저들의 불만을 폭발하게 했다.
물론 PTW가 공개한 기술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기술이긴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신작에 대한 작은 정보라도 풀어주기를 유저들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유저들의 불평이 완전히 묻혀버릴 정도로, PTW의 자율 주행기술 공개는 완벽히 멋진 이벤트였다고 할 수 있었다.
오늘 게스트 자격으로 <완전히 침묵한 PTW. 그들의 게임은 완전히 끝난 것인가>라는 TV 토론회에 출연한 허먼은 당시 느꼈던 뜨거운 전율을 추억하며 PTW가 게임 개발을 포기했다고 주장하는 게스트를 향해 입을 열었다.
“2024년의 첫 월드 파이널 때 공개된 TRD는 우리가 생각하는 VR 세계의 개념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죠.
그리고 2025년 공개된 워커 봇은 게이머들이 굳이 직장이란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가상 세계에서의 활동을 통해 즐거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게다가 2027년의 월드 파이널에서 공개된 레벨 5 자율 주행기술.
그 공개 이벤트는 말 그대로 모두의 예상을 깨는 충격적인 이벤트였죠.”
레벨 5 주행기술의 공개를 위해, PTW는 대전에 있는 PTW 파크에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형태의 레이싱 트랙을 건설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실제 F1 레이서들이 참여한 이벤트 레이스 대회를 개최했고.
물론 그 이벤트에서 레벨 5의 자율 주행기술이 공개된다는 사실은 극도의 보안을 통해 철저히 숨겼기 때문에, 이벤트를 시청하는 누구도 PTW가 AI 주행기술을 공개하기 위해 이벤트를 준비했다는 사실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순히 PTW가 신작으로 레이싱 게임을 준비하려는 게 아닐까 하는 추측만 무성했을 뿐.
그 이벤트에서, 상혁은 영화 ‘아이론 맨 2’의 한 장면처럼 일론 모스크를 테슬러가 운영하는 레이싱 팀의 레이서로 깜짝 출연시켰다.
그리고 차량에 탑승한 모스크는 신들린 듯한 주행 실력을 뽐내며 다른 F1 레이서들을 모두 제치고 대회에서 우승했고.
그것만으로도 전 세계의 신문 1면을 도배하기에 충분한 이슈 거리라 할 수 있었지만, 진정한 이벤트는 레이스가 끝난 이후에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죠?! 이게 정말입니까?! 모스크 씨가 탑승한 차량엔 핸들이 달려 있지 않습니다!!]
미친 듯이 놀란 아나운서의 말대로, 모스크가 탑승한 차량엔 핸들이 달려 있지 않았다.
모스크는 핸들은커녕 기어와 브레이크도 없는 차량에 탄 채로, 두 손을 가지런히 잡은 채 ‘앉아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심지어 너무 복잡한 코스 덕에 중간에 모스크의 바로 코앞에서 3대가 넘는 차량이 코스 이탈로 날아가는 사태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스크가 탑승한 테슬러의 레이스카는 완벽한 회피 컨트롤을 선보이며 다른 레이서들을 압도한 채 대회에서 우승하는 기염을 토해내었다.
그리고 상혁은, 모두를 경악하게 만든 그 경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전 세계로 하여금 PTW가 개발한 레벨 5 자율 주행기술의 우수함을 강제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보셨다시피 저희가 개발한 레벨 5 자율 주행기술은 그 어떤 인간 운전사보다 우수한 운전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완벽하게 안전 운행을 하더라도 온갖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도로 위에서 100% 사고가 발생하지 않는다고는 할 수 없죠.
하지만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그 어떤 사고 상황에서도 PTW의 자율 주행기술이 보장하는 것 이상의 안전성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저희가 개발한 자율 주행기술은 인간 운전자가 할 수 있는 그 어떤 운전 기술이라도 전부 사용할 수 있으며, 반대로 인간이 도저히 할 수 없는 미래 예지 수준의 사고 회피 성능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저는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하나의 보험을 제시하려 합니다.
앞으로 PTW가 개발하고 테슬러에서 제작한 자율 주행 AI 차량에서 사고가 발생할 경우, 그 사고가 인간 운전자가 조작했을 경우 피해를 더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최초로 성공한 분에게, 저희 PTW에서 1조 원의 보상금을 드리겠습니다.”
상혁은 ‘이 차를 타면 절대 사고가 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 될 테니까.
아무리 완벽한 AI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절대 피할 수 없는 사고란 늘 있는 법이다.
그러나 상혁은 그런 사고에 대해 다른 형태의 단서를 달아 운전자들을 안심시켰다.
적어도 최고 수준의 프로 레이서가 모는 차량보다 더 안전한 운행을 보장하겠다는 것.
물론 그것은 AI가 주행하는 차량이 도로를 누빌 때 이어질 수많은 소송전을 위해 상혁이 미리 깔아둔 일종의 ‘밑밥’이었다.
어차피 같은 사고가 발생하더라도 그것이 AI의 문제 때문에 발생한 과실이라는 것을 입증할 수 없다면, AI를 개발한 PTW에서는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결국 이 과감하고 도발적인 이벤트 이후로 전 세계의 주요 국가에서는 완전한 자율 주행 AI가 운전하는 차량이 도로에 들어서는 것을 허가했고, 그해 테슬러가 발표한 ‘모델 A’는 역대 자동차 판매 기록을 모두 갱신하며 세계 최고의 히트 상품이 될 수 있었다.
“과거 카네기가 미시시피 강에서 세계 최초로 강철을 이용해 만든 다리를 완성했을 때, 사람들은 그 다리가 정말로 튼튼한지를 걱정했죠.
그래서 카네기는 코끼리를 앞장세워 다리를 건너게 했습니다.
코끼리는 불안한 다리를 건너지 않으려 한다는 미신이, 당시에 널리 퍼져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코끼리가 다리를 성큼성큼 건너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그 다리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하나같이 코끼리의 뒤를 따라 다리를 걸어서 건넜죠.
아예 핸들이 없는 차량을 조종한다는 것 역시 비슷한 두려움을 줍니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려면, 설사 자신이 아닌 그 어떤 인간이 운전대를 잡더라도 AI보다 좋은 결과를 낼 수 없다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고요.”
그 이후로 AI가 조종하는 테슬러의 신형 차량을 타고 발생한 사고에서 벌어진 소송이 줄을 이었지만, PTW는 그 모든 소송에서 승리했다.
그 누구도, PTW가 개발한 AI의 최종 판단이 틀린 판단이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었기 때문에.
법원은 인간의 능력을 아득히 능가하는 초감각을 가지고도 피할 수 없는 사고에 대해, PTW는 책임이 없다는 선고를 내렸다.
그리고 이제는, 핸들조차 달리지 않은 널찍한 실내에서 편안한 자세로 잠을 자며 목적지로 이동하는 차량을 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마치 초등학생이 미술 과제로 그린, ‘내가 꿈꾸는 미래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듯한 몽환적인 미래가 인류의 앞에 펼쳐진 것이다.
허먼은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인류의 삶의 모습을 바꾸어낸 존재는 잡스가 개발한 스마트폰을 제외하면 존재하지 않는다며 PTW의 행보를 변호했다.
“저도 테슬러의 모델 A를 타고 다니지만, 지금은 그게 없는 삶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편안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갈 때도, 오늘은 가상 세계에서 어떤 음식의 맛을 보게 될까를 두근대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죠.
스마트폰이 나오고 나서 스마트폰이 없는 삶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것처럼, 이제 PTW가 제공하는 기술은 인류의 삶에 빠질 수 없는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변화는, 게리슨 씨가 ‘침묵’했다고 주장하는 그 5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죠.
예. 물론 말씀하신 대로 PTW가 5년, 아니 6년이란 시간 동안 단 한 개의 메인 타이틀도 내놓지 않은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래서요?
그들은 게임을 내놓지 않아도 게이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릴 만한 기술을 몇 번이고 발표해왔고, 그들이 만든 기술로 게이머의 삶을 몇 번이고 바닥부터 바꿔왔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앞으로도 저희 게이머들의 삶을 영원히 바꿔 놓을 변화일 테고요.
그리고 게리슨 씨도 부정하지 못할 만한 사실이 하나 있는데, PTW는 5년이 지난 지금도 자신들이 개발한 게임의 유지보수를 계속하고 있다는 겁니다.
풀 다이브 VRMMORPG인 YAS 뿐만이 아닌, KOH와 무한의 바다, 심지어 HC 101도 매년 대규모 패치를 하여 새 컨텐츠를 제공하고 있죠.
그리고 그것들은 언제나 다른 게임의 유료 확장팩보다 더 큰 볼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저도 PTW가 게이머의 삶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PTW라는 회사에 기대하는 것 중 가장 큰 것은, 단순한 혁신이 아니라 ‘새 게임’이죠.
과거 KOH가 공개되면서 ‘로봇 조종사’라는 새 꿈을 게이머들의 마음속에 심어준 것처럼, 발표를 보는 것만으로도 게이머들의 심장을 터져버리게 만드는 압도적인 혁신 말입니다.
허먼 씨가 오해하는 게 한 가지 있는데, 전 지금 PTW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죠.
전 PTW의 열렬한 팬으로서, 그들이 6년 전에 보여주었던 그 뜨거운 흥분을 다시 한번 게이머들에게 선사해 주기를 누구보다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PTW가 아직 팔팔한 현역 개발사라고 주장하시는 허먼 씨도 마찬가지일 테죠.”
허먼은 상대측 게스트로 출연한 게리슨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PTW가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허먼 조차 6년 전 있었던 5차 NE 컨벤션이 선사한 압도적인 흥분을 잊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오늘 <완전히 침묵한 PTW. 그들의 게임은 완전히 끝난 것인가>라는 제목의 TV 쇼가 진행된 것도, 바로 그런 게이머들의 마음이 반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알고 있고 그들이 믿고 있는 PTW라는 회사는, 절대 제자리에 멈춰서 있을 회사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허먼은, 그 수많은 게이머 중에서도 가장 강하게 PTW를 믿고 있는 게이머 중 한 명이었다.
“게리슨 씨. 사실 PTW에서 신작을 내놓지 않는다고 비방하는 측도, 그리고 어련히 알아서 내놓을 거라 옹호하는 측도, 결국은 같은 마음일 거라는 게리슨 씨의 말에는 저도 동의합니다.
저 역시 그 누구보다 PTW의 신작이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니까요.
다만 저희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 ‘시기’를 기다리는 마음가짐의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겠죠.”
“마음가짐의 차이라뇨?”
“예를 들어 지난번 4차 KOHA 월드 파이널에서 PTW의 자율 주행기술이 공개되었을 때, 유저들 사이에서는 PTW에서 신작으로 레이싱 게임을 공개할 거라는 추측이 지배적이었죠.
세계 유명 F1 레이서들이 하나둘 대한민국에 방문하고 있었고, PTW 파크에 레이싱 코트를 건설하는 사진이 자주 공개되었으니까요.
그러나 기다리던 신작 게임이 아니라 자율 주행기술이 공개되었을 때, 게리슨 씨는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이 자식들 만들라는 게임은 안 만들고 또 다른 짓만 하는구나! 라고 생각했죠.”
“거기서 저와 게리슨 씨의 차이가 있는 겁니다.
저는 그때 이렇게 생각했으니까요.
아니, 마지막 신작이 나온 지 5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신작 정보는 코빼기도 안 비쳐?
대체 얼마나 엄청난 걸 만들고 있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는 거야?”
“그건···.”
“기본적으로 PTW가 절대 게임 개발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믿음 하에서 나올 수 있는 생각이죠.
게리슨 씨. PTW의 오랜 팬으로써 제가 당신께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들은 언제나 기다린 보람이 있는 물건 그 이상의 보상을 들고 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개발기간이 오래 걸린다는 이야기는, 정말로 지금 개발하고 있는 물건이 보통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저희가 지금 이야기하는 건, 다른 게임 회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 PTW라고요.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개발력과 기술력을 가진 회사.
그리고 전 세계에서 가장 게임 개발에 진심인 회사.
그 회사에서 이렇게 오랜 기간을 들여 만드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그건 저희가 상상하는 게임의 개념을 초월한 무언가가 될 겁니다.
저는 그것을 알기 때문에, 오히려 개발 기간이 길어질수록 더 기대하는 마음을 품게 되는 거고요.”
“하지만 세상엔 그토록 오랜 기다림 끝에 처참한 결과를 내는 프로젝트가 얼마든지 있죠.
듀크 뉘켐이나 라스트 오버 어스2가 그랬던 것처럼요.
저는 또 한 사람의 PTW의 팬으로서, 이토록 커지는 기대감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작품을 PTW가 내놓는 미래를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두렵습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저는 세상에서 가장 신뢰하던 한 존재가 처음으로 저를 실망하게 하는 모습을 보게 될 테니까요.”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게리슨을 보며 허먼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게리슨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에게 말했다.
“믿음을 가지세요. 형제여. 그들은 지금 그 어떤 회사보다 더 열심히 게임을 만들고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게, 바로 그 증거이고요.”
그렇게 말하며, 허먼이 품 안에서 한 뭉치의 서류를 꺼내 게리슨에게 보여주자, 게리슨은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A4용지를 가득 메운 작은 글자들이 적혀 있는, 한눈에 보기에도 두꺼워 보이는 서류 뭉치를.
무언가의 리스트처럼 보이는 그 서류를 본 게리슨이 허먼을 바라보며 그게 무엇인지 묻자 허먼은 씩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는 서류 뭉치를 흔들며 게리슨을 향해 말했다.
“이건 6년 전 마지막 NE 컨벤션 이후로 PTW에 입사한 직원들의 목록입니다.
보시다시피 어마어마한 숫자의 신규 직원들이 PTW에 입사했죠.
그리고 그 대부분은, 게임 개발과 관련되어 보이는 인원들이고요.”
“그게 정말입니까?!”
“정말입니다. 물론 이 서류의 정확도가 100%라고 말씀드리긴 어렵지만, 나름대로 신뢰도가 있는 리스트라고 말씀드릴 수 있죠.
그 기간 중 다른 게임 회사에서 퇴사한 이후로 PTW에 입사했다는 SNS 메시지를 남긴 개발자들의 목록이나, 혹은 커뮤니티에 올라온 짤막한 흔적들을 가지고 유저들이 직접 추적하여 만든 리스트니까요.
게리슨 씨도 PTW에서 직원을 뽑을 때 PTW 커뮤니티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민간 전문가를 자주 채용하고 있다는 건 알고 계시죠?”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허먼이 말을 이어나갔다.
“여기엔 과거에 활동을 활발히 하다가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행방이 묘연해진 게시판 전문가들의 행적도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적힌 사람들의 공통점들은, 하나 같이 5차 NE 컨벤션 이후에 한국에서의 활동을 마지막으로 추적이 안 된다는 점이고요.
그러니 이 중에 100%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50% 이상은 PTW에서 일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겠죠.”
그러자 그 리스트가 가진 정보의 가치를 알아 본 게리슨이 기겁을 하며 허먼에게 소리쳤다.
“그럼 그 사람들의 전문 분야를 파악하면 신작 게임의 장르에 대해 알 수 있는 게 아닙니까?!
PTW에서는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지만! 게이머들은 미친 듯이 알고 싶어 하는 바로 그 정보를요!”
그러나 안타깝게도, 허먼은 게리슨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자신도 리스트를 입수한 순간 가장 먼저 그 생각을 했었지만, 이 리스트에서 그 정보를 빼내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죄송하지만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해서 관련 정보를 모아보았습니다.
하지만 신작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는 데는 실패했죠.”
“어째서요?!”
“새로 뽑힌 사람들의 전문 분야가, 말 그대로 ‘중구난방’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여기 있는 사람은 90% 확률로 PTW에 합류한 것이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인데, 전문 분야가 ‘스케이트 보딩’입니다.
그럼 토니 호크 시리즈 같은 게임을 만들려는 게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바로 아래 있는 사람은 유명한 자동차 개조 전문가죠.
현재의 PTW는 진짜로 뭘 만드는지 파악하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수많은 분야의 사람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 있습니다.”
“진짜 정보를 숨기기 위한 위장 전략이라면?”
“PTW의 연봉 수준을 생각하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죠.
고작 신작 게임에 대한 정보를 숨기겠다고 수천 명의 사람을 가짜로 고용하는 짓은 오히려 정보 누설의 리스크를 키우는 일일 테니까요.
게다가 이 모든 사람들이, 실제로는 게임 개발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PTW 직원들의 복지를 위해 고용된 사람들일 수도 있죠.
스케이트 보딩을 배우고 싶은 직원들을 위해 초빙된 강사일 수도 있고, 자동차 개조에 관심 있는 직원들을 위해 초빙된 강사일 수도 있는 것처럼요.”
“그럼 결국 이 리스트도 그다지 큰 정보는 되지 못한다는 거군요.”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뱉는 게리슨.
그러나 허먼은 그런 게리슨의 표정과는 반대로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게리슨 씨는 실망한 것처럼 보이는군요.”
“당연하죠. 마침내 신작의 실마리를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장르조차 특정할 수 없는 정보였으니까요.
허먼 씨는 실망스럽지 않으십니까?”
“저요? 리스트로 알아볼 수 있는 정보에 대해서라면, 당연히 실망스럽죠.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이 리스트는 절 기분 좋게 만듭니다.”
“어째서죠?”
“이 리스트를 보고 있으면, 1차 NE 컨벤션의 풍경이 떠오르거든요.”
“MYOM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던 그 컨벤션 말입니까?”
“그렇죠. 혹시 NE 컨벤션에 참가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제가 PTW의 팬이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이라서, 직접 참가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럼 직접 가본 제가 그곳의 풍경을 말씀드리죠.
거긴 마치 게이머들을 즐겁게 만들기 위한 목적 하나만으로 창조된 축제 장소 같은 곳입니다.
사방에 신작 게임의 테마와 연관된 먹을 것과 볼거리, 즐길 거리로 가득한 공간이죠.
그곳 안에서는, 모두가 행복한 표정으로 PTW가 준비한 어트렉션을 체험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마법같은 일이 벌어지죠.”
“마법같은 일이라면?”
“사람들이 사라집니다.”
허먼이 말했다.
“정신을 차려보면, 그토록 북적거리던 축제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졌고, 듬성듬성 모인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떠들고 있는 모습이 보이죠.
마치 조금 전 그곳을 가득 채우던 사람들의 풍경이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그리고 그렇게 사라진 사람들은, 하나같이 특정 장소에 모여 또다른 행복을 즐기게 됩니다.
바로 PTW가 공개한 신작 게임의 체험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이죠.”
“아, 비슷한 광경은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가보지 못했지만, 5차 NE 컨벤션 때도 행사장 대부분이 텅 비어 있었다고 했죠.
다들 KOH를 플레이하거나 아레나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지켜보기 위해 이동했으니까요.”
“그렇죠. 물론 PTW에서 정성 들여 준비한 다른 어트렉션도 충분히 즐겁긴 하지만, NE 컨벤션은 언제나 그들이 만든 게임이 주인공인 행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게임들은, 그토록 화려한 어트렉션 사이에 있는 관객들을 하나둘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행사장에서 사라지게 했죠.
저에겐 이 리스트가, 그 마법의 개발자 버전인 것처럼 보입니다.
전 세계에 흩어진 수많은 개발자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 있는 탐욕스러운 프로젝트가 존재한다는 증거처럼 보이는 거죠.
그리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결국 흠뻑 물을 머금은 그 스펀지는 사방에 기쁨과 환희의 물방울을 마구 뿌려대게 될 겁니다.”
허먼은 서류 뭉치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비록 PTW에서 개발 중인 신작의 장르가 무엇인지, 대체 무슨 게임을 만들려고 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전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봅니다.
어찌 되었건 PTW에서 대규모의 개발인력을 충원하고 있다는 건 사실이고, 그건 저희가 기대할 만한 엄청난 신작이 개발 중이라는 이야기일 테니까요.
그러니 저희가 여기서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볼 수 있겠죠.”
그렇게 말한 허먼은 방송국 스탭에게 양면 테이프를 요청한 뒤 A4용지에 커다란 글자를 몇 자 적었다.
그리고는 스튜디오 중앙에 걸려 있는 TV쇼의 제목을 향해 다가가 그 종이를 붙였다.
그렇게 허먼이 뒤로 물러나자, 카메라가 제목이 붙어 있던 자리를 비추었다.
거기엔 허먼이 강제로 수정한 쇼의 제목이, 손으로 쓴 어설픈 글씨로 조잡하게 적혀 있었다.
<미친 듯이 질주하는 PTW. 그들의 신작은 얼마나 대단할 것인가?>
그렇게 쇼의 제목 자체를 멋대로 바꾸어버린 허먼은 자신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보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활기찬 목소리로 시청자들을 향해 외쳤다.
“자! 그럼, 이제부터 이 정신 나간 리스트를 가지고 PTW가 만들려는 게임이 무엇인지 추측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할까요?
저희가 어떻게 예상하더라도 늘 그 이상을 내놓는 회사가 PTW이긴 하지만, PTW를 대상으로 한 망상은 언제나 즐거운 법이니까요.”
그렇게 그날의 방송은, 중반부터 완전히 바뀐 주제를 가지고 PTW의 신작에 대해 예상하는 방송으로 내용이 변경되었지만, 그것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시청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것 역시 언제나 그렇듯 PTW의 팬이 PTW의 팬다운 행동을 보여준, 또 하나의 게임 쇼였을 뿐이니까.
그런 돌발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PTW는 이미 게이머들의 삶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