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3. 천국의 저편 >
“오빠들, 미쳤어요?”
로그인하자마자 자신을 둘러싸고 미친 듯이 환호하는 인파를 피해, 지수는 YAS 안에서도 손꼽히는 민첩 능력을 사용하여 빠르게 군중 사이를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인식 저해 마법이 걸린 장비를 착용한 뒤,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은밀히 ‘격이 다른 스테이터스’에 입장했다.
그렇게 식당에 도착한 그녀가, 종업원의 안내를 받아 상혁과 민준이 기다리고 있는 프라이빗 룸으로 입장하자마자 두 사람 앞에 쌓여 있는 산더미 같은 고급 음식들을 보고 가장 먼저 꺼낸 첫마디가 바로 ‘미쳤냐’는 말이었다.
“두 사람이 같이 그 초보 캐릭 가지고 무슨 히든 던전 레이드라도 뛸 생각이에요?
거의 확실한 건수가 잡혀있지 않은 이상, 중형급 이상 캐러밴도 이 정도 음식을 먹지는 않는다고요.”
맛이 느껴지지 않는 YAS의 세계 안에서, 음식을 먹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성장 버프’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일정 규모 이상을 갖춘 모험단에서는, 던전 탐험의 효율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탐사 전에 주점에서 비싼 음식들을 먹으며 탐사 준비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YAS 안의 문화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상혁과 민준이 주문한 음식은 그런 YAS안의 상식으로도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비싼 음식들이었기에, 지수는 단지 호기심으로 그런 음식들을 시킨 두 사람에게 불평을 쏟아내는 중이었다.
“아무리 플렉스라고 해도 다 먹지도 않을 거면서 한 끼에 2천만 원이 넘는 음식을 시킨다는 건 진짜 상식 밖의 일이라고요.
하다못해 본캐로 주문 한 거라면 버프 받아서 육성이라도 하려는 거라고 이해라도 하겠지만, 지금 둘다 부캐잖아요?
키우지도 않을 캐릭터에 버프는 둘둘 둘러서 뭐 하려고요?”
“그냥 궁금해서 메뉴에 있는 것 중에 가장 비싼 거로 시킨 것뿐인데···.”
“YAS 안에서는 음식 하나도 절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요.
게다가 이 재료 중의 상당수는 이 고급 음식점 안에서도 재고가 겨우 한두 개 있을까 말까 한 음식들이고.
오빠들이 오늘 그 재고를 털어버렸기 때문에, 다음에 던전을 돌아야 할 파티가 원하는 버프를 얻을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건 말 그대로 YAS 안에서 돌아야 할 소중한 자원을 오빠들이 쓰레기통에 버린거나 마찬가지라고요.”
“지수 넌 본캐로 접속했으니 남은 건 지수 네가 먹으면···.”
“YAS 안에서 식단 조절을 제대로 안 하면 캐릭터가 살찌거나 피부가 안 좋아지는 시스템이 있다는 건 개발자인 상혁 오빠도 잘 알고 있을 텐데요?
전 이미 캐릭터 육성을 위해 필요한 최적의 식사 스케쥴을 만들어서 돌리고 있다고요.
여기 있는 음식에는 제가 쓰는 버프보다 우선순위가 높은 버프들도 많아서, 아무거나 함부로 먹을 수는 없어요.”
“그··· 그럼 어쩌지?”
“후, 일단 지금 이중에서 제 캐릭터 육성에 도움 될만한 것만 골라서 제가 먹을게요.
나머지는 점원을 불러서 포장해달라고 하죠.
원래 YAS 안에서의 요리는 보존식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음식이 아닌 이상 시간이 지나면 품질이 떨어지지만, 여기는 수도 내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주점이니 보존 마법이 걸려 있는 보관 용기 정도는 갖추고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지수는 두 사람의 가운데 자리에 앉아 잔에 음료를 따랐다.
그리고는 가볍게 들이킨 뒤 두 사람을 향해 물었다.
“그.래.서.
PTW 안에서도 가장 거물인 두 사람이 굳이 부캐로 접속하면서까지 YAS 안에서 할만한 이야기가 뭐예요?
굳이 보안 마법까지 걸린 개인실을 대여한 걸 보면, 분명 보안이 필요한 내용이었을 것 같은데?
혹시 KOH 이후의 차기작에 관한 이야기?”
“흠···. 아직 구상 단계라 말할 만한 수준은 아닌데.
나 스스로도 아직 머릿속에서 어떤 형태로 완성해야 할지 구체화가 덜 된 상태의 아이디어거든.”
“그럼 그 구체화가 덜 된 아이디어라도 이야기해 줘요.
안 그래도 요즘 YAS의 게임 화폐 가치가 미친 듯이 뛰고 있는데, 오늘 오빠들이 시킨 음식값이면 꽤 괜찮은 수준의 무기를 만들 수 있는 핵심 재료를 살 수 있는 돈이니까.
여기서는 제가 물주나 다름없으니, 그 정도 권리는 인정해주셔야죠?”
그러자 상혁이 미소지으며 민준을 바라보았고, 민준은 그런 상혁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허가를 내렸다.
“좋아. 일단 차기작에 관한 논의를 위한 자리라는 건 지수 네 생각이 맞아.
그러나 그걸 차기작이라고 확정해서 부를 수 있을지는 좀 생각해봐야 할 거야.
이건 잘못하면 몇 년이 걸릴 수도, 혹은 그 몇 년을 투자하고 나서도 실패할 수 있는 프로젝트니까.”
“말씀하시는 거로 봐서는 그 몇 년이 1~2년을 말하는 건 아닐 것 같은데, 대략 몇 년을 생각하고 계신 거예요?”
“최소 5년.”
“5년?!”
만약 그녀가 PTW가 아닌 다른 게임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다면, ‘최소’ 5년이란 개발 기간은 그리 보기 어려운 개발 기간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일하고 있는 회사는 PTW였고, 그 PTW라는 회사는 전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개발자들이 발에 차일 정도로 넘치는 회사였다.
다른 회사에서 4~5년 걸릴 프로젝트를 1년 안에 마무리 지을 수 있을 정도로.
그러니 상혁이 말하는 PTW 기준으로 최소 5년이 걸린다는 이야기는, 다른 회사에서 만들면 15년에서 20년이 걸릴지도 모르는 프로젝트라는 소리였다.
그것은 심지어 상혁이 실물 크기 로봇을 만들었다고 말해주었을 때도 놀람보다는 흥분을 느꼈던 그녀의 담대한 가슴을 크게 놀라게 만드는 것이었다.
“다른 회사 기준이 아니라, 현재의 PTW를 기준으로 최소 5년이라고요?”
“그보다 더 걸릴 수도 있고. 하지만 그보다 짧지는 않을 거야.”
“지금은 무한의 바다와 KOH개발이 끝나서 메인 프로젝트가 하나도 없는 상태에요.
그 말은 지금부터 시작하는 프로젝트는 그게 무엇이든 간에 PTW의 압도적인 개발력을 온전히 쏟을 수 있는 프로젝트가 될 거란 말이죠.
오빠가 말하는 건, 중간에 다른 게임의 개발을 진행하는 것을 제외하고, 오직 그 프로젝트에만 PTW 직원 전체가 매달렸을 때 최소 5년이란 이야기인가요?”
상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지수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상혁을 향해 말했다.
“아니, 지금의 PTW라면 스타 시티즌을 바닥부터 새로 만들어도 완성까지 5년이 안 걸려요.
아마 하늘림 같은 게임은 6달이면 만들고 남을 걸요?
심지어 현존하는 풀다이브 VR 게임 중에 가장 스케일이 크다는 무한의 바다도 개발 기간이 3년이 채 안 됐어요.
그것도 개발 인력의 상당수가 KOH 프로젝트에 투입된 상태에서.
지금의 PTW는, 웬만한 개발사에서 전력을 동원해야 만들 수 있는 AAA게임을 두세 개 동시에 만들 수 있는 개발력을 가지고 있는 회사라고요.
그런데 그 인력을 다 투입하고도 최소 5년이라니, 대체 어떤 게임을 만들려고 하길래 그런 계산이 나오는 거예요?”
상혁은 지수에게 민준과 자신이 만들고 싶은 게임에 관해 설명했다.
중간중간 끼어드는 민준의 도움을 받으며 상혁이 설명을 하는 동안 지수는 얼빠진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상혁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는 상혁이 설명을 마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오빠들, 미쳤어요?”
상혁이 먼저 뭐라고 하기 전에, 지수는 검지를 들어 상혁을 제지했다.
그리고는 상혁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이 게임을 만들고 싶다고 한 게 민준오빠라고 했죠?
상혁 오빠.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오빠라면 지금 말씀하신 이 아이디어가 얼마나 허무맹랑한 아이디어인지 알 수 있었잖아요.
게임을 창조해내는 게임이라니.
그건 PTW 전 직원이 달려든다 하더라도 5년이 아니라 10년이 걸려도 완성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게임이라고요.
솔직히 말해서, 사람마다 취향이 수천수만까지인데, 아무리 AI가 대단하다고 해도 그 유저가 어떤 월드를 원하는지 어떻게 알아내서 월드를 구현하겠어요?
세세한 부분까지 원하는 취향을 맞춰서 만들려면, 아마 게임 하는 시간보다 월드 생성을 위한 세팅하는 데 시간이 더 걸릴 거라고요.
게다가 그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설정하고 나면, 결국 게임 내용을 게이머가 전부 파악한 상태에서 게임을 하게 되겠죠.
하늘림을 하면서 한 달 넘게 이상의 모드 세팅을 하려고 넥서스 모드 페이지를 샅샅이 뒤지다가, 결국 자신이 원하는 모든 모드를 다 집어넣은 상태에서 게임을 시작하고 정작 게임은 2~3일도 못하는 경우를 오빠도 잘 알고 있잖아요?
심지어 일반 콘솔 게임이라면 모를까, 풀 다이브 VR 게임은 게임 내에서 요구되는 디테일의 차원이 완전히 다르고요.
하늘림에 나오는 NPC의 머리에 양동이를 씌워서 물건을 훔치는 트릭 같은 것도, 결국 ‘유저가 NPC의 머리에 양동이를 씌운다.’라는 부분에 대한 AI 반응을 개발사가 제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트릭이죠.
실제 인간이라면 양동이를 머리에 가져다 대는 순간 ‘어?!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라고 소리치겠지만, 하늘림의 NPC들은 그런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로직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풀 다이브 VR 게임에서는, 그런 일이 정말 말도 안 되게 많이 일어나고요.
만약 오빠가 말한대로 어설프게나마 유저가 원하는 세계를 구현할 수 있다고 해도, 유저가 중간에 ‘이런 것도 해볼까?’라는 마음을 먹는 순간 그 세계의 규칙은 완전히 붕괴해버릴 거이에요.
결국 이건 한번 월드를 세팅해 두면 무조건 그 월드의 규칙에 충실히 따르지 않는 이상 버그가 미친 듯이 발생하는 게임이 되겠죠.
무리에요.
절대 가능할 리가 없다고요.”
그러자 속사포처럼 문제점을 쏟아내는 지수를 향해 민준이 입을 열었다.
“우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설명할게.
지수 네 말이 상당히 일리가 있지만, 그건 기본적으로 기존 게임들의 NPC가 특정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구조로 만들어졌기 때문이야.
예를 들어 방금 예로 든 하늘림의 NPC같은 경우는, 유저가 말을 걸면 그에 맞는 대답을 하고 유저가 공격하면 반격하며 유저가 도둑질을 하면 소리치며 공격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그 외에도 밤이 되면 자신의 침대를 찾아 자러가거나 특정 시간에 일하는 시늉을 하기 위해 특정 위치로 이동하는 로직도 들어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그 정도가 하늘림의 NPC가 가진 한계라고 볼 수 있어.
하지만 우리가 만들 AI는 다르지.
판타지 세계의 인간이든, 현실 세계의 인간이든 기본적으로 특정 상황에 대처하는 사고방식엔 일정 부분 공통점이 존재할 거야.
예를 들어 무차별적으로 누군가가 공격을 해오면 인간의 성향에 따라 반응이 갈리겠지.
지킬 존재가 있는 사람이라면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설 것이고, 겁이 많은 사람이라면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게 될 거야.
둘 다 해당되는 사람이라면 우선순위에 따라 공포를 물리치고 적에게 맞서거나, 반대로 소중한 존재를 버려두고 혼자 살기 위해 도망치겠지.
그건 세계관에 관계없이 인간이란 존재가 가지는 사고방식 자체의 특징이야.
그 부분을 제대로 구현해서 각 상황에 대한 개개인의 특징을 구현할 수 있다면, 우린 풀 다이브 VR 환경에서도 진짜로 사람 같은 반응을 보이는 AI를 만들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확신하건대 그 AI는, 모 게임의 NPC처럼 자신의 머리 위에 양동이를 씌우는 데도 바보처럼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그 많은 성향을 가진 AI를 일일이 컨트롤 하는 건 말 그대로 엄청난 연산 능력을 요구하는 일이 될 텐데요?”
“굳이 필요없는 시간에 필요없는 데이터를 일일이 시뮬레이트 할 필요는 없어.
기본적으로 유저가 존재하는 영역의 NPC들은 실시간으로 행동을 연산하게 되겠지만, 유저가 없는 지역의 NPC들은 마지막으로 유저가 있던 시점의 기억만을 저장한 상태로 휴면 상태로 유지되게 되겠지.
그리고 다시 유저가 인식 범위 안에 들어왔을 때, 그 NPC가 휴면기간 동안 얻을 수 있는 정보만을 갱신한 상태로 다시 재생성하면 돼.
예를 들어 마왕을 물리친 플레이어가 초보자 마을의 NPC를 만나기 위해 돌아갔다면, 그 NPC는 시간 경과에 따라 플레이어가 얻을 수 있는 명성에 대한 정보를 얻어서 재생성되는 거지.
용사가 될 거라고 시끄럽게 떠드는 동네 꼬맹이를 무시하던 나무꾼에서, 자신의 마을에서 용사가 나온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나무꾼으로.
기본적으로 두 NPC는 같은 사고 방식으로 돌아가는 AI야.
다만 가지고 있는 정보가 달라서, 하는 행동도 달라지는 것뿐이지.”
“그것만으로 사람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을까요?”
“줄 수 있고, 이미 확인도 했어.”
“어떻게?!”
놀라는 지수를 보며 민준이 상혁을 돌아보자, 상혁이 쓴 웃음을 지으며 지수에게 말했다.
“여기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중 한명이 사실은 민준이 만든 AI라고 하더라고.
그리고 한 달 넘게 식당에서 수많은 사람을 상대로 일하면서도 단 한 번도 자신이 AI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았고.”
그 말도 안 되는 실험 방식과 결과에 놀란 지수는 진지한 눈빛을 지으며 테이블에 달린 벨을 눌렀다.
그리고는 민준이 만들었다는 종업원을 호출한 뒤,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고는 다시 돌려보냈다.
“후, 진짜네요.
저 정도면 진짜로 사람하고 구분하기 어렵겠어요.
새삼스럽지만 민준오빤 진짜 괴물인 것 같아요.
아마 저 AI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다면, 말 그대로 수십조를 내겠다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넘쳐날 거라고요.
그런 AI를 고작 게임 만드는 데 쓴다니···.”
“엄청 흥분되지 않아?”
지수는 깜짝 놀라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상혁이 중학생 시절의 그녀에게 게임 이야기를 할 때처럼, 꺼지지 않는 불꽃을 담은 것 같은 눈빛을 한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나도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민준이 만든 AI의 성능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더라고.
그리고 그런 AI가 있다면.
정말로 천의 역할을 소화해낼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연기력을 가진 배우 수백 수천 명을 쓸 수 있다면, AI에 의해 생성된 월드에서 진짜로 그 세계의 주민이 된 것 같은 느낌을 플레이어에게 전달하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 아닐 거야.
민준이 만든 그 AI는, 게임의 배경이 SF이든, 2차 세계대전이든, 레이스 서킷이든, 판타지 월드이든 간에, 언제나 그 세계의 모든 정보를 완벽하게 주입 당한 상태에서 플레이어에게 완벽한 연기를 선보이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게 가능하다면, 정말로 민준이 말하는 대로 유저가 원하는 월드를 자유자재로 생성해내는 ‘게임을 만드는 게임’의 제작이 가능할지도 모르지.
수백 수천 번을 플레이해도 질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체 이 게임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그런 게임 말이야.”
확실히 만들수만 있다면 아이디어 자체는 매력적이긴 했다.
그러나 지수는 PTW의 특이한 구조 때문에 그 게임의 제작이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상혁에게 어필했다.
“좋아요. 만약 오빠들이 말한 아이디어가 전부 가능하다고 쳐요.
그래도 어떤 장르든 다 포함하는 게임이란 건 정말 말도 안되는 볼륨을 가진 게임이 될 거예요.
상혁 오빠의 말대로, PTW 전 직원이 5년 이상 달려들어도 완성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게임이.
그런데 문제는, PTW는 ‘단순히 이걸 만듭시다’라고 상혁오빠가 말한다고 해서 전 직원이 우르르 달려들어 게임을 만드는 그런 회사가 아니라는 거죠.
PTW 직원들에게는 프로젝트 선택의 자유가 있어요.
그리고 그 자유는, 심지어 프로젝트의 발안자가 회사의 CCO인 상혁오빠라 할지라도 작업자 개개인의 마음에 들지 않는 프로젝트라면 거부할 수 있는 자유이기도 하고요.
물론 그런 PTW의 방식이 지금의 PTW를 만들어낸 방식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회사 전체가 뛰어들어야 하는 프로젝트에는 한없이 불리한 방식인 것도 사실이에요.
분명 누군가는 설명을 다 듣고서도 이 게임이 절대 완성될 수 없을 거로 생각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이 게임의 비전 자체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런 자유분방한 회사 정책 속에서, 오빠는 어떻게 전 직원이 이 프로젝트에 뛰어들게 할 건가요?”
“혹시 꿈의 구장이란 영화 알아?”
상혁이 뜬금없이 1989년에 나온 고전 영화를 언급하자, 지수는 벙찐 표정이 되었다.
그러자 상혁은 그런 그녀를 앞에 두고 영화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그 영화에서는 아이오와에 사는 한 중년 남성이 자신의 옥수수밭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어.
신은 그에게 이렇게 말하지.
‘그것을 만들면, 그가 올 것이다 ( If you build it , he will come ).’
여기서 말하는 그는 전설 속으로 사라져간 야구선수를 말하는 건데, 그 남자는 정말로 그 말을 믿고 자신의 옥수수 밭을 밀어버리고 그 자리에 야구장을 지어.
아무도 찾아올 리 없는 시골 변두리의 옥수수밭에, 허름함 그 자체인 야구장을 만든 거지.
난 이 게임이 그 꿈의 구장과 비슷하다고 생각해.
일단 지어놓기 시작하면, 그들이 올 거라고.”
“강제가 아닌 자발적인 참여로 전 직원들이 참여하길 기대한다고요?”
“우리가 만드는 게임이 그 정도로 대단하다면, 분명 그렇게 되겠지.
수많은 게이머의 모든 욕망을 받아줄 수 있는 게임이라면, 그 전에 수많은 개발자의 모든 욕망을 받아줄 수 있는 게임이 되어야 할 테니까.”
“진짜···. 꿈같은 이야기네요···.
미친 이야기이기도 하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 혼자서는 야구장을 지을 수 없지.
여기 민준이 있지만, 그걸로는 부족하고.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시간이 꽤 오래 걸리게 될 거야.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부탁할게.
지수야.
이 프로젝트의 서브 프로듀서 자리를 맡아서, 나와 함께 이 꿈의 구장을 지어주지 않을래?”
상혁은 그렇게 말하며 지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지수는 상혁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장을 한번 보고는, 다시 한번 상혁의 손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하아···. 솔직히 말해서, 이건 지금까지 오빠가 말한 것 중에 가장 미친 아이디어의 게임이에요.
하지만 그만큼 미칠 듯이 매력적이기도 하고요.
모든 게이머의 욕망을 받아줄 수 있는 게임이라.
오빠라면 확실히 완성할 수 있는 거죠?”
“네가 도와준다면.”
상혁의 말을 들은 지수는 그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상혁을 향해 말했다.
“5년 후에 ‘아, 이건 진짜 불가능하겠다. 미안.’ 이러면 진짜 농담으로 끝나지 않을 거예요.”
“절대 그렇게 되지 않게 해야지.”
“좋아요. 그럼 저도 낄게요.
하지만 세 사람으로도 구장을 짓기엔 부족한 것 같은데, 나머지 멤버들은 어떻게 구할 생각이에요?
지금은 보고 찾아올 구장도 없는 상태인데?”
“고전적이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한명 한명 찾아가서 설득해야지.
꿈의 구장을 짓는 데 가장 도움이 될 만한 핵심 인원을 중심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상혁이 민준을 향해 말했다.
프로그래머와 기획자, 오직 두 사람만 있었던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그럼 다음은 AD를 확보하러 가 볼까?”
지금도 작업 공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서연을 떠올린 상혁.
상혁은 PTW의 근본이라 할 수 있는 ‘원년 멤버’들을 소집할 생각이었다.
***
‘PTW 임원들이 모여서 뭔가를 진행하고 있다.’라는 소문은 생각보다 빠르게 퍼져나갔다.
워낙 회사 안에서 비중이 큰 멤버들이니 만큼, 작업을 위해 빠지는 시간이 생기면 바로 티가 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물론 PTW의 임원들은 모두 현업 최일선에서 뛰는 개발자들이었기에, 그들이 작업을 위해 자리를 비우는 것은 그리 보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상황은 조금 다른 것 같다는 소문이 회사 안에 돌고 있었는데, 지금까지는 대부분이 서로 다른 프로젝트에 배치되어 교대로 자리를 비우던 멤버들이 모두 ‘부실’에 모여 뭔가의 작당 모의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KOH와 무한의 바다라는 대형 프로젝트가 끝나고 전 직원이 여유롭게 휴식을 즐기고 있던 상황에서, 업계 전설로 불리는 PTW의 임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뭔가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은 PTW 직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기에, 작게 시작된 소문은 점점 덩치를 불려가며 그 존재감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으레 이런 소문들이 흘러가는 방향이 그렇듯 이 소문 역시 직원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불안감을 자극하며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고.
결국, 당사자인 임원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직원들의 마음속에 있는 불안감은 변질된 소문의 확산이란 형태로 표현되었다.
‘PTW 임원들이 단체로 은퇴 계획을 짜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루머부터, ‘임원들이 단체로 회사를 매각하려고 한다.’라는 소문까지.
물론 개중에는 ‘차기작을 기획하기 위해서 모인 게 아닐까?’라는 정상적인 추측도 있었지만, 그 의견은 바로 기각되고 말았다.
‘저 멤버들이 다 한자리에 모여야 할 만큼 압도적인 스케일의 게임이 존재할 리 없다.’라는 황당한 이유로.
심지어 스타 시티즌 같은 거대 스케일의 게임도 2~3개 정도는 동시에 개발할 수 있는 개발력이 있다고 평가받는 PTW에서, 차기작 하나를 위해 모든 임원들이 소집되었다는 것은 직원들이 생각하기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고작 차기작 개발을 위해서 저 멤버들이 한 달째 전부 한자리에 모여있다는 건 말이 안 돼.
지금의 PTW 임원들은 다른 회사로 치면 개개인이 전부 대형 개발사의 스튜디오 치프 자리는 손쉽게 차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그 사람들이 차기작 개발을 위해 모였다는 건, 말하자면 미야모토 히게루와 리드 마이어, 히데오 카즈마와 피터 몰라뉴가 게임 하나를 만들려고 모이는 거랑 같은 거라고.
그중에 한 사람만 있어도 충분히 어떤 게임이든 만들 수 있는데, 굳이 전부 모여서 프로젝트 하나를 만들 이유가 없지.”
“그럼 역시 매각인가?”
“다들 나이가 있으니까, 특히 원년 멤버들 중 상당수는 고등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하이페이스로 게임 개발을 해왔다고 하고, 이제는 그만 쉬고 싶은 게 아닐까?”
“솔직히 나도 KOH를 통해 게임이란 매체가 보여줄 수 있는 스케일의 끝이 뭔지 보여줬다고 생각해.
어쩌면 이제는 기대감에 가득 찬 유저들을 그 이상으로 더 놀라게 해주는 게 불가능할지도 모르고.
진짜로 손뼉 칠 때 떠나기 위해서 은퇴 계획을 짜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지.
만약 그들이 지금 은퇴한다고 해도, 그들이 세운 업적은 그 누구도 깰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업적으로 남을 테니까.”
“난 인수는 아니라고 본다.”
“어째서?”
“지구상의 어떤 회사도 PTW가 가진 자산 가치를 지급할 수 있는 여력이 있을 것 같지 않거든.
재벌들을 상대로 조단위 가격에 전용기를 팔아 제끼는 회사야.
미군 전체가 쓰는 장비의 핵심 부품과 소프트웨어를 조달하는 회사고.
그리고 풀 다이브 VR장비의 기술 특허를 가지고 있는 전 세계 유일의 회사지.
게다가 나이츠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등록한 특허만 수만 건이라고 들었어.
심지어 핵심 기술의 상당수는, 유출을 막기 위해 특허 등록까지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앞으로 20년, 아니 30년은 전 세계에서 비교할 상대가 없을 정도의 AI 기술력을 가진 회사지.
그리고 지금은 전 세계 선진국 유저 대부분이 사용하는 ‘새 인터넷’의 운영 권한을 가진 회사고.
게다가 지금은 ‘망가지는 순간 전 세계 산업의 절반이 붕괴된다.’라고 까지 평가받는 워크 패스트도 PTW 가 개발 및 배포하고 있지.
진짜로 돈을 긁어모으려고 하지 않아서 그렇지, 맘만 먹으면 와플이고 코카콜라고 다 씹어먹을 수 있는 회사가 PTW라고.
그런 회사를 사려면, 대체 얼마를 내야하겠어?”
“판다고 하면 살 사람은 많을걸.
물론 그 금액을 다 내려면 한두 개 기업이 아니라 여러 개의 초 거대 기업이 연합체를 구성해야 하겠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쪼개 파는 방법도 있지.
로봇 기술에 관심이 있는 회사는 나이츠 개발부서를, 게임 개발에 관심이 있는 회사는 PTW 본사나 PTW LAB의 일부를 사가는 식으로.
그렇게 따지면 파는 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야.
게다가 PTW의 지분은, 잘 알려진 대로 CCO 이상혁이 100% 가지고 있으니까.”
“99.9999%겠지.
삼정 회장 이주용이 1주 가지고 있잖아.”
“의결권도 없는 1주 그거 어따 쓰라고.
물론 그런 독특한 지분 구조 덕분에 PTW가 주주들의 매출 압박을 받지 않고 소신대로 게임을 마음껏 개발할 수 있는 회사가 된 건 사실이지만, 반대로 그래서 CCO인 이상혁이 임원들과 함께 회사를 매각하려 마음먹으면 막을 방법이 없어.
어쩌면 마음의 준비를 해야할 순간일지도 모르지.”
“아···. 싫다.
지금의 임원들이 아닌 다른 임원들이 지배하는 PTW라니,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아.
분명 개 쓰레기 같은 새끼가 위에 와서 이래라저래라 훈수 놓다가 무지갯빛 깃발이 가득한 PC로 점철된 이상한 게임을 만들게 될 거라고.”
물론 상혁은 현주를 통해 직원들의 이런 불안을 전부 전해 듣고 있었지만, 굳이 그것에 대해 반응하지는 않았다.
직원들의 불안 해소를 위해 신경 쓸 여유가 없을 정도로, 지금 맡은 프로젝트의 스케일이 무지막지하게 거대했기 때문에.
상혁은 벌써 한 달째 모든 작업을 뒤로 미룬 상태로 천하대 본사에 있는 PTW 부실에서 임원들과 함께 ‘게임을 만드는 게임’의 초안을 잡고 있었다.
“그냥 서프라이즈 프로젝트 중이라서 그런 거라고 둘러대고 밀린 휴가나 가라고 해요.
진짜로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그때부터는 몇 년 동안 휴가가 문제가 아니게 될 수도 있으니까.”
물론 PTW라는 회사의 특성상 가겠다는 휴가를 굳이 만류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쉴 시간을 충분히 보장하기 위해, 파다완 급 이상의 모든 직원들에게 주 4일의 업무 시간만을 요구하는 것이 PTW라는 회사였기 때문에.
그러나 회사에서는 주 4일만 출근하라고 해도, 프로젝트에 꽂힌 개발자들은 알아서 출근해 진도를 뽑는다.
손을 댈수록 결과물이 재미있어지는 것을 두 눈으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리얼 엔진의 특성 상, 개발자 자체가 본인이 만드는 프로젝트에 미칠 듯이 빠져드는 것이 PTW 직원들의 특징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이런 장기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전에, 상혁은 개발자들이 충분한 휴식을 하게 하고 싶었다.
못 보던 드라마도 보고, 영화도 보고, 만화도 보고, 게임도 하면서.
KOH와 무한의 바다라는 두 거대 프로젝트를 개발하며 텅 비어버린 그들의 가슴 속에 새로운 욕망이 자리 잡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것은 이번 프로젝트에 PTW의 전 직원을 끌어들이기 위한 필수 조건이라 할 수 있었다.
“회사 차원에서 여행 비용 지원해주고 게임기도 하나씩 다 사주고 휴가 기간 중에 구매하는 게임 비용도 전부 낸다고 해요.
애니메이션 블루레이 구매비도 지원하고 피규어 구매비도 지원해주세요.
다들 뒤도 안 보고 열심히 달렸으니 그 정도 플렉스는 누려야죠.
앞으로 6개월 간, PTW는 전력으로 휴식 모드에 들어갑니다.
그 기간 직원들이 가입하는 모든 OTT 비용과 영화 티켓 구매 비용, 홈시어터 구매 비용, 놀이공원 이용 비용과 여행 비용, 아무튼 노는 데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영수증만 내면 회사에서 지불하도록 하죠.
넷플릭스와 디즈니 플러스, 왓챠와 웨이브, 애니플러스와 라프텔까지 OTT란 OTT는 전부 다 동시 가입하고 보고 싶은 거 골라서 보라고 하세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삼정에 연락해서 직원 모두에게 홈 시어터를 세트로 제공해도 되고요.
어차피 직원 대부분이 싱글인데다 회사에서 지원하는 아파트에 살고 있으니 집에 공간은 있을 거고, 집 구조도 저희가 알고 있으니 딱 맞는 시스템을 대량 구매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상혁이 그렇게 말하자 현주가 물었다.
“하지만 PTW 직원들은 안 그래도 업계에서 연봉이 제일 높은 사람들이야.
그 사람들이 원한다면, 굳이 우리가 주지 않아도 전부 사지 않았을까?”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놀아라.’라고 푸쉬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게 목적입니다.
그리고 기간이 한정되어 있어야, ‘지금이 아니면 못 놀겠구나!’ 하는 압박감이 생기죠.
진짜로 몸만 가서 놀고 오면 되게, 아예 아키바를 경유하는 여행 코스도 짜서 게으른 덕후들을 단체로 여행 보내세요.
저희 전용기도 있지 않습니까?
전 좌석이 일등석으로 개조된 무지막지한 전용기가.
이번 기회에 뽕뽑는다 생각하고 미친 듯이 돌려요.
미친 듯이 게으르고 돌아다니기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도저히 안 끼고는 못 버티게.
굳이 제가 이렇게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선생님이라면 직원들을 어떻게 하면 놀게 만들 수 있을지 잘 알고 계시잖아요?
선생님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세상에 일하지 말고 놀게 하려고 전력을 쏟아야 한다니···.”
“자고로 인간의 욕망은 휴식에서 나오는 거니까요.
때로는 놀고, 먹고, 사고, 보고, 만지면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있는 법이죠.
지금 저희가 만들려는 프로젝트는, 그 욕망의 힘이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가 될 거고요.”
제자들이 만들고 있는 게임에 대해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그녀는 상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진지한 표정으로 상혁을 향해 말했다.
“나한테 맡겨. 우리 직원들에게 천국이 뭔지 보여줄 테니까.”
“왠지 여주인공을 앞에 둔 산적이 할법한 대사 같긴 하지만, 정말로 지금은 그게 필요한 상황이니까요.
선생님만 믿고 있겠습니다.”
현주는 상혁을 향해 싱긋 미소지은 뒤, 미친 듯이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제자들을 뒤로한 채 부실을 나섰다.
그리고 그녀가 그렇게 부실을 나선 지 정확히 일주일 후, 전 세계 게임업계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하나 돌기 시작했다.
‘PTW가 돈이 너무 썩어나서 주체를 못 한 나머지 직원들에게 미친듯한 복지를 베풀기 시작했다.’라는 소문이.
그것은 직원 한명 한명을 영혼 깊은 곳까지 파악하고 있는 PTW의 CEO.
김현주가 ‘전력’을 다하면서 만들어진 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