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갓겜 제작법-467화 (468/485)

467. 영웅의 자격

[메인 파일럿과 서브 파일럿이 연출한 각본 없는 드라마.

두 사람의 뜨거운 희생이 전 세계를 울리다.]

[매번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임펙트를 전해주고 있는 PTW의 웹드라마 ‘퍼스티스트’.

회당 수천억이 투자된 하이퍼 블록버스터 드라마를 가볍게 능가하는 흥행 비결은?]

[PTW의 독도 이벤트.

절대 넘을 수 없을 것이라던 뉴욕 이벤트의 화려함과 비장함을 단숨에 넘어서며 시청자들의 최애 에피소드 1위로 등극!]

[순식간에 최고 인기 나이츠 ‘즈라드’의 자리를 넘어선 ‘RebirthDP’와 파일럿 ‘마성준’.

해당 나이츠의 자세한 스펙과 파츠 구성, 전투 스타일에 대해 심도 깊게 파헤쳐보자.]

[독도 이벤트에서 장렬하게 폭사한 미소녀 ‘티르네’의 정체는?

KOH의 세계관 속 머신 스피릿의 존재와 프로젝트 퍼스티스트에 참가 중인 서브 파일럿의 개념에 대해 알아보자.]

[마스터를 향한 무한한 애정 외에도 그 귀여운 외모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머신 스피릿 ‘티르네’.

그녀의 정체는 전 아이돌 지망생?]

[일본 정부 관계자의 발언.

‘솔직히 이벤트 장소에 대해 항의하고 싶은 마음은 지금도 굴뚝같지만 이번에 보여준 이벤트의 내용은 로봇과 미소녀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가슴을 울리는 이벤트였다.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왈가왈부하는 것은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일일 것.’]

[방송 영상 중 등장했던 ‘작은 흠집.’

그 정체는 일본 정부에서 요청한 메시지?

PTW의 공식 입장 - ‘알 수 없는 기술적 오류로 인해 원래 의도보다 작은 크기로 메시지가 삽입된 것.’]

[이번 이벤트의 1등 수훈자인 머신 스피릿 ‘티르네’.

공식적으로는 사망 처리되어 프로젝트에서 하차하게 된 그녀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그 대단했던 뉴욕 이벤트보다 더 뜨거운 반향을 일으킨 독도 이벤트는, 예정에도 없던 머신 스피릿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말 그대로 폭발적인 반응을 끌어냈다.

웹 드라마를 보지 않는 네티즌들이 게시판마다 점령된 독도 이벤트 이야기를 보며 ‘제발 독도 이야기좀 그만해애애!!’라고 화를 낼 정도로.

그러나 잔뜩 흥분한 팬들은 그런 네티즌에게도 ‘헤이! 츄라이 츄라이!’를 시전하며 웹 드라마 ‘퍼스티스트’의 팬이 되라고 꼬드겼고, 결국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보자.’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PTW의 홈페이지에서 웹 드라마 1화를 보는 순간 드라마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단순히 분위기를 내기 위해서 ‘모양만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세트가 아닌, 실제 내부에서 생활하는 파일럿의 생활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세트 설비들.

‘미래의 생활이란 이런 것이다’를 온몸으로 보여주려는 듯 편리함의 극치를 달리는 부유 요새에서의 생활.

게다가 실물 특유의 위압감을 그대로 뿜어내는 실제 나이츠들의 번쩍이는 외형과, 모든 촬영 전 철저하게 코디 네이트를 받은 상태에서 드라마에 출연하는 ‘퍼스티스트’ 멤버들의 수려한 외모.

하나같이 작은 키를 가졌지만 마치 게임 속에서 그대로 튀어나온 듯한 모습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머신 스피릿’들의 모습까지.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가상인지 모를 듯한 웹 드라마의 내용 전부가 하나같이 매력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수많은 네티즌들은 ‘제발 KOH 얘기 좀 그만해!’라고 불평을 쏟아내다가 올라오는 게시글의 스크린샷이나 웹 드라마를 추천하는 낚시 글에 낚여 웹 드라마를 시청하게 되고, 다음날엔 그 좀비 무리들의 일원이 되어 ‘츄라이 츄라이’를 외치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마치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같은 삶을 누리는 퍼스티스트 멤버들을 보며 부러움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았다.

드라마를 통해 비친 그들의 하루하루가, 말 그대로 즐거움과 도전으로 매일같이 반짝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프로 나이츠 파일럿이 되어 저 시설에 들어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게이머들은 웹 드라마를 보는 시간을 제외하면 잠을 자는 시간까지 쪼개가며 KOHA의 랭크를 올리기 위해 애썼다.

최상위권의 플레이어가 되어 국가 대표 나이츠 파일럿 팀의 일원이 되면, 월드 파이널 기간 동안 드라마 속에 등장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한 달여의 꿈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기대를 걸면서.

그러나 단순히 웹 드라마의 화려한 전투에 혹해 게임을 시작한 사람들이 쉽사리 적응할 수 있을 정도로, KOHA란 게임은 만만한 게임이 아니었다.

[인간적으로 KOHA 조작난이도 실화냐?

버튼이 200개는 되는 것 같은데, 저 파일럿들은 그럼 저걸 다 외워서 누르면서 그렇게 빠르게 움직이는 거라고?]

↳ 처음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익숙해지면 진짜 로봇 파일럿이 된 기분으로 조작할 수 있는 시스템임.

버튼 배치도 자주 쓰는 동작의 동선을 고려해서 배치되어있고 배우면 배울수록 ‘아 이 버튼이 이래서 여기 있었구나.’하고 감탄하게 된다니까?

↳ 그래도 나한텐 너무 어려워.

드라마에 나온 파일럿들이 진짜 멋지게 조종하기에 나도 그렇게 조종하려고 해 봤는데, 같은 세팅을 해도 내가 조종하는 나이츠는 무슨 취권 쓰듯이 흐느적거려.

거기에 출력은 분명 사용 가능한 수준인데도 즈라드가 쓰는 양날 도끼는 컨트롤이 거의 불가능하더라.

무슨 시스템 어시스트 같은 게 있는 거 아냐?

↳ 혹시 1화부터 끝까지 안 봤냐?

↳ 어. 중간부터 보기 시작했는데?

↳ 즈라드 파일럿 최현민이 그 기술 습득하느라 트레이닝하는 과정 보면 진짜 기가 찰 정도임.

애당초 처음 휘두를 때부터 적에게 맞고 튕겨 나가는 것까지 전부 고려해서 궤적을 설계한 다음 그 궤적에 맞춰서 관성 주는 식으로 사용하는 무기야.

거의 무술 훈련 수준의 트레이닝을 받아야 그 스펙에서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무기라고.

↳ 젠장. 그럼 즈라드 같이 플레이하는 건 무리인가?

↳ 트레이닝 내용은 웹에 전부 공개되어있으니 그거 보고 연습하면 돼.

그 말도 안 되는 훈련량을 따라갈 수 있다면 말이지.

이처럼 웹 드라마를 보고 혹해서 PRD를 구매한 수많은 사람들이, KOHA의 혹독한 조작 난이도에 고생하는 사이, 정작 대박을 치고 있는 것은 ‘무한의 바다’였다.

KOHA를 플레이하기 위해 PRD를 샀다가, 그 어려운 조작 난이도 때문에 이른바 ‘쉬운 게임’인 무한의 바다에 눈을 돌리는 사람들이 넘쳐나기 시작했기 때문에.

게다가 어느정도 실력이 궤도에 올라야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KOHA와는 다르게, 무한의 바다는 시작부터 피부로 체감할 수 있는 재미들로 가득한 게임이었다.

그런 이유로 월드 이벤트가 시작된 이후로 PRD와 KOHA의 매출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수직으로 상승하고 있었지만, 정작 동접 상황은 무한의 바다 쪽이 훨씬 빠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덩달아 KOHA 때문에 3천만 원이란 거금을 주고 PRD를 구매한 수많은 팬들이, 역으로 ‘무한의 바다’를 적극적으로 바이럴 하고 있었고.

그것은 두 게임이 가진 서로 다른 타겟 층에 의해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웹 드라마 때문에 PRD를 사고 KOHA로 풀 다이브 VR 게임을 처음 접했는데 막상 매일 하는 게임은 무한의 바다네.]

↳ 요즘 그 게임 이야기 자주 나오는데 그렇게 재밌음?

↳ 키를 잡을 땐 대항해시대가 되고 전투에 들어가면 캐리비안의 해적이 되며 마을에서 술 마시고 놀땐 VR 미니게임 모음집이 되고 유적에 들어가면 인디애나 존스가 됨.

세상 어느 누가 이런 게임을 사랑하지 않겠음?

↳ 나도. 나이츠의 콕핏에 실제로 앉아 보고 싶어서 KOHA를 샀지만 실제로 계속 플레이하게 되는 건 무한의 바다더라고.

↳ 갑갑한 사무실에서 지친 몸을 끌고 와 무한의 바다를 켜는 순간, 난 무한한 자유를 느껴.

PRS를 통해 전달되는 서늘한 해풍의 감촉도, 키를 잡은 손을 통해 전달되는 파도의 흔들림도.

내 앞에 기다리는 모험이 인디애니 존스 같은 느낌의 모험일지, 캐리비안의 해적 같은 느낌의 모험일지, 이 게임 속에서의 모험은 게임을 하는 내내 단 한 번도 내 예상과 맞아떨어진 적이 없었어.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모험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섬에 도착하기 전에 유적의 정보를 모으고, 그 정보를 토대로 유적 탐사에 필요한 스킬을 가진 선원들을 편성하여 발굴단을 꾸미는 것도 즐겁지만, 게임 안에 등장하는 수많은 퍼즐을 풀기 위해 이끼 낀 벽에 있는 다 헤진 문장을 해석하는 것도 즐거워.

그리고 왼손에 피스톨을 들고 오른손에 사브르를 든 채 한쪽 손이 갈고리로 되어있는 후크 선장같이 생긴 녀석과 갑판에서 1:1로 칼싸움을 하는 것도 아주 즐겁고.

처음 들린 섬에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주점 아가씨를 만나 짧은 순간의 로맨스를 즐기는 것도 즐겁지.

그러다가 사귀고 있던 선원에게 그 장면을 발각당해서 필사적으로 도망가야 했던 경험도 무지막지하게 즐겁고.

바람피우다 걸려서 도망가는데 뒤에서 피스톨 들고 쫓아 오는 애인의 모습을 보면, ‘아, 아무리 예뻐도 해적은 해적이구나.’라는 살벌한 기분이 든다니까?

↳ 나도 똑같이 KOHA하려고 PRD 샀다가 무한의 바다만 줄창 플레이하고 있는 유저인데, 그래도 KOHA를 접지는 못하겠더라

너무 어려워서 키고 나서 조작법 연습 좀 하다가 금방 끄게 되더라도, 웹 드라마 보면 또 뽕 차서 다시 켜게 됨.

그 무한의 굴레에서 벗어나질 못하겠어.

그렇게 웹 드라마를 통해 KOHA에 입문했다가 그 높은 진입 장벽에 좌절한 사람들의 글이 자주 올라오고 있었지만, 그와는 정반대의 내용이 담긴 글들도 간간이 올라오곤 했다.

그런 글들은 주로 근성으로 기어이 KOHA의 조작법을 마스터하는데 성공한 유저들이나, 프로 나이츠 파일럿을 목표로 미친 듯이 KOHA를 플레이하는 유저들이 올리는 글이었는데, 그 후기에서는, KOHA의 복잡한 조작법에 대한 신앙심에 가까운 찬사가 가득 담겨 있었다.

[다들 복잡하다 복잡하다 하는데 KOHA는 엄밀히 말하면 실존하는 로봇을 그대로 조작하기 위해 만들어진 트레이닝 시뮬레이터라고.

비행기 조종석이 복잡한 것이 당연한 것처럼, KOHA의 콕핏 내부가 복잡한 것도 당연한 거지.

그것에 대해 불평한다는 건, 말 그대로 ‘난 실물 비행기가 몰고 싶은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놨냐.’라고 불평하는 거나 다름없어.]

↳ 나도 이 글에 동의한다.

솔직히 난이도야 머신 스피릿한테 조작 대부분을 어시스트 받으면 그리 높은 편이 아니잖아.

대신 조작 어시스트를 맡길수록 장비 용량이 줄어드니까 원하는 세팅을 하기는 어렵지만.

그건 몬스터 훈타도 마찬가지 아님?

방어에 집중하면 공격 성능을 포기해야 하는 것처럼.

내가 한 대도 안 맞고 다 피할 자신이 있으면 공격에 몰빵한 세팅도 쓸 수 있는 거지.

↳ 근데 본인 실력이 부족해도 동경하는 세팅으로 플레이 하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나 하지 않음.

퍼스티스트 멤버들이 사용하는 세팅이라던가.

↳ 그건 진짜 지옥 수준으로 집중 트레이닝 받았으니까 할 수 있는 세팅임.

일반 게이머야 그냥 계속 대전 돌리면서 이번 판은 잘했네, 이번 판은 못했네 정도로 때우고 끝나지만, 퍼스티스트 멤버들은 매번 훈련 과정이 끝날 때마다 전문가들이 단체로 붙어서 버튼 누르는 타이밍까지 전부 검토해주더라고.

그리고 그 검토를 바탕으로 아무 때라도 조건 반사적으로 몸이 버튼을 누를 수 있을 때까지 수없이 반복 트레이닝하고.

↳ 지금 KOHA 최상위권 유저조차도 퍼스티스트 멤버들의 플레이를 따라가기 버거워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겠지.

애당초 퍼스티스트 멤버들 자체가 수십만 명 중에 뽑힐 정도로 재능이 넘치는 사람들인데, 거기에 나이츠를 개발한 엔지니어부터 밸런스를 담당한 개발자까지 전부 붙어서 지도를 하고 있으니까.

아마 1년 후에 웹 드라마 프로젝트가 끝나고 전부 FA로 풀리고 나면, 멤버들 전부 프로 리그팀에서 한 자리씩 꿰찰 수 있을걸?

거기에 전용기까지 약속받은 상태니까, 최후까지 생존할 수 있는 멤버가 가진 가치는 상상을 초월하겠지.

↳ 생존 이야기하니까 떠올랐는데, 마성준이랑 티르네는 어떻게 됨?

폭사한 RebirthDP야 어차피 진짜 나이츠가 부서진 것도 아니니 한 대 더 복구하면 그만이지만, 머신 스피릿인 티르네는 규정상 리타이어 처리된 거 아님?

↳ 지금 그 문제 때문에 PTW 홈페이지에 청원 페이지까지 올라감.

규정상 리타이어가 맞기는 하지만, 설정으로 보면 머신 스피릿은 일종의 AI나 다름없으니, ‘티르네의 데이터가 담겨 있는 부품을 회수 해서 복구했다’ 라는 식으로 부활시켜달라는 청원이 올라왔거든.

그리고 실제로 KOHA라는 게임 안에서 파일럿과 머신 스피릿이 타고 있는 코어의 내구력은 거의 절대적인 수준이라서, 게임 안에서는 머신 스피릿의 사망이란 개념 자체가 구현이 안 되어있기도 하고.

보통 KOHA 안에서는 나이츠가 걸레짝이 되어도 코어는 무조건 남거든.

그런 설정을 감안하면 티르네 역시 생존한 거로 보아도 좋지 않냐는 주장을 하는거지.

↳ 공식 발표에서는 뭐래?

↳ 아직이야. PTW에서는 검토 중이라는 말만 반복하고 있어.

예상에도 없던 돌발 행동으로 마스터를 구하고 자폭한 ‘티르네’의 처리는 PTW 입장에서도 매우 골칫거리라 할 수 있는 문제였다.

팬들의 요청대로 부활을 시키자니 본인의 의지로 택한 장렬한 희생의 무게감이 손상될 위험이 있었고, 당사자 본인도 부활을 바라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티르네에게 구원받은 RebirthDP의 마스터 마성준은 강력하게 티르네의 부활을 원하고 있었다.

다른 머신 스피릿과 나이츠에 탑승하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결국, 그 문제로 고심하던 상혁은 성준과 티르네를 동시에 불러 비공개 삼자대면을 실시했다.

그곳에서, 이벤트 종료 이후로 머신 스피릿 없이 훈련에 불참하고 있던 성준은 티르네의 모습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를 질렀다.

“티르네!”

“마스터. 오랜만입니다.”

그러자 티르네를 미팅 장소에 데려온 상혁이 진지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향해 말했다.

“우선 이 방은 아무런 녹화 설비가 되어있지 않은 오프 더 레코드 전용 방입니다.

그러니까 이 안에서만큼은, 방송 프로젝트와 관계없이 대등한 입장에서 이야기를 진행했으면 합니다.

성준 씨는 레비아탄의 리더 마성준이 아닌 게이머 마성준으로.

티르네 씨는 머신 스피릿 티르네가 아닌 퍼스티스트 프로젝트의 참가자이자 RebirthDP의 머신 스피릿의 ‘대역’을 맡고 있는 PTW 직원 ‘유가연’으로써 말이죠.”

“그 말씀은 이 방 안에서는 현재 맡은 배역을 연기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마성준은 혼돈에 빠졌다.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그에게 있어서 현재의 유가연은 머신 스피릿인 티르네 그 자체나 다름없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는 배역으로서의 그녀가 아닌 ‘일반인’으로서의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자 상혁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멍한 눈으로 가연을 바라보는 성준을 향해 말했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색한 기분은 이해합니다.

이따금 영화배우들도, 영화를 촬영하는 과정에서 배역과 본인을 구분하기 어려워하는 경우가 있으니까요.

특히 ‘해리 버터’ 같은 장편 시리즈를 어린 시절부터 장기 촬영하다 보면 배우로써의 배역으로 지내는 시간이 현실의 자신으로 지내는 시간보다 더 길게 느껴지기도 하죠.”

“딱 그런 기분이긴 합니다.

비록 프로젝트가 시작한 지는 2달이 약간 넘은 시점이긴 하지만요.

그 기간 내내 저는 부유 요새 레비아탄의 리더로 살면서 앞에 있는 가연 씨를 제 파트너인 머신 스피릿 티르네로 대하며 지냈죠.

처음엔 그게 오히려 더 어색한 기분이었지만, 지금은 반대네요.”

“저도 그래요. 심지어 저는 성준 씨를 만나기 전부터 머신 스피릿의 배역을 맡기 위해 오랜 기간 훈련해왔으니까요.

그리고 5차 NE 컨벤션을 통해 성준 씨를 만났고, 그 이후로는 24시간 내내 RebirthDP의 머신 스피릿이라는 자각을 잊지 않으며 살아왔죠.

독도 해상전 마지막에서의 사건도, 그렇게 배역에 몰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벌어진 ‘행동’의 하나일 뿐이고요.”

가연의 말을 들은 상혁이 눈을 반짝이며 그녀에게 말했다.

“‘행동’이라···. ‘사고’라던가 ‘연기’라는 표현은 쓰지 않으시는군요?”

“그때의 저는 저 자신이 완벽하게 티르네 본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머신 스피릿 티르네의 성격이라면, 그 상황에서 100% 저와 같은 행동을 할 거로 생각했고요.

KOH안에 등장하는 머신 스피릿은 그 수에 걸맞게 수없이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티르네는 그 많은 머신 스피릿 중에서도 마스터에 대한 유대감이 특히 강한 성격을 가진 머신 스피릿이죠.

전 이번 이벤트에서 그런 티르네의 성격을 완벽하게 구현해야 하는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고요.”

“뭐 가연 씨의 말은 정당한 캐릭터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벤트 이후에 소집한 검증위원회에서 티르네의 AI를 같은 상황에 집어넣었더니 AI고 구현된 티르네가 가연 씨와 정확히 같은 행동을 했으니까요.”

상혁은 ‘심지어 같은 상황에서 AI가 내뱉은 대사도 가연 씨가 했던 대사와 똑같이 나와서 소름이 돋았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이번엔 여전히 상혁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가연이 서 있는 방향만을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는 성준에게 물었다.

“성준 씨.”

“예.”

“우선 결정 사항만 말씀드리자면, 티르네의 프로젝트 재참가는 불가합니다.”

“하지만 부활시켜달라는 팬들의 요청도 있고, 게다가 설정상으로도 복구가 불가능한 것은 아닌 게···.”

“그 설정에 기반한 결정입니다.”

상혁이 말했다.

“저희 PTW에서는 이번 사태를 매우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기에, 이벤트가 종료된 직후 PTW 내부의 전문가들을 소집하여 검증위원회를 꾸렸습니다.

그렇게 모인 검증위원회에서 주로 검증하고자 한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가연 씨가 머신 스피릿 티르네로서 내린 판단이, 배역의 역할을 뛰어넘어 AI가 아닌 사람의 의사가 개입된 판단인지, 아니면 티르네의 AI 역시 같은 상황에서 같은 판단을 내릴 수 있는 AI인지.

그리고 에서, 실물 나이츠를 고압 쳄버에 넣은 뒤 같은 환경에서 이벤트에 사용되었던 무기와 동급의 폭발력을 가진 TNT와 함께 터트렸을 때 머신 스피릿의 콕핏이 해당 파괴력을 충분히 버틸만한 내구력을 가졌는지.

우선 첫 번째 검증은 조금 전 가연 씨에게 말씀드린 대로 독도 이벤트에서의 가연 씨가 내린 판단이 AI티르네가 내린 판단과 다르지 않다는 결론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문제는 두 번째였죠.”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시다시피 나이츠는 파일럿을 보호하기 위해 엄청나게 단단한 코어를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미사일에 직격당해도 코어내부의 파일럿은 치명상을 입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죠.

하지만 그 방어력은, 어디까지나 기능 전체가 정상적으로 동작할 때 보장되는 방어력입니다.

예를 들어 비슷한 수준의 파괴력을 가지고 나이츠를 공격한다면, 나이츠는 방패가 없는 상황에서도 그 공격을 어렵지 않게 막아낼 수 있었을 겁니다.

백 스탭을 밟던 한쪽 팔을 희생하던, 어쨌든 코어에 데미지가 최소화되는 방향으로 움직여 파일럿을 보호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문제는 해당 자폭이 수중에서 이루어졌다는 겁니다.

티르네는 별다른 추가 기동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마스터를 탈출시키기 위해 장갑을 열고 메인 콕핏을 사출시켰죠.

그리고 내부 장비가 환하게 노출된 상태에서 폭발을 맞이했습니다.

당시 RebirthDP가 사용한 무기의 화력, 폭발 중심과 코어와의 거리, 가슴 장갑이 열린 상태에서 노출된 내부 장비의 내구도.

그 모든 것을 감안 하여 진행된 파괴 실험에서, 저희는 머신 스피릿이 탑승한 서브 파일럿 시트에 복구 불가능한 수준의 데미지가 가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머신 스피릿은 설정상 일종의 AI데이터이지 않습니까.

콕핏이 파괴되었더라도, 데이터가 담겨 있는 부품이 멀쩡하다면···.”

“그 부품이 그 깊은 동해 한가운데서 산산 조각나서 가라앉았습니다.

잠수부도 못 들어가는 그 심해에서, 그 잔해를 건져낼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 말씀은···.”

“공식적으로 RebirthDP의 머신 스피릿 티르네는 완전 소멸 처리되었다는 소리죠.

이후 프로젝트 퍼스티스트에서 머신 스피릿 티르네와 유가연 씨가 출연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티르네가 복귀하지 않으면 제가 프로젝트 퍼스티스트에서 하차한다고 해도 말입니까?”

“규칙은 규칙이니까요.

여기서 복귀가 허가된다면, 이후 있을 방어전에서 누구나 목숨을 소중히 여기지 않게 될 겁니다.

어차피 멋지게 죽으면 부활시켜줄 텐데, 위험을 무릅쓰고 최대한 멋지게 죽으면 되겠지라는 생각이 파일럿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게 되겠죠.

게다가 그것을 막기 위해 이후 이탈되는 멤버의 부활을 거부한다면, 누구는 부활시켜줬는데 왜 누구는 안 해 주냐는 식으로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고요.

이 부분에서는 확실히 원칙을 따르는 것이 나을 것이라 봅니다.

게다가, 가연 씨 본인의 의지도 확고하니까요.”

“가연 씨?”

성준이 절망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가연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지난 두 달간 진심으로 전력을 다해 서포트했던 자신의 마스터를 향해 말했다.

PTW의 직원 유가연이 아닌 RebirthDP의 파일럿이자 레비아탄의 리더인 마성준, 그가 가장 신뢰하는 머신 스피릿 ‘티르네’의 목소리로.

“마스터. 아마도 제가 성준 씨를 마스터라고 부르는 것은 이 자리가 마지막이겠죠.

그러니 이번 기회에 제 진심을 담아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마스터.

비록 제가 진짜 AI인 티르네는 아니었지만, 당신과 두 달 가까운 시간을 지내며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마스터를 지켜보았죠.

제가 본 마스터는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겉으로는 팀원들에게 자기만 믿으라고 소리치면서, 속으로는 밤새 노트에 온갖 작전과 세팅을 끄적이며 해결책을 찾는 사람.

리더로써의 신뢰에 손상이 갈까 봐 그 두꺼운 조종 메뉴얼을 통째로 외우면서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려고 하지 않는 사람.

서포트 중에 발생한 제 실수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면서도 제가 부담스러워하는 조작 전부를 마스터 컨트롤로 돌려 자기가 떠맡으려고 하는 사람.

아마도 티르네로서의 저는, 두 달이란 짧은 시간 동안 그런 마스터에게 진심으로 존경이란 감정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마스터 같은 파일럿이 프로젝트 중도에 하차하지 않았으면 했었던 거고요.

그러니 마스터는 이후로도 계속 레비아탄의 리더로 프로젝트에 참여해주셨으면 합니다.”

“하지만, 난 네가 서포트 해주지 않는 RebirthDP에는 타고 싶지 않아···.”

“그럼 이대로 하차하시려고요?

그럼 마스터를 살리려고 목숨까지 바친 저는 뭐가 되나요?”

“그건···.”

“저는 비록 웹 드라마 프로젝트에서 AI인 티르네의 대역을 맡고 있는 배우에 불과하지만, 그 누구보다 티르네라는 AI의 성격에 대해 잘 알고 있죠.

제가 아는 티르네라면, 아마 지금 같은 말을 하는 마스터에게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마스터가 이후에 펼치는 활약이 더 눈부실수록, 자신의 가슴 속에 품은 긍지도 더 커질 거라고요.

그리고 마스터가 전 세계의 수많은 파일럿 중에 가장 빛날 존재라는 것을 믿었기 때문에, 자신은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 마스터의 목숨을 살린 거라고요.”

“···.”

“저에게 애착을 가지는 것은 좋습니다.

머신 스피릿과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는 것은 나이츠 파일럿의 중요한 소양이니까요.

하지만 티르네가 목숨을 바칠 정도로 마스터를 소중히 생각했던 건, 마스터가 절대로 팀원들을 내버려 둔 채로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머신 스피릿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나이츠를 관장하는 AI이고, 본능적으로 영웅이 될 수 있는 파일럿을 동경하는 존재이니까요.

그리고 제가 본 마성준은, 그 어떤 파일럿보다 그 영웅이 될 자격이 가장 넘치는 파일럿이었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성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성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제가 마스터를 앞으로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최고의 파일럿이 되어주세요.

오늘 이후로 레비아탄 멤버들과 마스터가 등장하는 방송을 볼 때마다, ‘내가 저 사람의 목숨을 구했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도록.”

대답 대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성준을 보며, 그녀는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는 상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했죠? 제가 아는 마스터는 절대 이 정도 시련으로 좌절하지 않을 거라고요.

원래부터 노력의 화신 같은 사람이었으니, 이제부터는 진짜 무서운 파일럿이 되겠죠.

그 즈라드의 파일럿 최현민조차 한 수 접어야 할 정도로 대단한 파일럿이요.”

현재 조종 실력으로는 모두가 세계 최고라고 인정하는 최현민의 이름이 나오자, 성준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 그의 눈은 뜨겁게 불타오르는 각오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좋습니다. 상혁 씨가 권한대로, 새 머신 스피릿을 할당받도록 하죠.

그리고 그 최현민조차 찍소리 못할 정도의 압도적인 조종 실력을 보여주겠습니다.”

“가능하시겠어요?”

“그녀가 바란 게 그거니까요.

남은 프로젝트 기간은 이제 10 달 남짓.

그 정도 시간이면, 현민 씨의 즈라드를 능가할 만한 나이츠 파일럿이 된다는 충분한 시간일 테니까요.”

“그럼 좋습니다. 회의가 끝나는 대로, 현민 씨와 파장이 맞는 새 머신 스피릿을 준비해드리도록 하죠.

그 이후에 다시 팀 훈련에 합류하시면 될 겁니다.”

상혁의 말을 들은 성준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뭔가가 생각난 듯 상혁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저는 계속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치고, 이후 가연 씨의 처우는 어떻게 됩니까?

상혁 씨가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티르네의 부활을 원하는 팬들이 많은데요.”

그러자 상혁이 미소지으며 성준에게 말했다.

“그렇겠죠. 성준 씨와 마찬가지로, 가연 씨 역시 지금은 거의 무슨 슈퍼스타 수준으로 인지도가 올라갔으니까요.

게다가 프로젝트에서 하차하는 대로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하게 연결해달라는 요청도 엄청나게 많이 온 상태입니다.”

“그럼 바로 프리로 돌아가는 건가요?”

“아뇨. 그건 팬들이 원하는 바는 아닐 테니까요.

일단 규정과 원칙에 의해 부활은 불가능하더라도, 그녀를 다시 만나고 싶어하는 팬들의 마음엔 어느정도 보답할 필요가 있겠죠.

게다가 가연 씨 역시 이대로 프로젝트에서 빠지는 건 아쉬워하고 있고요.

그래서 그녀에겐 머신 스피릿이 아닌 다른 역할을 부탁할 생각입니다.”

“다른 역할이요?”

상혁은 그 ‘다른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성준에게 말해주지 않은 채로 삼자 회의를 마쳤다.

나중에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라면서.

그리고 며칠 후, 성준은 상혁이 말했던 그녀의 ‘다른 역할’이 무엇인지 웹 드라마를 보며 깨달을 수 있었다.

그에겐 그 어떤 목소리보다 편안하게 들리는 그녀의 밝고 귀여운 목소리가, 그가 보고 있는 퍼스티스트의 웹 드라마를 통해 들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부터 드라마 퍼스티스트의 나레이터로 합류한 유가연이라고 합니다!

그 전엔 티르네라는 이름으로 프로젝트에 직접 참가했었죠!

나이츠의 전(前) 서브 파일럿이자 전직 머신 스피릿으로써, 방송을 보는 여러분께 최선을 다해 나이츠 조종과 파일럿들에 대한 해설을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지금 보이는 화면에는 팀 훈련에 들어간 부유 요새 레비아탄의 멤버들이 보이는데요, 가운데 보이는 푸른색 나이츠가 바로 제 전 마스터이자 레비아탄의 리더인 마성준 씨가 조종하는 RebirthDP입니다!

다들 기억하시던 독도 해상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세팅으로 다시 태어난 머신이죠!

그럼, 지금부터 어떤 부분이 달라졌는지 하나하나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 그대로 자신을 ‘지켜보고’있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성준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저 목소리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이상, 이제 두 번 다시 레비아탄 멤버들을 희생해야 하는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고.

그녀가 살려준 목숨을 가지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세계 최고 실력의 나이츠 파일럿이 되는 것.

그것은 나이츠 파일럿인 그가 가연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의 보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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