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4.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약
이벤트는 끝났지만, 상혁에게 있어서 본격적인 업무는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뉴욕 이벤트의 성공적인 개최를 본 각국의 수많은 정부가 다음 이벤트 개최지 선정을 위해 PTW에 일제히 연락을 취해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외교부를 통한 연락부터 관광부를 통해 들어오는 연락, 심지어 대통령이 직접 해오는 연락까지 수많은 채널을 통해 PTW 본사로 직접 들어오고 있었다.
[PTW의 게임 ‘KOH’의 월드 이벤트. 최소 8조원 이상의 경제 효과를 가진 것으로 예상.]
[각국 정부. 다음 이벤트 개최지 낙찰을 위한 물밑 협상에 들어가.]
[대한민국 정부.
‘PTW 본사가 있는 국가로서 다음 이벤트가 서울에서 개최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
[프랑스의 하크롱 대통령. PTW의 CEO 김현주와 통화했음을 밝혀.
‘현재 파리에서의 월드 이벤트 개최를 긍정적으로 검토 중이란 답변을 받았다.’
프랑스군의 용감함이 미군의 그것에 절대 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줄 것.]
[이번 뉴욕 이벤트에 반대했던 공화당 후보가 자신의 발언을 철회.
‘지금 미국 정치판에서 PTW와 적대하면 정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
[바이던 행정부 이벤트 이전 대비 지지율 15% 이상 상승.
덩달아 뉴욕 시장의 지지율도 폭등.
‘위기 상황에서 신속하고 능숙하게 대응하는 대통령의 모습에 반할 수밖에 없었다.’]
[조 바이던 미 대통령.
‘뉴욕이 끝이 아니다.
서부에서도 이벤트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협상할 것.’]
[이시다 일본 총리.
‘현재 PTW의 협력사인 SANY를 통해 도쿄에서의 이벤트 진행을 협상 중.’]
[전설의 이벤트에 걸맞은 전설의 뒤풀이.
하룻밤 새 사용한 폭죽만 ‘700억’.]
행사의 어느 부분이든 집어서 조금만 파보면 뉴스거리가 쏟아져나오고 있었기에, 각국의 기자들은 행복의 비명을 지르며 헤드라인을 쏟아내고 있었고, 전 세계의 PTW팬들은 그런 언론의 반응에 엄청난 조회 수로 화답하고 있었다.
그렇게 ‘월드 이벤트’ 관련 기사라면 올라온 지 20분 안에 무조건 최상위 인기 기사 자리를 차지하는 상황 속에서, 행복에 젖어 있는 것은 기자들만이 아니었다.
행사에 참여한 팬들도, 행사에는 참여하지 못했지만 PTW의 완벽에 가까운 편집 영상을 통해 행사를 실시간으로 지켜본 팬들도, 이 말도 안 되는 열광의 파도에 몸을 실은 채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커뮤니티에 분야 관련 없이 월드 이벤트 관련 내용이 올라오고 있긴 했지만, 그중에서도 PTW 팬들의 주 활동 공간인 PTW 홈페이지에는 말 그대로 읽기도 힘들 정도의 글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벤트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뒷풀이까지 참가했는데, 아마 참가자들에게 이번 이벤트는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을 듯.
비록 AR 이벤트였다 하더라도 PTW의 기술력으로 구현된 실물 크기의 나이츠는 실물이라고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현실감과 위압감이 넘쳤고, 수백 미터 크기의 현무가 휘두르는 꼬리에 부서져 사방으로 흩날리는 건물 파편은 진짜로 깔려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위기감까지 주었음.
난 비록 꿈같은 삶을 사는 나이츠 파일럿들과는 다르게 현실의 세계를 살아가는 평범한 게이머지만, 적어도 이벤트가 진행되는 그 순간만큼은 PTW가 만들어낸 환상적인 세계의 일원이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대도시를 통체로 세트로 사용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스케일의 이벤트.
그리고 미군과 나이츠의 합동 작전에 의해 쓰러진 거대한 몬스터.
이벤트 시간 내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안전한 자리를 찾아 헤매던 팬들을 기다리고 있던 시원한 맥주와 음료.
뉴욕시의 밤하늘을 대낮처럼 밝혀버린 화려한 불꽃놀이.
어제의 이벤트는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게 좋았고 너무나 완벽했다.]
[나이츠 파일럿들도 너무 멋졌음.
비록 줄이 너무 길어서 콕핏에 앉아 사진은 찍지 못했지만, 그들이 이벤트가 진행되는 동안 안에 탑승했던 실물 크기 나이츠의 사진도 찍을 수 있었고, 웹 드라마에서만 볼 수 있었던 퍼스티스트 멤버에게 사인도 받을 수 있었다.
PTW에서 프로젝트 기간 메이크업이나 헬스 트레이닝까지 모든 걸 케어 받고 있다고 하더니, 진짜로 다들 너무 멋지고 예쁜 모습이었음.]
[나도 거기 있었는데 현희 씨와 머신 스피릿 지수 씨가 있는 곳은 진짜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접근이 불가능한 정도더라?
거기에 12대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콕핏에서 사진 찍는 건 엄두도 못 냈음.
줄 선 사람이 너무 많아서.
대신 뒷 풀이 시간 내내 작전에 참여한 미군 병사랑 이야기 할 수 있었는데, 엄청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이번 이벤트를 위해 PTW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들을 수 있었지.]
↳ 오! 재미있겠다! 썰 좀 풀어봐!
↳ 좋아. 나와 이야기 한 건 F35의 파일럿으로 작전에 참가한 뒤 레이건 호로 복귀한 다음 헬기를 타고 뒤풀이 장소로 합류한 조종사였어.
보안 문제가 될 수 있으니 이름은 밝히지 못하겠지만, 그는 이번 작전에서 총 4번의 출격을 해서 한반도 격추당하지 않고 현무에게 미사일을 먹였다고 이야기해 주었지.
그의 말에 따르면, 이번 작전에서 사용된 미사일은 PTW에서 이벤트를 위해 개발한 AR 미사일이라고 했어.
실물 미사일과 무게와 외형이 동일한 미사일이지만, 실제로 발사되거나 폭발하는 기능은 없는, 그런 미사일인 거지.
하지만 단순한 장난감만은 아닌 게, 실제 전투기의 화기 통제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어서 락온이나 발사 후의 미사일 잔량 표시 같은 건 실물 미사일과 똑같이 표시되도록 설계된 물건이라 하더라고.
그래서 AR 미사일임에도 불구하고 작전 도중에 3번이나 항모로 돌아가 미사일을 보급해야 했다더라.
갑판에 있던 병사들도, 지휘 통제함의 병사들도 모두 실제 무기를 사용해서 몬스터와 싸웠을 때를 가정한 데이터를 받아서 작전에 임해야했고.
레이더엔 진짜로 수백 미터짜리 거대한 몬스터 현무의 위치가 실시간으로 찍혀 있었고, 정찰기로 찍어 전송한 뉴욕시의 화면 속에서도 현무가 실제로 박살 낸 뉴욕의 모습이 그대로 전송되었다고 하네.
그러니까 우리가 진짜로 뉴욕이 박살 난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처럼, 이벤트에 참여하던 병사들도 거의 진짜 같은 상황 속에서 몬스터를 상대하고 있었던 거지.]
↳ 진짜 같은 가짜라는 건가?
근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 거지?
↳ 기본적으로 미군 장비를 사용하는데 필요한 모든 데이터를 PTW가 가지고 있으니까.
미군이라면 이제 전차병이든 조종사든 소총병이든 상관없이 모두가 워 다이버를 끼고 작전에 참여하잖아.
그리고 워 다이버는, 당연하게도 딥 다이버를 기반으로 개발된 장비이고.
딥 다이버는 망막에 직접 화상을 쏘아서 AR 이미지를 만드는 장비니까, 원한다면 눈앞에 보이는 거대한 건물을 통째로 사라지게 하거나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수백 미터짜리 몬스터를 보이게 만들 수도 있지.
그 AR 기능을 활용해서 가상의 데이터를 보이게 만든 거야.
병사들이 허공을 향해 미사일을 쏘는 시늉을 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눈앞에 보이는 몬스터를 향해 실감 나는 공격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는 오해하지 말아 달라고 하더라.
이번 이벤트를 위해 미군이 사용하는 AR 무기의 위력을 조정했기 때문에 현무가 쓰러지지 않은 거지, 진짜 무기를 쓰면 현무 정도의 몬스터는 나이츠의 도움 없이도 피떡이 되었을 거라고.
↳ 하긴, 벙커나 탱크도 박살내는 미사일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체가 버텨낼 수는 없겠지.
↳ 그나저나 그런 게 실제로 가능하다면, PTW에서 원하기만 하면 아군 병사의 모습을 테러리스트처럼 바꿔서 보여주는 것도 가능하다는 거 아냐?
말 그대로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조작 가능한 거잖아.
↳ 나도 그걸 물어봤지.
아무리 PTW가 미군과 친한 기업이라 하더라도, 타국의 기업에게 그런 막대한 권한을 주는 게 맞는 거냐고.
그러니까 그 조종사가 그러더라.
이번 이벤트는 미군 최고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승인 아래 이루어진 이벤트이고, 이벤트가 진행되는 시간 동안 대통령의 직접 명령을 받아 PTW의 이벤트 지원 기능이 지원된 거라고.
그리고 이벤트가 종료된 순간에, PTW에서 워 다이버의 AR 기능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해제되었다고.
다시 진행하려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가능하게 되어 있다고.
그리고 애당초 워 다이버의 프로그램 데이터가 들어있는 데이터 센터는 PTW 직원이 아니라 미군 병사들이 지키고 있다던데?
미군이 원하면 언제든 서버 채로 날려버릴 수 있다고.
사실 PTW의 가장 큰 고객은 게이머가 아니라 미군이라고 봐도 무방하다고도 하더라.
워 다이버의 독점 라이선스 비용도 비용이지만, 미군의 요청을 받아 업데이트를 할 때마다 PTW가 받는 비용이 말 그대로 천문학적인 비용이라던데?
그래서 이번 이벤트에서도, 그 많은 전투기가 이착륙하면서 사용한 연료비, 참가한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특별 수당, 그리고 7함대를 임의로 뉴욕 앞바다로 이동시키는데 사용된 비용까지.
말 그대로 엄청난 비용을 전부 PTW가 내는 거라고 들었어.
그 비용조차도, 미군이 1년에 PTW에 내는 비용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 거라고 하더라.
↳근데 그 말은 결국 다른 국가에서는 뉴욕 이벤트처럼 군대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이벤트 진행이 불가능하다는 뜻 아님?
현재 워 다이버는 미군만 독점적으로 사용할 수 있잖아?
↳ 그렇겠지?
[현직 미군으로써 말하는데 이번 이벤트가 가능했던 건 단순히 정부의 허가가 있어서만이 아니라, 원래부터 미군 병사들이 워 다이버를 이용한 가상 전투나 훈련에 매우 익숙했기 때문이었음.
현재 PTW는 미군의 장비를 운용하는데 필요한 모든 데이터와 튜토리얼을 가지고 있지만, 그건 미군이 워 다이버에 대한 독점 사용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거지.
만약 PTW에서 워 다이버의 프로그램을 타국 장비에 맞게 개조해서 제공한다면 미군의 분노를 사게 될 거야.
난 물론 PTW가 고작 월드 이벤트 때문에 그런 바보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거라고 믿지만.]
↳ 미군의 허가를 받아서 진행하는 것도 안 되나?
↳ 허가가 날 리가 없지.
↳ 그건 그렇네.
그럼 다른 나라에서 하는 이벤트는 각국 군대는 배제된 형태로 진행되려나?
↳ 그럴 가능성이 높음.
어차피 군대를 동원해서 보여줄 수 있는 화력 쇼는 뉴욕 이벤트에서 끝판왕 수준으로 보여줬잖아.
다른 곳에서 군대를 동원해서 이벤트를 펼친다 해도 뉴욕 이벤트처럼 화려한 화력전을 펼치는 건 불가능할 텐데, 그럼 2회차 이벤트부터는 좀 시시해 보이지 않을까?
미군 병사 출신 팬들이 올린 글처럼, 2회차 이벤트 이후부터 PTW가 각국의 군대를 동원하여 이벤트를 진행하는 데는 많은 애로사항이 있었다.
물론 억지로 진행한다면 워 다이버의 실시간 AR 훈련 기능을 뺀 상태로 전투기가 지나가는 타이밍에 맞춰 AR 미사일이 발사되는 영상을 겹쳐 송출하는 방법으로도 진행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런 편법을 사용하더라도 뉴욕 이벤트 수준의 군사력을 동원하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이 많았고, 거기에 이번 이벤트를 위해 PTW가 미군에 지불한 천문학적인 대가를 고려하면 이벤트마다 군대를 동원한다는 것도 무리가 있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레 팬들의 관심은 ‘2회차 이벤트’를 PTW가 어떻게 진행할 것인가로 쏠리게 되었다.
그리고 PTW는, 그런 팬들의 관심 속에서 그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형태로 2회차 이벤트 지역을 공개함으로써, 팬들의 기대를 한껏 부풀어 오르게 했다.
***
“블러디 크림슨 멤버들이 부럽네.”
대전에 있는 PTW파크의 지하에는 뉴욕 이벤트에 참가했던 블러디 크림슨(Bloody Crimson) 외에도 레비아탄(Leviathan)과 홀리 아크(Holy Ark)라는 두 그룹의 퍼스티스트 멤버들이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뉴욕 이벤트가 끝난 지 하루가 지난 레비아탄의 미팅 룸에서는 푸른색 전신 슈트를 입은 레비아탄의 파일럿들이 한자리에 모여 뉴욕 이벤트의 편집 영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백만의 관중에 둘러싸여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고 있는, 블러디 크림슨 멤버들의 모습을 보며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질투심을 불태우면서.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고작 한 달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표면적으로는 ‘퍼스티스트 프로젝트’의 동료이면서 내부적으로는 각 그룹 별로 경쟁 관계에 있는 그들은, 서로에 대한 투쟁심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이게 다 대장이 제비뽑기에서 져서 그래요.
안 그랬으면 저기 있는 파일럿이 우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솔직히 블러디 크림슨이라 고생한 거지 우리가 참여했으면 미군의 지원 없이도 현무 정도는 잡았을 겁니다.
근접전 중시의 블러디 크림슨과는 다르게, 화력전 중심의 레비아탄 나이츠들이 현무를 상대했다면 아예 맨해튼 섬에 상륙하기도 전에 화력전으로 발을 붙잡을 수 있었을 테니까.”
각자 한마디씩 내뱉는 팀원들을 보며 레비아탄의 대장인 마성준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변명하고 싶은 말이야 많지만, 자신이 제비뽑기에서 졌기 때문에 1회차 이벤트의 주인공이 될 기회를 놓친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게다가 상혁은 제비뽑기를 하기 전 3팀의 멤버들을 모두 모아놓은 상태에서 1회차 이벤트는 미군의 지원을 받은 상태에서 뉴욕에서 이루어지는 이벤트이며, PTW측에서도 이벤트를 위해 엄청난 비용을 지출하는 이벤트가 될 거라고 미리 이야기 해 주었다.
이후의 이벤트는 내부 사정상 그 정도 규모로 진행되기는 어려울 것이란 이야기와 함께.
물론 이해는 할 수 있다.
전 세계의 군대가 전부 미군처럼 PTW와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PTW가 아무리 돈이 많더라도 그 많은 도시에서 한 달에 한 번씩 엄청난 비용을 지출하며 연속으로 비슷한 규모의 이벤트를 진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기에.
애당초 도시 침공 이벤트 자체가 무료 이벤트이기 때문에 PTW는 그것을 통하여 단 한 푼도 벌 수가 없는 상황이라, 퍼스티스트 멤버 모두는 상혁의 그런 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 결과로, 오다 츠요시가 이끄는 블러디 크림슨이 첫 번째 이벤트의 방어팀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고, 레비아탄은 2번째 이벤트의 주인공이 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1회차 이벤트의 화려함과 비교하여, 명백하게 규모가 작아진 스케일을 보여주게 될 2회차 이벤트의 주인공이.
그것은 성준으로써도 아쉬운 결과라 할 수 있었다.
“다들 불만이 많은 표정이네요?”
그때, 브리핑 룸으로 제복을 갖춰 입은 남자가 들어서자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방 안으로 들어온 상혁은 손을 흔들며 레비아탄의 팀원들을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뒤쪽에 재생되고 있는 뉴욕 방위전 이벤트의 영상을 잠시 지켜보았다.
“멋진 이벤트죠. 블러디 크림슨 멤버들은 거의 완벽에 가깝게 이벤트를 성공적으로 진행했습니다.
심지어 상성 상 좋지 못한 관계에 있는 현무를 상대로, 아무도 쓰지 않는 기발한 장비를 사용한 전략을 사용하여 성공적으로 적을 물리쳤죠.
그건 제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결과였습니다.
저는 적어도 3기 정도는 이번 방어전에서 탈락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레비아탄이 상대였으면 그렇게 되지는 않았을 겁니다.”
“압니다. 장거리 화력전을 주 무기로 삼는 레비아탄이라면 현무를 상대로 쉽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건 전술적인 부분에서는 성공이라 볼 수 있을지 몰라도, 전략적인 부분에서는 실패라고 봐도 무방하겠죠.”
“무슨 의미입니까?”
“애당초 저 수많은 관객들은 뉴욕 시내를 박살내며 이동하는 거대한 몬스터를 구경하러 뉴욕시에 방문한 겁니다.
그런 화려한 볼거리 없이, 단순히 섬에 상륙하기도 전에 원거리 포격에 맞아 쓰러지는 몬스터를 보러 온 게 아니라요.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보면 노예상인 프록시모가 막시무스에게 이렇게 말하죠.
‘내가 최고였던 건 빨리 죽여서가 아니라, 관중을 열광시켰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역할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한 강한 적을 상대하되, 관중들이 그 화려함에 열광할 수 있도록 유흥(Entertainment)을 제공 하는 것.
그것이 여러분이 갖추어야 할 기본 소양이니까요.”
그러자 레비아탄의 멤버이자, 나이츠 ‘랜드 크러셔’의 파일럿인 이정열이 손을 들어 물었다.
“그 말은 지금 저희의 전투 세팅에 문제가 있다는 말씀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여러분의 전투는 충분히 화려하고, 보기에 멋진 부분이 넘치니까요.
다만 뉴욕 방어전의 경우에 여러분들이 참여했으면 지금 같은 멋진 그림이 나오지 않았을 거란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각 팀에게는 각 팀의 전략이나 성향에 맞는 전투 스타일이 있고, 몬스터의 특성은 그런 여러분들의 전투 스타일과 맞물려 일종의 상성을 만들어내죠.
같은 전투 방식이라 하더라도, 어떤 몬스터를 상대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그림이 펼쳐지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가장 빛나게 할 수 있는 몬스터는, 현무가 아니고요.”
“그 말씀은···.”
“맞습니다.”
상혁이 웃으며 말했다.
“여러분들이 할 일은 여러분들이 최선을 다해 싸울 수 있는 세팅을 갖추고 여러분들의 취향에 맞는 전술을 훈련하는 거죠.
그리고 저희의 역할은, 그런 여러분들의 전략이 최대한 화려하게 펼쳐질 수 있는 무대를 준비하는 거고요.
그리고 마침내 오늘, 2회차 이벤트를 위한 마수와 전투 지역에 대한 설정이 완료되었습니다.
그 말은, 이제 슬슬 2회차 이벤트에서 여러분들이 상대해야 할 적에 관해 설명해 드릴 타이밍이 되었다는 뜻이죠.”
그렇게 말하며 상혁은 손가락을 튕겨 뉴욕 이벤트의 모습이 재생되고 있는 백스크린의 화면을 전환했다.
거기엔 마치 고래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지만, 고래와는 다르게 온몸이 바위와 같은 갑주로 둘러싸여 있는 특이한 생물이 그려져 있었다.
***
“수중전이요?”
안 그래도 고래처럼 생긴 외형을 가진 마수의 모습 때문에 긴가민가하던 레비아탄의 리더 마성준은, 이어지는 상혁의 설명을 듣고 황당해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상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옙. 애당초 실제 나이츠의 코어에는 잠수를 위한 방수 처리와 산소 공급 장치가 설치되어 있어서 이론상 수중전투도 할 수 있게 제작되어 있습니다.
물론 대기압을 상정하여 만들어진 장비를 수중에서 발사하면 위력이 말도 안 되게 줄어들기 때문에 수중전 전용 장비가 따로 있긴 하지만요.”
“수중전 전용 장비라 하심은 작살 같은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작살도 있지만, 메인은 앵커와 다이브 부스터네요.”
“앵커는 아마도 끝에 닻 형태의 고리나 작살이 달린 줄이 달린 장비일 테고, 다이브 부스터는 뭡니까?”
상혁은 브리핑 영상을 통해 나이츠를 통한 수중전의 실험 영상을 공개했다.
거기엔 여러 대의 나이츠들이 팔에서 뻗어 나온 줄을 통해 수중에서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물론 나이츠 자체가 무게나 무겁기에 비해서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기동하는 이족 보행형 장비이긴 하지만, 물속에서 움직이려면 지상보다 엄청난 수압과 저항을 견뎌내야 합니다.
사람이 물속에서 걸으려 할 때 온몸에 엄청난 저항이 걸리는 것처럼, 물고기나 돌고래 같은 유체 역학적 디자인을 가지지 못한 나이츠 역시 물속에서 제대로 기동하기가 어려울 정도의 압력을 받죠.
그렇기에 물속에서는, 나이츠의 빠른 기동을 위해 특별한 장비가 필요하게 됩니다.
그래서 수중에서 기동하는 나이츠들은, 원하는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팔이나 허리에서 발사되는 앵커를 사출하여 연결된 로프를 고속으로 되감는 식으로 머신을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앵커는, 심해의 고압 환경에서 15미터 크기의 거대 구조물을 고속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출력을 가진 특수 이동 장비를 말하는 거고요.
물론 몸을 대자로 펼치고 수압에 정면으로 맞서면 앵커를 쓰더라도 본체에 엄청난 수압이 걸리기 때문에 앵커를 사용한 이동에는 특별한 요령이 필요합니다.”
“그게 저 자세인가요?”
“그렇죠. 잠영할 때 사람이 몸을 최대한 직선으로 펼쳐 물의 저항을 줄이듯, 이동을 해야 할 때 원하는 위치에 갈 때까지 앵커의 라인을 기준으로 최대한 몸을 일직선으로 펼치고, 원하는 위치에서 수압이 가해지는 정면으로 몸을 펼쳐 제자리에서 멈추는 기술.
그것이 수중전에서 나이츠 파일럿이 사용해야 하는 ‘기본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이브 부스터는 뭡니까?”
“앵커는 일단 쏘아낸 작살이 단단한 지면에 박혀야 쓸 수 있는 장비인 데다, 내장된 로프의 길이에도 한계가 있어서 사용 거리의 제약을 받습니다.
그래서 장거리 이동을 위해, 별도로 나이츠의 등 부분에 특수 장비를 부착하죠.
거대한 제트 엔진처럼 생긴 이 장비는, 물속에서 초고속의 수류를 발생시켜 나이츠를 빠르게 이동시킬 수 있는 장비입니다.
물론 앵커나 다이브 부스터 모두 동력을 무지막지하게 잡아먹는 장비이기 때문에, 수중전에서는 지상에서 쓰는 것과 같은 고출력 장비를 사용할 수 없게 되죠.
그렇기에 이번에 출현 예정인 EX급 마수는, 지상에 출현하는 마수를 기준으로 하면 고작 A⁺에서 S⁻급의 강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임무 난이도 자체는 EX 급으로 설정되어 있죠.
그 말은···.”
“단순히 배경이 해상전이 되는 것만으로도, 몇 단계 이상으로 난도가 상승한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얼마나 어려울까요?”
“솔직히 말해서, 블러디 크림슨 멤버들이 잡은 현무는 스펙상으로는 EX급 마수 중에서도 최상위 권으로 강한 편이긴 했지만, 미군의 지원도 있었던데다 센트럴 파크라는 개활지에서 싸울 수 있다는 메리트가 있었기에 충분히 승산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수중전의 경우는 개최지역 해군의 지원을 거의 기대할 수 없고, 오로지 여러분의 조종 실력과 팀웍으로만 마수에 맞서 싸워야 하죠.
난이도 자체만 따진다면, 현무 이상의 난이도를 가진 보스라고 판단됩니다.”
그러자 조용히 설명을 듣고 있던 레비아탄의 파일럿 최지연이 대화에 끼어들며 질문했다.
“조금 전 상혁 씨는 레비아탄 멤버들의 무장이 원거리 화력에 집중된 형태라고 말씀하셨었죠.
그리고 수중에서는 투사체의 대부분이 힘을 잃게 된다고도 설명하셨고요.
그럼 사실 저희가 쓰는 무기 대부분이 막히는 것 아닙니까?
어째서 저 몬스터가 저희에게 가장 최적화된 몬스터라고 생각하시는지 이해하기 어렵네요.”
“물론 레비아탄 멤버들의 장비 세팅이 직사형 투사체 중심이라면 수중전에 매우 취약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겠죠.
하지만 여러분이 사용하는 장비는 대부분 미사일 장비 아닙니까?
기체도 전부 중량형에, 잔탄 용량을 늘리는 장비 위주로 세팅이 되어 있고요.
다른 경우라면 몰라도 그 경우는 세팅 변경이 매우 간단합니다.
미사일의 종류만 수중에서 사용할 수 있는 어뢰 종류로 변경하면 되죠.
여기 있는 건 여러분이 현재 사용하는 장비에서 호환 가능한 수중전용 탄의 종류입니다.
앞으로 한 달 동안, 여러분은 나이츠에 탑승한 상태로 심해 환경을 구현한 고압 훈련장에서 특수 훈련을 받게 되실 겁니다.
그리고 그동안은, 기존의 파일럿 슈트가 아닌 신형 슈트를 입고 훈련에 임하게 될 거고요.”
상혁이 손가락을 튕기자, 바닥이 열리며 유리로 둘러싸인 특수 케이지가 천천히 올라왔다.
거기엔 입을 가리는 호흡기 파츠가 추가된 수중형 딥 다이버와, 전신을 덮는 푸른색 LED로 빛나는 신형 파일럿 슈트가 그 멋진 자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벤트가 진행되는 동안, 여러분은 방수 처리가 된 훈련용 나이츠에 탑승한 채 심해에서 AR 이벤트에 참가합니다.
그리고 마수를 퇴치하여 이벤트가 끝나면, 각자의 나이츠를 조종해서 근처의 섬으로 걸어 올라오면 되죠.
마치 진짜로 근처의 심해에서 격렬한 전투를 벌인 것처럼.
저희가 미리 준비한 AR이펙트가 여러분이 AR 전투에서 벌인 격렬한 수중전의 여파를 수면에 구현할 겁니다.
사방에서 물기둥이 치솟아 오르고, 그 거대한 마수가 수면 위로 뛰어올라 격렬한 파도를 일으키는 모습을 전 세계 팬들이 보게 되겠죠.
그리고 한편으로는, 심해의 어두운 시야와는 전혀 관계없이 실제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 같은 느낌의 수중전을 딥 다이버의 중계 화면으로 보게 될 겁니다.
심해 공포증이 절로 생겨날 정도로 압도적인 공포를 자아내는 마수를 상대로, 인류의 수호자인 나이츠들이 온몸을 던져 싸우는 모습을 두 눈으로 볼 수 있겠죠.”
모두가 기대하는 두 번째 방어전을 무려 ‘심해’에서 진행하겠다는 상혁의 설명에, 파일럿들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감정을 느꼈다.
상혁의 뒤에 재생되고 있는 ‘시뮬레이션’화면만 보아도, 그 전투의 격렬함을 쉽사리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블러디 크림슨이 뉴욕에서 보여주었던 인상 깊은 첫 번째 이벤트의 이펙트에 결코 밀리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좋네요. 심해에서 펼쳐지는 화력전이라.
레비아탄(Leviathan)이라는 저희 팀의 이름과도 잘 어울리는 작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 질문하고 싶은게 있는데요.”
상혁은 자신에게 질문하는 레비아탄의 리더, 마성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성준이 브리핑 룸 가운데있는 홀로그램 지구본을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바다는 넓죠.
그리고 지금은 전 세계의 수많은 국가가 2번째 월드 이벤트의 개최지가 되기 위해서 애타게 러브콜을 보내는 중이고요.
그런 상황에서, PTW가 생각하는 두 번째 마수의 침공 지역은 어디입니까?”
성준의 질문을 들은 상혁은 조용히 성준을 향해 걸어왔다.
그리고는 홀로그램 지구본을 손으로 돌려, 그 안의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집어 뒤에 있는 백 모니터를 향해 던졌다.
그러자 나이츠를 이용한 수중전의 시뮬레이션 화면을 보여주던 백 스크린이 지도화면으로 변경되었다.
사방이 푸른색으로 도배된 넓은 바다.
그 한 가운데 떠 있는 작은 바위섬 두 개의 모습이 그려진 지도화면으로.
그것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굳이 어디인지 말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그곳이 어디를 그려놓은 지도인지 알 수 있는 지역을 가리키고 있었다.
“다음 마수 침공 이벤트는 대한민국 동쪽에 있는 동해(East Sea).
그곳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영토인 ‘독도’ 근처에서 펼쳐질 예정입니다.”
상혁이 모여있는 멤버들을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물론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것은 전 세계 수억 명이 지켜보는 이벤트입니다.
그러니 그 많은 사람의 뇌리에 확실히 박아주자고요.
사람들이 이 바다를 떠올릴 때, 일본해(Sea of Japan)라는 이름 대신 ‘아, 퍼스티스트의 2차 방어전이 있었던 그 한국바다!’라고 떠올릴 수 있도록.
그리고 독도의 모습을 볼 때마다, 바위로 가득한 섬의 모습이 아닌, 전투에서 승리한 나이츠들이 전신을 반짝이며 심해에서 상륙하던 그 모습을 떠올릴 수 있도록.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여기 모인 여러분들이 1회차 이벤트에서 블러디 크림슨이 보여준 그것보다 더욱 화끈하고 화려한 전투를 보여주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고요.
제 믿음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마치 미리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대장이 일본인인 블러디 크림슨과는 다르게 레비아탄에는 일본인 멤버가 단 한 명도 편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도 모자라, 전체 팀 가운데 한국인 비중이 높은 팀이기도 했고.
그런 레비아탄(Leviathan)의 멤버들은, 상혁의 질문을 듣는 순간 힘차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자고로 ‘국뽕’이란, 세상의 수많은 마약 가운데서도 지극히 강력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는 마약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의 안에서 끓어오르는 한국인의 피를 느끼며, 상혁의 질문에 힘차게 소리쳐 대답했다.
“좋습니다!”
“독도 좋네요!”
“다시는 일본해란 이름이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임팩트 있는 전투를 보여드리죠!”
그렇게 대답하는 그들의 모습 속엔, 다른 게임을 다 지더라도 ‘한일전만 이기면 된다.’라고 생각하는 한국인 특유의 강한 승부욕이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