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 예비 파일럿
“어딜!!!!”
오다는 자신이 타고 있는 기체, ‘홀리 프레일’을 향해 날아오는 대검을 방패로 쳐내기 위해 조종간을 움직였다.
그러자 그 크기에서 나오는 스피드라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방패가 움직여 적의 공격 경로를 가로막았다.
그 순간, 대검의 날이 방패에 직격하기 직전, 오다는 잡고 있는 조종간을 틀어 방패의 각도를 조정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반복했던 것처럼, 적의 공격을 ‘받아내는’ 것이 아닌, ‘흘려내기’ 위해서.
‘이 정도 각도였나?’
그러나 오다의 예상과는 다르게 충돌 직전 방패의 각도가 더 틀어지며 적이 휘두른 대검이 튕겨 나갔다.
[패시브 <근접 방어 최적화>가 발동되었습니다.
거기선 손목을 더 트셔야 합니다. 마스터.]
“젠장!!!”
오다는 대검이 튕겨져 나가 균형을 잃은 로봇을 향해 거대한 플레일을 휘둘렀다.
그러자 상대 로봇은 허리를 숙여 어깨에 달린 장갑으로 플레일의 공격을 흘려내었고, 오다는 자세가 무너진 상대 로봇을 발로 차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는 30톤에 가까운 거대 로봇이 공중을 날아가 바위산에 부딫히는 것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말하고 있던 거지만 나이츠끼리의 싸움이란 건 진짜 무게감이 있네.
콘솔 버전을 플레이할 때도 하면 너머로 무게감이 느껴졌었지만, 직접 조종하면서 느껴지는 압박감이랑은 차원이 달라.”
[방금 전의 플레일에서 발차기로 연계되는 공격은 매우 좋았습니다.
마스터.]
“아직 공격을 익숙하게 흘려내는 건 어렵지만···.
엘레니아. 현재 동작 중인 패시브 리스트를 보여줄래?”
[부정. 해당 명령은 전투 시야를 제한하고 집중 상태에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습니다.
되도록 전투 종료 이후에 확인하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그럼 반투명 모드로 출력해줘. 틈날 때 곁눈질 하면서 보게.”
[명령을 확인.
<적용 중인 패시브 리스트>를 출력합니다.]
그 순간, 오다의 눈앞에 반투명한 홀로그램 형태의 기다란 텍스트 목록이 출력되었다.
각각의 텍스트 옆에 숫자가 표시되어있는 리스트는, 오른쪽 구석에 각각의 숫자가 표시되어있었다.
오다는 다시 시작된 상대의 공세를 맞받아치면서, 곁눈질로 허공에 떠 있는 패시브 리스트를 확인했다.
‘아직 <근접 방어 최적화>를 오프 시키기엔 내 숙련도가 모자라.
<플레일 숙련 보정> 정도는 꺼도 되려나?’
패시브는 나이츠의 조작에 익숙하지 않은 오다에게 엄청난 도움을 주는 기능들이었지만, 그가 패시브를 오프 시키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패시브 리스트의 옆에 적혀 있는 숫자.
그것은 해당 패시브를 동작하는데 필요한 일종의 ‘코스트’를 나타내는 숫자였기 때문에.
오다는 자신이 처음 나이트에 탑승했을 때 엘레니아가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마스터는 이런 방식으로 나이츠를 조작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시겠지만,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부족한 부분은 제가 마스터를 보조할 테니까요.]
“보조?”
[조금 긴 설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만, 설명을 들으시겠습니까?]
“응. 부탁해.
어차피 조작에 관한 부분은 좀 세세하게 들을 필요가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마스터.
그럼 기본 개념부터 천천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중간에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으시면 질문 부탁드립니다.]
엘레니아는 특유의 감정이 억누른 나지막한 어조로 KOHA의 조작 시스템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깔끔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오다는 머릿속에 한 가지 의혹이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지금 그녀의 설명을 듣자면 이건 진짜 로봇을 조종하는 시스템을 바탕으로 설계된 조작법 같은데, 왜 굳이 이런 불편한 조작법을 채택한 거지?
PTW의 기술력이라면 그냥 동작 연동으로 처리할 수도 있는 부분일 텐데?’
오다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녀가 설명을 시작하기 전에 말한 것처럼, 그녀에게 질문을 하면 그만인 문제였으니까.
만약 그것이 답변 불가능한 문제라면, 그건 그때 생각하면 되는거고.
오다는 한차례 설명을 마친 엘레니아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엘레니아.”
[예. 마스터.]
“일단 네 설명을 듣고 내가 이해한 걸 정리해볼게.
그러니까 이동의 경우, 왼쪽 페달을 조작하는 것으로 전진, 오른쪽 페달을 밟는 것으로 후진이라는 자동차 같은 조작법을 가지고 있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전투 상황에서는 단순한 전진이라도 앞으로 달려 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상체를 숙이고 달려 나가야 하는 경우, 짧은 시간 목표한 위치로 돌진해야 하는 경우, 몸을 던져서 태클을 해야 하는 경우, 공격을 위해 몸의 축을 틀며 축발을 내딛는 경우 등의 다양한 상황이 발생하게 마련이고, 각 상황에 따른 동작 보조를 수행하는데 머신 스피릿의 역할이라는 거야?”
[정확히 이해하셨습니다.
나이츠는 매우 복잡한 조작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모든 상황의 모션을 수동으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각 상황에 따른 대응에 대해서는 해당 나이츠에 탑승한 머신 스피릿이 대응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그럼 내가 해야 하는 건 단순히 전진을 위해서 어느 정도의 압력으로 페달을 밟아야 할지 결정하는 것 뿐이네?
그 속도로 전진하는데 필요한 두 다리와 전신의 움직임은 엘레니아가 처리해주는 거고?”
[그렇습니다.
움직임뿐만 아니라 무장이나 스킬의 세세한 시전 방법, 각 무장을 사용하는데 필요한 섬세한 움직임도, 저 엘레니아가 마스터의 의도를 그대로 구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조합니다.]
“믿음직하네. 그럼 동작 보조 패시브는 최대한 켜두는 게 좋은 건가?”
[그 부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숙달된 이후에 하나씩 오픈시키는 것을 추천해 드립니다.]
“그래? 어째서?”
[동작 보조에 들어가는 패시브는 머신 스피릿의 운용 한계를 잡아먹는 코스트를 소모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매우 복잡한 컨트롤이 필하긴 하지만, 머신 스피릿이 수행하는 동작 보조는 대부분 컨트롤러를 통해 직접 입력이 가능한 것들입니다.
그 부분을 마스터께서 직접 수행하여 주신다면, 남은 운용 한계를 나이츠의 기능 활용에 돌릴 수 있습니다.]
“오호라. 이제 좀 알겠네.
그러니까 내 조종술이 향상되어서 동작 보조 패시브를 끄게 될수록, 내가 활용할 수 있는 나이츠의 장비나 기능이 늘어난다는 거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조급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은 우선, 저와 한 몸이 되어 마스터의 나이츠를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하는 데 집중해주셨으면 하니까요.]
“좋아. 그런데 하나만 더 물어봐도 될까?”
[마스터의 질문이라면 그 어떤 질문이라도 괜찮습니다.]
“나이츠의 조작방법이 이렇게 복잡한 이유가 뭐야?”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마스터.]
“애당초 탑승자의 움직임을 그대로 연동시키면 굳이 페달을 써서 이동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그럼 동작 보조에 필요한 코스트를 소모하지 않아도 되잖아?
나이츠 정도의 로봇을 개발할 수 있는 기술력이면, 동작 연동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텐데,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인지 궁금해서.”
[머신 스피릿이 기억하고 있는 범위 안에서, 나이츠의 최초 설계자가 현재의 조작 시스템을 선택한 것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바로 운동성 때문입니다.]
“체력?”
[나이츠는 장착된 부품에 따라 리치나 운동능력, 구동 각도 등이 천차만별로 갈리는 로봇입니다.
어떤 나이츠는 늘어나는 팔을 채찍처럼 사용하기도 하고, 어떤 나이츠는 무언가를 잡을 수 있는 팔 대신에 거대한 대포를 장착하고 있기도 합니다.
개중엔 4발로 대지에 엎드려 야수처럼 움직이는 나이츠도 있죠.
그렇게 각양각색의 동작을 보이는 수많은 나이츠들의 조종을, 인간의 관절 움직임만으로 100% 구현하게 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체력 문제입니다.
나이츠라는 로봇은 그 육중한 무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그것을 훨씬 웃도는 운동 성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물론 고도의 훈련을 받은 인간이라면 어느 정도 그 움직임을 따라갈 수 있겠지만, 평범한 사람은 단 3분 정도의 기동만으로 체력이 고갈되고 말 겁니다.
게다가 조종사 개인의 숙련도가 아닌, 신체 능력이 나이츠의 성능에 영향을 끼치게 되겠죠.
그런 체력 문제 역시 ‘설계자’가 조종간 방식의 조작 시스템을 채택한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앞선 다른 이유보다, 설계자가 현재의 시스템을 채택한 가장 큰 이유가 존재하죠.]
“그게 뭔데?”
[지금의 조작방식이, 훨씬 로망있는 방식이라는 이유입니다.]
엘레니아의 말을 들은 오다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황당하게 들리는 그 이유를,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에.
“풉, 푸하하하! 네 말이 맞아.
동작 하나를 수행하기 위해서, 여러 버튼을 누르면서 레버를 조작하는 것.
그건 확실히 로망 있는 방식이지.
지금의 나 역시, 완전히 로봇을 조종하는 파일럿의 기분이 되어버렸으니까.”
미소 짓는 오다의 귀에, 엘레니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 나이츠에 타고 싸우는 전투는 마음에 드십니까?]
그러자 그 말을 들은 오다가 조종간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그녀에게 답했다.
“더할 나위 없이.”
그렇게 말한 오다는 오른쪽 구석에 있는 파티 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전투 중에 리타이어된 두 명의 동료들과 상대 진영에 남아있는 로봇의 개수를 보며 전투 상황의 판단에 들어갔다.
‘파티원 중 유일하게 원거리 투사체 영격이 가능한 디엘렌이 리타이어 한 건 뼈아프네.
덕분에 2대의 상대 나이츠를 빠르게 처리할 수 있긴 했지만.’
왜 굳이 그런 리스크를 지면서까지 후방에 있는 디엘렌을 노린 거지?’
일반적인 상황에서, 로봇 조종이라는 복잡한 동작을 수행하면서 전투 지휘를 동시에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오다는 그것에 별다른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KOH라는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을 먼저 플레이하면서 나이츠 간의 대결이라는 전술 지휘에 익숙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오다는 조종석에 앉아 1인칭 시점으로 나이츠를 조작하면서도, 작은 미니 맵을 통해 효율적으로 파티원들의 위치와 교전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미니맵 위의 붉고 푸른 점들만 보아도, 자연스럽게 KOH의 콘솔 버전에서 보았던 전투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기 때문에.
‘모두의 성향을 잘 알고 있으니 누가 어떻게 움직일지 전부 예측이 되네.
게다가 모두가 간단하게 내린 지시에도 내 의도에 따라 잘 움직여 주고 있어.
아마도 이런 플레이가 가능한 건 KOH를 먼저 플레이했기 때문이겠지.
전혀 다른 장르의 두 게임을 이렇게 잘 연동시켜놓았을 줄이야.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PTW가 게임을 만드는 방식은 감탄이 절로 나온다니까?’
후방에서 갑자기 등장한 적 두 명의 등장에 대응하여, 오다는 원거리 특화 나이트인 디엘렌의 구원에 나서는 대신 3명으로 줄어든 적 나이츠에게 총공세를 가했다.
디엘렌이 시간을 끄는 동안, 상대 나이츠의 본진을 공격하기 위해서.
그렇게 1대의 나이츠를 내어주는 사이 2대의 나이츠를 이탈시키는 데 성공한 오다는 후방으로 2대의 나이츠를 보내 1:1로 적을 상대하게 하고, 본인은 남은 한 대의 나이츠를 2:1로 상대하는 전략을 취했다.
“리타이어에 집중하기보다, 최대한 손상을 입히는 데 집중해.
다음 전투에서 빠르게 합류하지 못하도록.”
[OK! 대장! 맡겨달라고!]
든든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외치는 아우라의 통신을 보며 오다는 눈앞의 로봇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커다란 충격이 오다의 전신에 전달되었다.
“어?! 뭐야?!”
그것은 적 로봇에게 공격당했을 때의 감각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기에, 오다는 당황하며 소리쳤다.
‘적의 공격은 아니야.’
중간에 몇 번이고 적에게 두들겨 맞아본 적이 있었던 오다는 자신의 몸에 전해지는 충격이 피격시의 충격과는 다른 흔들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게임 안에서 전달되는 충격이 아닌, 마치 건물이 흔들리는 듯한 느낌의 충격.
그 이질적인 감각에 오다가 당황하고 있을 때, 엘레니아의 다급한 음성이 오다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마스터. 긴급 상황입니다!
현재 진행 중인 전투를 강제로 종료하겠습니다.]
그 순간, 오다는 자신의 손에 잡힌 조종간이 빛나는 가루처럼 부서지는 것을 보았다.
자신이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콕핏의 모니터도, 그리고 모니터 너머로 보이던 상대 나이츠의 모습까지도.
마치 세계가 붕괴하는 것처럼 산산이 부서지는 모습과 함께, 오다는 자신이 어느새 처음 들어왔던 아레나의 홀로 튕겨져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기엔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엘레니아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야?”
[관리자 측의 요청입니다.
현재 파일럿 룸의 입구에서 관리자분들이 미팅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관리자?”
[관리자란 이 세계를 창조하고 관리하는 분들을 말합니다.
현재 그분들께서는 마스터가 있는 파일럿 룸으로의 입장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PTW 직원들이라는 거네? 직원이 왜 나를 보자고 하지?
그리고 조금 전의 흔들림은?’
잠시 고민하던 오다가 엘레니아에게 물었다.
“혹시 거부할 수도 있어?”
[마스터에게 응답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유가 있어서 찾아오신 것일 테니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현명한 판단일 것이라 판단됩니다.]
“좋아. 만나보겠어.”
[마스터의 의사를 확인.
현재 진행 중인 훈련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AR모드로 전환합니다.
현재 시각을 기점으로 모든 훈련 사항이 저장되며, 그동안 저는 다음 아레나 방문 때까지 이곳에서 대기토록 하겠습니다.]
“응. 나중에 보자고.”
[재회할 그 순간을 기다리겠습니다.]
작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는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오다는 아레나에서 나와 파일럿 룸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자신이 PRD에 들어가기 전과 똑같은 모습을 하는 SF틱한 느낌의 방이 그를 반겨주었다.
[실례합니다만, 잠시 대화할 수 있겠습니까?]
“잠시만요. 지금 PRD에 연결된 상태라 와이어 좀 떼겠습니다.”
오다는 몸에 연결된 PRD의 와이어를 제거한 뒤, 조금 전 벗어놓았던 티셔츠를 PRS위에 걸쳤다.
무슨 용건으로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는 몰라도, 별 문제가 없다면 바로 KOHA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었기 때문에.
그러나 자신의 허락을 받아 방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순간, 오다의 그런 생각은 한 방에 날아가고 말았다.
방 안에 들어온 정체불명의 사람들.
그들이 무려 ‘흰 가운’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뭐지!? 왜?! 의사인가?! 아니 딱히 아픈 데는 없으니 의사는 아닐 거고, 무슨 연구원들인가?
왜 가운을 걸치고 있는 거야?!
게다가 안에는 무슨 우주 전함에서나 입을 것 같은 제복까지 걸치고?
이것도 무슨 이벤트인가?’
혼란스러워하는 오다를 두고, 방안에 들어온 4명의 사람들은 마치 군인처럼 절도있는 자세로 오다 앞에 나열했다.
그리고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타블렛 PC와는 디자인이 완전히 다른, 뭔가 SF스러운 디자인을 가진 타블렛 PC를 보며 오다에게 말했다.
“혹시 오다 츠요시 님 맞으십니까?”
“아, 예?! 예. 맞습니다.”
“저는 PTW 산하에 있는 KOH 특수 개발팀 소속 연구원 다테 류세이라고 합니다.
오늘 진행 예정이었던 PTW의 신작 쇼케이스와 관련하여, 긴급히 오다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라니, 부담스러운 호칭이네요.
그런데 PTW에서 일개 관람객인 저를 왜 찾으시는 거죠?”
“죄송하지만 해당 사안에 대해 이곳에서 설명해 드리는 것은 적절치 않을 듯합니다.
무엇보다 주변의 시선 문제도 있고요.”
오다는 열린 문을 통해 어떻게든 안쪽을 둘러보려 시도하는 수많은 관광객들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회장에 ‘코스프레’를 한 것처럼 보이는 일련의 무리가 나타나 특정 게이머를 찾아온 사건이니까, 저 정도 소란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에.
그러자 자신의 이름을 류세이라고 밝힌 남자가 문 쪽을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
“우선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곳으로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어떻게 할까.
일반적으로 처음 보는 사람들이 갑자기 찾아와 따라와달라고 하면 경계하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그러나 오다는 위험한 일에 얽혀 들어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아예 하지 않고 있었다.
애당초 그런 일에 끌어들일 의도였다면, 이렇게 대놓고 ‘흰 가운’과 ‘제복’을 입고 ‘이벤트’같은 냄새를 풀풀 풍기지는 않았을 테니까.
게다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이 공간에서 KOHA를 플레이하고 있는 유저만 따져도 1만 명 정도인 상황.
그 상황에서 ‘굳이’ 자신을 지목했다는 것에, 오다는 경계심보다 두근거림이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대체 뭘 준비했길래 이렇게 각 잡고 날 초대하는 거지?’
깊게 숨을 들이쉬어 마음을 진정시킨 오다는 자신을 찾아온 PTW의 ‘연구원’들을 향해 말했다.
“좋습니다. 따라가지요.
대신 입고 있는 PRS를 벗어야 하니 잠시 방에서 나가주시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며, 오다는 속으로 생각했다.
‘잠깐만 숨 좀 돌리자고. 지금 두근거려서 심장이 터질 것 같으니까.’
그러나 오다의 요청에 대한 상대의 답변은, 안 그래도 날아갈 것 같은 오다의 기분을 말 그대로 폭발시켜버리는 답변이었다.
“아, ‘파일럿 슈트’는 그대로 입고 있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곧 필요한 일이 있을 것 같으니까요.”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남자를 보며, 오다는 결국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하지 못하고 헤실 거리는 미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
“이쪽입니다.”
잠시 후, 연구원들을 따라 회장 의 구석으로 이동한 오다는 일반 관객의 눈에 노출되지 않도록 만들어진 비밀 문을 통해 비밀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끝이 보이지 않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향했다.
그것은 로봇을 좋아하는 사람의 심장을 터트리게 만들기에 충분한 ‘로망’을 전달하고 있었다.
“으오오오! 에스컬레이터의 끝이 안 보여! 혹시 PTW는 지하에 ‘네르브’라도 건설하고 있는 건가?”
“저기, 그런데 이제 슬슬 날 부른 이유에 관해서 설명해주지 않겠습니까?
에스컬레이터가 내려가는 속도를 보니, 못해도 지하 수백 미터까지는 내려갈 것 같은데, 이런 비밀 공간에서 일반 관람객인 저를 불러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짐작도 가지 않는데요?”
“로봇인가!? 진짜 로봇이라도 만들고 있는 건가!?!”
미친 듯이 퍼부어대는 오다의 질문 공세를 들으며, 류세이는 필사적으로 표정관리를 하고 있었다.
지금 오다가 보고 있는 지하 연구동 내부의 모습은, 단순히 모니터를 통해 출력되고 있는 일종의 ‘눈속임’에 불과했기 때문에.
‘실제로는 에스컬레이터가 엄청 느리게 움직이는 대신 영상을 돌려서 수백 미터를 내려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트릭이란 걸 설명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러나 류세이는 굳이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음으로써 오다의 환상을 깨트리지 않았다.
오다를 만나러 가기 전, 상혁이 ‘안내역’의 행동 지침을 철저하게 주입했기 때문에.
‘아무로 작전이 실행되는 그 시각부터 여러분은 PTW의 직원이 아닌 나이츠 아레나 특수 관리국의 직원들입니다.
안내하는 내내 그 사실을 가슴속에 숙지하도록 하세요.
여러분의 연기와 태도 하나하나가, 팬들의 추억 속에 깊은 인상을 남기게 될 테니까.’
상혁의 말을 떠올린 류세이는 다시 한번 가슴 속으로 다짐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 유니크한 이벤트의 ‘주인공’으로 뽑힌 오다가 미친 듯이 부럽고 질투 나긴 했지만, 질투심으로 남의 꿈을 깨부술 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류세이는 시종일관 ‘시크릿 에이전트’ 같은 태도를 유지하며 오다가 더욱 흥분하기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통제 본부에 보고 드립니다.
잠시 후 ‘예비 파일럿’과 함께 지정 장소에 도착 예정입니다.
예. 현장의 판단이지만 ‘그’야말로 현재 상황을 수습하는데 최적의 인물이라고 판단됩니다.
무엇보다 시뮬레이션 전투에서 다른 예비 파일럿 후보를 압도하는 전투 능력을 보여주었으니까요.
예.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인류의 도약을 위한 작은 한 걸음을.”
류세이는 자신의 통화를 듣고 마치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짓는 오다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뿅 갔네.’
사실 조금 전의 통화는 가짜 통화였다.
그냥 주머니에 있는 통신 단말기를 들고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대사들을 읊었을 뿐.
하지만 그 대사들은 류세이 자신이 오다의 입장에 있다면 가장 듣고 싶어 할 만한 대사들을 말한 것이었기에, 오다는 그런 류세이의 의도대로 미칠 듯이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뭐야?!? 뭐야?! <예비 파일럿>?! <상황 수습>?!? <시뮬레이션 전투>?!
시뮬레이션 전투라는 건 KOHA를 말하는 건가?
거기서 내가 좋은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에 부른 거라고?
그럼 현재 상황이라는 건 나이츠 조종과 관련된 상황인 건가?’
미칠 듯이 부풀어 오르는 망상 속에서, 에스컬레이터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러자 류세이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오다를 이끌어 작은 방에 데려갔다.
“이건···.”
조금 전부터 입을 다물지 못할 사건이 연속적으로 오다를 당황하게 하고 있었지만, 그의 앞에 펼쳐진 방 안의 풍경은 오다가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충격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임에도 매우 친숙한 느낌을 주는 ‘그 방’의 디자인은, 오다가 KOH에서 보았던 ‘부유 요새’의 작전 상황실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부유 요새의 단면도.
사방에 띄워진 나이츠의 홀로그램.
중앙의 거대한 테이블 위에 둥둥 떠다니고 있는 거대한 행성 모형.
그러나 그 모든 환상보다 오다를 두근거리게 만드는 것은, 방안 이곳저곳에 앉아 있는 다른 파일럿들의 모습이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훔쳐서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멋진 디자인의 파일럿 슈트를 입은 11명의 사람이, 마치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각자의 자리에 앉아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때, 금빛으로 반짝이는 머리를 가지긴 한 남자가 오다를 보며 말을 걸었다.
“뭐야, 마지막 멤버도 한국인인가?”
그러자 옆에 있던 젊은 여성이 남자의 말을 받아쳤다.
“어쩌겠어. 애당초 한국인이 게임을 잘 한다는 건 부정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잖아?
게다가 행사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한국인 참가자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을 것이고.
상위 랭커 중에 한국인이 많은 것도 어쩔 수 없는 문제겠지.”
그들은 모두 각자의 모국어로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딥 다이버를 쓰고 있는 오다는 실시간 번역기능을 통해 그들의 말을 모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응? 뭐죠?”
“전 일본인입니다.”
“아, 그런가. 오해해서 미안해요.
안 그래도 지금 12명 중에 절반 이상이 한국인이라서, PTW가 랭커 선정에 어드벤티지를 준 게 아닌가 하는 의혹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거든요.”
그러자 한쪽 구석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검은 머리 사내가 입을 열었다.
“그 말은 그냥 듣고 넘어가기 어렵겠는데.
실제로 서로 실력을 확인하지는 못했어도, 여기 모인 사람들은 PTW에서 직접 뽑을 정도로 KOHA를 잘 플레이한 사람들이겠지.
오히려 난 절반이나 외국인이 뽑힌 게 더 이상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은 내 나이츠 조종실력이 여기에 뽑힐 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이야기인가?”
“먼저 시비 건 건 그쪽이잖아.
그리고 애당초 우주 크래프트 같은 게임에서도 결승전은 한국인으로 도배되는 경우가 많다고.
배틀 넷에선 한국 서버만 따로 관리할 정도로.”
“단순히 인터넷이 빨라서 게임 인구가 많은 것뿐이겠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게임을 잘할 거로 생각하는 건 편견이야.
뭣하면 지금 바로 파일럿 룸으로 돌아가서 붙어보던가.
X만 한 꼬맹아.”
“X발 건방진 양키 새끼.
따라 나와. 머신 스피릿까지 통째로 고철로 만들어줄 테니까!”
기묘하게도 두 사람의 싸움은 분위기를 가라앉게 하기는커녕, 방 안의 분위기를 더욱 달궈놓고 있었다.
다들 로봇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미친 인간들만 모여 있던 데다, 파일럿 슈트를 입은 채 말싸움을 벌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말 그대로 애니메이션에서 튀어나온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싸우고 있는 당사자인 두 사람도, 그런 분위기를 어느정도 느끼고 있었다.
‘아 씨, 파일럿 슈트 때문인가? 뭔가 방 분위기 자체가 애니메이션 주인공처럼 말하게 만드는 느낌인데···.’
‘젠장, 누가 말려줘. 한국인하고 싸우고 싶지 않다고.
이놈들은 게임에 미친 인간들이란 말이야!’
금발 머리 남자의 바람이 통했던 것일까, 그 순간 한쪽 벽을 가득 채우고 있던 부유 요새의 모습이 사라지며, 한 남자의 모습이 등장했다.
-자, 싸움은 거기까지 하시죠.
원하시면 따로 무대를 마련해 드릴 테니까.-
그러자 그 남자의 얼굴을 본 오다가 화면을 향해 소리쳤다.
“이상혁?!”
-예. 맞습니다. 아시는 분이 계시네요.-
“PTW 팬이라고 하면서 상혁 씨의 얼굴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되죠!
대화하게 돼서 영광입니다!
이번 신작은 진짜 환상적이에요!”
-감사합니다.
저도 여러분이 게임을 즐겁게 플레이해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지금은 조금 곤란한 상황임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군요.
잠시 화면을 보아 주십시오.-
상혁이 손가락을 튕기자, 상혁의 모습이 사라지며 다른 그림이 출력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 전까지 화면에 보이고 있던 부유 요새의 단면도가 아닌, 마치 경기장처럼 보이는 거대한 스타디움의 조감도였다.
모두가 그것을 왜 보여주는 것인지 의문을 품는 가운데, 상혁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들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PTW의 이번 신작인 KOH는 기존의 공개 방식과는 다르게 실제로 플레이 할 수 있는 게임을 먼저 공개하고 쇼케이스를 나중에 진행하도록 일정이 잡혔었죠.
그 때문에 다들 이렇게 생각하셨을 겁니다.
게임을 공개하기 위해 진행하는 쇼케이스를, 왜 게임의 공개 이후에 진행하는 것일까?
그것에 대해 먼저 답변 드리자면, 저희가 이번 5차 NE 컨벤션에서 공개하려는 쇼케이스는 KOH라는 게임에 관한 쇼케이스가 아니었습니다.
굳이 말하면 KOHA.
그러니까 로봇을 통해 진행되는 팀 파이트를 공개하는 게 쇼케이스의 목적이었죠.
그것을 위해, 저희는 20만석 규모의 거대한 스타디움을 건설했습니다.
딥 다이버를 착용한 20만 명의 관객들이, 한곳에 모여 거대 로봇들이 펼치는 팀 파이트를 관람할 수 있도록.-
그러자 한 파일럿 후보가 손을 들어 상혁에게 질문했다.
“잠깐 질문해도 괜찮을까요?”
-얼마든지요.-
“혹시 저희는 그 팀 파이트에 참여할 파일럿으로 선정된 겁니까?”
모두가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는 가운데, 상혁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원래대로라면 PTW에서 준비한 파일럿들이 팀 파이트에 참여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파일럿들이 현장으로 이동하는 중에 사고가 생겨, 오늘 이벤트를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죠.
그래서 저희는 유저분들 중에 가장 높은 조종 능력을 보여주신 분들을 기준으로 예비 파일럿을 선정했습니다.
여러분을 부른 이유는 그 때문이고요.-
“그러니까 그 말은, 저희가 수십만의 관객들 앞에서 나이츠를 조종하여 서로 싸워야 한다는 말입니까?”
-정확히 이해하셨습니다.-
다시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화면은 나이츠들이 레이드를 진행하는 영상으로 전환되었다.
15미터 크기의 강철 기사들이 무기를 들고 거대한 괴수에 맞서 싸우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이루 말할 수 없는 장엄함을 전달해주고 있었다.
-관객 전체가 딥 다이버를 쓰고 있기 때문에, 저희는 AR 이미지로 실제 크기의 마수를 구현할 수 있습니다.
실제 로봇 간의 전투를 상정하여 만들어진 거대한 스타디움에서, 관객들은 게임 속의 로봇들이 환상으로 만들어진 괴수와 싸우는 멋진 모습을 볼 수 있겠죠.
저희는 나이츠들이 펼치는 이 경기를 정규 리그로 발전시킬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의 KOHA 유저들 중에서 선택받은 최상위 유저들이, 각자의 팀을 꾸려 격돌할 수 있도록.-
그러자 다른 파일럿이 손을 들어 상혁에게 질문했다.
“속물처럼 보이기 싫어서 좀 주저하고 있었지만, 혹시 참가 보상은 있습니까?”
-당연히 있죠.
일단 여러분이 수행하시게 될 임무의 위험성에 맞춰서, 각자에게 10억 원에 해당하는 보상금이 지급될 예정입니다.
승리 팀 소속의 파일럿 분께는 추가로 10억 원이 더 지급될 거고요.
그 정도면 위험을 무릅쓰고 경기에 참여할 정도의 충분한 보상이 될 거로 생각합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러자 오다가 다급하게 손을 들어 상혁에게 외쳤다.
“잠깐만요, 위험이라뇨?
저 마수는 AR 이미지로 구현된 괴물 아닙니까?
아마도 이벤트 진행 방식은 PRD를 이용하여 저희가 조작한 나이츠의 움직임을 AR로 구현하여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일 테고요.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할 것 같은 요소는 떠오르지 않습니다만?”
-아, 물론 경기장에 등장하는 마수는 말씀하신 대로 딥 다이버로 구현된 AR 이미지가 맞습니다.
하지만 오다 씨.
그거 아세요?
저는 마수의 이미지를 AR로 구현할 거라고 말했을 뿐이지, 나이츠도 AR로 구현하겠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상혁이 말을 마치자, 조금 전까지 나이츠들의 싸움을 보여주고 있던 거대 스크린이, 갑자기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갈라진 틈 사이로 하얀 연기를 마구 뿜어내면서.
마치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같은 그 모습을 보며, 오다는 말없이 꿀꺽하고 침을 삼켰다.
그리고는 벽 너머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벽 너머에 펼쳐진, 끝이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거대한 공간 안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12대의 나이츠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오다는 그것이 AR로 만들어진 물건이 아니라, 진짜 현실의 물질로 만들어진 로봇임을 본능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오다는 혹시 모른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이미 가짜를 현실로 만들어 사람의 눈을 속일 수 있을 정도로, PTW의 기술력은 엄청나니까.
그리고 눈앞의 로봇이 딥 다이버로 구현된 가상의 이미지인지, 아니면 진짜로 만들어진 1:1 스케일의 로봇인지를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머리에 쓴 딥 다이버를 벗는 것이었다.
‘제발 진짜이기를.’
진짜로, 정말 말도 안 되는 바램이긴 하지만, 오다는 눈앞의 로봇이 현실의 그것이기를 간절하게 기도했다.
그리고 손을 들어 머리에 쓴 딥 다이버를 벗었다.
“있어···?!”
마찬가지로 확인을 위해 딥 다이버를 벗은 다른 파일럿의 목소리를 들으며, 오다는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상상 속에서나 가능할 법한 ‘미친 짓’에 도전했으면서도, 기어이 성공해낸 PTW의 황당함에 말문이 막혔기 때문이었다.
“하, 하하···. 진짜네···. 미친···. 이 돌은 인간들···.”
그리고 그 순간, 얼빠진 표정으로 나이츠들을 바라보는 파일럿들의 귓가에, 상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대답은 이미 결정되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법적 절차를 위해 다시 질문드리겠습니다.
저희 PTW는 여러분께 이번 5차 NE 컨벤션의 쇼케이스를 위해, 여러분의 눈앞에 있는 나이츠의 탑승 및 전투 시연을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그에 따른 보상은, 전 세계 최초로 실전을 위해 만들어진 전투 로봇에 탑승하는 민간인이 될 수 있다는 영광과 혹시 발생할지 모를 부상에 대한 위험수당이 포함된 10억 원의 참가 보상입니다.
혹시 이 제안을 거절하고 싶으신 분이 있다면, 지금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거절의 의미로 받아들여질까 봐 눈조차 깜빡이지 않는 파일럿들을 보며, 오다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차라리 총을 들고 강제로 타라고 협박하는 게 이것보다는 덜 강제적인 느낌일 거라고.
그것은 그 자리에 갑작스럽게 불려가 상혁의 제안을 받게 된 모든 파일럿이 공통적으로 하고 있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