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갓겜 제작법-434화 (435/485)

434. 동료와 인연

‘오오! 움직인다!’

지수가 긴장된 표정으로 발에 있는 페달을 밟자, 로봇이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지수는 그 상태에서 왼손에 잡은 조종간을 앞으로 쭉 뻗었고, 로봇은 지수가 의도한 속도로 천천히 주먹을 뻗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하기 그지없는 동작이었지만, 조종간을 잡은 이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기에 충분한 마성을 가진 동작이었다.

‘내가, 로봇을 조종하고 있어···!!’

김기열 교수가 설계한 독특한 조종 시스템은 조종의 편의성보다는 조종할 때 파일럿에게 느껴지는 조작감에 집중한 형태의 시스템이었기에, 탑승자는 단순히 버튼을 누르고 조종간을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지수는 자연스럽게 자신이 조종하는 로봇이 전해주는 기분 좋은 조작감에 빠져들었다.

‘동작에 리듬감이 있어.’

애당초 PTW의 기술력이라면, 굳이 인간의 힘을 빌리지 않아도 100% AI가 로봇을 조종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김기열 교수는 일부러 로봇의 조작에 ‘사람이 해야 하는 영역’을 할당해놓았고, 로봇에 탑재된 AI는 충실히 그 명령을 수행하는 보조 역할만을 하도록 하였다.

로봇을 조종한다는 행위.

그 자체가, 하나의 즐거운 리듬 게임처럼 될 수 있도록.

그 덕분에 나이츠의 조종간을 잡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로봇을 조종할 때 느껴지는 조작감에 놀라게 된다.

하나의 동작을 수행할 때 눌러야 하는 버튼의 배열과 순서, 레버를 당겨야 하는 깊이, 그 모든 것이 철저하게 계산된 상태로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에.

-타탁-탁 타탁-

지수가 불이 들어오는 버튼을 순서대로 누르자, 로봇의 왼쪽 손바닥에서 푸른 화염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지수는 왼손으로 잡은 조종간에 있는 5개의 버튼을 눌러 그것을 움켜쥐고는, 이번엔 오른손 조종간에 있는 다른 버튼들을 누르기 시작했다.

-탁탁 타타탁-

그러자 이번엔 로봇의 오른손 위에 붉은색 화염이 맺히는 것이 보였다.

지수는 거대한 로봇의 손가락이 점차 붉게 달아오르는 것을 지켜보다, 오른손의 레버를 힘껏 쥐었다.

그러자 손바닥에 맺혀있던 불꽃이 마치 로봇의 팔에 흡수되기라도 한 것처럼, 로봇의 오른팔 전체가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방금 입력하신 동작이 초고열로 주먹을 달궈 상대를 공격하는 스킬 <플레임 피스트>의 동작입니다.

기본적으로는 버튼 조작을 통해 스킬을 펼치실 수 있지만, 급박한 상황에서는 음성 명령으로 스킬을 펼치실 수도 있습니다.]

“전투 중에 이 모든 입력을 전부 수동으로 하기는 힘들 테니까, 음성 명령을 자주 사용하게 되겠네?”

[아마도 그럴 것으로 생각합니다.]

“어? 로봇 모양의 홀로그램 옆에 떠 있는 붉은색 불꽃이 작아졌어.”

[그것은 로봇이 쓸 수 있는 원소 속성 에너지를 표시한 디스플레이입니다.

메이지 알파 안에는 속성 스킬 시전을 위한 추가 충전 탱크가 장착되어 있으며, 각각 냉기 관련 스킬 시전을 위한 액화 질소, 화염 관련 스킬을 채우기 위한 액화 수소, 공기와 닿으면 순식간에 굳는 성질을 가진 급속 경화형 특수 콘크리트, 한정된 공간에 초고해상도의 홀로그램 이미지를 방사하는 고성능 드론들이 탑재되어 있습니다.

그것들 모두가 전투가 개시된 이후엔 충전할 수 없는 자원들이며, 전투 이후의 정비를 통해 미리 충전해야 하는 자원들입니다.

그러나 카트리지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전장에 해당 자원이 보급될 경우 주워서 교체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렇기에 알파 메이지를 이용한 전투란, 한정된 자원을 얼마나 유용하게 사용하여 상대의 눈을 속이고 데미지를 줄 수 있는지가 메인이 됩니다.]

“말하자면 ‘마법사’ 같은 로봇이라는 거네.

왜 이름이 알파 메이지인지 알 것 같아.”

[마음에 드십니까?]

“응. 딱 나를 위해 준비된 머신 같은 느낌이야.

시트도 조금 좁긴 하지만 내 체격에 딱 맞는 것 같고.

상혁 오빠가 왜 155cm보다 작은 파일럿을 구해야 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아.

그보다 크면 아마도 탑승이 어렵겠지.”

[메인 파일럿 시트는 키가 큰 남성도 탑승할 수 있는 사이즈이지만, 서브 파일럿 시트는 현재 크기가 제한된 상태입니다.

아마도 그 부분을 염두에 둔 결정일 것이라 판단됩니다.]

지수가 그렇게 알파 메이지의 AI와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상혁은 초조한 표정으로 지수가 로봇을 조종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조작 미스로 옆에 세워진 다른 로봇들을 박살내는 건 아닐까 싶어서.

그런 상혁의 초조한 표정을 본 기열은 웃으며 상혁에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쇼.

어차피 웬만한 파손은 부품 교체로 바로 수리할 수 있으니까요.”

“그 부품 값이 장난이 아니니까 그렇죠.”

그러자 민준이 옆에서 끼어들며 말했다.

“아마 별 문제는 없을 거야.

여기 있는 로봇에 탑재된 전체 AI중에서, 알파 메이지에 탑재된 AI의 성능이 가장 좋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무선으로 PTW의 AI 터미널에 연결된 상태라 거의 인간 수준의 사고 능력을 지원받을 수 있지.

오프라인에서도 사람하고 구분이 안 가는 수준의 사고 성능을 보여주는 AI이지만, AI 터미널에 연결된 상태에서는 인간보다 더 뛰어나게 파일럿을 보조한다고.

그걸 알고 있으니까 지수가 저 로봇을 탈 수 있게 라이선스를 미리 넣어둔 거기도 하고.”

“아까 지수가 로봇에 손대자마자 전원 들어오는 거 보고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이럴 거면 언질이라도 미리 해 주던가.”

“재밌잖아. 기뻐하는 지수 표정을 보는 것도, 기겁하는 네 표정을 보는 것도.

덕분에 난 오늘 아주 즐거웠어.”

민준이 웃으며 말을 끝내는 순간, 지수가 조종하던 로봇이 천천히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는 해치가 열리며 안에서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잔뜩 흥분한 지수가 조심스레 걸어 나왔다.

멀리서 보아도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만족한 표정을 하고서.

지수는 자신이 내리자마자 해치를 닫고 원래의 자세로 돌아간 알파 메이지를 보며 90도로 허리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그리고는 상혁 일행이 있는 세이프티 룸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때요?! 다들?! 제 멋진 조종 실력 봤어요!?

크···. 이 정도면 타고난 거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 않을까요?”

“니가 조종한 거냐? AI가 조종한 거지.”

“아니죠. AI는 제가 무슨 버튼을 누르면 되는지 LED로 알려줬을 뿐이라고요.

실제로 조작한 건 저.

제가 조작한 게 맞으니까 이건 제가 잘한 거라고 해주세요.”

“그래그래 무지막지하게 잘했다.

니가 지금 넘버 원 파일럿이다.”

“야호!”

“그러니 넘버원 파일럿으로서의 책임도 져야지.

현재 서브 파일럿 후보 중에 로봇에 탑승 가능한 건 너밖에 없으니까.

오늘부터 바로 훈련에 들어가.

그리고 파일럿 선정 과정에도 참여하고.”

“오! 진짜요? 그럼 제가 원래 하던 업무는요?”

“그건 내가 넘겨받아서 해야지.

버츄얼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던 거는 어차피 AI 통해서 인수인계 받으면 되니까 크게 문제는 없을 거고, 혹시 오프라인에서 작업한 문서 같은 거 있으면 오늘 중으로 정리해서 넘겨.

앞으로 뭐 처리할 거 있는지도 같이 넘기고.”

“다른 사람이 제가 하던 작업을 넘겨받겠다고 했으면 분명 불안했겠지만, 오빠는 괜찮을 것 같네요.

세상에서 가장 듬직한 인수자니까.

딱히 따로 인계할 내용은 없어요.

제가 한 대부분의 작업은 버츄얼 스튜디오에서 진행된 거니까요.

일부 오프라인 작업도 전부 동기화시켜놨고요.”

“좋아. 그렇다면 서지수 너를 5차 NE 컨벤션에 참여할 머신 스피릿 1호로 결정하도록 하겠다.

행사 날짜까지 최선을 다해 파일럿 교육과 훈련에 임할 수 있도록.”

“만세! 그런데 아까부터 서브 조종사니 머신 스피릿이니 하시는데, 그건 무슨 말이에요?

제가 행사에서 로봇을 직접 조작하는 게 아닌가요?”

“로봇의 메인 파일럿은 행사에서 KOH의 체험 플레이 랭킹을 기준으로 뽑힌 유저가 맡게 될 거야.

그리고 우리가 미리 훈련시킬 서브 파일럿은, 메인 파일럿 석 하단에 있는 서브 파일럿 시트에 앉아 메인 파일럿이 조종을 편하게 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할 거고.

아까 지수 네가 로봇을 조작할 때, 로봇에 탑재된 AI가 도움을 줬었지?”

“네.”

“다른 로봇엔 그 정도 수준의 AI가 탑재되어 있지 않아.

그러니 그 AI가 하는 어시스트를 서브 파일럿이 맡아서 하는 거지.”

그러자 지수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상혁에게 물었다.

“어? 그럼 그냥 알파 메이지에 탑재된 AI를 다른 로봇에도 전부 집어넣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지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상혁이 아닌 민준이 해 주었다.

“원작의 설정대로라면 나이츠에는 대화를 할 수 있는 사고형 AI 탑재되어 있지 않아.

대신 로봇의 영혼이라 할 수 있는 존재인 머신 스피릿이 서브 파일럿 시트에 앉아 메인 파일럿의 조종을 보조하지.

조금 전 AI가 너에게 제공했던 어시스트를, 네가 음성으로 메인 파일럿에게 전달해야 한다는 소리야.

왜냐면 KOH라는 게임에서, 서브 파일럿의 존재가 바로 사고 능력이 있는 로봇의 영혼 같은 존재인 거니까.”

“말하자면 서브 파일럿의 역할은 사○버 포뮤러의 AI, ‘아수라다’ 같은 역할을 하는 거군요.”

“그렇지. 기본적으로 서브 파일럿의 역할은 메인 파일럿에게 특정 상황에서 어떤 조작을 하는 것이 좋은가를 알려주는 거야.

그리고 메인 파일럿과 호흡을 맞추면서, 그가 탄 로봇의 적절한 운영법을 알려주는 거고.

마지막으로, 위험한 순간이라 판단되면 자동차에 탑재된 긴급 회피 기능처럼 강제로 조종 권한을 뺏어서 로봇을 조종하는 반사신경의 역할도 대신 수행해야 해.

그 말은 모든 서브파일럿이 자신이 조종하는 로봇의 특성에 대해 100%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

조종간에 앉아봤으니 알겠지만, 그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야.”

“원래 게임도 너무 쉬우면 재미없는 법이죠.

전 오히려 좋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이제부턴 제가 조종하는 로봇에 탄 게이머가, 자신과 함께하는 머신 스피릿이 저라는 사실을 행운으로 생각하게 할 정도로, 최선을 다해 조종법을 숙지할게요.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그러자 상혁이 끼어들며 지수의 말을 막았다.

“어? 그건 안 돼.”

“흠? 왜요?”

“사실 서브 파일럿 시트를 변경할 수 없게 된 거는 원작 설정을 따라가면서 개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사고 같은 거긴 하지만, 원작 게임에서 모든 로봇의 머신 스피릿은 체구가 작은 미소녀라는 설정이 있거든.

머신 스피릿이 탑승하는 서브 파일럿의 시트가 작은 것도 그 때문이고.

5차 NE 컨벤션에서, 지수 너를 포함한 서브 파일럿들이 맡을 역할은 단순히 메인 파일럿이 로봇을 조종하는 것을 보조하는 것만이 아니야.

원작 게임에서의 머신 스피릿이 하던 역할을 대신해서 맡는 일종의 배우 겸 모델의 역할도 맡아야 하는 거지.

그러니까 이번 행사에 참여하는 파일럿들은 조종법을 숙지하는 것과 동시에, 원작 게임에서의 머신 스피릿처럼 외모적인 부분에서도 원작에서 튀어나온 듯한 모습을 보여줘야 해.

이 멋진 대결을 지켜보는 20만명의 관객의 눈앞에서, 이 게임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역할을 맡게 되는 거니까.”

“게임 쇼의 코스프레 도우미 같은 역할도 맡게 된다는 거네요.

잘 알겠어요.

그럼 키와 체형 외에 목소리나 외모적인 부분도 후보 선정의 기준으로 잡고, 훈련 기간에도 철저하게 관리를 받게 할게요.

행사에서 도움을 줄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알아보고요.

그런데 오빠.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현재 저희가 서브 파일럿을 뽑는 기준은 이미 개발된 로봇의 서브 파일럿 시트의 크기를 조정하는 게 어려워서 그렇게 된 건가요?”

“맞아. 팔다리의 부속을 바꾸거나 추가하는 거랑 아예 통째로 설계된 몸통 파츠의 설계를 바꾸는 건 엄청난 차이가 있거든.”

“그럼 이후에도 계속 서브 파일럿은 155cm 이하의 파일럿만 탈 수 있게 할 생각이에요?”

“아니,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기열 교수님이 새 메인프레임의 설계를 다시 하는 중이고, 이후엔 서브 파일럿의 키나 체형 제한이 풀리게 되겠지.

아니면 서브 파일럿이 탈 자리를 전부 연산 장비로 채워서 AI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하던가.

로봇이 공개되는 첫 행사야 게임이 아직 출시되기 전이라 프로팀 같은 개념이 존재할 수 없지만, 결국 이건 글로벌 스포츠의 형태로 발전하게 될 거야.

각국에서 선출된 대표가 팀을 이뤄서, 각자를 대표하는 형태의 나이츠를 타고 팀 파이트를 진행하는 형태로.

콘솔 버전 KOH의 엔딩을 본 유저들에게 실제 조종을 유사체험할 수 있는 PRD 버전의 멀티 플레이 체험 권한이 부여될 것이고, 그 가상 전투에서 최상위 실력을 뽐내는 랭커들이 실제 로봇을 타고 싸울 기회를 받게 되겠지.

가상의 팀 파이트 대회는 매년 여름과 가을에 온라인을 통해 열릴 거고, 실제 로봇들이 싸우는 경기는 2년마다 한 번씩 대전에서 열리게 될 거야.”

“실제 사람이 타고 싸우는 데 100% 안전한 건 맞아요?”

“조작 훈련이 아니라 전투 테스트를 해보면 알겠지만, 네가 로봇을 탄 상태에서 무슨 무기를 써도 상대 파일럿에게 데미지를 주는 건 불가능해.

애당초 그런 위험이 발생할 공격은 시스템적으로 전부 미리 계산해서 공격의 세기를 조정하도록 민준이 운영체제를 잠가놓았으니까.”

그러자 민준이 상혁의 말을 이어받았다.

“나이츠들이 쓰는 무기 중에는 실탄을 발사하는 무기도 있지만, 상대 로봇이 맞을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는 폭발만 화려한 가짜 탄환을 발사하게 되어있고.

바닥이나 주변 오브젝트에 맞을 거라고 판단되는 경우에만 실탄이 나가게 되어 있어.

로봇이 직접 물리 피해를 받는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 경우도 파일럿에게 위험이 가해지지 않는 경우를 철저하게 계산해서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의 공격만 직접 받도록 설계되어 있고.

그리고 그 모든 안전장치는 구스타프씨가 온갖 삽질을 반복하면서 완벽한 상태로 조정했지.

지금은 안전장치를 풀지 않는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상대 로봇에 타고 있는 파일럿에 데미지를 주는 건 불가능해.”

민준의 말을 들은 지수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상혁을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상혁 오빠의 계획에는, 큰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떤 문제?”

“물론 이번 행사야 어떻게든 10명의 서브 파일럿을 뽑아서 원작의 느낌을 그대로 재현한 듯한 이벤트를 펼칠 수 있겠죠.

하지만 그 이후에는요?

2년 후에 다시 한번 경기를 할때도 그 서브 파일럿들이 그대로 이벤트에 참여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은 없어요.

누군가는 아플 수도 있고, 누군가는 체형이 변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결혼해서 아이를 가질 수도 있겠죠.

그럼 결국 매번 행사 때마다 서브 파일럿을 다시 뽑아야 할 텐데, 그건 매우 어려운 일일 거로 생각해요.

그리고 KOH의 컨셉에도 맞지 않고요.”

기본적으로 KOH는, 플레이어와 함께 성장하는 AI라는 개념을 머신 스피릿이라는 이름으로 구현한 게임이었다.

그렇기에 원작 게임에서의 머신 스피릿은, 오랜 기간 플레이어와 함께하며 플레이어가 자주 사용하는 스킬이나 전략, 머신에 탑재된 장비 등을 학습하여 점점 플레이어의 취향에 맞는 AI로 성장하게 되어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버 포뮤러의 ‘아수라다’처럼, 기체의 변화와 파일럿 능력의 성장에 따라 AI도 자연스럽게 성장하는 시스템이었다.

“게다가 KOH에서는 플레이어가 선택한 기체에 깃든 머신 스피릿에 따라 성우도 바뀌죠.

5차 NE 컨벤션에서 처음 로봇에 타는 플레이어라면 그 위화감을 느낄 수 없을지 몰라도, 게임을 오래한 플레이어는 바로 느끼게 될 거에요.

‘아, 지금 내 머신에 타고 있는 머신 스피릿은 게임 속에 있던 내 파트너와는 다른 사람이구나.’하고요.

그렇게 된다면, 그건 그냥 회사에서 고용한 이쁘장한 여자애가 배우 역할을 맡아 타고 있을 뿐이에요.

게임 속에서의 자신의 파트너였던 머신 스피릿이 아닌, 머신 스피릿인 ‘척’하는 코스플레이어가 앉아있을 뿐인 거죠.”

상혁이 듣기에 지수의 지적은 상당히 타당성 있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방법을 해결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는 것뿐.

애당초 인간의 상상을 통해 ‘만들어진’ 존재인 머신 스피릿을 현실로 불러올 수는 없는 법이었다.

“지수 네가 말하는 의도는 잘 알겠지만 그렇다고 가상의 세계에 있는 미소녀를 현실로 소환할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체형 문제를 해결한 뒤에 머신 스피릿 더빙에 참여한 성우들을 전부 고용해서 머신 스피릿 역할을 시킨다 하더라도, 캐릭터가 가진 외형과 성우의 외모 사이에서 생기는 괴리가 있을 거고.

그 부분은 어쩔 수 없는 부분 아닐까?”

상혁의 말을 들은 지수는 다시한번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한참을 이리저리 걸어다니다 주먹으로 손바닥을 치며 상혁에게 말했다.

“그럼 차라리 ‘인형’을 쓰죠.”

“인형을?”

“저희는 이미 스턴트 봇이라는, 인간과 같은 크기를 가지고 인간과 똑같이 움직일 수 있는 로봇을 가지고 있잖아요?

물론 지금의 스턴트 봇은 뭔가 둥글둥글한 느낌의 플라스틱 외장을 달고 있지만, 외장을 벗겨내고 실리콘 같은 재질을 덮어씌우면, 사람하고 똑같은 형태로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스턴트 봇의 외장이 그런 형태인 건 발열 문제와 경량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런 거야.

애당초 무게가 많이 나가서 가벼운 껍데기를 씌운 로봇 위에 실리콘을 씌우면 무게가 더 나갈 거라고.

게다가 중간 중간 비어있는 부분을 통해서 발열 처리를 하던 부분도 막힐 거고.

게다가 사고형 AI는 전력을 잡아먹는 괴물이나 다름없어.

로봇에 달린 배터리 성능으로는 절대 커버 못 하지.

애당초 그런 이유로 현재 만들어진 스턴트 봇들은 로봇마다 전부 다른 기능을 수행하게 된 거야.

타일을 까는 로봇은 타일만 깔 수 있도록.

파이프 공사를 하는 로봇은 파이프 설치만 할 수 있도록.

지수 네가 말하는 수준의 AI를 탑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흥미롭다는 듯이 듣고 있던 기열이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

“잠깐만요.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예?!”

“그 전에 질문을 조금 하죠.

상혁 씨. 대회에서의 머신 스피릿이 하는 일은, 파일럿 시트에 앉아 메인 파일럿의 역할을 보조하는 것이죠?”

“그렇죠.”

“행사가 끝나고 메인 파일럿이랑 팔짱 끼고 데이트를 해야 하는 건 아니고요?”

“아닙니다. 대신 수상대 정도는 같이 올라가서 트로피는 들어줘야죠.”

“그럼 사고형 AI의 성능이 필요한 모든 행위는 파일럿 시트 위에서 일어나는 거네요?”

그러자 상혁도 무언가를 눈치 챈 듯 기열을 향해 말했다.

“잠깐만요. 그럼 교수님 말씀은···.”

“상혁 씨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것과 같다면, 아마도 가능할 겁니다.”

“확실히. 그런 구조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네요.”

“그렇게 말하면 옆의 사람들은 못 알아듣잖아요.

뭘 어떻게 하면 가능하다는 거죠?”

서연의 질문을 들은 기열은 하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손바닥을 들어 사과의 제스처를 취하며 서연에게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지금 상혁 씨와 나눈 대화의 내용은, 어차피 파일럿 시트에서만 사고형 AI의 성능이 필요하다면, 그걸 굳이 스턴트 봇 자체에 탑재할 필요는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어차피 통제된 조건 하에서만 동작하는 로봇이, 모든 기능을 독립적으로 수행하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발열 문제 역시, 서브 파일럿 좌석의 조작 패널 부위에 냉각수 교환 파이프를 설치하고 로봇의 발바닥을 통해 냉각수를 교환하는 식으로 해결할 수 있겠죠.

그와 동시에 안정적으로 전원도 공급할 수 있을 테고요.

사고형 AI에서 나오는 대화 내용 자체도, 굳이 로봇에 탑재할 필요는 없습니다.

로봇엔 스피커만 달아놓고, 외부에서 연산해서 만들어진 내용을 재생만 시키면 되는거죠.

말 그대로 사람의 모습을 흉내 내는 완벽한 로봇 미소녀를 만들 수 있는 겁니다.”

“엑?! 그게 가능하다고요?”

“물론 인간의 얼굴에 있는 근육은 80개나 되니, 그 모든 표정을 할 수 있도록 얼굴 파츠를 새로 설계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이 되겠죠.

하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다음 대회는 5차 NE 컨벤션이 열린 뒤 2년 후에나 열릴 테니까요.

2년이면 사람처럼 행동하는 로봇을 만들기엔 충분한 시간이죠.

지금처럼 빵빵하게 지원만 확실히 해 주신다면요.”

“하지만 어설프게 사람 모양을 흉내 내려다 오히려 혐오스러운 외형의 로봇이 만들어질 위험도 있어요.

인간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어설프게 닮은 것을 닮지 않은 것보다 더 싫어하는 생물이니까요.”

“불쾌한 골짜기 말씀이시군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되겠죠.

15미터짜리 거대 로봇끼리 불꽃을 튀기며 싸우는 것도 해냈는데, 불쾌한 골짜기 따위를 넘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맡겨주십시오.

세계 최고의 로봇 공학자, 저 김기열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그 불쾌한 골짜기를 넘어 ‘대 유쾌 마운틴’에 도달해 보일 테니까.”

“그럼 결정됐네요!”

모두에게 들릴만한 큰 소리로, 지수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저는 당장 오늘부터 5차 NE 컨벤션에 참여할 서브 파일럿의 모집과 조작법 트레이닝에 들어가도록 할게요.

이후 대회에서 필요한 서브 파일럿 역할을 로봇이 대체할 수 있다면, 굳이 서브 파일럿 시트를 키우기 위해 메인 설계를 변경할 필요도 없겠죠?

로봇을 작게 만들면 되는 문제니까요.

상혁 오빠. 지금까지 아무도 모르게 이 큰 프로젝트를 맡아서 진행하느라 수고하셨어요.

이제부터 이쪽 파트는 제가 맡도록 할게요.

상혁 오빠가 나머지 행사에 필요한 준비에 집중할 수 있도록.”

그러자 상혁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지수를 보며 말했다.

“지금 그건 내가 해야 하는 말 아니냐?”

“누가 하면 어때요.

한시가 급한데.

이번에도 슈퍼볼 광고를 통해서 행사 개최를 알리실 거잖아요.

그리고 다음 슈퍼볼까지는 두 달밖에 남지 않았고요.

그러니 빠르게 정리하고 다시 모두의 할 일로 돌아가는 게 낫겠죠.

전 지금 조금이라도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저 멋진 로봇에 다시 타고 싶을 뿐이에요.

아니면 추가로 덧붙일 말씀이라도?”

지수의 말을 들은 상혁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한탄하는 듯한 목소리로 천장을 보며 말했다.

“내···. 내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구나···.”

“그 호랑이가 상혁 오빠의 일을 전부 물어가서 먹어치울 거예요.

이쪽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행사 진행에 아무런 차질이 없도록, 제가 책임지고 전부 해결할 테니까.

자자! 고고씽! 허리 업! 챱찹! 빨리 가서 일합시다!

세계 최고의 이벤트를 유저들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상혁은 힘차게 소리치는 지수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고는, 함께 온 일행들을 향해 외쳤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모두를 향해, 지수의 말을 따르자고 말하기 위해.

“뭐해요? 볼 거 다 봤잖아요?

갑시다. 지수 말대로 저희가 할 게 겁나 많으니까.”

민준은 그런 상혁의 말을 들으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상혁을 따라 엘리베이터로 이동한 뒤, 조용한 목소리로 상혁에게 말했다.

“뭔가 시원섭섭한 표정인데?”

“내 가장 큰 스트레스이자 기쁨의 원천이었던 작은 비밀이 사라졌으니까.

지수 말대로, 솔직히 로봇 개발 관련 업무를 진행하면서 5차 NE 컨벤션 준비도 하고, 슈퍼볼 광고를 준비하면서 개발 중인 게임도 관리하는 건 거의 죽을만큼 힘들었거든.

그중에 가장 큰 부분을 대신 맡아준다는데, 내 입장에선 거절할 이유가 없지.”

“문제가 생길까봐 불안하지는 않아?

넌 원래 뭐든지 다 직접관여하려고 하는 스타일이잖아.”

“지수는 내 분신 같은 아이야.

비록 가벼운 성격과 CCO인 내 그림자 때문에 실력에 맞는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지만, 걔가 일을 추진하는 능력은 월드 클래스 기획자의 그것이지.

만약 나에게 이 프로젝트를 완전히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을 꼽으라면, 난 지수를 꼽겠어.”

“어? 그럼 나는?”

“나는 프로그래밍적인 부분에서라면 민준이 너를 절대적으로 신뢰하지만, 넌 그 외의 파트에서는 젬병이잖아.

각자 가진 장단점이 다 다른 거지.”

그러자 민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상혁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건 그래. 만약 나한테 서브 파일럿 선정 같은 일을 맡겼으면 난 절대 않으려고 했을 테니까.

차라리 교수님 말대로 로봇을 만드는 게 낫지.

사람은 너무 어려운 존재야.

컴퓨터처럼 입력한 값만 계산해서 딱 내놓는 존재였으면 좋았을 텐데.”

“사람이 그런 존재였다면 세상에 게임이란 문화는 존재하지 않았겠지.”

“그것도 그렇네. 그럼, 이제 서브 파일럿 문제는 지수가 완전히 맡아서 하는거야?

넌 나머지 파트만 맡아서 하는거고?”

“그렇지. 난 그래서 좀 더 기대된다고 생각해.

원래대로 내가 모든 것을 기획했다면, 행사에서 내가 모르는 부분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지수가 로봇 대전의 메인 파트를 담당하게 되었으니, 어떤 식으로 행사를 연출하고 어떤 식으로 유저를 즐겁게 할지를 고민하는 건 지수의 몫이 되었지.

난 지수가 어떤 식으로 메인 이벤트를 만들어갈지가 매우 기대돼.

걔가 가진 로봇에 대한 열정과 아직도 지우지 못한 중2병 끼를 고려한다면, 진짜로 상상하지 못한 멋진 연출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이제부터는 일부러라도 그쪽 관련 보고는 읽지 않을 생각이야.

지수를 믿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두근거림을 즐기고 싶기도 하니까.”

“그럼 이 행사는 게이머에게도, 그리고 아직 로봇의 존재를 모르고 있는 직원들에게도, 그리고 행사를 기획한 너에게도 두근거리는 행사가 될 수 있겠네.”

“그렇겠지.

흐흐···. 그 말을 듣고 나니 더 기대되는데?

행사를 기획한 나조차 모르는 메인 이벤트라.

이번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진짜로 즐겁게 행사를 지켜볼 수 있겠어.”

상혁은 자주 미소를 짓는 편이긴 하지만 상혁이 짓는 미소는 ‘사악한 생각이 떠올랐을 때의 미소’ 혹은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을 때의 미소’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혁은, 마치 PTW의 팬들이 NE 컨벤션을 기대하는 것처럼, 자신이 알지 못하는 미지의 뭔가에 대해 ‘기대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며, 민준은 어쩌면 이번 5차 NE 컨벤션이야말로, 상혁이 처음으로 ‘기대감’이라는 것을 느끼는 컨벤션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대감이라···.’

그 순간, 엘리베이터가 PTW 본사의 1층에 도착했고, 상혁은 문이 열리자마자 경쾌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온 현주를 향해 말했다.

“선생님. 저는 지금 엄청나게 두근거리는 기분이 되었습니다.”

“지수 때문에?”

“예. 이제는 저도 마지막 이벤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태가 되었으니까요.

이런 기분은 굉장히 오랜만이네요.”

“그야 상혁이 너는 회사에서 진행되는 모든 일을 다 알고 있으니까.

충분히 그럴 만도 하지.”

“그렇죠. 그래서 이런 기대감이 얼마나 좋은 느낌인지,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뭐랄까, NE 컨벤션의 진행자가 아닌 관람자의 입장에서, 팬들이 어떤 기분으로 행사를 기다리고 있었을지 조금은 이해가 되는 기분입니다.”

“그렇지. 그리고 지금은 팬들 모두가 목이 빠져다 다음 컨벤션을 기다리고 있을 거고.”

“그렇죠. 다들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사랑스러운 팬들에게 이 좋은 기분을 더 극적으로 맞이하게 해 주자고요.

선생님. 다음 슈퍼볼 광고예약을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현주가 미소 지으며 상혁에게 말했다.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이미 해놨지.”

“역시 선생님. 시간도 넉넉하게 잡아두셨나요?”

“2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서 그렇게 해뒀는데, 아직 시간이 있으니 필요하면 조정 가능할 거야.

조정할까?”

“아뇨. 2분이면 충분합니다.

2분이면, 전 세계에 있는 팬들의 심장을 기대감으로 가득 채우기엔 충분한 시간이니까요.

저희 광고가 나간 순간, 슈퍼볼을 보러온 팬들의 가슴 속에서 경기의 결과는 이제는 중요한 게 아니게 될 겁니다.

보는 모든 이들의 마음속에, 저희가 열 다음 컨벤션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 차게 될 테니까요.”

확신을 담아서 말하는 상혁의 눈빛을 보며, 현주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믿음이 담긴 목소리로 상혁을 향해 말했다.

“응. 나도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해.”

그것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간 이상혁이란 동료를 지켜보며 쌓인, 깊은 믿음이 담긴 한마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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