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 탑승
“으아아아아아! 오빠아아!! 나 로봇 안 태워주면 퇴사할거야아아! 퇴사할거라고오오!!”
사내에서 파일럿 모집을 위해 상혁이 공고를 올린 지 정확히 5분 만에, 상혁은 부실 문을 부술 듯이 열고 들어와 자신에게 땡깡을 부리는 지수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도 초등학생이 마트에서 장난감 사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바닥에 누워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는 ‘진짜’ 땡깡을.
올해로 35이 된 그녀가 자신의 나이도 무시한 채 이토록 땡깡을 부리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상혁이 올린 ‘5차 NE 컨벤션 쇼케이스를 위한 파일럿 모집 안내’에, 마치 그녀를 저격하는 듯한 내용이 있었기 때문에.
상혁은 파일럿의 신체 조건인 ‘155cm 이하’ ‘여성’이라는 조건 말고도 한 가지 조건을 더 붙였는데, 그것은 바로 ‘임원 참여 금지’라는 조건이었다.
그런 조건하에서, 키가 163센티인 서연이 자연스럽게 제외되었기에, 임원 중 남은 두 조건을 만족하는 유일한 멤버는 단 한 사람밖에 없게 되었다.
“흐아아아앙! 오빠가 어뜨케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요오오! 난 이 회사를 위해 연애도 포기했는데에에!!”
“아니, 누구도 너한테 연애하지 말라고는 이야기 안 했잖아···.”
그러자 옆에서 지켜보던 서연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
“오빠도 아시다시피 지수는 1차 NE컨벤션에서 MYOM의 마탑주 역할을 맡으면서 나름 팬클럽이 생길 정도로 인지도를 쌓아왔어요.
그리고 이후에도 YAS의 스트리밍 이벤트 같은 여러 행사를 통해 팬들에게 얼굴을 비추고 있었고요.
지금의 PTW팬들에게 있어서, 지수는 PTW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죠.”
“적어도 내가 아는 마스코트란 존재는 이렇게 바닥에서 초등학생처럼 팔다리를 휘저으며 생떼 부리지 않아.
그리고, 지수한테 팬클럽이 있었다고?!”
“엑? 모르셨어요? 회원 수만 40만 명이 넘는데?”
“엑?! 내 팬카페 회원 수보다 많잖아!”
“그야 오빠와는 다르게 지수는 귀여우니까요.
게임 잘하는 미소녀는 인기가 많다고요.”
“30대 중반에 미소녀란 호칭은 좀···.”
“누가 지수를 30대라고 보겠어요?
키도 작고 타고난 동안이라 지금도 고등학생 정도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데.”
그때, 바닥에 누워있던 지수가 벌떡 일어나며 상혁에게 말했다.
“오빠, 저는 지금까지 저 스스로 회사의 메인 이벤터라는 자각을 가지고 살아왔어요.
그래서 항상 체중에도 신경쓰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피부관리도 받고 에스테틱도 받았다고요.
말하자면 제 풋풋한 외모는 타고난 유전자의 영향도 있겠지만 노력의 산물이기도 한 거죠!
그러니 나이 때문에 제가 참여하는 걸 막으려고 임원 참가를 막은 거라면, 그건 억지라고 주장하겠습니다.
팬들도 제가 이벤트에 참여하는 걸 바랄 거라고요!”
“아니, 임원 참가 제한은 딱히 지수 너를 저격해서 만든 조항은 아닌데···.”
“그럼요? 지금 임원중에 155cm이하 여성 임원은 저밖에 없잖아요!
그런 상태에서 임원 참가를 막으면 그건 저를 저격하는 거나 마찬가지죠!
해당하는 사람이 저 한 명밖에 없으니까!”
“임원 참가를 제한한 이유는, 해당 이벤트에 참가가 결정되는 순간부터 컨벤션이 시작되는 날짜까지 트레이닝만 받아야 하기 때문이야.
안 그래도 NE컨벤션 때마다 임원급 직원들이 하는 일이 산더미 같은데, 거기서 한명이라도 빠지면 부담이 커지니까 막으려는 거지.”
“트레이닝이요?”
“어. 공지에 적어놨잖아. 이번 파일럿 후보는 5차 NE 컨벤션에서 있을 쇼케이스 진행을 위해 뽑는 거라고.
우린 그날 KOH의 홍보를 위해 딥 다이버의 VR 기능을 사용해서 로봇끼리의 가상 대전을 실행할 예정이고, 선정된 파일럿들은 실제 로봇에서 사용할 법한 조작 시스템을 조종해서 유저들 중에 선정된 10명의 파일럿의 전투를 보좌하는 역할을 하게 될 거야.
당연히 유저 출신 파일럿들은 해당 조작 시스템을 그날 처음 만져보는 사람들일 테니 실력이 떨어질 것이고, 그 부족한 숙련도를 우리가 미리 뽑은 파일럿들이 보조하도록 하는거지.
유저가 이벤트의 주인공인 기분을 느끼게 하면서, 동시에 현란하고 능숙한 전투가 진행될 수 있도록.”
“그러니까 훈련 시간 때문에 본 업무를 못할까 봐 임원진은 참가하지 못하게 한 거라는 거죠?”
지수가 상혁에게 묻자, 상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럼 좋아요. 제가 제 명예를 걸고 약속하건대, 파일럿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동시에 제 업무도 전부 처리하도록 할게요.
그럼 문제없는 거죠?”
그러자 상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선출된 인원은 마지막 한 달간 전원이 외부와의 접촉이 단절된 상태에서 특별 합숙을 받아야 해.
인터넷도 안 되고 전화도 할 수 없는 곳이니 업무 진행은 불가능하겠지.”
그러자 지수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낀 듯 상혁을 흘겨보며 물었다.
“잠깐만요. 아무리 보안을 위해서라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어요?
PTW 직원 중에 보안의 중요성을 모르는 직원이 있을 리도 없고, 단순히 PRD를 통해 3D 모델링으로 구현된 로봇을 조종하는 것 치고는 보안 상태가 너무 심하잖아요?”
지수의 예리한 질문을 받은 상혁은 당황하며 빠르게 지수의 질문에 답변하기 시작했다.
“우선 지금 직원 정보를 파악한 바로는 회사 전체를 뒤져봐도 155cm이하의 여성 직원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이야.
안 그래도 게임회사라 남성 직원 비율이 높은데, 거기에 여성 직원 중 상당수가 해외 출신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서연이만 해도 키가 160이 넘잖아?
155cm 이하 파일럿을 10명 뽑으려면, 필연적으로 외부 인력을 추가로 충원해야하지.
문제는 그렇게 되면 보안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거야.
그래서 마지막 1개월을 외부와 격리된 상황에서 훈련받게 하는 거고.”
“보안이 문제라면 아예 처음부터 완전히 격리해야죠.
어차피 훈련에 참여하는 순간부터 우리가 뭘 하려는 건지 바로 알 수 있을 텐데.
오빠. 뭐 숨기는 거 있죠?”
“뭐!? 뭘 숨겨!? 내가 너희한테 뭘 숨긴다고?!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네!?”
그 순간, 옆에서 조용히 미소 지으며 이 광경을 바라보던 민준이 상혁에게 질문했다.
“상혁아. 나도 지수 의견에 동의해.
마지막 한 달간 받는 트레이닝의 내용이 앞서 받은 트레이닝 내용과 전혀 다르면 모를까, PRD로 진행하는 초반부 훈련은 격리 없이 진행하고 마지막 한 달은 굳이 격리까지 하면서 진행한다?
그 말은 그 뒤쪽에 있는 한 달의 훈련 과정에 뭔가가 있다는 말이지.”
그러자 상혁의 고개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아가며 민준을 향했다.
‘넌 비밀을 알면서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라는, 원망 섞인 눈빛과 함께.
민준은 그런 상혁을 보며 피식 웃더니, 고개를 저으며 상혁에게 말했다.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해주겠다는 의도는 잘 알겠지만, 지수가 저렇게 참가하고 싶어하는 상태에서 더 이상의 비밀유지는 의미가 없어.
지수가 파일럿에 지원하면 어차피 밝혀질 이야기이고, 반대로 지수가 파일럿에 뽑히지 못한다면 행사가 공개되는 순간 상혁이 너를 엄청나게 원망하게 되겠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냥 임원들에게만이라도 공개하는 게 어때?”
“어!? 맞죠! 역시 뭔가 있다고 생각했어! 오빠! 뭘 숨기고 있죠?! 빨리 말해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그때 지수가 끼어들며 민준에게 물었다.
“민준 오빠는 뭐 알고 계세요?”
“알고 있지만, 상혁이 말하기 전에는 말하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말은 못 해줘.
상혁은 이번 프로젝트에 대해서 직원들에게 비밀로 하기를 원했거든.
아마 임원 중에서도 상혁이 숨긴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헬퍼로 참여했던 나랑 예산 승인 권한을 가진 현주 선생님뿐이겠지.”
“선생님도 알고 계셨어요?”
서연이 묻자 현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나는 솔직하게 말하자고 했지만, 상혁이 반대했었어.
일단 프로젝트 초기 단계에서 해당 프로젝트가 성공할지가 굉장히 불투명했거든.
상혁도 초반엔 돈만 엄청나게 잡아먹고 결국 실패로 돌아갈지도 모르는 프로젝트라고 경고했었고.”
“그게 무슨 프로젝트죠?”
지수의 질문에 현주가 답했다.
“나도 상혁의 허락이 없으면 말할 수 없어.
입막음 당했거든.”
“확실히 뭔가 있기는 한 거네요?”
지수가 상혁을 향해 확 다가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리고는 반짝이는 눈으로 상혁을 향해 물었다.
“오빠?”
상혁은 대답 없이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렸고, 지수는 재빨리 상혁의 시선이 향한 방향으로 이동해 다시 한번 상혁을 빤히 쳐다보았다.
“오빠?”
결국 상혁은, 그런 그녀의 눈빛을 도저히 무시하지 못하고 어깨를 떨구며 그녀를 향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젠장. 내가 졌다.”
“끼야호우! 빨리! 빨리! 뭔지는 몰라도 뭘 하고 있었든 간에 빨리 보여줘요!”
“알았으니까 기다려. 지하 연구동으로 가려면 보안 레벨 설정 고쳐야 하니까.”
상혁이 노트북으로 이동해 설정을 조정하는데, 갑자기 카렌이 자리에서 일어나 상혁에게 말했다.
“저도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평소엔 거의 말을 하지 않는 민솔까지 자리에서 일어나 상혁에게 말했다.
“저도 부탁드립니다.”
“카렌 씨도 그렇고 민솔이 너도 160cm 넘잖아.”
“구경은 할 수 있잖아요.”
“젠장.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지금 부실에 있는 사람 전부 같이 구경하러 갑시다.
대신 다른 직원들한테는 철저하게 비밀로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직원들의 보안 레벨을 수정한 상혁은, 기열에게 임원진이 연구동에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린 후, 모두를 데리고 엘리베이터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지하 연구동으로 들어가기 위한 복잡한 보안 절차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보안 액세스 권한 1급.
방문자 이상혁의 시큐리티 코드를 확인하였습니다.
특수 보안 지역 이동을 위해 망막 및 지문 인식을 수행합니다.
터치패드에 등록한 지문을 인증하시고 카메라로 눈동자를 향해주시기 바랍니다.
지문 정보 일치 여부···. 확인.
망막 스캔 일치 여부···. 확인.
음성 인식 프로세스를 시작합니다.
랜덤한 단어를 발언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민준이 마치 SF영화의 한 장면 같은 보안 절차를 상혁이 수행하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며 상혁에게 말했다.
“드디어 ‘그걸’ 보게 되는 건가.
메인 운영체제를 내가 작업했으면서도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네.”
“전에 구경 갈 거냐고 물어봤을 때 네가 거절했잖아.
다 완성되면 보고 싶다고.”
“두 분 다 조용히 해 주세요.
전 지금 이 순간을 만끽하고 싶으니까.
하아··· .만약 상혁 오빠가 숨겨놓은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그것’이라면. 전 오늘 행복사할지도 몰라요.”
“네가 생각하는 그게 뭔데?”
상혁이 묻자 지수가 혀를 내밀며 말했다.
“오빠도 자기가 뭘 하는지 안 가르쳐주셨으니까, 저도 말해주지 않을 거예요.
그나저나 이거 왜 이렇게 오래 이동해요?
연구동이 지하 수백 미터에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정확한 층수를 가늠하지 못하게 엘리베이터의 속도가 랜덤으로 조정되게 되어있어.
어떨 때는 오래 걸리고, 어떨 때는 빠르게 움직이지.”
“아까 보안 절차도 엄청 복잡하던데 그런 기능까지 적용하신 거예요?”
“그것만 한 게 아니야.
내가 보안 절차를 해제하긴 했지만, 지금 엘리베이터에 탄 전원의 신원이 동시에 인식된다고.
지금이야 내가 조금 전 보안 설정을 수정해서 전원에 해당하는 보안 코드를 발급했으니까 괜찮은 거지, 만약 이 엘리베이터 내부에 단 한 사람이라도 허용된 인원이 아닌 다른 사람이 타고 있다면 엘리베이터는 목표한 연구동이 아닌 지하의 다른 층으로 가게 되어있어.
거기엔 진짜 프로젝트를 위장하기 위한 다른 설비가 들어가 있고.”
“오, 그러니까 진짜로 무슨 비밀본부 같다!”
“비밀 본부가 맞으니까.”
상혁이 말을 마치는 순간, 엘리베이터의 뒤쪽 문이 푸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문 건너편에 있는 SF 스타일의 두꺼운 해치가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 순간, 지수는 입을 벌린 채 소리없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로봇.
번쩍이는 강철로 만들어진 15M 크기의 거대 로봇들이, 상혁 일행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엘리베이터 입구의 양쪽에 줄을 서서 무릎을 꿇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지수가 상상하던 ‘그것’의 모습을 아득하게 초월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이거···.”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지수를 대신 해, 서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거 진짜 맞아요?”
“서연이 네가 말하는 진짜라는 게 어떤 의미로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 단어가 ‘저게 실제로 사람이 탑승해 움직이는 거대 로봇이 맞느냐’는 의미로 물어본 거라면, 저건 진짜가 맞아.”
“미쳤어······. 원래부터 오빠가 어딘가 정신 나간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기는 했지만, 이건 진짜 미친 짓이에요···.”
“칭찬이야?”
상혁의 물음에 서연이 답하기도 전에, 지수가 빼액하고 소리질렀다.
“로로로로로로!! 로보트다아아아아아!!!”
그리고는 마치 장난감 매장에 도착한 어린애처럼 두 팔을 벌리고 로봇들이 도열해 있는 곳을 향해 힘차게 달려나갔다.
“우와아아아!! 꺄아아아아!! 진짜다!!! 이거 홀로그램 그런 거 아니죠!? 헉! 차가워! 단단해! 플라스틱도 아니잖아! 이거!
이거 KOH에 등장하는 로봇을 실물로 만든 거 맞죠?!
오빠 진짜 미쳤어요!?”
그 화려한 리액션을 보며, 민준은 피식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상혁을 보며 말했다.
“미친놈이니까 이런 걸 만들 생각을 했겠지.”
그런 민준의 말을 깨끗이 무시한 채, 지수는 잔뜩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치기 시작했다.
“와! 와! 헉! 꺅! 움직이는 거 보고 싶다! 타고 싶다! 와! 진짜!
어떻게 이런 걸 만들면서! 꺄아악!! 저 한테! 말을 안 할 수 있어요!?
만약에 제가 말 안 했으면 임원이라는 이유로 파일럿 지원도 못 하게 했을 거 아니에요!
진짜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만약에 이걸 조종석이 아니라 관람석에서 봐야 했다면 난 오빠를 평생 원망했을지도 모른다고요!”
“아까 숨겨둔 게 무엇일지 예상하고 있었다며, 반응이 너무 격한거 아냐?”
“난 해봤자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스턴트 봇 같은 걸로 싸우는 거라고 생각했죠!
세상에 누가 게임회사 지하에서 15미터짜리 거대로봇을 만들고 있다고 생각하겠어요!?
이건 시도한 사람도 미친 거지만 그럴 거라고 상상하는 사람도 미친 거라고요!”
그렇게 소리치던 지수는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더니, 상혁을 향해 홱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다람쥐처럼 쪼르르 달려와 상혁을 향해 말했다.
“헤헤···. 상혁 오빠. 아니, 상혁오라버니···.”
“뭐야. 갑자기 왜 그러는데.”
“소녀 오라버니께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사옵니다.”
“뭐, 타보고 싶다고?”
마치 머리에 모터라도 달린 것처럼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지수를 보며, 상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지수를 향해 말했다.
“타고 싶으면 우선 파일럿으로 뽑혀야겠지.
그리고 훈련도 받아야 하고.
한 대에 수천억짜리 물건인데, 아무리 지수, 네 부탁이라도 갑자기 초보자를 태울 수는 없어.
타고 싶으면 절차를 걸쳐서 하도록 하자.”
“꼭 조종이 아니어도 되니까!
그냥 좌석에 앉아서 조종간만 잡을 수 있게 해주면 되니까!
응?! 오라버니! 조금만! 타기만 할게요. 타기만!”
“미안한데 완성된 로봇들은 사고 방지를 위해서 테스트 파일럿인 구스타프 씨가 아니면 해치를 열 수 없게 설정되어 있어.
임의의 직원이 멋대로 파일럿 권한을 부여받아 로봇을 타고 사고 칠 수 없도록, 훈련 프로그램을 수행하지 않은 인원은 파일럿 권한을 받을 수 없게 해놓았고.
거기 들어가는 모든 보안 프로그램은 민준이 직접 설계한 거야.
여기 직원들도 멋대로 해제할 수 없지.”
“쳇. 그럼 오빠한텐 볼일 없어요.”
지수는 이번엔 민준을 향해 다가가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민준 오라버니. 소녀는 평소부터 오라버니의 신들린 프로그래밍 실력을 동경하고 있었사옵나이다.
부디 그 신들린 능력으로, 보안 절차를 해제하여 소녀에게 저 멋진 로봇을 탈 수 있는 영광을 주시지 않겠사옵니까?”
그러자 민준은 손으로 턱을 비비며 지수에게 말했다.
“타고 싶어?”
“네!”
“진짜로 타기만 할 거지?”
“그럴게요!”
“미안한데 나도 저거 보안 뚫으려면 하루 넘게 걸려.
내가 설계했지만 설계한 본인도 뚫기 어려울 정도로 철저하게 틀어막아 놨거든.
저건 잘못하면 대규모 살상을 일으킬 수도 있는 ‘병기’니까.”
“그럼 하루를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저렇게 멋진 로봇을 눈앞에 두고서?!!”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실망스러운 듯 말하는 지수를 보며, 민준이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지수를 향해 말했다.
“글쎄. 그건 모르지.
어쩌면 프로그램을 개발한 사람이, 등록된 파일럿 데이터를 작업할 때 더미 데이터로 임원중 155cm 이하의 키를 가진 사람의 지문을 등록했을 수도 있는 거고.
그리고 우연히 저 중의 한 로봇에 그 더미 데이터가 남아있을 수도 있는 거고.
그리고 그 로봇은 처음부터 자신의 파일럿이 될 사람을 기다리면서 조용히 저 자리에 앉아있을 수도 있는 거겠지.”
그러자 상혁의 고개가 휙 돌아가며 민준을 향했다.
“뭐···. 라고?”
“그냥 가정을 말한 것뿐이야.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
하지만 지수야. 아무리 낮은 확률이라도, 한번 확인해 볼 가치는 있지 않을까?”
민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수는 민준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힘차게 소리치며 로봇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나갔다.
“상혁 오빠는 바보! 멍청이! 해삼! 말미잘! 스폰지밥!
오늘부터는 민준 오빠가 최고야!
오빠! 이 중에 어떤 로봇에 그 더미 데이터가 남아있을까요?”
“글쎄. 네가 느낌이 오는 로봇이 바로 그 로봇이겠지.”
민준의 말을 들은 지수는 숨을 가다듬으며 조용히 자신을 둘러싼 10대의 로봇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중 아직 완성이 덜 된 것처럼 보이는 두 대의 로봇을 제외하고, 나머지 로봇들의 디자인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자신의 안에 타달라고 부탁하는 듯한 디자인을 하고 있는, 멋진 로봇들의 모습을.
그리고 그중 하나의 로봇에서, 지수는 강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거다.’
컬러링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보라색의 컬러로 되어있는 로봇.
마치 마법사의 로브처럼, 형형색색의 수정구를 온몸에 박아넣은 그 로봇은, KOH를 테스트 플레이 할 때 지수가 메인으로 플레이하던 ‘그 로봇’을 닮아 있었다.
‘내 심장 소리가 들릴 것 같아.’
점점 가빠오는 자신의 숨소리를 들으며, 지수는 로봇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자신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은은히 빛나고 있는 로봇의 부품에 가져다 대었다.
[등록된 서브 파일럿의 신원이 확인되었습니다.
마스터 서지수.
당신의 로봇, <메이지 알파>가 탑승을 기다립니다.]
전자음이 섞인 음성과 함께, 육중한 기계음을 내며 로봇이 자신의 가슴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파일럿 석에 위치한 모든 버튼들과 조명에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오..오오오!!오오오오!! 이거 뭐야!?! 오빠!? 이거 뭐에요!?”
그 모습을 보며 미친 듯이 흥분하는 지수를 보고, 상혁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민준을 향해 물었다.
“너, 이거 알고 미리 작업해둔 거냐?”
“조금 전 니가 보안 작업할 때 미리 입력해놨지.”
“니가 직접 해킹해도 못 뚫는 보안이라며?”
“그건 뚫었을 때 이야기고, 애당초 난 마스터 권한이 있어서 모든 프로그램에 접근할 수 있어.
그게 없으면, 나도 뚫는 게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였지.
애당초 키를 가지고 있는데 문을 부술 필요는 없잖아.
어쨌든, 파일럿 하나는 확보된 것 같네.
저길 보라고.
마치 지수를 위해 설계한 것처럼, 서브 파일럿 시트가 완벽하게 들어맞잖아.”
그렇게 말하는 민준의 의견엔, 상혁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저리 조종간을 만져대며 아직도 비명을 질러대는 지수의 모습은, 그녀가 타고 있는 로봇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기 때문에.
지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로봇의 조정석에 앉아 조종간을 꽉 잡고 있었다.
마치 결코 내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러자 조금 전 그녀에게 말을 걸었던 목소리가 다시 한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마스터 서지수.
메이지 알파가 명령을 기다립니다.]
“어?!?어?! 하지만 난 아직 조종할 줄 모르는데?!
버튼이 너무 많아!
뭘 눌러야 할지 전혀 모르겠다고!”
[그럼 제가 메인 기동에 필요한 조작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지금부터 빛이 들어온 버튼을 순서대로 따라서 조작해주시기 바랍니다.]
순간 그녀는 조종석에 있는 모든 버튼의 불이 꺼지며, 자신의 자리 바로 왼쪽에 있는 작은 스위치에 빛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작은 레버처럼 생긴 그 버튼의 밑에는, [Close Hatch]라는 단어가 적혀있었다.
그녀가 버튼을 누르자, 로봇의 해치가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상혁은 급하게 지수가 탄 로봇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야! 타기만 한다며어어어!!”
“미안해요! 오빠아아! 조금만 탈 게요오오오!!”
그녀의 비명은 해치가 폐쇄되면서 잘리듯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상혁은 메이지 알파의 온몸에 달린 수정구가 차례대로 빛을 뿜어내는 것을 보며, 함께 구경 온 일행을 향해 급하게 소리쳤다.
“전부 옆방으로 도망쳐어어어!!”
지수는 해치 내부의 메인 카메라를 통해 급하게 옆방으로 뛰어가는 동료 직원들의 모습을 보며, 작은 웃음을 지었다.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 로봇의 시야로 보는 그들의 모습이 작은 개미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것은 자신이 ‘로봇을 타고 있다.’라는 사실을 무엇보다 실감하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마스터. 근처에 파괴 목표가 될 수 있는 나이츠들이 9대 있습니다.
해당 로봇을 타겟으로 설정하고 전투를 수행하시겠습니까?]
“싸우고 싶기는 한데 아마 내가 여기 있는 로봇에 기스라도 내면 상혁 오빠가 날 다시는 보지 않으려고 할 거야.
그래도 내가 사고 칠까 봐 계속 걱정하던 게 괘씸하긴 하니까, 멋지게 조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뭔가 방법이 없을까?”
[그 경우 본 로봇의 탑재된 가상 스킬의 기초 기능 테스트를 수행하는 프로토콜을 추천해 드립니다.
제시된 조작 가이드에 따라 천천히 조작을 입력하시면, 해당 조작의 입력 타이밍을 조작하여 숙련자가 입력한 것처럼 부드러운 움직임으로 재생하겠습니다.]
“그런 게 가능해?”
[가능합니다. 메이지 알파는 10대의 나이츠 중에서도 수많은 주문 보조가 가능하도록 AI 성능을 특화한 로봇이니까요.]
“그럼 그렇게 하자.”
지수는 조종간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는 정면의 모니터를 보며 힘차게 외쳤다.
“어디 한번 보여주실까! 상혁 오빠가 몰래 개발한, PTW의 로봇의 성능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