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 Toys' War
구스타프가 탄 거대 로봇.
영원(永遠)의 팔이 하늘 높이 치켜 올라갔다.
마치 하늘을 향해 삿대질이라도 하는 것 같은 자세로, 구스타프는 자신의 명령을 받드는 운영 체제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플라즈마 필드!”
[플라즈마 필드. 레디.]
그 순간 영원의 주먹에서 마치 번개처럼 뇌전의 줄기가 갈래갈래 뻗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 화려한 이펙트를 보며, 기열은 속으로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화려한 전투는, 사실 딥 다이버를 벗는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AR로 구현된 ‘가상 이펙트’였기 때문에.
그러나 딥 다이버의 무지막지한 해상도와 그래픽 성능에 힘입어, 그 가상의 전투는 매우 현실감 있는 모습으로 기열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 거대한 로봇이 겨우 전기 몇 줄기 맞아서 데미지가 나올 리가···.’
영원이 뇌전이 깃든 손으로 바닥을 내려치는 찰나의 순간, 기열은 속으로 생각했다.
상대 측에 있는 15미터 크기의 강철 거인이, 곧 바닥에 깔린 뇌전의 장판을 성큼성큼 뚫고 구스타프가 조종하는 영원의 옆구리를 향해 검을 휘두를 거라고.
그러나 그런 기열의 기대를 철저하게 배신하며, 반대쪽에 있는 로봇은 기열이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여주었다.
-퍼퍼퍼퍼펑!-
전신의 부속이 고압 전류에 튀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플라즈마 필드에 직격당한 로봇이 전신에서 불꽃을 뿜어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신에서 스파크를 튀기며 주저앉은 채 감전된 것처럼 부들부들 떠는 로봇을 본 기열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머리에 쓰고 있던 딥 다이버를 벗었다.
그러자 그의 눈과 귀를 가득 채우고 있던 화려한 이펙트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멀쩡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은 채 실감 나게 몸을 떠는 로봇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화려한 이펙트를 가진 헐리우드 영화의 CG를 갑자기 벗겨버린 느낌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본 기열은 다시 딥 다이버를 머리에 뒤집어쓰며 범배에게 물었다.
“단순히 로봇이 가상 이펙트를 맞고 리액션을 보이는 부분만 구현했을 거로 생각했는데, 가상 공격의 속성에 따른 부품 파손도 구현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화속성 공격을 맞으면 장갑이 그을려야 정상이고, 빙속성 공격을 받으면 갑옷에 서리가 맺혀야 정상이고, 뇌전 속성 공격을 받으면 전신의 회로가 불타는게 당연하겠죠.”
“하지만 원래 저 로봇은 웬만한 초 고전압도 버텨낼 수 있도록 설계된 로봇입니다.
게다가 영원이 현재 낼 수 있는 전기적 출력을 전부 쏟아내더라도 상대측의 로봇을 감전시킬 정도의 초 고전압을 쏘아내는 건 불가능하죠.”
“압니다. 그리고 원본 게임에는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화포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무기가 개발 과정에서 제외되었다는 것도요.
하지만 교수님.
피격 당했을 때의 데미지나 이펙트가 가짜인 것처럼, 공격 이펙트 역시 가짜로 꾸며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매 공격에 들어가는 값을 미리 정해둔다면, 각 공격에 들어가는 ‘가상의 출력 소모량’ 역시 정해둘 수 있죠.
게다가 이 방식을 사용하면, ‘저런 것’도 가능하고요.”
범배의 말을 들은 기열이 고개를 돌려 로봇이 있는 방향을 보았다.
거기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소환된 거대한 총기를 붙잡고 사격을 하려고 하는 영원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가상의 무기?”
“있지도 않은 번개를 소환하는데 총이라고 못 만들 건 없죠.”
가상의 총기이지만 움직이는 모습은 정말 진짜 같은 모습이었다.
구스타프가 조종하는 영원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진짜 거대한 총이 있는 것처럼 자세를 취했고, 손잡이와 방아쇠를 잡은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그 동작에서 전해지는 무게감.
총을 쏘는 순간 어깨가 뒤로 밀리는 반동.
총이라기보다는 ‘대포’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거대한 총신에서 탄환이 쏘아져 나갈 때 나오는 폭음과 불꽃.
그리고 거대한 탄피가 총에서 튕겨 나와 바닥에 충돌하는 모습.
그 모든 것이 이 ‘연기’에 현실성을 부여하고 있었다.
딥 다이버를 벗지 않는 이상, 현실과 가상의 차이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러나 더욱 황당한 것은, 영원의 소총 사격에 대응하는 상대 로봇의 자세였다.
상대측의 로봇은, 영원이 쏘아내는 가상의 총탄에 대응해, 손바닥에서 펼친 에너지 필드로 자신에게 발사된 총탄을 허공에 붙잡아 두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붙잡은 총탄이 일정 수 이상이 되자, 로봇은 마치 염력을 다루는 듯한 자세로 손을 휘두르며 자신이 붙잡아 둔 총탄을 그대로 영원을 향해 되쏘아냈다.
그것은 그나마 출력만 보장된다면 어떻게든 구현은 가능한 수준이었던 뇌전 공격과는 다르게, 아예 현실에서는 구현이 불가능한 공격 방식이었다.
구스타프는 영원을 공중에서 회전시키며 자신에게 되쏘아진 총탄을 피해냈지만, 모든 총탄을 완벽하게 막아내진 못했다.
쏘아진 총탄은 영원의 장갑과 충돌하며 폭음과 함께 깊은 자국을 남겼고, 그러자 일부 공격을 직격으로 받은 영원의 몸이 공중에서 뒤로 살짝 밀려났다.
“저 정도면 거의 초능력 수준인데요?
그리고 방금 공중에서 자세 바꾼 건 어떻게 한 거죠?”
“애당초 그렇게 움직이도록 계산된 점프를 한 겁니다.
사실 총탄에 맞지 않았어도 똑같은 자세로 움직였겠죠.
지금 저 두 로봇이 펼치는 묘기는 일종의 프로레슬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쪽이 기술을 걸면, 접수 측의 리액션을 통해 기술의 데미지가 커보이게 만들고, 진짜로 피해를 입은 것처럼 연기를 하는거죠.
상대가 쏜 총탄이 몸에 직격 되는 타이밍을 계산해서 뒤로 한 발짝 물러선다던가, 상체를 뒤로 꺾는 식으로 피격감을 구현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래픽 기술의 도움을 받아 피격된 자리에 이펙트와 흔적을 남기는 거고요.
만약 가상의 데미지로 로봇의 장갑이 파손되었다면, 그것은 보는 사람의 시야에 파손된 장갑의 형태로 그대로 덧씌워집니다.
아예 장갑이 떨어져 나갔다면, 보는 사람의 시야엔 현실에서는 존재하는 장갑이 아닌, 그래픽이 그려낸 내부 관절의 모습이 보이게 되겠죠.
그리고 그 덧씌움은 실시간으로 로봇의 움직임을 추적하며 계속 유지되게 됩니다.
게다가···.”
-쿵!!!-
방금 공격을 받은 어깨 부위의 손상이 심했는지, 영원이 들고 있던 소총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리고는 총격을 맞은 한쪽 팔이 고장난 것처럼 축 늘어트렸다.
“그렇게 구현된 가상의 데미지는 실제 머신의 구동에도 영향을 줍니다.
말하자면 상상의 영역이 현실에 영향을 끼치고, 현실의 효과가 상상의 영역에도 효과를 끼치는 거죠.
구스타프 씨가 조종하고 있는 영원은 조금 전의 공격으로 한쪽 팔의 기능이 크게 저하되었을 겁니다.
그건 가상의 세계에서 일어난 가상의 데미지지만, 로봇의 운영체제는 그것을 실제 데미지로 계산하여 강제로 팔의 움직임을 제한하죠.
반대로 조금 전 플라즈마 필드에 직격당한 상대 로봇의 경우, 일부 전자 기능에 문제가 생겼을 겁니다.
카메라가 나갔다면 아마 일부 모니터가 파손이라는 문장을 띄우고 있을 것이고, 감지 센서가 나갔다면 손상된 만큼의 감지 장치가 동작하지 않겠죠.
반대로 현실에서는 단순히 손을 하늘로 뻗었다가 바닥에 내리쳤을 뿐인 영원도, 실제로는 기체 출력의 상당 부분을 기술 시전에 사용했을 겁니다.
그러니 조금 전 상대 로봇의 반격에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못했던 거죠.
큰 기술을 사용한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요.
기체에 가해지는 모든 가상의 부담은 현실의 기체 조종에 영향을 끼칩니다.
구동 속도, 데미지 감소율, 장갑의 내구도, 기체의 출력, 남은 탄환의 수, 사용할 수 있는 기술.
그 모든 것이 현실의 로봇과 연동되어 두 로봇의 전투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가상의 세계에서 계산되어 현실의 로봇에 실시간으로 적용되고 있다는 말입니까?”
“맞습니다.”
“엄청나네요. 확실히 그 방법이라면 전투를 엄청나게 화려한 방식으로 구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범배는 기열의 눈빛에 서린 ‘아쉬움’을 눈치채고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기열에게 물었다.
확실히 이번 업데이트가 거대로봇끼리의 대결의 수준을 크게 올리기 위해 진행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반대로 이 프로젝트를 책임지고 있는 기열의 허락 없이 구현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범배는 그 부분에 대해 기열에게 사과했다.
“멋대로 전투 방식에 변화를 주려 시도한 것에 대해 사과드립니다.
미리 승낙을 받으려고 했지만, 구스타프 씨가 필사적으로 말리더군요.
기열 교수님의 놀란 모습이 보고 싶다면서요.”
그러자 기열이 고개를 저으며 범배에게 말했다.
“아뇨.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현실의 물리적 데미지를 겨루는 기존의 전투도 박진감이 넘치는 멋진 대결이었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의 전투도 더 멋지면 멋졌지 나빠지지는 않았으니까요.
오히려 제가 아쉬워하는 건, 조금 더 일찍 저 아이디어를 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지금 저 전투를 보아하니, 저 상태에서 좀 더 현실적인 리액션이 가능하도록 로봇을 업그레이드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업그레이드를요?”
“예를 들면 현재 로봇에 설치된 장갑 안쪽에 잠금 해제 기능이 있는 사출 장치를 설치할 수도 있겠죠.
실제 데미지를 입어서 장갑이 부서지면, 로봇 본체에서도 장갑이 떨어져 나가도록요.
그리고 불꽃을 발생시키는 장치를 전신에 설치하여 실제 스파크가 튀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고, 가상의 총기가 아닌 실제 총기를 가지고 상대를 공격하게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스펙 그대로의 총기를 구현하면 로봇의 내구도가 버티지 못할 테니 진짜 총기를 사용하게 할 수는 없지만, 일종의 너프건 같은 가짜 탄환을 쏘게 만드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죠.
물론 그 경우는 가짜 탄환이기 때문에 조금 전 보여준 것처럼 공중에 탄환을 붙잡아놓는 기술은 쓸 수 없을 테지만요.”
“그 경우는 섞어서 쓰면 될 겁니다.”
“섞어서요?”
“모든 탄환을 저렇게 막아내는 건 아니죠.
몇몇 탄환은 빗나가서 바닥에 맞기도 하고, 몇몇 탄환은 조금 전 영원처럼 장갑에 직격하기도 할 겁니다.
염동력 실드의 출력을 초과하는 물리력을 가지는 탄환의 경우, 탄속만 조금 떨어지는 상태로 방어를 뚫고 들어갈 수도 있을 거고요.
사격이 개시되는 순간, 예상되는 결과를 미리 시뮬레이트해서 반영시키면 됩니다.”
“그러니까 바닥이나 장갑에 맞는 탄환은 실제로 총에서 발사되게 하고, 공중에 붙잡히는 총알은 가상으로 구현한다는 거군요?”
“그렇죠. 사실 이 모든 아이디어는 민준 씨가 설계한 안전 프로그램에서 나온 겁니다.
민준 씨는 로봇이 시전하는 모든 공격의 데미지를 미리 계산하여 파일럿에게 일정 이상의 데미지가 예상되는 경우 강제로 공격의 출력을 낮추는 방식을 설계했죠.
현실 속에서의 로봇이 펼치는 전투는, 제가 조종하는 로봇의 행동이 상대 로봇의 상태에 영향을 끼치는 방법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오로지 현실에서 펼쳐지는 물리력에 의해서만 상대 로봇의 상태를 변화시킬 수 있죠.
그건 병기라는 측면에서는 당연한 겁니다.
상대가 죽을 것 같으면 탄속이 줄어드는 총 같은 건 말 그대로 완전히 쓸모없는 물건이니까요.
하지만 병기라는 측면을 걷어내고 순수한 엔터테이먼트 디바이스로서 로봇을 해석한다면, 전투에 임하는 두 로봇의 움직임을 의도적으로 통제함으로써 엄청나게 많은 가능성을 열 수 있죠.
파일럿의 안전에 대한 걱정 없이, 애니메이션에서나 나올법한 온갖 화려한 공격 방법이 가능해질 테니까요.
특히 저런 방식으로 싸우는 상황이라면 더 그렇고요.”
범배가 말을 하는 순간, 두 로봇이 마치 무협 영화의 주인공처럼 손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데미지 때문에 한쪽 팔을 쓸 수 없는 영원은 한 손으로, 그리고 상대측의 로봇은 두 손으로.
순간 공간이 일렁이며 마치 보이지 않는 기운이 두 로봇의 손바닥 위에 응축하는 듯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그 무형의 기운이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강해지자, 두 로봇은 서로를 향해 동시에 팔을 뻗었다.
-쿠오오오오오오-
마치 공기가 비명을 지르는 듯한 사운드와 함께, 마치 공기가 압축되는 것 같은 느낌으로 두 로봇 사이의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무협 영화에서 두 고수가 내공 대결을 펼치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범배가 기열에게 말했다.
“지금 저 모션은 순전히 프로그램적인 통제로만 이루어진 가상의 출력 대결이지만, 만약 두 로봇의 손바닥에 강한 출력으로 바람을 쏘아낼 수 있는 장비가 있었다면, 저 상태에서 실제로 공기와 공기가 충돌하는 강한 풍압이 발생했을 겁니다.
앞서 이뤄진 전투에서 바닥에 떨어진 수많은 탄피와 부속들이 바람에 밀려 날아가고,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관중들의 얼굴에도 공기의 압력이 주는 박력이 전달되었겠죠.
아무리 출력을 높인다 하더라도 저렇게 무거운 로봇을 뒤로 밀어낼 수 있는 장치는 만들기 어렵겠지만, 딥 다이버가 합성한 AR 이펙트의 도움을 받는다면, 보는 이로 하여금 그럴싸한 느낌을 주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요?
게다가 저 대결의 결과 역시 로봇의 상태에 반영되니, 가상의 스킬이지만 현실 대결의 결과에 영향을 끼치게 될 거고요.”
“확실히. 눈으로만 보고 있는 지금도 진짜 염동력 대결을 펼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인데, 저 사이에서 바람까지 뿜어져 나온다면···.”
그 모습을 상상한 기열이 범배를 향해 말했다.
“아, X발. 그거 진짜 개 끝내주겠는데요?”
기열이 말을 마치는 순간, 공기를 찢는 듯한 거대한 파공음이 두 사람의 귀에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파문처럼 공간을 울리는 거대한 일렁임이 테스트 동 전체로 퍼져나가며, 두 로봇이 마치 강한 압력에 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균형을 잃고 반대편으로 튕겨 나갔다.
그것은 도저히 짜고 치는 연출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수준의 모션이었다.
“거기까지 하죠.”
그때, 범배가 마이크를 통해 구스타프에게 말하자, 구스타프가 대답했다.
“엑?! 아직 보여줄 게 더 남았는데?!”
“그건 굳이 대결의 형식이 아니어도 천천히 보여주시면 됩니다.
게다가 교수님 역시 지금 전투를 보고 업그레이드할 부분을 찾으신 것 같으니까요.
이후는 전문가들에게 맡겨야죠.”
그러자 구스타프가 조종하는 로봇.
영원이 상대 로봇을 향해 포권을 했고, 상대 로봇은 그런 영원을 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마치 절정 고수 두 명이 대련을 마치고 인사를 나누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비록 양측 모두 격렬한 전투의 여파를 보여주기라도 하듯 엄청나게 만신창이인 모습을 하고 있긴 했지만.
아직도 스파크가 튀고 있는 회로들.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터져나간 듯 유압 오일이 줄줄 흘러내리는 관절 부위.
너덜너덜한 장갑 위에 훈장처럼 새겨진 수많은 흠집과 그을음들.
그 수많은 파손 부위를 바라보며, 범배가 기열에게 말했다.
“이제 딥 다이버를 벗으셔도 됩니다.”
기열은 범배의 말대로 딥 다이버를 벗었다.
그리고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며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딥 다이버를 벗은 순간, 조금 전까지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있었던 거대 로봇이 순식간에 말끔한 모습으로 변했기 때문에.
격렬한 움직임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잔기스를 제외하면, 두 로봇 모두 완벽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전투라는 것을 치르지 않은 것처럼.
“물론 가상의 데미지를 입히는 공격을 주로 했으니 대부분의 손상이 가짜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만···.
분명 중간에 서로 주먹이나 발로 기체를 후려치기도 했고, 몸싸움도 꽤 벌인 거로 기억하는데 이 정도로 데미지가 없다는 건···.”
“사실 중간에 휘두른 주먹도 정확하게 타격 거리를 계산해서 충돌 직전에 멈춘 겁니다.
그리고 그 주먹을 접수하는 측에서도, 기계적으로 계산된 타이밍에 맞춰 주먹의 위력으로 예상되는 만큼 몸을 뒤로 던진 거고요.
그러니 사실 이런 형태의 전투에서, 기체 손상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파일럿에게 가해지는 위험도 제로가 되고요.”
“그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만, 조금 아쉬운 점도 있네요.
포탄과 뇌전이 난무하는 조금 전의 결투도 멋졌지만, 실제로 검을 들고 상대의 팔을 잘라내는 기존의 전투 방식도 박력이 있었으니까요.”
“그건 그거대로 살려야죠.
교수님. 이 업데이트의 목적은 로봇간의 대결을 전부 가상 데미지로 처리하고자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지금은 수리에 대한 부담을 덜기 위해서 데미지를 강제로 통제했지만, 실제 대결에서는 서로 때릴 부분은 때리고, 자를 부분은 잘라야 하겠죠.
현실에서 15미터짜리 강철 거인들이 서로를 죽일 듯이 두들겨 팰 때 나오는, 가상의 기술로는 도저히 구현할 수 없는 박력.
저는 거기에 물리적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인간의 상상력을 더하고 싶을 뿐입니다.
뇌전을 뿜고, 공기를 얼리며 탄환을 붙잡아 되쏘아내는 마법같은 일들이 벌어질 수 있도록.
그렇게 현실과 가상이 완벽하게 합을 이루게 된다면, 저희가 만들 로봇이 벌이는 결투는 그야말로 가장 환상적이면서도 가장 현실적인 결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범배의 말을 들은 기열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범배의 양손을 잡으며 말했다.
“저도 범배 씨의 말에 100%, 아니 3만% 동의합니다!
로봇을 개발하는 내내, 제 마음속에는 채워지지 않는 아쉬움이 있었죠.
도저히 현실적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그런 멋진 전투에 대한 로망을 포기해야한다는 아쉬움이.
하지만 범배 씨가 제작한 이번 업데이트를 보면서 희망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완벽에 가까운 그 결과물을 더 멋지게 만들 방법에 대한 아이디어도요.
저희 개발팀은 지금 이 순간부터 범배 씨가 구현한 가상의 공격에 현실감을 더할 수 있는 수많은 장비를 추가로 장착할 겁니다.
저희의 로봇이 전신에서 불꽃을 뿜고, 바람을 쏘아내며, 장갑에 서리가 내리게 하고, 미리 준비한 오일을 줄줄 흘릴 수 있도록.
그 장치들을 통해서, 범배 씨가 구현한 ‘가상의 공격’이 완벽히 현실과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의 현실성을 가질 수 있도록.
발바닥에 궤도를 달아 미끄러지듯 뒤로 밀려나게 하고, 타격 부위가 있는 곳에서 소리가 울려 퍼질 수 있도록 초고출력 스피커를 전신에 배치할 겁니다.
그렇게 완성된 저희의 새 로봇은, 말 그대로 완벽한 프로레슬러가 될 수 있겠죠.”
“컴퓨터에 의해 완벽하게 통제되는 1200억짜리 프로레슬러의 대결이라···.”
범배가 미소 지으며 기열에게 말했다.
“그건 참···. 끝내주는···.”
그리고는 그대로 고개를 숙이며 기절해버렸다.
세상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미소를, 얼굴 가득 띄운 채로.
그렇게 한 프로그래머의 기절 사건을 계기로, 그날부터 PTW의 지하에 있는 비밀 연구동은 완전히 새 페이즈에 돌입하게 되었다.
‘가장 현실적으로 동작하는 1200억짜리 거대 로봇’의 개발에서,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싸우는 1200억 짜리 장난감’을 개발하는 방향으로.
그러나 그런 격한 목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연구동의 직원 중 변화한 개발 방향에 대해 불만을 가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이 개발하고 있는 존재는, 그야말로 ‘인간의 상상을 현실로 구현해주는 로봇’이었기 때문에.
작업자들은 자신들이 작업한 장비들이 하나하나 로봇에 추가될 때마다 흥분에 가득 찬 목소리로 외쳤다.
“진짜, 공개만 하면 다 뒤졌다.”
“공개되는 날 심장마비 걸려서 쓰러지는 환자 100명 쌉 가능.”
“100명이 뭐냐 난 천 단위에 건다.”
“그럼 난 만 명 단위로 바지에 오줌 싼다는 것에 걸겠다.”
모두가 그렇게 떠드는 가운데, 한 직원이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이 거대한 로봇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단 한 번도 제기된 적이 없던 질문을.
“근데 이거, 공개는 어떻게 하는 거지?”
“그러게?”
크기만 15미터인 로봇 두 대가 격렬한 전투를 벌일 수 있는 경기장이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에, 그것은 당연한 질문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지금 개발하고 있는 ‘팀 파이트’에 관련된 기능을 공개하려면, 각종 지형지물이 설치된 엄청나게 넓은 공간이 필요했고.
그리고 직원들은 어느 누구도 상혁이 온라인으로만 이 로봇들의 전투를 공개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애당초 영상 데이터로만 로봇을 공개할 예정이라면, 굳이 현실에서 움직이는 로봇을 만들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상혁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오프라인상에서 사람들이 두 눈으로 로봇을 볼 수 있도록 공개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프로젝트에 수조 원을 밀어 넣는 짓을 할 리가 없으니까’
문제는 ‘어떻게?’라는 점이었다.
누구도 시도한 적이 없었던 거대 로봇끼리의 대결.
그 대결이 펼쳐질 ‘스타디움’의 존재야말로, 다음 NE 컨벤션의 가장 핵심적인 존재였기 때문에.
그렇기에 작업자들은 기열을 대표자로 삼아 그 부분에 대한 질문을 상혁에게 보냈다.
대체 다음 NE 컨벤션의 개최지가 어디인지에 대한 질문을.
그리고 상혁은, 보안을 위해 답변을 피할 거라는 직원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시원하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 주었다.
애당초 이 프로젝트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다음 NE 컨벤션의 개최지를 마음속으로 확정해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상혁은 자신을 찾아온 기열을 향해 대한민국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다음 NE 컨벤션 개최지는, 대전이 될 겁니다.”
“대전이요?”
“예. 사실 원래 대전이란 도시는 과학 엑스포가 진행된 적이 있었던 도시였죠.
하지만 꿈돌이 랜드가 폐장된 이후, 지금은 노잼도시라 불리는 도시이기도 합니다.
대전에서 볼만한 게 뭐냐 라고 물어보면 빵집 이름이 나올 정도로 특색이 적은 도시이기도 하죠.
저는 그 노잼 도시 대전을, 세계에서 가장 재미있는 도시로 바꿔볼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노잼 도시 대전에서 개꿀잼 도시 대전이 되는 거죠.
이 계획을 위해, 저는 2015년도에 꿈돌이 랜드가 폐장할 때에 맞춰서 정부에 해당 부지의 소유권을 구매해놓았습니다.
묵힌 지 몇 년 되기는 했지만, 지금은 한참 공사 중이기도 하죠.”
“그게 가능합니까?”
“20만명 이상이 입장해서 두 눈으로 거대 로봇들의 팀파이트를 직접 지켜볼 수 있는 거대 스타디움.
그리고 그 주변에 설치될, 지금까지 PTW가 NE 컨벤션에 사용했던 모든 어르렉션들.
교수님. 이번 NE 컨벤션은 지금까지의 NE 컨벤션과는 조금 다른 형태가 될 겁니다.
과거 꿈돌이 랜드가 사람들에게 미래를 보여주었던 그 땅에서, 저희는 모든 사람들에게 PTW가 만들었던 게임의 역사와, 저희가 열어갈 미래를 보여줄 겁니다.
그런 이유로, 이번 5차 NE 컨벤션은 컨벤션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지 않을 거고요.”
“그럼 어떤 이름이 되는 거죠?”
“엑스포(Expo : 박람회). 다음 5차 NE 컨벤션은, NE 컨벤션이 아닌 NE Expo라는 이름으로 개최될 겁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저희는 전 세계의 PTW의 팬들에게 지금까지의 PTW의 게임들과, 미래의 PTW 게임들을 모두 만끽할 수 있는 거대한 테마파크를 제공할 거고요.”
그렇게 말한 상혁은 씨익 웃으며 기열에게 말했다.
“어때요. 이 정도면 개꿀잼 도시소리 들을 만하지 않나요?”
상혁의 그 말을, 기열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며 상혁이 보여준 행사 지역의 ‘조감도(鳥瞰圖)’가, 너무나도 환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기열은 고개를 끄덕이며 상혁의 의견에 동의했다.
“개꿀잼 도시 확정이네요.”
“그렇죠?”
그렇게 마주보며 미소짓는 두 사람의 앞에는, 인간이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경기장이 아닌, 오로지 로봇만을 위해 설계된 거대한 스타디움의 이미지가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