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갓겜 제작법-425화 (426/485)

425. 믹스커피

기본적으로 대학교란 곳은 교육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지만, 연구를 위해 존재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연구’라는 것은, 성과가 나오기 전에는 돈 잡아먹는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한 대에 수천만 원에서 수십억을 호가하는 각종 측정 장비들.

‘교수’라는 인재를 유치하는데 필요한,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연봉.

그의 밑에서 박사학위를 꿈꾸며 일하는 수많은 대학원생의 인건비.

각종 시약을 구매하는데 들어가는 비용과 국제 학회에 출석하는 데 필요한 출장비.

만약 그 학과가 누구나 들어가고 싶어하는 메이저 학과라면 그 비용을 조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한해 수천만 원에 달하는 대학생들의 등록금으로 그 비용을 조달하면 되는 문제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대학의 모든 학과가 수백 명의 정원을 가지고 있는 대형학과는 아니기에, 대학에서는 필연적으로 학과생의 숫자에 따른 수익의 차이가 생기게 된다.

그렇게 학생 수가 적은 비인기 학과라서 가뜩이나 등록금 수익이 적은 상황에서, 가장 만만한 것은 조교와 연구생의 인건비를 건드는 것이었다.

기본적으로, 연구실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대학원생들은 다음과 같은 월급 체계를 가진다.

학기당 700만 원에 달하는 대학원의 등록금을 면제하는 조건으로 월 100~200만원 정도를 받는 경우.

등록금을 지원받고 생활비 명목으로 30~60만원 정도를 받는 경우.

가장 최악의 케이스로, 등록금도 지원받지 못하면서 월 100만원 정도의 돈을 받는 경우.

잘나가는 연구실의 경우 첫 번째 사례와 같이 등록금을 지원하면서 적절한 월급이 지급되는 경우도 있지만, 비인기 학과의 경우는 3번째 케이스처럼 자신이 받은 쥐꼬리만 한 월급에서 등록금을 또 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천하대는 달랐다.

예전엔 다른 대학교와 같이 비슷한 임금체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대한민국의 대학 재단 전체를 다 합쳐도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의 대형 기업인 PTW가 입주하고 나서, 대학의 운명이 완전히 뒤바뀌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학과 종류에 상관없이 석박사 과정 인건비 전액 지원.

석사는 250부터. 박사는 350부터.’

‘대학원 등록 시 등록금 없음’

‘모든 연구비는 PTW에서 지원.’

‘필요한 측정 장비 및 설비 무제한 요청 가능.’

그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지원하면서, 천하대는 좋은 조건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성과에 대한 강요’조차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 돈은 PTW에서 나오는 것이었기에.

PTW는 천하대에 존재하는 수많은 연구실에 필요한 거대한 연구비를 전부 지원하면서, 그들에게 단 한 가지만을 요구하고 있었다.

‘언젠가 PTW에서 필요할 때 아낌없는 지원을 퍼부어줄 것.’

그 지원을 통해, PTW는 지금까지 수많은 게임을 만들며 천하대의 힘을 빌려오고 있었다.

고증에 필요한 자문을 받기도 하고, 검증된 인력을 지원받기도 하며, 때로는 필요한 설비나 장비를 통째로 개발해달라는 의뢰를 하기도 하면서.

물론 그 과정에서도 기존에 지급된 연구비와는 별도로 막대한 성과급이 지급되었기 때문에, 천하대의 모든 연구실에 있는 연구생들은 매일같이 연구실 문을 바라보며 묘한 망상을 하곤 했다.

지금이라도 저 문이 벌떡 열리며, PTW의 직원이 뛰쳐 들어와 자신들에게 ‘새 프로젝트’에 필요한 무언가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하지 않을까 하는 망상을.

그것은 3차 NE 컨벤션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게이밍 체어’를 개발했던 천하대 로봇 공학과의 연구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세계 최고의 로봇 개발자로 알려진 김기열 교수가 이끄는 천하대 로봇 공학부는, 3차 NE 컨벤션에 공개되었던 ‘게이밍 체어’의 개발과 더불어 이번 테스트에 사용된 ‘스턴트 봇’의 핵심 개발까지 진행하면서, 말 그대로 돈방석에 앉았기 때문에.

그러나 박사학위를 따고 졸업하는 순간부터 이미 테슬러나 PTW에 입사할 수 있는 자격까지 확보된 상황에서, 김기열 교수는 행복에 겨워하는 연구생들과는 다르게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다.

전 세계 게이머들을 흥분시켰던 게이밍 체어는 그보다 훨씬 상위 기술인 PRD가 개발되며 순식간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고, 이번에 개발한 ‘스턴트 봇’은 그가 만들고 싶어하던 ‘로봇’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노트북 화면에 띄워놓은 게이밍 체어의 사진을 보며 말했다.

“이게 아니야.”

그리고는 완성된 스턴트 봇의 실물 사진을 보며 다시 말했다.

“이것도 아니야.”

그가 마지막으로 띄운 사진은, 일본에 있는 실물 크기 간담 모형의 사진이었다.

그는 그 사진을 보고서도,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것도 아니라고.”

그리고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노트북 키보드에 얼굴을 묻었다.

“아아! 젠장! 저런 거 말고! 진짜! 로봇이! 만들고! 싶다고!

내가 뭣 때문에 갖은 개고생을 하며 이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왜! 로봇을! 못 만드는 건데!”

그러자 그의 옆에서 열심히 CAD로 설계 도면을 그리고 있던 연구생이 잔에 담긴 커피를 빨대로 마시며 말했다.

“그야 교수님이 생각하는 ‘로봇’이란 건 실제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물건이니까요.

스턴트 봇이라면 모를까.”

“그건 로봇이 아니야!

인간 크기의 플라스틱 바다라니!

그걸 로봇이라고 부르는 건 로봇에 대한 모독이라고!”

“정확히는 고분자 폴리머로 만든 물건이긴 하지만, 뭐 플라스틱의 한 종류긴 하니까.

하지만 교수님이 만들고 싶어하는 ‘로봇’은 그런 물건이 아니잖아요?

못해도 수십 톤은 나갈만한, 강철로 된 거인을 만들고 싶으신 거니까요.”

“그렇지.”

“그럼 일본에 있는 실물 크기 간담 정도면 되지 않아요?”

“그건 로봇이 아니라 건축물이야.

원본 로봇의 기능이 전혀 구현되어 있지 않잖아.”

“아니 그 로봇의 원본은 우주 세기 물건이잖아요.

그게 불만이면 타임머신이라도 개발해서 우주 세기로 가셔야죠.”

“젠장. 그게 더 빠를지도···.

타임머신 만든다고 예산 달라고 하면 PTW에서 줄까?”

“교수님이 말씀하시면 진짜로 만들려고 시도할 것 같아서 무서우니까 제발 그만두세요.

그리고 그렇게 로봇이 만들고 싶으시면 그냥 PTW에 로봇 만들 테니 돈 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요?

PTW라면 줄 것 같은데.”

“내가 안 해봤을 것 같냐?”

“거절했어요?”

“가끔 보면 PTW라는 회사가 워낙 미친 짓만 하는 회사라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는데, 거긴 의외로 돈 나가는 걸 엄청 깐깐하게 보는 회사야.

필요할지도 모르는 곳에는 아낌없이 돈을 퍼붓지만, 필요 없다고 판단되는 곳에는 한 푼도 쓰지 않는 회사가 PTW라고.

그리고 그 기준에서, 현존하는 기술로 그냥 돈만 퍼부으면 완성 가능한 로봇은 ‘연구’의 대상이 아니니까 탈락인 거지.”

“단순히 교수의 취미 생활을 위한 돈을 주지는 않는다는 거군요.

납득은 가는 이유네요.”

“젠장. 연봉을 모아서 만들려면 엄청 오래 걸릴 텐데···.

생각보다 게이밍 체어의 수명이 너무 짧았어.

만들 때는 한 10년은 불티나게 팔릴 거라고 예상하고 개발한 건데, PRD가 나오니까 거들떠보지도 않잖아.”

“스턴트 봇 개발에 참여하며 받은 기술료는요?”

“그건 상용화 이후에 지급되기로 한 돈이야.

게다가 사실 안에 들어간 장비 자체는 PRD에 사용된 근육 제어 기술이 핵심이기 때문에, 내가 받을 기술료는 그리 높지 않고.

난 지금 당장 로봇 제작에 들어가고 싶다고.”

담당 교수인 김기열이 ‘로봇 만들고 싶다’라고 노래를 부르는 것은 매일같이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패턴 중의 하나였기에, 연구생은 곧 자신이 잡고 있던 작업으로 관심을 돌렸다.

어차피 하루에 한 번 정도 저런 식으로 투덜대다 잠잠해질 것이 뻔했기 때문에.

그러나 그날은, 그런 연구생의 예상을 벗어나는 묘한 사건이 벌어진 날이었다.

스턴트 봇의 개발 의뢰 이후로 로봇 연구동엔 얼굴조차 비추지 않던 상혁이, 오랜만에 로봇 연구동에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혁의 방문에 뜨거운 기대를 보내는 연구생들의 표정과는 다르게, 로봇 공학과를 이끄는 김기열 교수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어차피 이번에도 자신이 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을 부탁할 것이 뻔했으니까.

기열은 자신을 찾아온 상혁을 데리고 연구실 한쪽에 있는 응접실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종이컵에 믹스 커피를 한잔 타서 상혁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자신이 운영하는 학과에 매년 수십억 이상을 지원하는 물주에 대한 대접치고는 형편없는 대접이라 할 수 있었지만, 상혁은 미소지으며 커피를 홀짝였다.

그리고는 기열을 향해 말했다.

“맛있네요.

가끔은 원두커피 말고도 이런 커피 믹스의 맛이 그리워질 때가 있죠.”

“그야 가끔 마시는 거면 맛이 있겠죠.

하지만 좋아하지 않는 커피를 매일 마신다면 그건 그거대로 스트레스가 될 겁니다.”

“그렇겠죠?”

“그래서. 오늘은 어떤 용건으로 방문하셨습니까?

지난번에 드렸던 스턴트 봇의 설계에 문제라도 있었나요?”

“아뇨. 그건 완벽하게 동작했습니다.

저희가 필요한 스펙에 맞춰 정확하게 저희가 필요한 수준으로 작동했죠.

아마 내년 이후로 양산에 들어가고 나면,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될 거로 생각합니다.

어쩌면 딥 다이버 이상의 후폭풍을 몰고 올지도 모르죠.”

“PTW는 다시 한번 돈방석에 앉게 되겠군요.”

“아마도 그렇겠죠.”

“아마도 그중에 제 몫은 그리 크지 않겠죠?”

“저희는 작업의 기여도에 따라 대가를 냅니다.

그리고 이번 스턴트 봇에 사용된 기계적 설계는 전부 PRD를 만든 개발팀에서 담당했죠.

천하대 로봇 공학부는 관절이나 외장 케이스 디자인만 하지 않았습니까?

라이선스 비용이 적은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개발에 참여한 부분이 적으니, 받을 수 있는 금액도 적어야죠.

혹시 그 부분에 대해 불만이라도 있으십니까?”

“딱히 PTW의 분배 정책에 불만이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일을 맡아서 하는 입장에서는, 조금 더 돈이 될만한 건수를 맡겨주셨으면 한다는 거죠.

게임 판매 수익의 일부를 받을 수 있도록 개발 과정에 참여한다던가, 아니면 PRD나 딥 다이버처럼 10년 이상 마켓을 지배할 수 있는 물건의 개발에 참여한다던가.”

“스턴트 봇은 향후 20년은 잘 팔릴 물건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건 그렇지만 기여도가 너무 낮아서···.”

“잠깐 정리 좀 하겠습니다.”

상혁이 말했다.

“그러니까 김기열 교수님의 말은, 본인이 높은 기여도로 참가할 수 있는, 그런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다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그리고 여긴 로봇 공학부고요.”

“그렇죠.”

“김기열 교수님은 로봇 공학부의 교수님이죠.”

“맞습니다.”

“그럼 저희보고 로봇이라도 만들라는 말입니까?”

“그럴 수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딱히 로봇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로봇이 등장하는 게임의 고증 작업에 참여한다던가, 아니면 GOS에서 가장 인기 좋았던 DP-045의 실물 크기 모형을 만든다던가.

좀 더 저의 능력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그런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싶은 거죠.”

“유용함에 대한 대가도 받으시고요?”

“겸사겸사 그렇게 되면 더 좋겠죠.”

“그러니까 이 믹스커피는 일종의 뇌물이자 반항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조금 놀랐습니다.

교수님에 대해서는 여러 번 협업을 진행하면서 꽤 파악했다고 생각했지만, 제가 아는 교수님은 돈에 그리 관심이 있는 분은 아니셨으니까요.

로봇에 미쳐있는 분이긴 해도.”

“로봇을 만들려면 돈이 들죠.

제 꿈은 애니메이션 속의 로봇처럼 동작하는 실물 크기 로봇을 만드는 겁니다.

하지만 그런 저에게 PTW는 지금까지 ‘의자를 만들어 달라’라는 부탁이나 ‘인간 크기 로봇의 껍데기를 디자인해 달라’라는, 실물 크기 로봇 제작과는 전혀 관련 없는 요구만을 해 왔죠.

만약 이번에도 그런 부탁을 하실 요량으로 절 찾아오신 거라면, 전 그 부탁을 거절하겠습니다.

오래 참았어요.

이제는 제가 하고 싶은 걸 할 타이밍이라고 생각합니다.”

“돈을 준다 하더라도요?”

“그 돈이 실물 크기 로봇을 제작할 수 있는 비용이 아니라면, 거절할 겁니다.”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기열을 보며, 상혁이 미소지었다.

그리고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그를 향해 말했다.

“아쉽네요. 안타깝게도 이번 의뢰의 보상은, 교수님이 원하는 실물 크기 로봇을 제작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 될 예정이라서요.”

“그럼 거절해야죠.”

“정말 거절하실 겁니까?

이 연구동을 운영하는 운영비 전체를 저희 PTW에서 대고 있는데요?”

“로봇 공학부가 로봇을 만들지 않으면 그건 로봇 공학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실물 크기 로봇을 만들 수 없는 로봇 공학부 따위는, 저에게 아무 의미도 없고요.

차라리 그 시간에 고철이라도 사서 용접이나 하겠습니다.

아니면 실물 크기 로봇에 투자할 투자자를 찾아다니던가.”

“교수님의 의향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그럼 저희 프로젝트를 맡아주실 다른 분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대신 마지막으로 부탁하나만 드리겠습니다.

지금 제가 추진하려는 프로젝트가 하나 있는데, 이 프로젝트에 적합한 교수님을 한 분 추천받고 싶습니다.

가급적이면 기계 공학 관련 전문가였으면 좋겠고, 로봇 제작에 해박한 지식이 있는 분이었으면 좋겠네요.”

“그런 거라면 UC버클리의 로봇 및 지능화 기계 연구실에 있는 교수가 제 지인이니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아니면 MIT의 컴퓨터사이언스 및 인공지능연구실 쪽도 괜찮고요.

하지만 현재의 로봇 공학은 기계 공학이라기보다는 컴퓨터 공학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해당 분야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로봇의 구동계를 설계하는 기술보다는, 설계된 구동계를 제어하는 컨트롤 기술의 개발에 그 역량이 집중되고 있죠.

그리고 제가 알기로, 그 분야의 1인자는 PTW입니다.

전세계 어느 대학의 로봇 공학부도, PTW가 가진 소프트웨어 역량을 따라갈 수 없죠.

그러니 제가 소개는 해드릴 수 있어도, 제가 소개해드린 분들이 상혁씨가 하려는 프로젝트에 적합한 분들이라고는 확신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상혁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소프트웨어 전문가는 스컹크웍스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제가 필요한 건 구동계를 설계해주실 교수님이죠.

전달받은 제어 신호에 따라서, 로봇의 각 파트가 정확하게 원하는 형태로 구동되게 할 수 있는, 관절과 동력부의 설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겁니다.”

“그런 거라면 SANY에서도 인간형 로봇을 개발하고 있는 부서가 있고, 테슬러에도 인간형 로봇을 개발하고 있는 부서가 있죠.

게다가 이미 개발이 완료된 스턴트 봇 역시 받은 신호를 완벽하게 구동할 수 있는 관절과 구동계를 가지고 있고요.

필요한 기술은 이미 PTW에 전부 있는데, 굳이 새 프로젝트를 진행하시려고 하는 이유가 뭡니까?”

“지금 스턴트 봇에 쓰이는 인공 근육 기반 구동 체계로는 무게만 수십 톤이 나가는 로봇의 관절을 제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혁의 말을 들은 기열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지금 수십 ‘톤’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티타늄과 강철로 만들어진 15m 크기의 로봇을 만들 생각이니까요.”

“15m요?!??”

“정확히는 종류에 따라 다르긴 한데, 작은 건 10m에서 큰 건 25m 정도 할 겁니다.

저도 가상의 설계 데이터를 기반으로 말씀드리는 거라, 구체적인 데이터는 실제 재질로 시뮬레이터를 해 봐야 알 수 있겠지만요.

어쩌면 수십 톤이 아니라 세 자리 단위가 될 수도 있겠죠.

장비 하나의 무게만 톤 단위가 넘어갈 겁니다.

그리고 그 장비를, 마찬가지로 강철과 티타늄으로 만든 팔과 다리로 지탱해야 할 거고요.

현존하는 전기 모터의 출력으로는 그런 움직임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가능하다 하더라도, 모터의 크기와 무게가 너무 커진다거나 소모되는 전력의 양이 극단적으로 올라가겠죠.

일본에 있는 간담 실물처럼 굼벵이 기어가는 속도로 걸어가게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전투가 가능한 수준의 빠른 속도로 이동하게 하는 건 매우 어렵습니다.”

상혁은 테이블 위에 있는 노트북을 들고 와 자신의 워크 패스트 계정에 접속시켰다.

그리고는 몇 장의 이미지를 띄워 기열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엔 한눈에 보기에도 그의 심장을 터트릴 것 같은, 중세 기사를 연상하게 하는 멋진 디자인의 로봇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현재 개발 중인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와 동료들이 탑승하는 기체의 모형입니다.

물론 가상의 공간인 게임 속에서만 존재하는 기체이기에, 고증은 밥 말아 먹은 상태죠.

게임 속의 로봇들이, 굳이 현실 속 로봇의 움직임에 맞춰 움직일 필요는 없으니까요.

말하자면 이 로봇들은, 상상 속의 세계에서만 이렇게 움직일 수 있는 로봇들입니다.”

상혁이 마우스 패드를 클릭하자, 화면 속의 로봇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현실의 로봇이라면 절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은 멋진 움직임을 보이며, 강철로 된 무기를 휘둘러 상대를 공격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 정도 크기를 가진 로봇을 이 정도 속도로 움직이게 하는 건 매우 어렵죠.

출력을 늘리면 무게가 증가하고, 무게가 늘어나면 요구되는 출력이 증가하니까요.

그렇기에 스턴트 봇을 개발할 때는 일부러 전신을 구성하는 부품 대부분을 고분자 폴리머로 제작했었습니다.

이미 티타늄으로 만들어진 뼈대와 관절들, 그리고 그것들을 구동하는 모터와 배터리의 무게만 더해도 인간의 체중과 비슷한 상태였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그래도 되는 물건이었습니다.

딱히 전투를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 아닌 데다, 부숴져도 딱히 상관 없는 물건이었으니까.

게다가 그건 안에 보호해야할 탑승자 따위도 들어있지 않은 로봇이었죠.

하지만 이번 로봇은 다릅니다.

저는 이 안에 파일럿이 탑승해서 전투하길 원하고, 그러려면 수 톤짜리 강철이 본체를 후려치는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장비를 설계해야겠죠.

이토록 빠른 움직임을 보이면서도, 강력한 힘을 내는 새로운 구동계도 필요할 거고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저희 개발자들은 게임이 재미없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게임 속 로봇을 현실의 스펙에 맞추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찾는 교수님은, 현실의 로봇을 이 ‘가상의 스펙’에 맞춰서 개발해주실 수 있는 교수님이죠.

원래는 우리나라가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김기열 교수님의 손을 빌리려고 했지만, 본인이 싫다니 어쩔 수 없죠.

아쉽지만 다른 교수님께 부탁하는 수밖에요.”

상혁은 화면 속의 영상을 홀린 듯 바라보는 기열을 무시하고 노트북의 커버를 닫았다.

그리고는 기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해당 작업이 가능한 교수님을 섭외하시면 저에게 연락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작업에 들어가는 비용은 얼마든지 내겠다는 조건도 같이 붙여 주시고요.”

그러자 김기열은 두 팔을 벌린 채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하는 듯한 빠른 속도로 응접실의 문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상혁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며 소리쳤다.

“잠까아아아안!!!”

“왜 그러시죠?”

“그, 작업. 제가 하겠습니다.”

“말씀드렸지만 이건 상용화를 위한 프로젝트가 아닙니다.

그냥 이벤트를 위해 진행하는 단건 프로젝트고, 판매가 되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니 라이선스도 비율 분배가 아닌 단건으로 지급되고요.

그 금액도 그리 크지 않을 겁니다.”

“상관없습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다 완성되면 로봇끼리 싸우게 해서 다 박살 낼 건데요?”

“그런 식의 격렬한 전투가 가능한 로봇을 만드는 게 제 꿈이었으니까요.

오히려 부서지는 게 영광이죠.

게다가 설계도만 있으면, 같은 로봇을 또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제작 도중에 수리나 교체를 위해 여분의 부품을 발주해야 할거고요.

개런티도 필요 없습니다.

남는 부품만 제가 가질 수 있게 해 주세요.”

“흠···.”

그러자 상혁이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기열에게 말했다.

“일단 마시다 남은 믹스 커피나 마시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그 순간, 기열은 번개 같은 속도로 테이블로 달려가 상혁이 마시던 종이컵을 벽으로 던져버렸다.

그리고는 캐비닛으로 달려가 중요한 날이 아니면 절대 꺼내지 않는, 그가 가장 아끼는 고급 홍차를 꺼내오며 말했다.

“상혁 씨는 커피로 유명하시지만 저는 홍차에 조예가 깊은 편이죠.

오늘 제가 귀인에게 차 한 잔 대접해드리고자 하는데, 혹시 시간 괜찮으십니까?”

그러자 상혁이 미소지으며 기열에게 말했다.

“다 좋은데 이번 프로젝트는 저희 직원들에게도 극비로 진행해야 합니다.

부품도 전부 별도로 주문해서 비밀 장소에서 조립해야 하고요.

다음 NE 컨벤션 전까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인원을 제외하면 지구상의 어떤 인간도 이 로봇의 개발에 대해 알아서는 안 됩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그래도 완성된 로봇 자체는 공개 하는 거지요?”

“예.”

“그렇다면 좋습니다. 전 세계에 실제로 전투가 가능한 수준의 ‘진짜’ 로봇을 만든 개발자로 이름을 날릴 수 있다면, 그 정도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죠.

NE 컨벤션은 게임 쇼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행사라고 들었습니다.

거기서 주목받을 수 있다면, 전 세계에서 주목 받는 것이나 마찬가지겠죠.”

“주목이요?”

상혁이 말했다.

“주목이 아니라, 아예 그 행사의 주인공으로 만들어드리죠.

저희가 요구한 스펙에만 맞춰 주실 수 있다면요.”

상혁이 5차 NE 컨벤션을 위해 준비하려는 ‘히든 카드’.

그것은 가상의 범선을 현실의 그것에 맞추는 것을 목표로 했던 ‘무한의 바다’와는 정반대로, ‘현실의 로봇’을 가상의 로봇처럼 움직이게 하겠다는,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계획 속에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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