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갓겜 제작법-421화 (422/485)

421. 탐험가의 삶

‘무한의 바다’의 캐릭터 시스템에는 한 가지 특이한 스킬이 있었다.

바로 ‘재능(Talent)’이라는 스킬이었는데, 플레이어는 기본 캐릭터뿐만이 아닌 오리지널 캐릭터를 만들 때도 이 ‘재능’을 골라 캐릭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게임에서, 캐릭터의 스토리 분기는 바로 이 ‘재능’에 의해서 결정되게 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다른 게임의 ‘직업’과 비슷한 방식으로 동작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캐릭터가 가진 재능이 ‘탐정’이라면, 남들이 발견하지 못하는 힌트가 형광색으로 하이라이트 되어 보인다거나, 혹은 독백 대사로 상황을 정리하는 마음의 목소리가 들리는 식으로.

반면에 ‘싸움꾼’ 재능을 가진 캐릭터는 탐정처럼 상대의 몸짓을 보고 거짓말을 간파한다거나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하는 능력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단순히 자리에서 일어나 인상을 쓰는 것만으로도 트러블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탐정, 싸움꾼, 신비주의자, 행운의 화신, 도박사, 타고난 군인, 해적의 자질, 카리스마, 매혹의 여신, 바람둥이, 저격수···.

같은 퀘스트라도 자신이 보유한 재능에 따라 다양한 해결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무한의 바다’의 특징이었기에, 이 게임에서의 ‘재능’은 ‘어떤 식으로 게임을 플레이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특성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해밀턴이 고른 ‘에른네스트 로테즈’는, 다름 아닌 ‘모험의 매력’이라는 재능을 가진 캐릭터였다.

[재능 : 이론만 최강인 모험학자]

[셀 수 없이 많은 모험담을 책으로 읽어온 당신은 사람들을 모험으로 끌어들이는데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모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은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집중할 것이며, 모험에 대한 당신의 권유를 거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해당 재능은 다음과 같은 보너스를 가집니다.]

[탐험 목표가 존재할 경우, 선원을 스카웃 할 때 설득력에 보너스를 받습니다.]

[여성 캐릭터와 대화할 때 모험관련 이야기를 할 경우 호감도에 보너스를 받습니다.]

[유물 탐사를 원하는 가문에서 후원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유적 탐사가 끝나면 선실에서 ‘모험담’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각 지역의 출판 길드에서 매우 높은 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습니다.]

[유적 발굴 시 숨겨진 트랩과 방이 하이라이트 되어 표시됩니다.]

[유적에서 모르는 문자를 보았을 때 해당 언어의 레벨이 낮아도 문자가 전달하는 느낌으로 대충 어떤 내용이 적혀있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험과 관련된 퀘스트 트리거의 발동 확률이 매우 증가합니다.]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유적이나 보물에 관련된 책이 존재할 경우 해당 책이 밝게 빛납니다.]

[지도를 쓰지 않아도 시스템으로 미니 맵 UI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재능의 설명을 보던 해밀턴이 마지막 문장을 보고 자신의 플레이를 지켜보는 상혁에게 물었다.

“이거 다른 캐릭터는 미니맵 못써요?”

그러자 상혁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예. 원래 지도 그리는 전용 스킬이 있고, 그나마도 지도를 매번 펼쳐야 확인할 수 있어요.-

“아, 그럼 엄청 좋은 스킬이군요?”

-편하죠. 매우. 게다가 글을 너무 많이 읽은 나머지 모르는 문자도 대충 어떤 내용인지 알 수 있는 재능이니까, 모험에 딱 좋은 캐릭터라고 보시면 됩니다.

다만 신체 능력은 애벌레에 가까워서, 전투는 최대한 피해야 하지만요.

아니면 전투력이 높은 동료를 항상 데리고 다니던가요.-

“동료는 어떻게 영입하죠?”

-퀘스트를 하다 보시면 자연스레 알게 되실 겁니다.-

상혁의 말대로, 해밀턴이 동료 후보를 고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딱 보기에도 ‘난 싸움을 매우 잘합니다.’라고 이마에 써 붙여 놓은 것 같은 NPC가, 그에게 계속 말을 걸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이름을 ‘호든’이라고 소개한 선원은 바보 같으면서도 매우 순수한 느낌의 사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모험을 동경하는 사내였고.

“로테즈. 지금 쉬는 시간인가? 오늘도 책 좀 읽어달라고.”

퀘스트를 마치자마자 책 한권을 들고 자신을 찾아온 호든을 보며, 해밀턴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

게임을 시작했을 때, 해밀턴이 가장 걱정한 것은 범선의 조작에 대해 배우는 것이었다.

이 게임이 일반적인 콘솔 게임이었다면 범선의 조작이라고 해도 어차피 버튼을 누르는 것이 전부이기에 그다지 어려운 느낌이 아니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이 게임은 PRD 전용 게임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실제 범선 운용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겠다고 실물 크기 범선을 만든 개발자들이 만든 게임이기도 했고.

그렇기에 해밀턴은 민준이 4개월의 항해 기간 필사적으로 익힌 범선 운용에 대한 지식을, 어느 세월에 다 배워야 하나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해밀턴의 걱정을 덜어주기라도 하듯, 게임의 초반부 퀘스트는 범선 운용의 기초를 가르쳐주는 퀘스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늘은 맞바람이 불 때 범선을 어떻게 운용하는지에 대해 알려주지.

기본적으로 역풍이 불 때는, 사각 돛이 아닌 삼각돛을 사용해서 항해하는 거야.

뒤에서 바람이 불 때 최대의 속력을 낼 수 있는 사각 돛과는 다르게, 삼각돛은 역풍이 불고 있어도 앞으로 나갈 수 있게 하지.”

해밀턴을 익사 직전에 구해준 선장은, 해밀턴을 손님으로 취급하며 범선 운용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을 알려주었다.

“물론 삼각돛을 쓰더라도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 정면으로 뚫고 갈 수 있는 건 아니야.

기본적으로는 바람이 부는 방향과 45도 정도의 각도를 유지하면서 지그재그 형태로 전진하는 거지.

중요한 건 배의 속도를 고려해서, 키의 방향을 반대로 돌리는 타이밍을 잘 재는 거야.

만약 현재 방향에서 2시 방향으로 30분을 항해했다면, 이후엔 키를 어디로 꺾어야 할까?”

“그때는 현재의 두 시 방향이 배의 12시 방향이 될 테니 90도로 틀기 위해선 8시 방향으로 꺾어야겠죠.”

“정확해. 역시 학자 출신이라 그런가? 몸은 비리비리해도 머리는 아주 좋구만! 하하하하핫!

지금 방향을 생각해서 10시 방향이라고 대답했으면 등짝을 후려쳤을 거야! 하하하하!”

그렇게 말하면서도, 선장은 기분 좋은 듯 해밀턴의 등을 마구 두드리고 있었다.

해밀턴은 그렇게, 해풍과 해류를 이용하는 방법.

키를 잡는 방법과 범선을 운용하는데 필요한 기초적인 지식을 선장에게 전수하였다.

그리고 선장은, 수련 과정이 끝날 때마다 곧바로 함선 내부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안에서, 게임화 능력을 갖춘 해밀턴은 선원들이 가진 다양한 개성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중 몇 명은 해밀턴에게 자신이 가진 기술을 전수해주기도 했다.

“좋아, 잘 들어. 기본적으로 5발 정도 쏘면 그 총은 더 못쓴다고 생각하라고.

이 흑색화약이란 놈은 소리만 요란하지 의외로 찌꺼기만 잔뜩 남고 위력은 별로인 물건이니까.

그러니 평소에 청소를 열심히 해 두어야 해.”

‘타고난 사수’ 재능을 가진 선원에게서, 피스톨의 사용법을 배우던 해밀턴은 눈앞에 뜨는 선택지를 보고 그에게 질문했다.

“이런 권총형 피스톨의 경우 사거리는 얼마나 되나요?”

그러자 총기 손질을 하던 선원이 해밀턴에게 답했다.

“평소에 관리가 얼마나 잘 되었는지, 그날 습도가 얼마나 높은지, 탄이 얼마나 잘 맞물려 있는지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가장 큰 차이는 총에 따라 발생하지.

같은 피스톨이라도 형태나 모양에 따라 사거리가 달라지는 편이니까.

그러니 자신이 가진 무기가 평소에 어떤 느낌으로 표적을 맞히는지 그 감각을 잘 기억해야 해.

만약 총을 바꾸게 된다면, 바로 새 총의 감각을 익혀야 하고.

하지만 그런 세부적인 내용을 제외하면, 대충 30미터 안쪽에서 쏜다고 보면 되지.”

“총알이 거기까지밖에 안 나가나요?”

“아니 총알은 더 나가는데, 그 이상 가면 맞추기가 어려워.

물론 나같이 숙련된 사수는 무려 50미터 밖의 적도 맞출 수 있지.

한 50% 확률 정도로.”

“엄청나게 유용한 느낌은 아니네요.”

“듣자 하니 총기 장인으로 유명한 콜튼이 만든 머스킷은 200m 밖의 적도 맞춘다던데, 그런 비싼 물건은 평생 만지기 힘들 테니 예외로 쳐야지.

그런 건 귀족님들이나 쓰는 물건이니까.”

그렇게, 일과를 마치고 침실로 돌아가면, 귀신같이 쉬는 시간임을 알아차린 호든이 책을 들고 해밀턴을 찾아왔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책을 읽어달라 졸랐다.

처음 호든이 책을 가져왔을 때만 해도 책 전체를 읽어줘야 하는 퀘스트인줄 알고 기겁했던 해밀턴은 곧 호든이 가져온 책들이 그림만 가득한 어린이용 동화책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흔쾌히 매일 저녁 책을 읽어주었다.

그리고 호든은 해밀턴이 읽어주는 다양한 바다의 모험담을 들으며 매일 밤눈을 반짝였다.

그 험악한 인상과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한 표정을 하고서.

“그러니까, 어느 섬에 가면 빵이 열리는 나무가 있다는 거지?

생긴 건 나무 열매 같은데, 구우면 완전히 빵 같은 맛이 나는 열매가.”

“호든 씨는 선원이 된 지 10년 가까이 되었다면서 책에 나오는 건 한반도 본적이 없어요?”

“없지. 나는 주로 무역선을 타고 다녔고, 우린 언제나 정해진 항로를 따라서 정해진 길로만 다녔으니까.

가끔 나는 돛대 위에 있는 감시대에서 멀리 보이는 섬들을 보며 생각했지.

배에 있는 비상용 보트를 몰래 타고, 그 섬에 가보고 싶다고.

하지만 단 한 번도 시도한 적은 없었어.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어서 두려웠으니까.”

“알 수 없기에 더 두근거리는 것이 모험이죠.”

해밀턴의 말을 들은 호든이 미소지었다.

“그래. 네가 읽어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널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함께 모험할 수도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집채만 한 거인들이 산다는 섬에도 가보고, 거대한 바다거북의 등 위에 있다는 도시도 가보고, 어쩌면 살아있는 용을 이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때, 해밀턴의 눈앞에 선택지가 떠올랐다.

이 배에서 처음으로 동료를 구하기 위해 권유를 시도하는 선택지가.

[그럼, 만약 제가 선장이 된다면 제 선원이 되어주시겠어요?]

다른 선택지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해밀턴은 그것이 정답이라 확신하며 선택지의 대사를 읽었다.

“그럼, 만약 제가 선장이 된다면 제 선원이 되어주시겠어요?”

그러나 그런 해밀턴의 권유를 들은 호든이 돌려준 것은, 망설임이 섞여 있는 거절이었다.

“하아···. 그럼 정말 좋겠지. 세상의 모험이란 모험 이야기는 다 알고 있는 네가 선장이라면, 정말 끝내주는 모험을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네 부탁은 거절하겠어.

난 아직 이 배에서 할 일이 있거든.”

‘어라? 이 선택지가 아니었나? 100% 지금 권유하면 동료로 들어오는 분위기였는데?’

해밀턴은 의아해하면서도 일단 권유를 접었다.

어쩌면 이 배의 선원들은, 권유가 불가능한 NPC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해밀턴은 게임화 능력으로 확인한 호든의 능력치가 매우 마음에 들었지만,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초반 퀘스트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런 해밀턴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미리 도착해 항구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빚쟁이들이었다.

“자네는 읽어서는 안 되는 책을 읽었어.

그 덕에 그 책은 쓸모가 없어졌고.

우린 그 책값을 자네가 배상하길 원하네.”

‘대체 무슨 수로?’

해밀턴은 그제야 자신이 고른 캐릭터의 자세한 백 스토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전형적인 학자 스타일인 자신이 어째서 배에 밀항을 시도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피해 여행을 하고 있었는지.

그것은 빚 독촉을 피하기 위한 도피행이었다.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선장에게 소개받은 여관으로 이동하던 해밀턴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일련의 무리에게 납치당했고, 집단으로 린치를 당한 후 포대기에 담겨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에게 빚을 받으러 왔다는 험악한 사내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녀석의 설명을 정리하자면, 책을 좋아하는 내가 마법이 담겨있는 특별한 책을 읽는 바람에 마법이 내 몸에 깃들게 되었고, 그게 내가 게임화 능력을 갖추게 된 이유라는 거지?’

문제는 황당하리만치 높은 빚의 액수였다.

500만 두카트.

호든에게 들었던, 2달 일정의 원양 항해에서 받을 수 있는 선원 월급이 2백 두카트 정도였으니 500만 두카트라는 빚은 호든의 연봉을 기준으로 무려 4166년을 일해야 갚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선장에게 작별 선물로 받은 20두카트가 재산 전부인 해밀턴이 그걸 갚을 수 있을 리가 없었기에, 해밀턴은 눈앞의 남자에게 항변했다.

“제가 읽었다고 책의 글자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읽는다고 닳는 것도 아닌 책을 읽었다고 해서 그 막대한 빚을 갚으라는 겁니까?”

“이미 말했잖나. 그건 마법이 깃든 마도서라고.

그건 그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책이지.

사람의 잠재능력을 볼 수 있게 해주고, 세상을 전혀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 깃들어 있는 책이라고.

우린 그걸 ‘신의 눈’이라고 부르지.

물론 지갑에 겨우 20두카트 밖에 없는 자네에게 그 돈을 직접 갚으라고는 하지 않겠네.

우리가 찾아온 건, 다른 방식으로 능력을 회수하기 위한 거니까.”

남자는 품 안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아마도 해밀턴의 캐릭터인 로테즈가 읽었던 책일 것이라 추정되는, 마법서처럼 생긴 한 권의 책을.

그리고 그 책을 들고 있는 남자의 다른 손에는, 시퍼런 날을 번득이고 있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역시 가장 간단한 방법은 자정이 되었을 때 자네를 죽이고 그 피를 먹여서 능력을 회수하는 거지.

원망은 하지 말게.

이건 어디까지나 비즈니스일 뿐이니까.”

“그것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고?”

“500만 두카트면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도 죽일 수 있는 금액이야.

자네도 그 사실엔 동의할 텐데?

자정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으니 남은 삶을 곱씹어 보라고.

그래 봐야 3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은 삶일 테지만.”

그들이 창고 안에 해밀턴을 남겨두고 밖으로 나가자, 해밀턴은 곧바로 탈출을 시도했다.

양초를 이용해서 양손을 묶은 로프를 끊고, 창문을 타고 밖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해밀턴이 창밖으로 나가기 직전에, 누군가가 들어와 소리를 질러 해밀턴의 도주 계획은 바로 발각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해밀턴이 할 수 있는 것은 젖먹던 힘까지 쥐어짜내 도망치면서, 스토리를 이따위로 잡아놓은 PTW의 개발자들을 욕하는 것뿐이었다.

“이 X발 스토리가 뭐이래애애애!!”

그러나 해밀턴의 그런 불만은, PTW의 직원들이 정성스레 준비한 도주 루트를 따라가며 순식간에 희열의 감정으로 바뀌었다.

도망가는 과정 자체가, 말 그대로 ‘무지막지하게’ 재미있었기 때문에.

“크하하하하하하하하!!

머저리들아!! 기억해라! 오늘을 이  에른네스트 로테즈를 거의 잡을 뻔했던 날로!!!”

해밀턴은 알지 못했지만, PTW에서 진행한 내부 테스트에서, 가장 호평을 받는 부분 중의 하나가 바로 ‘도주’ 시퀀스였다.

중국 코믹 액션 영화의 매니아들과, 파쿠르 전문 스턴트맨으로 구성된 전문 개발팀이 도주 과정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구성해냈기 때문에.

그 역동적인 배경 안에서, 해밀턴은 마차를 타고 거리를 질주하거나, 장대를 잡고 먼 거리를 건너뛰거나, 로프를 잡고 하늘로 날아오를 수 있었다.

듣는 것만으로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멋진 ‘해적 분위기’의 음악과 함께.

그 과정에서, 해밀턴을 쫒아오던 남자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통쾌해지는 다양한 함정에 빠지고 있었다.

해밀턴이 성공한 장대 높이 뛰기를 따라 하다가 장대가 부러져 돼지우리에 처박히기도 하고, 그가 던진 여성 속옷을 뒤집어쓰고 분노한 여성들의 집단 린치를 맞기도 하면서.

해밀턴의 능력 ‘게임화’는 어떤 오브젝트를 어떻게 사용해야 추적자를 따돌릴 수 있는지 끊임없이 그에게 알려주었고, 해밀턴은 그 능력의 도움을 받아 추적자를 뿌리치며 마치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멋지게 도주극을 펼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신나는 과정의 끝에, 해밀턴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날카로운 검을 든채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추적자들의 모습이었다.

온몸에 닭털과 돼지 똥을 덕지덕지 붙인 채, 분노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추적자들의 모습을 보며, 해밀턴은 필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분명 이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는 힌트를, 시스템이 제공할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에.

그러나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기에, 해밀턴은 자신이 중간에 뭔가 잘못된 루트로 접어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계산된 연출이었다.

애당초 PTW의 개발자들이 의도한 이번 도주극의 시나리오는, 신나는 도주 활극의 끝에 플레이어가 위기에 처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그 위기의 상황에서 주인공을 구하는 것은, 배 안에서 주인공과 특별한 친분을 쌓았던, ‘동료’의 역할이었다.

“저리 꺼져라!! 머저리들아아아아!”

사람 몸통만 한 통나무를 붕붕 휘두르며 등장한 것은 해밀턴이 매일 밤 모험 이야기를 읽어주었던 괴력의 선원, 호든이었다.

괴성을 지르며 통나무를 휘두르는 그에게 추적자들은 에스톡을 휘두르며 저항했지만, 그것은 야구 방망이를 이쑤시개로 막으려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갑자기 히어로처럼 등장해 추적자들을 날려 보내는 호든을 보며, 해밀턴이 반갑게 소리쳤다.

“호든!?! 여긴 어떻게!?”

“술 마시러 가는데 누군가가 거리를 박살 내면서 도망가고 있다고 하더군!

듣자마자 모험 냄새가 나더라고!

그리고 나는 지금 이 항구에서 모험이란 단어와 가장 가까운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

역시 내 예상대로, 멋진 모험을 하고 있었군그래!”

“모험이 아니라 도망인데요?”

“다른 사람이 하면 도망이지만, 자네가 하면 모험이야.

내가 아는 자네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모험가니까!”

그러자 추적자 중 한 사람이 갑자기 끼어든 호든을 향해 소리쳤다.

“이런 무식한 자식 같으니!! 감히 우리에게 청부한 가문이 누군지 알고 우리 일에 끼어드는 것이냐?!!!

이 어깨의 사자 문양이 보이지 않냔 말이다!!”

“사자든 고양이든 난 무식해서 그런 거 몰라.

내가 아는 건, 너희가 쫓아야 할 사람을 잘못 골랐다는 것뿐이야.

무슨 일로 이 사람을 잡으려고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너희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탐험가가 될 남자를 잡으려고 하는거라고.”

“탐험가? 그 비리비리한 샌님이?

돈도, 가족도, 근거지도, 심지어 배조차 없는 쓰레기가 무슨 탐험가가 된다는 거냐?

지나가던 개가 웃겠군.”

그 말을 들은 호든이 들고 있던 통나무를 바닥에 세웠다.

그리고는 해밀턴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돈 있냐?”

해밀턴이 고개를 젓자 호든이 다시 물었다.

“배는?”

다시 고개를 젓는 해밀턴.

“집은? 가족은?”

“아무것도 없는 거 아시잖아요.”

“탐험가를 만만하게 보지 마라.”

그때,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든 추적자가 말했다.

“수없이 많은 정보를 모으고, 확실한 계획을 세워서, 좋은 후원자를 설득해 거대한 예산을 들여야만 성공할 수 있는 게 탐험이지.

그 머저리가 가지고 있는 건 단지 책으로 익힌 알량한 지식뿐이야.

그리고 지금은, 원래 우리의 것이어야 할 물건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그 녀석이 가져간 물건엔 무려 500만 두카트의 가치가 있다.

그것을 회수하기 위해서, 저 녀석은 목숨을 바쳐야 해.

아니면, 중간에 끼어든 네가 갚아줄 텐가?”

그러자 호든이 황당하다는 투로 추적자를 향해 물었다.

“내가 돈이 있어 보이냐?”

“그럴 리가. 선원 나부랭이가 돈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나.

그러니 이 일에 끼어들지 말고 꺼져라.

저 남자를 순순히 넘긴다면, 네 죄는 묻지 않을 테니.”

그러나 그의 말을 들은 호든은, 옆에 세워둔 통나무를 집어 들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는 단호한 말투로 추적자를 향해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어.”

“어째서지?”

“적어도 나란 인간은 선장을 버리는 선원이 아니니까.”

“선장? 저 녀석에게 배가 있었나?”

“10년 동안 선원으로 살면서, 난 엄청나게 크고 멋진 배를 수없이 타왔다.

그러나 그 배를 가지고 모험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

배는 물건일 뿐, 모험을 하는데 가장 필요한 건, 모험을 하고 싶어하는 선장의 ‘의지’니까.

그 의지가 있다면, 배를 가지고 있느냐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아.

그 사실을, 내가 가르쳐 준 사람이 바로 이 남자니까.

그러니까 캡틴.

선장으로서 지시를 내려주세요.

지금 당장 이 녀석들을 전부 박살 내라고.”

해밀턴의 눈앞에 선택지가 떠올랐지만, 해밀턴은 그 글자를 읽지 않았다.

굳이 선택지를 읽지 않아도, 지금 이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너무나 잘 알 것 같았기 때문에.

배 안에서도 가장 능력치가 출중했던 ‘최고의 선원’이 동료로 합류한 것을 보며, 해밀턴은 힘차게 소리쳤다.

“가라! 호든! 저 자식들을 박살내고 모험하러 가자고!!”

“Aye aye, captain!”

마치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처럼 거대한 통나무를 든 채 추적자를 향해 달려드는 호든을 보며, 해밀턴은 속으로 생각했다.

나중에 아무리 대단한 능력치를 가진 캐릭터를 만나게 되더라도, 호든 만큼은 절대 선원 리스트에서 빼지 않겠다고.

해밀턴의 마음속에서, 호든은 이미 ‘동료’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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